[좋아하는 사람…너야…]
호경인 문자를 보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왜 그래?”
재유가 이상한 듯 호경이에게 물었다.
호경인 핸드폰 폴더를 닫아버렸다.
“응? 아니야. 아무것도….춥다 가자.”
얼떨떨한 기분으로 호경인 윤진이를 떠올렸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1년 가까이 함께 해왔지만 사실 호경인 윤진이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에게 관심이 많은 윤진이에게 가끔 짜증을 내곤 했었다.
친구라면서 호경인 숨기는 게 더 많았고
친구라면서 아무 말이나 막 한적도 많았던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하나…
괜히 미안한 마음에 호경인 안절부절 하지 못하였다.
“재유야.”
“응?”
“먼저 집에 가.”
“왜?”
“나 잠깐 다녀올 데가 있어.”
“그래.”
재유는 어디 가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물으면 안될 것 같았다.
호경인 급한 마음에 윤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호경이의 번호가 핸드폰에 뜨자 윤진인 당황해서 받지 못했다.
갑자기 뛰기 시작하는 심장 때문에 긴장감이 더 고조되는 듯 했다.
전화를 받지 않는 윤진이에게 호경인 문자를 보냈다.
[집에 도착했어? 아직 안 갔으면 잠깐 보자. 공원으로 와]
윤진인 호경이의 문자를 확인하고 발걸음을 학교 근처 공원으로 돌렸다.
문자를 보냈으니, 무책임하게 도망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걸었다.
호경이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할까.
호경이는 나에게 어떤 말을 건넬까.
윤진인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엉켜 있었다.
펑펑 내리던 눈도 이젠 내릴 만큼 내려 멈췄고 회색 빛 하늘은 따뜻한 햇빛으로 물들어
따뜻한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12월이라 바람은 차고 추위는 매서웠다.
공원 안으로 들어서는데 호경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재유는 없었다.
재유와 함께 있을 때 문자를 봤을까?
아니면 집에 다 가서 혼자 본 것 일까.
윤진인 눈을 밟으며 호경이에게 다가갔다.
발소리에 호경이가 고개를 들고 윤진이를 바라보았다.
“많이 기다렸어?”
윤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나도 방금 왔어.”
호경인 두 손에 하나씩 들고 있던 캔 커피 중 하나를 윤진이에게 건넸다.
커피는 따뜻했다.
윤진이가 슬그머니 커피를 받았다.
“나 처음 전학 왔을 때 생각난다. 너랑 짝이 됐는데 니가 어찌나 새침한지.”
“그랬지. 까만 단발머리에 얼마나 차가워 보였는데. 말도 못 붙였다구.
어떻게 보면 이 세상에서 제 할일 그때그때 하는 건 시간밖에 없어.
시간이 흐르니까 너와 나, 이렇게 친구가 될 수 있었잖아.”
호경이가 웃으며 말했다.
“윤진아….”
호경인 진지한 목소리로 윤진이를 불렀다.
“말해.”
“계속 친구로 지내는 건 안될까?”
호경이의 말에 윤진인 약간 흥분한 듯 큰소리로 떠들었다.
“안될 거 뭐 있어? 내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해서 우리에게 달라질게 뭐 있었겠어.
다만 난 좀 더 가까이, 널 가까이 두고 싶은 욕심에서 그런 거야.
좋아한다고 말하면 하루에 한번씩은 통화할 수 있을까 해서
휴일은 잘 보냈는지 문자 보내는 걸 고민하지 않아도 될까 해서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함께 영화 보자고 당당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시험기간엔 도서관에서 함께 나란히 앉아 공부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래서….그러니까 난 너한테 뭘 어쩌자는 게 아니고…하…”
윤진인 쉬지 않고 말을 하다가 중간에 끊어버렸다.
뭔가 횡설수설 한 것 같아서 윤진인 뱉어낸 말들을 후회하고 있었다.
윤진이의 말을 들은 호경이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윤진이의 표정을 살폈다.
해가 구름 뒤로 숨어버렸는지 다시금 주변은 어두워졌다.
윤진인 끼고 있던 장갑으로 벤치의 눈을 털었다. 왠지 힘이 빠지고 다리가 아팠다.
윤진이의 행동을 보던 호경이도 벤치의 눈을 털어냈다.
그리고 둘은 나란히 앉았다.
“이런 내가 우습니?”
윤진인 맥이 풀린 듯 물었다.
“무슨 소리야.”
“아까 말야.”
“아까?”
“눈 펑펑 와서 같이 창가에 서있을 때.”
“응.”
“넌 늘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어.”
“내가…그랬나?”
호경인 모르는 척 했다. 사실은 기억난다.
윤진이에게 농담처럼 말했지만 늘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응. 너 그렇게 말했어.
그런데 엉뚱하게도 난, 니가 늘 사랑한다는 그 사람이 꼭 재유 같았어.”
윤진이의 말에 호경인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호경이의 당황한 표정을 읽지 못한 윤진이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너희 둘,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인데, 저렇게 잘 맞을 수가 있을까.
우리 셋은 친구였지만 너희 사이에 내가 낄 틈 같은 거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어.
재유가 예전처럼 밝아진 건 친구로써 정말 행복해.
늘 우울한 얼굴로 사람자체에 관심 없는 듯한 그 얼굴 싫었거든.
재유의 상황을 이해 하면서도…니가 있어 재유가 따뜻해 졌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니가 재유에게만 신경 쓰는 게 못내 속상했어.
나 웃기지…”
윤진이가 멋쩍은 듯 웃었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당황스럽기도 하면서 솔직한 윤진이의 속마음을 들으니 왠지 편한 마음도 들었다.
호경이가 한참 동안 말없이 있자 윤진이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가볼게. 말해버린 걸로 됐어. 속이 후련해. 계속 친구로 지내자는 말 받아들일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윤진이가 웃었다.
분명히 거절 당했는데 그렇게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매서운 바람 때문에 너무 추워서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기까지 했으니까.
호경에게서 뭔가 더 듣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윤진인 일어섰다.
호경이가 잠시 동안 침묵 한 건 분명히 자신에게 뭔가 할말을 생각하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기분 나쁘지 않게 돌려서 말하려고.
그냥 그런 말이라면 듣고 싶지 않았다.
윤진이가 가려고 하자 호경인 윤진이의 팔을 잡아 당겼다.
“잠깐만.”
“응?”
“잠깐만 앉아봐. 할말 있어.”
호경이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나 괜찮아. 그러니까 애쓰지마.”
윤진인 또 한번 웃으며 말했다.
“엉뚱한 생각이 아냐.”
“무슨…말이야?”
윤진이는 이상한 직감에 벤치에 다시 앉았다.
“나………, 재유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