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헌책방 거리를 보는 눈도 있으면 좋겠다부산에는 헌책방이 참 많이 있습니다. 숫자로 치면 서울이 훨씬 많으나 헌책방거리 한 곳에 모여 있기로는 나라 안에서는 부산이 으뜸입니다. 그래서인지 부산 보수동에 자리한 헌책방 거리를 찾아가 보면 서울 청계천과는 사뭇 딴판입니다. 더구나 부산 헌책방 거리는 넓지도 좁지도 않은 골목길 두 편에 헌책방이 죽 늘어서 있어서 아주 남다른 느낌과 분위기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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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보수동 헌책방거리에서. 사람 여럿 다니기 알맞은 길 두 편에 헌책방이 줄줄이 늘어서 있습니다. 걷기만 해도 즐거운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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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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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살리는 대책을 하나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장사가 되든 말든 거들떠보지도 않는 가운데 우리네 책 문화를 살릴 길을 헤아리지 않아요. 그건 문화관광부도 마찬가지. 헌책방 거리는 그저 책 하나에만 얽힌 문제가 아니라 우리네 책 흐름과 책 문화와 이어진 중요한 문화 터전입니다.
새책방과 도서관과 헌책방 이 세 곳이 물 흐르듯 잘 이어져 있어야 책을 즐기는 문화도 살뜰히 거듭날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네 현실을 돌아보면 정책도 정책이고, 헌책방을 보는 우리 눈길도 참 낮아요.
그래서 서울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는 `헌책방 거리'임을 알려주는 푯말조차 제대로 서 있지 않아요. 그렇지만 부산은 남다릅니다. 멋드러지게 세운 조형물까지 세워서 부산 보수동 헌책방 거리를 아주 부산의 명소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해 놓았거든요. 그뿐 아니라 거님길 돌(보도블럭)도 새롭게 깔았고, 거님길 돌에는 `헌책방 거리'라는 글자까지 새겨 놓았어요. 헌책방 거리로 들어가는 길목마다 헌책방 거리임을 알려주는 선간판을 세워 놓았고요.
지난해 2월에 부산 헌책방 거리를 찾아간 뒤로 꼭 열 달만에 이곳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이번에는 부산에 있는 아내 동무가 시집을 가는 터라 그 김에 넉넉하게 부산으로 왔고, 장인어른 댁에서 머무르면서 반나절 짬을 내어 자갈치시장 쪽으로 나와서 헌책방 거리를 둘러보았습니다.
2. 열 시간쯤 파묻혀 읽고 싶은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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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방 <고서점> 앞 모습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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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규 |
열 달만에 찾아온 헌책방 거리는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가 눈에 띄는군요. 그건 바로 커다란 조형물. 헌책방 거리로 들어가는 들목 가운데 한 켠에 멋드러진 조형물과 전광판을 세웠습니다. 부산시에서 이곳을 적잖이 투자해서 키우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헌책방 거리에 깃든 쉰 곳이 넘는 헌책방 가운데 헌책 장사를 이어가는 곳은 나날이 줄어들어요. 열 달만에 찾아갔음에도 헌책에서 새책으로 장사를 바꾼 곳이 꽤 많이 눈에 띕니다. 그만큼 장사가 안 되고 힘들다는 소리이겠죠?
헌책방 거리에 있는 분식집에서 어묵꼬치를 몇 점 사먹은 뒤 <고서점>이라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보수동 헌책방 거리에서 <고서점>을 꾸리는 분은 나이로 치면 가장 젊은 분일지 모르나 이곳에서 책을 가장 많이 다루고, 좋은 책을 알뜰하게 갖춘 곳이라고 손꼽을 수 있는 곳이에요. <고서점>을 꾸리는 분 아버님은 이곳에서 골동품을 만지던 분이었다는군요. <고서점>을 꾸리는 분은 당신이 태어난 이곳에서 평생을 일하고 싶다고, 당신도 책을 좋아하는 터라 헌책방 일을 즐겁게 한답니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시간이 없어서 대충 둘러보고만 온 <고서점>입니다. 이날은 넉넉한 마음에 찾아왔기에 느긋하게 구경을 합니다. 깊은 골마루를 샅샅이 살피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높은 천장 가까이 꽂힌 책도 살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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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책 <살아오는 동지여> 겉그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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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사 |
먼저 <최신대학가요 모음 `살아오는 동지여', 청년사(1988)>라는 노래 책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 노래 책에는 악보를 손으로 그리기도 했고, 컴퓨터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청년사 같은 곳에서 이런 노래 책을 냈다는 사실도 놀랍고 재밌지만 1988년에 낸 책이라면 악보를 모두 손으로 그리거나 컴퓨터로 그리거나 하나로 모았어야 할 텐데. 그리 하지 않고 어설프게 낸 모습도 재미있군요.
<신문연구> 1962년 봄호와 <저널리즘> 1976년 가을호를 집습니다. <신문연구>와 <저널리즘>은 언론 이야기를 살필 수 있는 퍽 오래된 잡지입니다. 철이 꽤 지난 이런 잡지를 살피면 지금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좋은 글을 만날 수 있는 한편 우리네 언론 매체가 걸어온 길도 느낄 수 있어 좋아요. 저는 송건호 선생 옛글이 실려 있기에 그 글을 읽고자 <신문연구>와 <저널리즘>을 집었습니다.
.. `엄정중립'이니 `시시비비'니 `불편부당'이니 하고 신문이란 의례 그래야만 하는듯 이러한 슬러우간을 사시로 내세우고 있다. 조금도 `엄정중립'도 아니고 `불편부당'도 아닌 신문까지도 사시에는 반드시 이런 말을 내세우고 독자들을 속여왔다. 신문들이 도대체 `시시비비'일 수 있고 `불편부당'일 수 있는가도 문제이지만 무엇을 기준으로 `시시비비'가 되고 `불편부당'이 된다고 생각해야 하는지도 의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 <신문연구>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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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건호 선생 글이 실려 있기도 한 잡지 <신문연구> 1962년 봄호 겉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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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규 |
송건호 선생이 "신문사설론"이라는 이름으로 쓴 글 한 대목입니다. 송건호 선생은 신문사에서 `불편부당' 같은 말을 내세우는 까닭은 자신들이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듯 대중지 성격을 띄워야 독자가 늘고 장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조금도 `불편부당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불편부당을 내세우기에 신문 시장은 더욱더 어수선하고 논조는 치우치고 비틀린 기사가 나온다고 비판합니다. 이 말은 1960년대뿐 아니라 2000년대에도 똑같이 생각하고 헤아려 볼 만한 이야기라고 봅니다.
<헤리 스트리이트/양승두 옮김-시민과 정부,연세대출판부(1974)>라는 책도 보고, <존 스타인벡/이종구,김성한,강봉식 옮김-불만의 겨울,지문각(1962)>라는 책도 만나고, <안호상 옮김-세익스피어명작집,정음사(1968)>도 구경합니다. <교육자료> 1978년 5월호 별책부록으로 나온 <한글정서법자료>와 <김영환 항소이유서>도 구경하고, <시몬느 드 보봐르/전성자 옮김-작별의 예식,두레(1981)>도 보았어요. <노동문제,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1972년 4월호도 보았는데, 이 많은 책들을 만나고 구경하고 살피면서 헌책방 <고서점>에서 열 시간쯤은 푹 파묻혀서 책을 보고프다는 마음이 자꾸자꾸 들었습니다. 하지만 열 시간쯤 파묻혀서 책을 살펴도 보고픈 책을 다 보지 못하겠지요?
3. 책은 마음으로 간직해 둔다<작별의 예식>이라는 책은 사르트르가 죽은 뒤 시몬느 드 보봐르가 펴낸 첫 책이라고 합니다. 보봐르는 책 첫머리에,
사르트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사랑할 사람들에게라는 글 석 줄을 적어요. 참 좋군요. <작별의 예식>은 보봐르가 사르트르가 죽기 앞서 열 해 동안 곁에서 돌보고 지켜보면서 나눈 이야기와 겪은 일을 담은 책이에요. 1970년부터 1980년까지 한 해씩 나누어 이야기를 풀어 갑니다.
잔뜩 쌓인 사진 책을 구경합니다. <고서점> 아저씨 말로는 짬을 내지 못해서 사진책이 있는 칸만은 아직 다 갈무리를 못 했다는군요. 그래서 "헌책방에서는 정리가 안 된 책들 사이에서 좋은 책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어야지요" 하고 대꾸했습니다. 이런저런 책들을 뒤지다가 <あの日,廣島と長崎で,平和のアトリェ(1994)>라는 사진책을 봅니다. 이 사진책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 때문에 엄청난 아픔을 겪은 사람들 이야기를 묶었어요. 원폭을 맞아서 죽거나 다쳐서 끔찍하게 된 사람들과 무너진 건물들 모습을 사진으로 보입니다. 다음으로는 그날 아픔을 겪은 사람들(어른과 아이 모두)이 지난날을 돌아보며 그린 그림을 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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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방 <고서점> 안 모습. 천장도 높고, 높은 천장만큼 책도 가득 쌓였고, 파묻혀서 책을 보기에 참 좋은 곳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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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규 |
이 책을 들고 구경하고 있노라니 아저씨가 슬쩍 보다가 한 말씀합니다. "그건 책이 참 좋아서 다른 책방에서 (구경하다가) 사온 책"이라고, "책방 주인이니 사가지 말라고 말할 수 없"답니다.
아저씨 말을 듣고 가만가만 생각해 봅니다. 사실 그렇거든요. 책방 임자는 책 손들에게 책을 팝니다. 팔기 싫거나 팔고 싶지 않아서 안 팔 수도 있겠지만, 그러다가는 장사를 못하고 문을 닫을 수 있겠죠? 헌책방 임자라고 책을 안 좋아하겠어요? 그래서 헌책방 임자가 보기에 참 마음에 드는 책을 사들일 때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답니다.
책이 좋아서 집에 두고 간수하고 싶지만, 그러다가는 아무 책도 팔 수 없을 것 같다고요. 그래서 "좋은 책은 마음에만 간직하"고 내다 판다고, 책을 사가는 책 손들이 잘 사가서 즐겁게 보면 그런 일로 헌책방 임자도 뿌듯하고 즐겁다고들 말해요.
마지막으로
이라는 그림책을 집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림책인가 싶어서 집어서 구경하려다가 말았는데, 나중에 책값을 셈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앞서 호기심에 꺼내 보았어요. 책등에 적힌 `Sendak'이란 이름 때문입니다. 책등에 적힌 이름 `센닥'이 `모리스 센닥'이라는 빼어난 그림책 작가를 가리키는 이름이라면 이 책은 대단히 괜찮은 책이거든요.
생각대로 모리스 센닥이 그림을 넣은 책이었고, 글을 쓴 란달 자렐이라는 사람도 좋은 어린이책을 퍽 많이 써온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냥 흔한 그림책이라고만 생각하고 지나쳤다면 몹시 안타까웠으리라 생각합니다. 헌책방에서는 호기심이 나는 책은 안 사더라도 반드시 구경하고 가라는 말을 다시금 가슴에 새겼습니다.
4. 아쉬움이 있다면
보수동 헌책방 거리를 앞으로도 꾸준히 지켜가고 싶다는 <고서점> 아저씨. 아저씨는 저보다 나이가 고작 두 살 위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무척 젊은 헌책방 임자예요. 다른 헌책방을 두루두루 둘러보아도 <고서점> 아저씨만큼 젊은 또래를 찾기 힘들어요. 아마도 책장사가 참 힘들고 돈벌이 또한 힘든 일이 헌책방 일이라서 젊은 분들이 부모 일을 이어받으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헌책방 장사라는 일이 사회에서도 푸대접을 받으니 누군들 소중한 집안 일로 여겨서 물려받고자 하겠어요?
부산 헌책방 거리는 서울이나 인천, 대구나 대전, 청주, 광주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시에서 여러 모로 뒷배도 하는 듯하고 문화 터전 분위기도 만드니까요. 하지만 책방 골목만 죽 모아놓아 주면서 장사를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뒷배에는 생각이 못 미치지 싶어요.
여러 선간판과 조형물을 세우는 일도 좋지만, 헌책방은 무엇보다도 헌책이 제대로 들어올 수 있도록 공급 길을 열어 놓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영세한 헌책방 장사이다 보니 달세 짐이 참 큰데, 이런 대목에서도 오래도록 헌책방 장사를 물려받고 이어나가는 가게는 어떤 뒷배를 해 주어야 좋지 않겠냐 싶어요. 그리고 이런 뒷배는 헌책방 뿐 아니라 동네마다 있는 작은 책방과 도서관까지도 체계있는 지원과 정책이 뒤따라야 좋겠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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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방 <고서점> 바깥에서. 바깥 벽에는 조그마한 책방 간판 하나를 붙여 놓기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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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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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쪼록 우리들 책 문화를 살찌우고 꽃피우는 소중한 문화 터전 가운데 하나인 헌책방이 무럭무럭 살찌고 아름답게 거듭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올 여름께, 아마도 5월이나 6월쯤이 될 듯한데, 그때 부산 헌책방 거리에서 네 번째 헌책방 사진 전시회를 열 생각입니다.
- 부산 보수동 <고서점> / 051-253-7220 . 017-552-7455
yangssine@hanmail.net . 부산 중구 보수동1가 119 (3/3)
- 보수동 헌책방거리는 자갈치시장에서 걸어서 7~10분 거리에 있습니다. 자갈치 시장에서 즐거운 구경을 하셨다면, 잠깐 짬을 내어 이곳으로 가서 책 구경을 해도 재미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첫댓글 아하! 보수동! 그런 곳이 있었지요. 내고향에도 .. 잊어버렸습니다. 일깨워주셔서 감사!
혹 구할 귀한 책이 있으시면 알려 주세요... 기를 쓰고 찾아 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