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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은 죄와 의에 대하여 깨닫게 함
예수께서 보혜사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하셨다(요 16:8). 그 자신에 관하여도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먼저 필요를 느끼어야 도움을 받아들이게 된다. 먼저 병을 알아야만이 약을 쓸 수가 있다. 이와같이 의의 약속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유의할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성령이 맨 처음에 하는 위로의 일은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 3:22).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죄를 자백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이와같이 율법은 성령의 안중에서 사람들에게 약속의 충만을 받도록 유도하는 하나의 산 매체가 된다. 어느 사람이나 미지의 위험을 알려 주어 그의 생명을 구해준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이같은 사람을 친구로 생각하고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다가올 진노에서 도망하라고 하는 그 경고의 음성을 들은 자들은 율법을 이와같이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은 시편 기자와같이 항상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시 119:113)라고 말할 것이다.
의와 생명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21절).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의는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단순히 형식이나 생명이 없는 이론이나 주의가 아니라 살아있는 행동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이며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의가 되신다.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 8:10). 두 돌비에 쓰여진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고 율법이 쓰여진 돌비도 마찬가지로 생명을 줄 수 없다. 모든 율법이 완전하나 그러나 생명이 없는 문자들이 변하여 살아 움직일 수가 없다. 율법의 문자만을 받는 사람은 “정죄의 직분”과 사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산 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생명과 평안이 된다. “영의 직분”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받을 때에 율법이 시인하는 의의 생명을 가지게 된다.
이 21절은 율법을 주신 것은 약속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율법을 주실 때에 모든 상황―나팔 소리, 두려운 음성, 땅의 진동, “불붙는 산과 흑운과 폭풍”, 우레와 번개, 산에 경계를 정해 놓고 넘어가면 죽는―이 모든 것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율법은 진노를 이”룬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엡 2:2; 롬 4:15). 그러나 율법이 이루는 진노가 불순종의 자녀들에게만 이르러 온다는 사실은 바로 율법은 선하고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실망시키기를 바라시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시내산에서의 그 무서운 광경들은 430년 전에 각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영원히 살아계시는 구세주를 믿음으로 얻는 의의 보증으로 주셨던 하나님의 맹세의 말씀으로 빨리 달려 가도록 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8절과 22절 사이의 유사성을 주목하라.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큰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우리는 복음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둔 같은 성경에 의해서 전파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두었다”는 말은 23절에서와 같은 글자 그대로 “매인다”는 말이다. 법에 의하여 가두어진 사람은 감옥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세상의 정부에서도 범죄자는 법에 의하여 그를 붙잡아 가둔다. 하나님의 법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항상 작용하고 있으므로 사람이 죄를 지을 때에 즉시 그를 가둔다. 온 세상이 이와 마찬가지의 상태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롬 3:23, 10)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였었던 저 노아 시대의 불순종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옥”(벧전 3:19, 20)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도 다른 모든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슥 9:12)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으니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시 102:19, 20)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6, 7).
개인의 경험에서 아직까지 주께서 주시는 기쁨과 자유를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는 죄인을 이야기 해보자. 지금까지는 이런 기쁨과 자유를 체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 죄를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지난 날에는 의심과 망설임이 많았고 쉽사리 자기 변호를 했지만 지금은 아무런 할 말이 없게 될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과 성령이 계시는 것에 대해서 의심이 없게 될 것이다. 또 그것을 확신시키려고 구구한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알게 되며 그러므로 옛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20:19)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감옥에 갇히는 것이 곧 사면팔방의 벽으로 둘러 싸여 빠져 나갈 수도 없는 옥에 갇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큰 바위 아래 생매장시키는 것같은 사람들을 정죄하는 말이 마치 율법의 돌비가 우리의 생명을 박살내는 것같이 느끼고 한장의 대리석이 우리의 심장을 터지게 하는 것같이 보이는 것처럼 매우 생생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우리가 받도록 하는 유일한 목적을 위하여 갇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기쁨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의심의 성문을 여는 열쇠가 되는 이 약속을 붙잡을 때에 즉시 감옥문은 활짝 열릴 것이며 그러면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시 124:7)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율법 아래, 죄 아래
방금 성경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기 위해서라는 것임을 보았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후에 계시될 믿음이 계시되기까지 갇혀 있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나 죄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롬 14:23 참조).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죄 아래 있다는 말과 같다. 우리가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로부터 구원을 가져다 주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에 죄로부터 해방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는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을 범하는 자들이다. 의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율법 안에서 행하고 있는 자들이다.
율법은 간수, 현장 감독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새 번역에서는 몽학 선생 대신에 가정 교사로 번역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말이 더 좋다. 그러나 독일어 성경이나 스칸디나비아 역 성경에서 “교도소의 감독”이라는 말로 번역한 말이 휠씬 더 의미가 잘 전해진 것같다. 이 말에 해당하는 우리 나라의 말은 간수라는 말이 될 것이다. 헬라어에서는 영어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정교사이다. 가정 교사는 학교가는 아이들을 따라 가면서 학교 가지 않고 도중에 노는지를 보는 종이다. 만일 아이들이 도망하려고 하면 다시 데리고 올 것이며 또 바로 잡기 위하여 매를 때리는 권리까지도 가지고 있다. 헬라어에서는 몽학 선생이라는 의미가 전혀 없지만 몽학 선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현장 감독”이라는 말이 더 좋을 것이다. 여기서의 의미는 오히려 감옥 벽 밖에서 다니기를 허락받은 죄수를 따라 다니는 감독을 뜻한다. 이 죄수는 실제로 감옥 안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다. 사실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가두어져 있고”, ”율법 아래” 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들의 간수로 행동하고 있다. 그들을 가두고 놓아주지 않는 것은 율법이다. 죄인은 그들의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스러우시지만 죄인을 죄없다고 하시지 않는다(출 34:6, 7 참조). 다시 말하면 악을 선하다고 하면서 거짓말을 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이 그들의 죄를 떠날 수 있는 길을 제공하신다. 그때에 율법은 더 이상 그들을 대적하지 않으며 더 이상 그들을 가두지 않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자유롭게 살 수가 있다.
단 하나의 문
그리스도께서 “나는… 문이라”(요 10:7, 9)고 말씀하셨다. 그는 또한 양의 우리와 목자가 되신다. 사람들은 그들이 우리 밖에 있을 때에 자유롭지만 우리 안에 들어가면 자유를 상실한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그와는 정반대이다. 그리스도의 우리는 넓은 곳인 반면에 불신은 좁은 감옥이다. 죄인은 한낱 좁은 생각 밖에 할 수 없으나 진정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한 것임을 깨닫는 자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속박이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자유가 있다. 그리스도를 떠나면 인간은 감옥에 갇혀 있고 “그 죄의 줄에 매”(잠 5:22)여있다.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사람을 죄인이라고 말하고 그의 상태를 알게 하는 것은 율법이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롬 3:20; 5:13). 율법은 사실 죄인의 감옥을 만들어 준다. 죄인을 벽속에 가두고 불편하게 느끼게 하며 생명을 짓눌러 없앨 것처럼 죄책감으로 압제한다. 아무리 벗어날려고 노력을 하나 헛된 일이다. 그 계명들은 영구한 산처럼 꼼짝도 않는다. 어느 길로 향하나 계명을 만나면 그 계명은 “네가 범죄하였기 때문에 나를 통해서 자유를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아무리 율법과 친구가 되려 하고 율법을 지키겠다고 약속한다 하더라도 그의 죄가 여전히 있기 때문에 더 나을 수가 없다. 율법은 죄인을 도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으로 몰고 가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자유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이 하나님의 의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 1:25)이 있다.
율법은 복음을 전파
“그러나 율법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 증거도 하지 않는다”라고 어떤 사람은 말한다. 아니다. 오히려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의 구원의 능력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모든 숲의 잎사귀에서 볼 수 있고 참으로 모든 만물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신체의 모든 근육까지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부르짖고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고 있지 않지만 그리스도는 “만국의 사모하는 것”(학 2:7)이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 145:16)신다. 오직 그분 안에서만이 불안한 세상에서 위로를 찾을 수 있다. 이제 그 안에 평강을 가지고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지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찾고 계시며 그들을 그 자신에게로 부르고 계시며 인간은 누구나 세상의 무엇도 만족시켜 줄 수 없는 사모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므로 만일 율법의 일깨움을 받아 자신의 상태를 더 세밀하게 알고 있으며 율법이 계속하여 견책하고 쉼을 주지 않고 도망할 모든 길을 차단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드디어는 안전한 포구의 문을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문은 언제나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도피성이므로 피의 복수로 쫓김을 받고 있는 모든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수 있으며 또 영접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죄인이 율법의 채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의가 성취되었으며 그 의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 안에 성취되기 때문이다(롬 8:4 참조). 율법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같이 구원을 받기 위하여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하지 않으므로 율법은 어느 사람이나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구원을 받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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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늘본향님은 성령을 받으셨나요?
성령을 받지 않고 어떻게 예수님을 주라 할 수 있는지요?
그래서 님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CRYSTAL™ 님에게 드리는 글은 성령 받고 드리는 글입니다.
@하늘본향 님이 성경받았다는 증거는 있나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며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후
"내가 떠나가는 것이 유익이라" 말씀하신 성령을 보내주셨는데
창조주 하나님께서 성령보다 더 좋은 선물을 보내주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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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령은 하나님의 생생한 임재이다 -ST1901.8.7.
2. 오순절의 에너지, 모든 정복하는 능력 - 8T297
3. 전지전능한 능력 -MH94
4. 초자연적 능력-3SM137
5. 하나님 그분 자신-7T273[Phi. 2:13]
6.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소망87
7.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임재이다. -RH1892.11.29
8. 우리가 성령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무한한 능력을 붙들게 되며 하나님께로 오는 모든 것 을 받게 된다. -복음289
9.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님이 우리 집에 왔을 때에 성령 받는 일의 중요성을 말씀드렸지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늘본향님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이단사상에 빠져있습니다. 큰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없이는 너희는 단 하나의 죄도 이길 수 없고 조그마한 유혹이라도 물리칠 수 없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성령을 끊임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
"Abide in Me, and I in you." Abiding in Christ means a constant receiving of His Spirit," -
위의 증언은 "성령을 끊임없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단 하나의 죄도 이길 수 없고 조그마한 유혹이라도 물리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율법주의에 빠진 이단이니, 그곳에서 도망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