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규 양반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제일 낮은 철봉도 높아 보였습니다. 학교 운동장도 교문에서 한참을 걸어야 교사에 도착할 정도로 넓었습니다. 어른들이 태규 양반네라고 부르는 집의 마당도 동네에서 제일 컸습니다.
그 시절에는 싸리나무나, 가시가 있는 망개나무와 참나무를 섞어서 울타리를 만든 마당이 있는 집은 제법 사는 집이었습니다. 태규 양반네 넓은 마당은 기와를 얹은 흙돌담이 있고, 대문과 쪽문이 있는 집이었습니다.
여느 집처럼 처마 밑에 있는 섬돌을 디디고 마루에 올라서는 구조가 아닙니다. 초등학교 저학년들 키 정도의 쌓은 축대를 돌계단을 통해 올라서면 마루가 있습니다. 마루 끝 사랑방 앞에는 난간이 있는 누마루가 있었습니다. 누마루 밑에는 소죽을 끓이는 아궁이가 있고 어른들은 허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쪽문 옆은 작약밭입니다.
작약밭 뒤쪽 거리에는 요즘 말로 공중변소가 있었습니다. 개똥도 주워다 거름으로 사용하던 시절이라 동네 사람들은 태규 양반네 공중변소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태규 양반네 집에서 장터가 멀지 않아서 장날이면 장사꾼들이나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줄을 지어 공중변소를 드나드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태규 양반 슬하에는 5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아들은 태규 양반을 모시고 살고, 살림을 나와 사는 둘째 아들은 전방을 열고 장사를 하는데 어른들은 이 상사라 불렀습니다. 소문에는 군대에서 상사로 근무하다 전역했다고 하는데 술만 마셨다 하면 고함을 지르면서 동네를 휘젓고 다녔습니다. 장남처럼 얌전한 셋째 아들은 면서기로 근무했고, 넷째 아들은 이 상사 못지않은 난봉꾼이었습니다. 막내는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한 번씩 내려올 때마다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양복을 입은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나름대로 좀 튄다는 사람은 군복을 염색한 바지에 재건복 같은 걸 입고 다녔습니다. 태규 양반 막내아들은 넥타이를 맨 양복 차림에 머리카락에는 포마드 기름을 번지르르하게 바르고 검은색 선글라스를 썼습니다. 시쳇말로 칼주름을 세운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선글라스까지 썼습니다. 항상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넣고 건들건들 걸었습니다.
태규 양반네는 여름에는 항상 칡넝쿨 껍질을 벗겨서 어디론가 팔아넘겼습니다. 초여름부터 냇가 자갈밭에서는 동네 아주머니 수십 명이 밤새도록 솥에 삶은 칡넝쿨의 껍질을 벗겼습니다. 칡넝쿨 껍질을 흐르는 냇물에 깨끗이 씻어 볕에 말린 것을 태규 양반의 큰아들에게 갖다줍니다. 그럼 저울로 껍질을 달아서 얼마큼 벗겼다는 표를 만들어 줍니다. 그 표를 모아서 한 달에 한 번씩 정산을 해주는 시스템입니다. 처녀들이나 아줌마 할머니들은 칡넝쿨을 벗기고, 남정네들은 산에서 칡넝쿨을 끊어 옵니다. 그러다 보니 비가 오지 않는 날 냇가에는 장날처럼 사람들이 붐볐습니다.
태규 양반의 장손자의 별명은 ‘칠거지’입니다. 집에서 칡넝쿨 사업을 하는 탓도 있지만 멀대처럼 키가 크고 아버지를 닮아서 바보스러울 정도로 성격이 순했습니다. 키가 큰 데다 순하니까 학교에서는 요즘 말로 동네북 취급당했습니다.
할아버지인 태규 양반은 여름에는 항상 러닝셔츠가 훤히 보이는 하얀색 모시저고리에 접는 부채를 들고 있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동네 나들이도 안 하고, 칡넝쿨을 사들이고, 파는 문제는 장남의 몫입니다. 동네 어른들이 인사를 해도 웃는 얼굴로 받지 않습니다. 고개만 끄덕거리거나, 인사하는 어른들이 무안해할 정도로 홱 고개를 돌리기도 합니다.
마당 구석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이웃 사람들도 태규 양반네 우물을 사용하지 않고, 더 먼 곳에 있는 우물을 이용했을 정도로 늘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태규 양반과 다르게 큰아들인 장남과 맏손자인 칠거지는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을 탄 듯 행동을 하니까 죽어나는 건 맏며느리입니다. 남편이 냇가에서 칡넝쿨 장사를 하느라, 담배밭에서 담배를 따고, 고추를 따고, 콩밭을 매는 일은 온전히 맏며느리 몫입니다.
파김치가 돼서 집에 오면 저녁을 하는 둥 마는 둥 술집에서 요즘 말로 호구 짓하고 있을 남편 찾으러 다니랴, 학교에서 얻어맞고 온 아들네 친구집에 가서 악다구니를 치랴 바쁘게 삽니다. 혼자 북치고 장구 치다 보니 시간이 없어서 어느 때는 새벽같이 아들의 친구집에 가서, 우리 애를 왜 때렸냐며 고함을 지르는 날도 있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도 어른들의 호칭은 장사를 하면 대창상회, 양산건어물, 중앙쌀집 등으로, 집을 짓는 일을 하면 김 대목, 백 토수 등으로 불렀습니다. 아니면 칠용이 할아버지, 민기 할아버지 등 자식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태규 씨만 이름 뒤에 양반 자를 붙여 불렀습니다. 왜, 태규 양반이라고 부르는지는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맏손자인 칠거지도 자기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함구하라는 교육이라도 받은 것처럼 내력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태규 양반은 더 무섭고 엄한 분으로 보였습니다.
태규 양반이 대문 밖에 나오는 경우도 드물었지만, ‘태규 양반’이라는 특별한 호칭에 어쩌다 집 앞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곤해 주눅 들며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정도입니다.
태규 양반네 칡넝쿨 가공사업은 태규 양반이 돌아가시고 끝이 났습니다. 어른들은 그 이유를 알았겠지만, 어린 제 눈으로 볼 때 이상한 거라곤 초여름부터 장날 파전처럼 붐비던 냇가 자갈밭이 조용해졌다는 점, 태규 양반이 돌아가시고 거의 오륙 년이 지나도 방천둑 밑에 설치된 대형 가마솥에 철거되지 않은 점밖에 없었습니다.
변한 것은 칡넝쿨 가공사업만 하지 않는다는 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태규 양반이 살아 있을 때는 거의 닫혀 있던 대문이 밤이 되어도 열려 있을 때가 많아졌습니다. 오가며 마당 안을 힐끗거리거나, 걸음을 멈추고 집 안을 살피기도 하는 사이에 예전처럼 엄숙한 분위기가 사라졌습니다.
칠거지 아버지는 부친이 살아 계실 때보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장터를 가로지르는 날이 더 많아졌습니다. 술만 마셨다면 누군가에게 트집을 잡아 술주정하는 이 상사는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갔습니다. 셋째 아들은 면사무소 계장으로 승진했고, 넷째 망나니는 술에 취해 20대와 싸움이 붙었다가 시궁창에 처박히는 개망신을 당한 이후로 한껏 얌전해졌습니다.
어른들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을 태규 양반네 마당은 칠거지가 집주인이 되고 나서 더 넓어졌습니다. 담벼락과 경계를 두고 있는 두 채의 초가집을 헐어버린 결과입니다. 마당은 더 넓어졌지만, 뒷문과 공중변소도 사라졌고 더 이상 작약꽃이 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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