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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올스타전 : Boston Celtics & L.A Lakers
1962년 1월 16일, 역사상 12번째 NBA 올스타전이 세인트루이스 호크스(現 애틀란타 호크스의 전신)의 홈구장인 Kiel Auditorium에서 열렸습니다.
당시는 보스턴 왕조가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8년 연속 우승을 향한 박차를 신나게 가하던 시기였습니다.
또한 어디에서 윌트 체임벌린이라는 외계인이 나타나 경기당 50득점을 넣으며 말도 안되는 기록들을 양산하던 바로 그 시즌이기도 했구요.
당시 동부지구 올스타 팀은 빌 러셀 - 윌트 체임벌린이라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포스트 진용을 내세웠고, 서부지구 역시 세인트루이스의 밥 페팃(Bob Pettit)을 위시하여 레이커스의 엘진 베일러(Elgin Baylor)와 제리 웨스트(Jerry West), 신시내티의 오스카 로버트슨(Oscar Robertson)등 막강 화력 군단으로 맞섰습니다.
올스타전답게 양 팀은 화끈한 공격 농구를 선보였지만 체임벌린이 홀로 분전한 동부지구보다 주전들이 고루 득점포를 가동한 서부지구의 화력이 좀 더 앞섰습니다.
결과는 150-130으로 서부의 낙승. 25득점, 27리바운드를 기록한 밥 페팃은 올스타전 MVP로 선정되었죠.
서부지구에서는 그밖에 베일러가 32득점, 로버트슨이 26득점 13어시스트를 보탰으며, 당시 루키였던 월트 벨라미(Walt Bellamy)도 23득점 17리바운드로 활약, 동부의 막강 포스트와 대등한 경기를 펼칠 수 있었습니다.
동부지구의 체임벌린은 42득점, 24리바운드로 분전했지만 팀의 패배로 빛이 바랬죠.
당시 보스턴은 동부지구 최강팀답게 4명의 올스타를 배출했습니다. 밥 쿠지, 빌 러셀, 샘 존스(Sam Jones), 톰 하인손(Tom Heinsohn)...
하지만 그때도 역시 리그에 팀이 고작 8개(각 지구당 4개)밖에 없던, 현 KBL보다도 더 소박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한 팀에서 4명이 올스타로 뽑힌 건 별로 얘깃거리가 안됐습니다. 3명이 뽑히는 경우도 비일비재했구요.
그래도 그당시 보스턴 군단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비록 특급 슈터 빌 셔먼(Bill Sharman)이 은퇴하긴 했지만 백전 노장 쿠지에 셔먼의 후계자인 샘 존스, 수비 귀신 토마스 'Satch' 샌더스, 특급 포워드 톰 하인손, 그리고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빌 러셀...
게다가 이 막강 베스트 5에 K.C 존스, 프랭크 램지(Frank Ramsey) 등 초특급 식스맨들까지 보유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초호화 '레알' 셀틱스였죠. 이 막강 군단을 중심으로 보스턴은 60년대에만 무려 9차례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습니다.
한편 서부지구의 L.A 레이커스 역시 4명의 올스타 - 엘진 베일러(Elgin Baylor), 제리 웨스트(Jerry West), 프랭크 셀비(Frank Selvy), 루디 라루소(Rundy LaRusso) - 를 배출했습니다. 하지만 라루소가 부상으로 결장하는 바람에 실질적으로 경기에 뛴 올스타는 3명이었죠.
당시만 해도 레이커스는 연고지를 미네아폴리스에서 L.A로 옮긴지 얼마 안된 때였죠. 하지만 득점기계 베일러, 무서운 신예 웨스트 등 젊은 선수들을 주축으로 50년대 미네아폴리스 왕조의 부흥을 꿈꾸던 패기넘치는 팀이었습니다.
레이커스는 이전까지 서부 최강자였던 세인트루이스가 다소 몰락한 틈을 타 서부지구를 제패하고, '최종 보스' 보스턴을 향한 기나길고도 처절한 정상 도전의 드라마를 펼치기 시작합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비극입니다. 60년대 레이커스는 보스턴과 파이널에서 6번 대결하지만 모두 패배하고말았죠...ㅠ.ㅠ)
어떻게 보면 기나긴 보스턴 VS 레이커스 라이벌리의 서막이라고도 할 수 있던 당시 올스타전의 양팀 주역들을 이제부터 죽 살펴보죠.
◇ Boston Celtics
◆ 밥 쿠지 (Bob Cousy)

○ 61-62시즌 : 평균 15.7득점, 7.8어시스트 (리그 3위)
○ 그해 올-NBA 세컨드 팀 선발
○ 62년 올스타전 기록 : 31분 출장, 11득점, 6리바운드, 8어시스트, 4-13 필드골, 3-4 자유투
한때 리그를 주름잡던 최고의 포인트가드 쿠지... 하지만 이제 어느덧 33살이 된 그도 선수생활의 황혼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와 10년동안 고락을 함께 한 백코트 파트너 셔먼도 어느덧 은퇴했고 보스턴 다이너스티도 어느덧 세대교체의 시기를 맞고 있었죠.
세월의 무게 앞에 그의 스태치는 점점 하락세를 그리고 있었죠. 지난 10년간 고수해온 퍼스트팀의 자리는 이제 오스카 로버트슨, 제리 웨스트같은 새로운 젊은 가드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최고의 스타였고 보스턴의 상징, 그 자체였습니다.
이후 쿠지는 1년 더 뛰다가 62-63 시즌을 마치고 은퇴를 선언합니다. 그가 떠난 빈자리는 이제 K.C 존스의 몫이 되었죠.
비록 선장은 바꼈지만 보스턴 다이너스티의 순풍 항해는 여전히 계속되어, 쿠지 없이도 이후 5개의 반지를 더 따냅니다.
◆ 빌 러셀 (Bill Russell)

○ 61-62 시즌 : 평균 18.9득점 (리그 17위), 23.6리바운드 (리그 2위), 4.5어시스트 (리그 13위)
○ 그해 올-NBA 세컨드 팀 선발
○ 62년 올스타전 기록 : 27분 출장, 12득점, 12리바운드, 2어시스트, 5-12 필드골, 2-3 자유투
더이상 말이 필요없는 전설적인 센터이자 10여년간 리그를 주름잡았던 보스턴 다이너스티를 최종적으로 완성시킨 인물입니다.
러셀이 합류하기 전의 보스턴은 밥 쿠지 - 빌 샤먼이라는 최고의 백코트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늘 골밑 리바운드와 수비에서 밀려 번번히 대권 도전에 실패하고 있었죠.
에드 매컬리(Ed Macauley)라는 훌륭한 센터가 있긴 했지만 체구가 워낙 빈약해 골밑에서 포스는 조금 떨어졌습니다.
보다 강력한 센터의 영입을 희구하던 보스턴의 감독 레드 아워백(Red Auerbach)은 1956년 드래프트에서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에 지명된 러셀을 트레이드로 데려오는 데 성공합니다. 바로 세인트루이스 대학 출신의 지역스타 에드 매컬리를 미끼로 해서요.
당시 연고지를 이전한지 얼마 되지 않아 흥행을 위해 스타 영입에 열을 올리던 세인트루이스는 아워백의 희대의 낚시질에 그만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대신에 클리프 헤이건(Cliff Hagan)이라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훌륭한 포워드를 덤으로 얻어오긴 했지만요.
(이 트레이드 이후 공교롭게도 두 팀은 50년대 후반 최고의 라이벌로서 파이널에서 4번이나 격돌하죠. 결과는 3-1로 보스턴의 판정승이었지만, 밥 페팃, 클리프 헤이건이 버틴 세인트루이스도 정말 대단한 팀이었습니다.)
러셀은 비록 득점을 많이 하는 선수는 아니었습니다만 대신에 막강한 보드 장악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경기당 20개가 넘는 엄청난 리바운드, 그리고 수많은 블록슛들...
(당시는 블록슛이 공식으로 집계되던 시기가 아니었기에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러셀의 플레이를 직접 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조금 과장 보태서 매 경기당 블록슛을 10개 가량은 했다고 합니다....;)
6-9, 220파운드의 러셀은 신체조건은 그리 압도적이진 않았지만, 넘치는 열정과 영리한 두뇌 플레이를 바탕으로 골밑에서 리바운드를 마구 쓸어담았습니다.
덕분에 안그래도 강력한 보스턴 백코트진은 러셀의 공격 리바운드를 믿고 마음대로 슛을 던졌고, 그 위력은 배가 될 수 있었죠.
외곽은 최강이었지만 골밑이 약했던 보스턴은 이제 러셀의 가세로 내외곽이 최강인 팀으로 변모했습니다. 그야말로 향후 10여년간 NBA를 지배한 보스턴 다이너스티의 등장이었죠.
러셀이 합류한 바로 그해인 56-57시즌, 첫 우승을 차지한 보스턴은 이후 세인트루이스와 필라델피아에게 중간에 한번씩 일격을 당한 것을 제외하고는 총 13년동안 11번의 우승을 차지합니다.
이 엄청난 불패신화의 이면에는 밥 쿠지, 빌 샤먼, 톰 하인손, 샘 존스, 존 하블리첵(John Havlicek) 등 수많은 레전드들의 공헌이 있었겠지만 그들 중에서 베스트 오브 베스트를 꼽자면 역시 러셀이었죠.
러셀은 소포모어때인 57-58시즌 올스타에 처음 뽑힌 이래, 은퇴할때까지 12년 연속 올스타전에 출장합니다. 그리고 1963년 올스타전에선 매치업 상대 체임벌린(17득점 19리바)을 압도하며 19득점 24리바운드를 기록, MVP를 차지하기도 했죠.
그리고 무적 보스턴 다이너스티를 이끈 주역으로서 무려 5차례나 시즌 MVP를 차지했습니다.
당시는 윌트 체임벌린이라는 엄청난 스탯 괴물이 있었지만 당시 NBA 선수들은 체임벌린보단 러셀이 더 적합한 MVP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는 NBA 선수들이 직접 MVP를 뽑는 시절이었죠...)
선수 한 개인의 능력으로 보면 체임벌린이 앞선던 게 사실이었지만 농구는 5명이서 하는 팀플레이였기 때문에 러셀이 더 높은 점수를 받은거였죠.
반면에 센터자리의 퍼스트팀 경쟁에서는 체임벌린이 좀더 앞섰습니다. 러셀은 체임벌린과 퍼스트팀을 놓고 총 9번 격돌했지만 2 : 7로 열세였죠.
러셀은 통산 총 3차례 퍼스트팀, 8차례 세컨트팀에 올랐으며, 5차례 리바운드 타이틀을 차지했습니다.
러셀은 전설적인 코치 레드 아워백이 65-66시즌을 끝으로 은퇴하자 그 바통을 이어받아 선수 겸 감독으로 뛰기도 했습니다. 리그 역사상 최초의 흑인 감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죠.
선수 겸 감독으로 팀에 두차례 더 우승 반지를 선사한 러셀은 68-69시즌을 끝으로 은퇴했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의 등장과 함께 막을 연 보스턴 다이너스티 역시, 그의 퇴장을 끝으로 함께 막을 내리고 말았죠.
러셀은 1975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그의 저지 #6은 당연히 보스턴에서 영구결번됐습니다.
13년의 선수 경력동안 그는 무려 11개의 우승 반지를 따냈고, 그 11번의 영광의 순간마다 늘 주인공이었습니다.
◆ 샘 존스 (Sam Jones)

○ 61-62시즌 : 평균 18.4득점 (리그 18위), .464 필드골% (리그 11위), .818 자유투% (리그 11위)
○ 62년 올스타전 기록 : 14분 출전, 2득점, 1리바운드, 1-8 필드골, 0-1 자유투
Sam Jones... 아주 흔한 이름이지만, 보스턴의 전설적인 슈팅가드 빌 셔먼의 계보를 이은 또하나의 전설적인 슈터의 아주 특별한 이름이기도 합니다.
무명팀 노스 캐롤라이나 센트럴 대학의 무명 선수였던 존스는 레드 아워백 감독의 눈에 띄어 1957년 드래프트에서 아무도 예측 못한 깜짝 1라운더로 지명되었습니다.
이후 존스는 특별히 그를 총애한 아워백 감독의 조련 하에 차츰 대형 선수로 성장해가죠.
셔먼의 은퇴 이후, 팀 내 붙박이 슈팅 가드로 자리잡은 존스는 62년 생애 최초로 올스타에 뽑혔습니다.
그리고 이후로도 4번 더 올스타에 올랐으며 3차례 올-NBA 세컨드 팀에 선발되었죠.
존스의 주무기는 아주 정교한 뱅크슛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특유의 뱅크슛을 구사하게 된 동기가 아주 흥미롭죠.
고등학교 시절 그는 워낙 실력이 미숙해 레이업도 제대로 못넣는 선수였죠. 그래서 임시 방편으로 레이업을 할 때 백보드를 맞춰 집어넣는 편법을 연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독특한 백보드 슛은 나중에는 점점 수비수들이 막기 힘든 필살기로 변모했죠.
팬들은 그의 독특한 슛을 보고 즐거워했지만, 상대 수비수들은 예측 불가능한 궤적을 그리는 그의 슛에 좌절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그는 항상 쉴새없이 코트 여기저기를 누비던 부지런한 선수였습니다. 마치 지금의 리차드 해밀턴 처럼요.
그는 갑자기 어디에선가 번개처럼 나타나 패스를 받아 멋진 뱅크슛을 성공시키며 상대 수비수들을 아주 피곤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는 팀 내 최고의 클러치 슈터이기도 했습니다. 60년대 보스턴 왕조의 무적 행진은 플옵때 고비마다 중요한 슛들을 성공시킨 그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죠.
(요즘 선수로 비교하자면 60년대판 뱅크슛 레지 밀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의 생애 가장 멋진 클러치 슛은 69년 파이널 4차전에서 터졌습니다. 당시 보스턴은 레이커스에게 1승 2패로 몰려있었죠.
반드시 이겨야하는 4차전, 경기종료 15초를 남기고 88-87로 레이커스의 한점 차 리드... 게다가 볼의 소유권은 레이커스에게 있었죠.
그냥 공만 돌려도 레이커스가 승리를 따내는 순간이었지만, 보스턴의 가드 에멧 브라이언트(Emmette Bryant)가 천금같은 가로채기를 성공시켰죠.
하지만 이어진 찬스에서 존스의 점프슛은 그만 빗나가고 맙니다. 다행히 보스턴이 다시 공격 리바운드를 따내 타임을 불렀고 시간은 겨우 7초 남았죠.
보스턴의 플레잉 코치였던 러셀은 그의 오랜 동료 존스에게 마지막 공격을 주문합니다.
당시 팀내 득점 1, 2위였던 하블리첵이나 베일리 호웰(Bailey Howell)이 아닌, 35살의 은퇴를 앞둔 노장 존스에게요...
방금전 중요한 샷을 미스한 존스였지만, 그는 언제나 보스턴의 최고 클러치 슈터였으니까요.
타임 아웃이 끝나고 보스턴의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블리첵의 패스를 받은 존스는 다소 망설이며 바로 슛을 던지지 못했고, 시간은 어느덧 2~3초 여를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윌트 체임벌린이 그의 슛을 저지하기 위해 긴 팔을 뻗었고, 존스는 다소 발란스가 무너진 자세에서 마지막 점프슛을 던졌습니다.
스핀이 잔뜩 걸린 존스의 크런치 슛은 림을 한번 맞고 톡 튀어오르더니 다시 림의 뒤쪽에 맞고는 그림같이 림 안으로 빨려들어갔습니다.
마치 기적과도 같은 역전 슛... 훗날 레이커스의 제리 웨스트는 이 슛을 두고 "신의 뜻이었다. (The Lord's will.)"라고 회상했죠.
89-88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보스턴은 이후 7차전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레이커스를 누르고 통산 11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멋진 클러치 슛의 주인공이었던 존스는 이 시즌을 끝으로 빌 러셀과 함께 은퇴하게 되죠.
러셀과 존스의 퇴장과 함께 길고도 화려했던 보스턴 다이너스티의 기나긴 우승 퍼레이드도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존스는 1984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그의 저지 #24는 보스턴에서 영구결번되었습니다.
◆ 톰 하인손 (Tom Heinsohn)

○ 61-62시즌 : 평균 22.1득점 (리그 12위), 9.5리바운드 (리그 16위), .819 자유투% (리그 10위)
○ 그해 올-NBA 세컨드 팀 선발
○ 62시즌 올스타전 기록 : 13분 출장, 10득점, 2리바운드, 1어시스트, 4-11 필드골, 2-2 자유투
하인손은 보스턴 최전성기에 빌 러셀과 함께 골밑을 굳건히 지킨 파워포워드이자 팀의 주득점원이었습니다.
1956년 드래프트에서 보스턴은 1라운드에서 하인손을 지명했고, 하인손은 세인트루이스에서 트레이드해온 빌 러셀과 함께 막강 포스트를 구축했죠.
원래 골밑이 가장 큰 약점이었던 보스턴은 하인손과 러셀의 동시 영입으로 순식간에 최강 골밑으로 거듭났습니다.
하인손은 올림픽 참가로 뒤늦게 합류한 러셀을 누르고 그해 신인상을 차지했고, 루키이면서도 당당히 올스타전에도 명함을 내밉니다.
그리고 세인트루이스와 맡붙은 그해 56년 파이널 7차전에서 무려 37득점을 올리며 팀의 사상 첫 우승의 견인차 노릇을 톡톡히 했죠.
6-7, 218파운드의 평범한 신체조건을 지녔지만 보기와는 달리 매우 터프가이였던 하인손은 파워포워드이면서도 매우 정교한 슈팅 터치를 지니고 있었죠.
또한 그는 장거리 점프슛 뿐만 아니라 전천후 훅 슛과 다양한 레이업 기술들도 갖고 있었죠. 그는 외곽이든 골밑이든 어디든지 득점을 올릴 수 있는 탁월한 득점기계였습니다.
간혹 그는 언론들부터 너무 슈팅을 남발하는게 아니냐는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레드 아워백 감독도 그의 이기적인 플레이를 자주 지적했죠.
하지만 팀메이트들은 그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공격을 맡겼습니다. 그는 50년대 말~60년대 초까지 보스턴의 리딩 스코어러였죠.
그는 생애 통산 6차례 올스타에 올랐으며, 60-61시즌부터는 4년 연속 올-NBA 세컨드 팀에 뽑힙니다. 그리고 64-65시즌을 끝으로 은퇴할때까지 팀의 8차례의 우승을 견인했죠.
한편 레드 아워백 감독은 65-66시즌을 마치고 은퇴하면서 하인손을 자신의 후임 감독으로 지목했습니다.
하지만 하인손은 아직 현역이던 빌 러셀에게 감독직을 양보합니다. 그는 동갑내기이자 팀의 에이스인 러셀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러셀의 은퇴 이후, 아워백은 하인손에게 다시 한번 감독직을 권유합니다. 하인손은 이번엔 흔쾌히 감독으로 취임하며 보스턴의 다이너스티 시절 이후의 리빌딩을 전두지휘하죠.
70년대 보스턴은 헤인손의 지휘 하에 데이브 코웬스, 존 하블리첵 등 간판 선수들의 활약으로 두차례 챔피언에 오른, 여전한 강팀이었습니다.
비록 60년대 무적 시대에 비하면 다소 초라해 보일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팀들의 수준이 많이 평준화된 시대에서 일궈낸 값진 성과였죠.
하인손은 9년간 셀틱스의 지휘봉을 맡았고 총 427승을 거둬 레드 아워백(795승)에 이어 보스턴 코치 다승 랭킹 2위에 올라있습니다.
위대한 선수이자 코치였던 하인손은 1986년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그의 저지 #15는 보스턴에서 영구결번되었습니다.
◇ L.A Lakers
◆ 엘진 베일러 (Elgin Baylor)

○ 61-62시즌 : 평균 38.3득점 (리그 2위), 18.6리바운드 (리그 5위), 4.6어시스트
○ 그 해 올-NBA 퍼스트 팀 선발
○ 62년 올스타전 기록 : 37분 출장, 32득점 (팀 1위), 9리바운드, 4어시스트, 10-23 필드골, 12-14 자유투
NBA에서 우승의 감격을 맛보지 못했던 슈퍼스타들 중에서 가장 불운한 선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칼 말론? 레지 밀러? 패트릭 유잉? 물론 그들도 나름대로 불운합니다. 하지만 앞서 거론한 그 누구도 이제부터 얘기할 엘진 베일러보다 더 불운하지는 않았죠.
베일러는 레이커스에서 14년동안 선수생활을 하면서 팀을 8차례나 파이널에 진출시켰습니다. 하지만 무적 왕조 보스턴의 벽에 막혀 우승의 문턱에서 번번히 좌절해야만 했죠.
러셀의 은퇴로 보스턴 왕조가 막을 내리자, 베일러에겐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뉴욕 닉스의 윌리스 리드(Willis Reed)의 파이널 7차전 부상 투혼에 가로막혀 8번째 고배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베일러는 끝내 우승의 감격을 누리지 못한 채 71-72시즌 도중 은퇴를 선언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레이커스는 베일러가 은퇴한 바로 그 시즌에 파이널에서 닉스를 누르고 대망의 우승을 차지하고 맙니다.
무려 14년을 그토록 기다렸건만... 운명의 장난은 이처럼 잔인했죠.
하지만 비록 끝내 우승의 꿀맛은 보지 못했어도 그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최고의 선수중 한명이었습니다.
6-5 밖에 안되는 작은 신장이었지만 폭발적인 득점력과 운동능력, 엄청난 체공력... (지금 NBA 선수들이 펼치는 각종 공중 기술들의 원조는 바로 베일러로부터 나왔죠...)
거기에 가공할 리바운드 능력과 파워, 가드급의 드리블링과 패싱 능력까지 갖춘... 그는 당시 리그에서 가장 화려한 플레이어였습니다.
그는 루키때부터 이미 올스타, 올-NBA 퍼스트팀에 뽑혔으며, 생애 처음 출전한 올스타전에서 24득점 11리바운드를 기록, 밥 페팃과 공동으로 MVP에 오르는 기염을 토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앞으로 펼쳐질 그의 화려한 농구 경력의 신호탄에 불과했죠.
그는 통산 10차례 올-NBA 퍼스트팀에 올랐고 11차례 올스타에 뽑혔습니다.
62년 올스타전에서 그는 팀 내 최다인 32득점을 퍼부으며 서부지구의 완승을 이끌었지만, MVP는 페팃의 몫이었죠.
하지만 61-62시즌 그가 보여준 포스는 대단했습니다. 군복무와 농구를 병행하는 어수선한 와중에서도 평균 38.3득점을 올리며 리그 득점 2위에 올랐죠.
아니, 평균 38.3득점인데 리그 2위냐니... 많은 분들이 어리둥절 하실겁니다. 바로 그 시즌에 체임벌린이 평균 50득점을 올렸기 때문이죠...;
(당시 베일러의 38.3득점은 득점 랭킹 2위 중 역대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베일러는 통산 3시즌이나 평균 30득점 이상을 기록했지만, 이처럼 번번히 체임벌린의 벽에 막혀 단 한차례도 득점왕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우승 반지는 물론이요, 개인 타이틀도 하나 없는 진정한 무관의 제왕이죠...ㅠ.ㅠ
가공할 득점기계였던 베일러는 득점에 관한 많은 기록들을 세웠는데요, 1960년 11월 15일 대 뉴욕 닉스전에서 무려 71득점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25리바운드는 보너스...)
이 기록은 얼마전 코비 브라이언트의 81점쇼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레이커스 프랜차이즈 최고 득점 기록이었죠.
또한 그는 62년 파이널 5차전에서 보스턴을 상대로 무려 61득점을 퍼붓는 가공할 득점쇼를 자랑합니다.
보스턴은 베일러를 막고자 러셀을 전담마크로 붙이는 초강수까지 뒀지만, 리그 최고의 수비수 러셀도 불붙은 베일러를 저지할 순 없었죠.
이 기록은 24년 후 마이클 조던이 86년 플옵 1라운드 2차전에서 보스턴을 상대로 63득점을 올리기전까지 역대 플레이오프 최다 득점 기록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던의 63점은 2차 연장전까지 간 끝에 기록한 거죠. 팀은 패배했구요.
베일러의 경우 비록 점수는 2점 적지만, 리그 최고의 수비수를 상대로 파이널에서 팀을 승리로 이끌며 거둔 기록이니 그 포스는 더욱 대단합니다...)
하지만 이런 베일러의 엄청난 활약에도 불구, 레이커스는 파이널에서 번번히 보스턴의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바로 강력한 센터의 부재 때문이었죠.
대럴 임호프(Darrall Imhoff)나 멜 카운츠(Mel Counts)도 그럭저럭 좋은 센터들이었지만 러셀의 상대는 전혀 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루디 라루소가 분전했지만 그는 너무 언더사이즈였죠.
결국 레이커스는 윌트 체임벌린까지 영입하는 초강수를 두었고, 결국 훗날 체임벌린을 앞세워 대망의 우승까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작 그때가 되서 베일러는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죠...ㅠ.ㅠ
커리어 후반기에는 내내 무릎 부상의 고통에 시달려야했던 베일러는 이처럼 끝내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쓸쓸히 은퇴하고맙니다.
하지만 그는 여느 1등 못지 않은, 진정으로 아름다운 2등이었죠.
베일러는 1977년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그의 저지 #22는 레이커스에서 당연히 영구결번되었습니다.
은퇴 후 뉴올리언즈 재즈(現 유타 재즈의 전신)의 사령탑을 잠시 맡기도했던 그는 현재 19년째 L.A 클리퍼스의 단장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 제리 웨스트 (Jerry West)

(그 유명한 NBA 로고모델 사진)
○ 61-62시즌 : 평균 30.8득점(리그 6위), 7.9리바운드, 5.4어시스트(리그 8위)
○ 그해 올-NBA 퍼스트 팀 선발
○ 62년 올스타전 기록 : 31분 출장, 18득점, 3리바운드, 1어시스트, 7-14 필드골, 4-6 자유투
NBA 로고의 모델로도 유명한 제리 웨스트는 레이커스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인물입니다.
위대한 선수로서, 또 감독으로서, 또 단장으로서... 무려 40여년간 웨스트는 레이커스 신화의 주역을 맡았죠.
6-2, 185파운드의 작은 체구의 이 평범하게 생긴 백인 가드는 겉보기와는 다른 엄청난 농구 천재였습니다.
가공할 슈팅력과 돌파력은 물론이요, 리그 최고의 퍼리미터 디펜더였고, 또한 "Mr. Clutch"라는 멋진 별명을 가진 최고의 승부사였습니다.
미네아폴리스에서 L.A로 연고지를 옮긴 후, 레이커스는 과거 리그 초창기때 영광을 되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중이었습니다.
그 재도약의 중심에는 특급 포워드 엘진 베일러와, 혜성같이 나타난 백인 가드 제리 웨스트가 있었습니다.
웨스트는 소포모어 시즌에 30득점 이상을 기록하며 베일러와 함께 리그 최고의 원-투 펀치로 거듭납니다.
두 선수는 매 경기 거의 70득점을 합작했고, 레이커스는 이 듀오의 활약에 힘입어 파이널까지 진출, 보스턴과 격돌하죠.
하지만 베일러의 61득점 쇼에도 불구, 레이커스는 7차전 접전 끝에 보스턴에게 아쉽게 무릎을 꿇습니다.
이후 레이커스는 보스턴과 결승전에서 끊임없이 재격돌하지만 번번히 복수에 실패합니다.
웨스트는 "Mr. Clutch"답게 플레이오프에서 무척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1965년의 플레이오프는 가히 백미였죠.
웨스트는 그해 플옵 시리즈 11경기에서 무려 40.6득점의 평균 득점을 올렸으며, 특히 볼티모어 불렛츠 (現 워싱턴 위저즈의 전신)와 벌인 컨퍼런스 파이널 6경기에선 무려 평균 46.3득점을 기록하기도 하죠.
(40.6득점은 10경기 이상 치른 플레이오프 시리즈를 기준으로 역대 최고 득점 기록입니다.
마이클 조던이 86년 플옵에서 평균 43.7득점을 기록하긴 하지만, 당시 불스는 플옵 1라운드에서 보스턴에게 0-3으로 스윕당했죠. 조던이 2차전에서 한경기 플옵 최다인 63득점을 터뜨리기도 했던 바로 그 시리즈입니다.
물론 조던의 업적도 위대하지만 웨스트는 11경기나뛰며 올린 기록이기에 더욱 포스가 넘치죠...)
하지만 웨스트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났던 건 바로 1969년 파이널이었습니다.
당시 레이커스는 파이널에서 보스턴과 7번째 운명의 조우를 하죠. 이전 6번의 뼈아픈 패배를 뒤로 한채...
시리즈 내내 극적인 승부가 이어졌고, 마침내 레이커스가 5차전을 승리로 이끌며 3-2 리드를 따냅니다.
하지만 팀의 에이스 웨스트가 그만 이 경기에서 햄스트링 부상을 입고 말죠.
웨스트는 부상에도 불구, 절뚝거리며 6차전을 뛰는 투혼을 발휘했지만 팀은 패배하며 마침내 운명의 7차전을 맞게되었습니다.
7차전을 앞둔 상황에서 웨스트의 부상은 더욱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웨스트는 두 다리를 랩으로 칭칭 감고 출장을 감행했죠.
레이커스는 4쿼터 한때 17점차까지 뒤졌지만 플옵의 사나이 웨스트의 부상 투혼으로 한 골 차까지 따라잡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경기 막판 보스턴의 돈 넬슨의 결승골이 터졌고, 보스턴은 108-106으로 승리하며 통산 11번째 우승을 차지합니다.
절뚝거리는 두 다리를 랩으로 감고 투혼을 발휘한 웨스트는 7차전에서 42득점, 13리바운드, 12어시스트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패배한 팀 선수로서 파이널 MVP에 오르게 되죠. (기아 시절의 허재... 다들 생각나시겠죠?)
"Mr. Clutch"의 눈물겨운 파이널 도전기는 72년에야 비로소 결실을 맺습니다. 마침내 레이커스는 파이널에서 닉스를 물리치고 감격의 우승을 차지하죠.
플옵의 사나이 웨스트의 생애 유일한,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값진 우승이었습니다.
웨스트는 통산 14년 동안 13차례 올스타에 올랐고, 10차례 올-NBA 퍼스트팀, 1차례 세컨드팀에 뽑혔습니다. 72년 올스타전에서는 멋진 버저비터 결승골을 작렬하며 올스타 MVP를 차지하기도 했구요.
또한 통산 4시즌을 평균 30득점 이상을 올렸으며 1차례 득점왕을 차지했고, 커리어 후반에는 게임메이커로 변신, 어시스트 1위에 등극하기도 했습니다. (71-72시즌, 평균 9.7개)
또한 그는 위대한 공격수이자 위대한 수비수이기도 했습니다. 리그에서 68-69시즌부터 선정하기 시작한 디펜시브 팀 명단에 웨스트는 항상 단골 손님이었죠.
그는 통산 4번 디펜시브 퍼스트팀, 1번 세컨드팀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웨스트는 73-74시즌을 마치고 은퇴를 선언했고, 은퇴 뒤에도 여전히 레이커스 맨으로서 수많은 업적을 쌓았습니다.
76-77시즌부터 3시즌동안 감독으로서 레이커스의 지휘봉을 잡기도 했으며, 1982년부터는 레이커스의 단장을 맡아 80년대와 2000년대 레이커스 왕조를 이끌었습니다.
(코비 브라이언트와 샤크의 영입은 모두 그의 업적이죠...)
웨스트는 1980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그의 저지 #44는 레이커스에서 당연히 영구결번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멤피스 그리즐리즈의 단장을 맡아 한때 암울했던 신생팀 그리즐리즈를 서부 강호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최고의 선수이자 단장인 웨스트의 신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 프랭크 셀비 (Frank Selvy)

○ 61-62시즌 : 평균 14.7득점, 5.2리바운드, 4.8어시스트 (리그 10위)
○ 62년 올스타전 기록 : 11분 출장, 0득점, 4리바운드, 1어시스트, 0-3 필드골
셀비는 대학 시절 한 경기 100득점을 기록한 것으로 유명한 선수입니다.
Furman 대학 시절 셀비는 당시 전미 득점 랭킹 1위(경기당 평균 41.7득점)를 달리던 득점 기계였습니다.
1954년 2월 13일, Newberry 대학과의 경기는 셀비의 대학 시절 마지막 경기였죠.
당시 Furman대학의 감독이었던 라일즈 앨리(Lyles Alley)는 특별히 이날 경기를 '프랭크 셀비의 밤(Frank Selvy's Night)'으로 정하고 셀비에게 마음껏 득점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셀비는 마음껏 득점에 집중하며 자신의 밤을 즐겼고, 결국 경기 종료와 함께 하프라인 근처에서 던진 버저 비터로 영광의 100득점째를 올렸습니다.
이날 셀비는 66개 중 41개의 야투를 꽂아넣었고, 22개중 18개의 자유투를 성공시켰죠.
셀비의 한 경기 100득점은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깨지지않는 NCAA 디비전Ⅰ의 한경기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십여년 후, NBA에서 윌트 체임벌린도 대기록을 달성했는데 둘 다 모두 딱 100득점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남다르죠.
게다가 놀라운 점은 셀비는 고작 6-3짜리 가드였으며, 주로 외곽슛으로 많은 득점을 올렸다는 점입니다.
당시는 3점 라인이 없던 때지만 그날 셀비가 던진 슛 중 10개 가량은 지금의 3점 라인 거리에서 성공시킨 장거리포라고 합니다. 또한 마지막 100점째가 장거리 버저비터라는 점도 흥미롭죠.
대학 최고의 스코어러였던 셀비는 당당히 전체 1번으로 볼티모어 불렛츠(워싱턴 위저즈의 전신인 6~70년대 볼티모어 불렛츠와는 다른 팀임...)에 입단합니다.
하지만 볼티모어가 시즌 개막 전에 파산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밀워키 호크스(現 애틀란타 호크스의 전신)로 이적하죠.
루키인 셀비는 드래프트 동기생 밥 페팃과 함께 루키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나란히 올스타전에도 출전하죠.
당시 밀워키는 만년 약체팀이었지만, 슈퍼 루키들의 놀라운 활약은 대단한 볼거리를 제공했습니다.
셀비는 루키 시즌에 평균 19득점(리그 5위)를 기록하며 대학 시절 득점 기계의 명성을 이어갔죠.
하지만 다음 시즌 셀비는 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에는 제자리를 잡지 못한 채 벤치 워머로 방황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59-60시즌 도중 레이커스로 이적하면서 농구 인생에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하죠.
셀비는 제리 웨스트와 함께 팀의 백코트 주 득점원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는 61-62시즌, 루키때 이후 오래간만에 올스타에 다시 선발되는 등 제 2의 전성기를 맞았죠.
그리고 그해 파이널에서 셀비를 대학 시절 100득점만큼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 벌어집니다.
레이커스는 베일러, 웨스트의 활약에 힘입어 파이널까지 진출, 셀틱스와 격돌했습니다. 시리즈는 치열한 접전을 거듭했고, 마침내 대망의 7차전까지 이어졌죠.
숨막히던 승부는 경기 막판까지 이어졌고, 경기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고 100-96, 보스턴이 두 골차 리드를 지키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프랭크 셀비는 귀중한 수비 리바운드를 따낸 뒤 코트 위를 돌진해 멋진 드라이빙 레이업을 성공시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찾아온 공격 기회에서 셀비는 한번 더 멋지게 드라이빙을 시도했죠.
공은 아쉽게도 림을 벗어났지만 셀비는 재차 공격 리바운드를 잡아내며 기어이 득점에 성공, 경기 종료를 18초 남긴 채 100대 100, 극적인 동점을 만듭니다.
이어진 보스턴의 마지막 공격에서 프랭크 램지의 훅슛이 빗나갔고, 루디 라루소가 귀중한 수비 리바운드를 건져냈죠.
레이커스의 Fred Schaus 감독은 타임을 불렀고, 5초가 남은 상황에서 마지막 공격을 주문했습니다.
Schaus는 우선 베일러에게 라스트 슛을 맡기되, 여의치않으면 웨스트가,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오픈된 다른 선수가 슛을 쏘라고 지시했습니다.
마침내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노련한 아워백은 베일러, 웨스트에게 공격이 갈 것을 미리 예측했고, 보스턴 선수들은 둘을 빈틈없이 타이트하게 마크했습니다.
당시 볼을 몰던 포인트가드 로드 헌들리(Rod Hundley)는 베일러나 웨스트에게 패스가 가는게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죠.
헌들리는 자기 자신에게 약간의 오픈 찬스가 났다는 걸 알았지만 더 좋은 찬스를 가진 동료가 없나 다시 한번 둘러봤습니다.
그러자 왼쪽 베이스라인에서 셀비가 오픈 찬스를 잡고 있는 걸 보고 바로 패스를 했죠.
당시 셀비의 마크맨은 밥 쿠지였지만 쿠지는 웨스트를 막기 위해 더블팀을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셀비에게 패스가 가자 당황한 쿠지는 카바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8피트 거리에서 셀비의 멋진 점프샷이 공중을 갈랐죠.
하지만 아쉽게도 공은 림을 외면했고, 빌 러셀이 수비 리바운드를 잡아내며 경기는 연장전으로 돌입했습니다.
결국 레이커스는 연장 접전 끝에 110-107로 패배하며 우승 문턱 바로 앞에서 고개를 떨궈야만 했습니다.
이날의 패배 이후, 레이커스는 보스턴과 파이널에서 다섯번 더 격돌하지만 모두 패배하고 말았죠.
만약 셀비의 이날 슛이 들어갔다면 레이커스는 그들의 우승을 10년이나 더 단축할 수 있었을 것이며, 보스턴 다이너스티의 8년 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도 세워지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엘진 베일러는 우승 반지 없이 쓸쓸히 은퇴하지 않아도 됐을거구요...ㅠ.ㅠ
이처럼 리그의 역사를 송두리채 바꿔버릴 수도 있었던 셀비의 8피트 베이스라인 점퍼는 아쉽게도 miss였습니다.
훗날 셀비는 그날을 회고하며 이런 말을 남겼죠. "내가 평생 올린 모든 득점을 그 한 골과 바꾸고 싶었을 정도다."
비록 결승골을 놓쳤지만, 셀비는 그 덕분에 더 화제가 되고 주목받았습니다. 셀비는 이후로도 레이커스에서 2년을 더 뛰다 은퇴했죠.
◆ 루디 라루소 (Rudy LaRusso)

○ 61-62 시즌 평균 17.2득점(리그 19위), 10.4리바운드(리그 14위), .466 필드골% (리그 9위)
○ 61시즌 올스타전 기록 : 부상으로 출전 못함
엘진 베일러의 좋은 프론트코트 파트너였던 라루소는 60년대 레이커스에서 항상 골밑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준수한 롤 플레이어였습니다.
레이커스는 58년 드래프트에서 엘진 베일러를 얻고난 뒤, 연이어 드래프트로 훗날 60년대 팀의 주역이 될 좋은 인재들을 계속 뽑았습니다.
59년엔 Dartmouth 대학 출신의 라루소를 2라운드에 지명했고, 60년엔 제리 웨스트를 뽑았죠.
라루소는 6'7", 220파운드로 원래 파워포워드에 적합한 체격 조건이었지만, 동일 포지션에 리그 최고의 파포 베일러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센터 스팟에서 더 자주 출장해야 했습니다.
라루소 역시 베일러만큼은 안되도 좋은 득점력과 보드 장악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늘 베일러의 그늘에 가려 골밑의 2인자였죠.
61-62시즌, 17-10의 준수한 스탯을 기록하며 레이커스의 상승세에 일익을 담당하던 라루소는 생애 처음으로 올스타에 지명되는 영광을 얻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부상은 그의 첫 올스타 데뷔를 망쳐놓았죠. 당시 레이커스에선 베일러, 웨스트, 셀비, 라루소 이렇게 4명이나 올스타에 뽑혔지만 실제 올스타전에 뛴 건 라루소를 제외한 3명이었습니다.
라루소는 레이커스 시절 3번,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現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전신) 시절 2번, 총 5번 올스타에 뽑혔습니다.
또한 뛰어난 수비력을 바탕으로 68-69 시즌에는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죠.
경기당 10개 가량 잡아주는 견실한 리바운드, 탄탄한 수비력을 보유한 라루소는 레이커스 골밑 수비의 핵심이었습니다.
베일러는 화려한 공격력과 막강 리바운드에 비해 수비력은 그다지 뛰어나진 않았죠. 파이널에서 보스턴과 격돌할 때마다 빌 러셀을 마크하는 건 주로 라루소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라루소는 비교적 단신이었기때문에 레이커스는 상대적으로 높이 싸움에서 보스턴에 많이 밀렸습니다.
파이널에서 번번히 러셀에게 당하던 레이커스는 결국 높이 보완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죠.
66-67시즌, 대럴 임호프라는 6-10짜리 정통 센터가 점점 신임받으면서 라루소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조금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레이커스는 임호프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죠. 결국 삼각 딜을 통해 볼티모어 불렛츠의 젊은 7풋 센터 멜 카운츠를 영입했고, 대신 라루소를 디트로이트로 이적시켰습니다.
하지만 라루소는 트레이드에 불복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농구 선수로 뛰면서 동시에 L.A에서 주식 중개업도 병행하던 중이었기 때문이죠.
개인적인 이유로 공식적인 트레이드를 거부한 라루소에게 리그는 잔여경기 출장 금지 처분을 내렸고, 레이커스는 라루소에 대한 보상으로 디트로이트에 67년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내줬습니다.
이후 라루소는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로 현금 트레이드됩니다. 샌프란시스코는 L.A에서 비교적 가까웠기때문에 라루소는 이번에는 트레이드를 수용하죠.
라루소는 워리어스 소속으로 뛰면서도 수시로 L.A로 출퇴근하며 주식 중개업 역시 계속 병행했습니다.
레이커스 시절 라루소는 베일러, 웨스트에 이어 팀의 제 3옵션 신세였지만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일약 에이스 대접을 받습니다.
당시 SF에는 네이트 서몬드(Nate Thurmond)라는 훌륭한 센터가 있었기 때문에 라루소는 골밑 수비의 부담을 던 채 자신의 트루 포지션인 4번 자리에서 마음대로 뛸 수 있었죠.
라루소는 그동안 자신이 베일러에게 밀려 과소평가당한 선수임을 당당히 증명하며 경기당 20득점, 9리바운드에 가까운 뛰어난 스탯을 기록했고, 올스타에도 계속 뽑혔습니다.
SF에서 2년간 올스타로 뛴 라루소는 농구 선수로서 제 2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죠.
하지만 당시 그는 주식 중개업에 한창 빠져있었고, 매일 L.A에서 SF로 출퇴근하는 걸 번거롭게 여긴 그는 고민 끝에 Ball 대신 Stock을 잡는 길을 선택합니다.
결국 68-69시즌을 끝으로 그는 현역에서 은퇴해 주식 중개업자로 새 인생을 살게 되죠.
말년에 파킨슨씨 병으로 고생하던 라루소는 2004년 그가 사랑했던 도시 L.A에서 67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습니다.
(P.S : 다음편에는 75년 올스타전에 뽑혔던 4명의 보스턴 선수들 - 데이브 코웬스, 존 하블리첵, 죠죠 화이트, 폴 사일러스 -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에궁, 전편은 비교적 간단하게 썼는데 이번에는 쓰다 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이러고보니 쿠지 씨랑 셔먼 씨에게 괜히 미안해지는군요...;
원래 레전드들 이야기가 쓰고 쓰다 보면 끝이 없는지라... 그냥 간단하게 언급만 하고 넘어간다는 게 좀 길어진 것 같습니다.
시간이 되면 전편에서 너무 싱겁게 다뤘던 쿠지, 셔먼, 매컬리, 박스데일 이야기도 좀 보완해서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첫댓글 재미있게 봤습니다. 겁나 유익했네요.
정말 대단한 정보네요. 너무 잘 읽었습니다^^
2006년 2월 12일에 I Love Basketball 게시판에 게시된 글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플옵에서 40.6득점....ㅎ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