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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수상한 시국입니다.
十常侍(십상시)인지 시방새인지 하는, 저 한양 북악산 밑의 환관, 내시 나부랭이 잡것들이 지덜끼리 미행하고 쫒아내고 까발리며 지랄발광 하는 現下(현하)의 이 亂世(난세)에도 우리 미천하고 ‘어린‘ 백성들만은 자기들끼리 품어주고 힘 보태주는 자체발광으로 이 風塵(풍진) 세상을 환하고 따뜻하게 만들어 갑니다.
그 환하고 따뜻한 이바구 둘입니다.
♯ 1
금방 진눈개비라도 흩뿌릴 듯한 일요일 오후에 신림동 고시촌의 녹두거리를 찾은 까닭은 녹두거리 앞 복개천 다리 위에서 병삼이가 농성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농성장이든 토요일과 일요일은 쓸쓸하겠기 때문입니다.
저와 띠동갑인 병삼이는 버스회사 해고노동자입니다. 고시촌에 차고지를 둔 501번 한남운수에서 정비 일을 하다가 2010년 10월에 해고 되었습니다. 해고사유는 업무지시불이행입니다.
2009년에 회사가 임금을 15% 삭감하는 한편, 신분도 정규직에서 1년 계약직으로 바꾸자고 일방적으로 요구하면서 정비사 여섯 명을 버스기사로 강제 발령 내자 정비사들이 자신들의 대형면허증을 운전면허시험장에 일괄 반납하여 운전기사로 발령 나는 것을 원천봉쇄했고 이를 괘씸히 여긴 회사가 정비사 2명을 해고하고 3명을 2개월 정직시켰는데 병삼이가 그만 해고자로 간택(?)된 것입니다.
정비사들이 운전직으로의 전환을 반대한 이유는 ▸당시에는 정비사의 임금이 운전기사보다 다소 많았고 ▸1년 정도의 마을버스 경력만 있으면 즉각 취업이 가능한 버스기사와 달리 정비기사는 오랜 경험이 필요한 직종이라고 자부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정된 댓수의 버스가 고장이 나면 빠른 시간 안에 원인을 파악하고 즉각 수리하여 버스 회전율을 높일 수 있는 내공이 있어야 시민 안전을 보장하고 시민 불편을 덜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린 병삼이는 이후 차고지 앞에서 5년째 출근투쟁을 벌이면서 매주 수요일에는 공공운수노조 정비지회나 쌍차, 기륭 조합원들과 함께 복직 촉구집회를 헸지만 회사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자 급기야 회사 코앞에서의 무기한 농성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벌써 한 달째 농성입니다.
버스에서 내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횡단보도 앞에서 보니 저 복개천 다리 중간에 천막이 있습니다. 천막 입구와 다리 난간에는 농성을 지지하는, 회사대표를 규탄하는 펼침막들이 나부낍니다.
횡단보도를 건너와 반대편 쪽에서 천막 뒤태를 한 번 더 찍고는
다리 중간에서 다시 한 번 더 찍었습니다.
왼쪽으로 보이는 게 한남운수 버스 차고지이고 횡단보도 앞의 오렌지색 간판은 서점 ‘그날이 오면’의 간판입니다.
사진을 찍고 나서 살그머니 천막을 들추고 들어가니 병삼이가 잠을 자고 있습니다.
곯아 떨어져 자는 모습이 참 측은합니다. 나중에 병삼이에게 들으니 45m 굴뚝 위에서 187일째 농성하고 있는 스타케미컬 해고노동자를 어제 아침 희망버스를 타고 가서 응원하고는 오늘 새벽에 왔다고 합니다. 자기도 농성하는 주제에 경북 구미까지 달려가다니.... 참으로 못 말리는 전국구 오지랖입니다.
차마 깨우지는 못하고 천막 안을 찬찬히 둘러보노라니 ㅋ, ‘시위 전문꾼’들이 지은 농성장답게 천막이 아주 튼실합니다. 다리 위에 지었기에 바람이 매우 세차 바람이 불어오는 쪽의 벽면은 은박돗자리를 덧대었는데 조만간 스티로품 한 겹을 덧씌워 이 겨울을 날 생각이라는, 병삼이의 나중 설명입니다.
이윽고 부시시 일어난 병삼이가 저의 깜짝 출몰에 쑥스럽게 웃습니다. 희끗희끗 웃자란 수염이 그의 한 달 노숙을, 辛酸(신산)스런 삶을 대신 말해 줍니다.
아, 그래도 병삼이는 씩씩합니다. 꿋꿋합니다.
천막 안 네 귀퉁이마다 나름 깔끔 정리해 놓은 커피, 생수, 라면, 귤, 감, 사과상자들이 후원물품들이라고 자랑하더니만 엊그제에는 근처 빵집주인아저씨가 갓 구운 빵을 종류별로 한 봉지 갖다 주었으며, 같은 날 오후에는 인근 중학교 여 선생님이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자초지종 사정도 듣고 응원도 해주었다며 무척 고마워합니다.
지나가던 아주머니들은 천막을 들춰보며 “빨리 이겨야 할 텐데....” 걱정들을 해주었고 大醉(대취)한 취객이 막무가내 후원금 주려는 것을 극구 말린 적도 있다고 합니다. 시비 거는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으며 구청에서도 아직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고 합니다.
원래 관악구가 관악주민연대 등 진보적 시민운동이 활발하고 주민들의 성향도 야성이 강한 곳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참 고마운 일입니다. 사람 냄새 향긋한 동네입니다.
전기는 어디서 끌어오느냐는 물음에는 길 건너에 있는 서점 <그날이 오면>을 가리킵니다. 화장실도 언제든 서점 건물의 것을 쓰라면서 열쇠 하나를 주었다고 합니다..
과연 천막 출입구 쪽 천정에는 열쇠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선한 이웃’이 ‘없는 이웃’에게 건네준 연대의 증표입니다.
그 허공에 매달린 열쇠를 보면서 저 열쇠가 화장실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부조리, 불평등, 모순, 협잡의 밀실까지도 열어젖히는 쇠붙이였음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합니다. 아니, 우선 당장은 저 꽉 막힌 자본가의 두개골을 열어젖혀 부디 열린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했음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하여 병삼이가 이 겨울을 이산가족, 풍찬노숙하지 않고 내년 초에 군에 가는 아들과 함께 이 연말연시를 살 맞대고 지낼 수 있음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천막 양쪽으로 내달리는 찻소리가 무지 시끄럽습니다.
날씨도 꿀꿀하고 마음도 심란합니다. 한잔 생각이 간절합니다.
찌릿찌릿 눈치를 주었건만 아직도 잠이 덜 깬 건지 술 생각이 없는 건지 병삼이는 별무반응입니다. 房長(방장)이 가만 있는데 客(객)이 먼저 속내를 드러내기란 민망한 일입니다. 말 그대로 主客顚倒(주객전도)입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쟤는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타악, 탁, 있지도 않는 신발의 흙을 소리 나게 털며 오늘은 일단 퇴각하기로 합니다. 담배를 피기 위해 겸사 따라 나온 병삼이의 배웅을 받으며 농성장을 나오니 이번에는 그 새 밝혀진 길 건너편의 ‘그날이 오면’ 서점 불빛이 제 시선을 끕니다.
貧者一燈(빈자일등)!
왕이 공양한 등잔불보다 가난한 노파가 어렵사리 공양한 등불이 가장 오래도록 환하게 빛났다는, 그 불빛 같습니다. 보는 마음이 덩달아 환해집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착한 연대로 그날이, 一心正念(일심정념), 우리가 염원하던 '그날이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 저 횡단보도 신호등 앞까지 다가왔습니다.
♯ 2
두 번째 이바구는 우리 아파트 야그입니다.
한 달 전쯤, 제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경비아저씨들 관리를 외부 용역회사에 떠넘기자는 案(안)을 가지고 주민들 찬반 의사를 묻는 투표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경비아저씨들은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 신분이었습니다.
‘2015년 최저임금이 7.2% 인상 예정이고 감시직 근로자의 최저임금 적용율이 90%에서 100%로 변경됨에 따라 약 17.2%의 인상요인이 발생하여 관리비의 대폭 증가가 불가피한 바, 용역시행으로 전문업체를 통한 인력 운영의 효율성과 경비 절감을 기하고자 경쟁 입찰로 용역업체를 선정하고자 한다’는, 사실상 용역전환 찬성을 강요하는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명의의 안내문이 주민들 집집마다 전달되었으니 용역 전환을 굳이 반대할 주민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외부 용역회사에 경비아저씨들 관리를 맡기면 ▸문제 직원 즉시 교체 가능 ▸노사문제 용역회사에서 전담 ▸직원과실로 인한 사고 발생 시 용역회사 책임 등등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다는 솔깃함까지 조목조목 덧붙여놨으니 입주자대표회의의 바람대로 경비아저씨들의 운명이 용역회사에 떠넘겨짐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하얀 꽃 피면 하얀 감자’인 것처럼, ’♬파보나마나 하얀 감자‘인 것처럼 해보나마나한 투표라고 확신했습니다.
아, 입주민들이 경비아저씨들을 보듬어 안고 가야할 텐데... 안타까웠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용역 반대’에 기표를 하고 지켜볼 따름이었습니다.
그랬는데.... 그렇게 혼자 속앓이를 했는데.... 투표 마감 사흘 후(ㅋㅋ, 투표 마감 후 결과 발표까지 무려 사흘이나 걸렸음은 대표자회의의 당혹함과 속쓰림이 그만큼 혹독했다는 반증일 터) 아파트 엘리베이터마다 붙은 투표 결과 공고문은 누구도 예상 못한 반전이었습니다.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근래에 들었던, 가장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막혔던 가슴이 뻥! 뚫렸습니다.
그 감격을 오래 간직하고자,
이기심을 이긴 양심을 오래 기억하고자 재빨리 사진 한 장 찍었습니다.
숫자가 의미하는 ‘배려’와 ‘함께’를 한 장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아직은 훈훈한 世上입니다.
첫댓글 오홋~ 좋은아파트사시네요... 용역반대가 쉽지 않았을터인데... 축하축하 / 그리고, 한남운수 병삼씨께 쌀 한포 보내렵니다. 주소좀 알려주세요.
앗! 한발 늦었네. 천막에서 뭘 드시고 사시나 걱정이 되서 쌀이나 한포 보내드려야겠다 했더니만...
뭐 딴 걸 생각해 봐야겠군.
날은 추워지는데 참... 쩝.
이병삼 010 5240 2653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241-42 한남운수 앞 다리 위 천막 농성장
입니다.
유상샘 그리고 희양쌀 식구들 고맙습니다.
형님 코끝이 찡허내여....... 한남운수 뒷쪽으로 "이가네 설렁탕집" 있어요. 전화번호 888-1530 대표 이명자/ 응원하는 지역경찰이 ...가계주인계좌로...5만원 입금했으니...병삼이 형님보구....따끈한 선지해장국에 소주한잔 하시라고 하세요. ㅠㅠ
헉~ 이가네 설렁탕집? 그런데도 알아? 맛집인가? 함 묵으러갈까?
완존 괜찮은 생각이네! 근데 거기 아는 식당이예요? 아는 지역인가? 아님 기냥 검색해서?
내 본시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으나 몇 줄 날림 문구에 이다지 뭉클 댓글 꼬리를 무니 자연스레 생각나는, 불러보는 그 노래 -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들.
아, 봉선화도 그냥 봉선화가 아닌 물.봉.선.
형님의 뜨뜻한 시선이 더 뭉클하옵네다
곶감으로 응원합니다. 곧 달려갑니다. ^^
만사귀찬! 콕 처박혀있다가 끄응하고 기지게를 펴듯 공유버튼을 눌렀습니다. 온갖 모임으로 쓰린 속을 부여잡고 계실 님들께 해장이 될 듯 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