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시골 학교 축구부에서 뛰는 지극히 평범한 노력형 선수였다. 그러니 연령별 대표는 만무하고 도 대표, 시 대표도 한번 소집돼 본 적이 없었다. 2006년 전북현대에 입단하고 꾸준한 기회를 받으며 입단 첫해 A대표팀 소집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잊을 수 없는 대표팀 첫 선발
아직도 나는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여느 날과 똑같이 운동하던 10월 초였던가 자고 일어나니 엄청나게 전화와 문자가 와 있었다. 팀 선배들의 격한 축하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울며 전화를 걸어오신 어머니. 2006년 독일 월드컵을 마치고 새로운 얼굴을 찾고 있던 대표팀이 내 가능성을 봐줄 거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 조금은 두려울 정도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당시 대표팀은 대한민국을 붉게 물들였던 2002 한일월드컵에서 뛰었던 선수가 주축이었고,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거리응원을 하며 그 ‘스타’들을 스크린으로 봤었다.
그런 선수들과 내가 함께 그것도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한 팀으로 축구를 할 수 있다니... 그 순간은 현존하는 훈민정음으로는 표현이 어려울 정도였다. 축구화를 신고 뛰는 선수들의 근본적인 꿈은 모두 국가대표 아니겠는가 그렇게 연령별 대표도 한번 소집돼 본 적 없는 철저한 노력형 후천적 왼발잡이 선수에게 국가대표라는 타이틀은 꿈같은 일이었다. 2006년 10월 8일, 핌 베어백 감독은 가나전에서 나를 데뷔시켰다.
19번, 백업선수
프로에 오고 나서 거의 모든 경기에 팀에서 붙박이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왼발잡이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전술에, 내게 감독님들이 기대하는 장면들을 잘 만들어내곤 했다. 사실 감사하게도 주전 경쟁은 거의 해본 적이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나 대표팀은 달랐다. 해외파들이 모두 소집되는 경기에서는 주전으로 선수 입장을 해본 적이 많지 않다.
대표팀에서는 주전과 백업이라는 구분도 잊게 할 만큼 매 순간 배웠다. 축구를 기막히게 잘하는 선수들은 자기관리도 철저했고 모두가 겸손한 자세로 자신이 아닌 나라를 위해 뛰었다. 그런 선수들 사이에서 나는 주전이냐 후보냐를 떠나 모든 것들을 눈에 담고 느끼려고 했다. 대표팀 훈련은 그 어떤 훈련장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집중도와 의지가 높다. 주전은 아닐지라도 팀에 기여하는 선수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늘 대표팀에서 배우고 모든 순간을 감사히 여기며 최선을 다해 경기를 뛰고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