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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에서 4m짜리 '명상자(瞑想者)'라는 조각을 만들다 사다리에서 떨어졌습니다.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몰라요. 비장까지 떼어냈어요. 사고가 오후 5시 무렵 났는데 다음 날 아침까지 수술받지 못하면 죽는다고 했어요. 멕시코에는 혈액은행도 없었어요."
―큰일 날 뻔했군요.
"헌혈을 받아야 했는데 조건이 까다로웠어요. 술, 담배, 에이즈 검사를 다 통과해야 했거든요. 어찌어찌 수소문해 멕시코인 20명이 검사를 했어요. 그 중 조건에 맞는 사람이 딱 네 명이었습니다. 그들이 피를 많이 뽑았지요. 전 요즘 그래요. 제 몸엔 멕시코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재미있는 일도 있었어요. 수술하려 개복(開腹)을 했는데 제 내장이 30대처럼 깨끗하다는 거예요. 의사들이 비결이 뭐냐고 묻더군요. 홍삼(紅蔘) 많이 먹었다고 했지요. 나중에 의사들에게 홍삼을 보내줬는데 그렇게 보물처럼 애지중지했다는 얘길 들었어요."
―그런데도 공부는 잘했네요.
"서울중학에 진학하려 했는데 신체검사에서 탈락했어요. 그래서 휘문중으로 간 겁니다. 누님 한분이 경기여고, 서울대를 나오셨습니다. 경기고 진학을 권했는데 중학교 입시 때 같은 꼴이 될까봐 그냥 휘문고로 갔어요. 당시 휘문고에선 공부 좀 하는 학생들이 빠져나갈까 노심초사했거든요. 서울의대 입시는 뭐…."
―그 시절엔 장애인에 대한 시선이 지금보다 더 차가웠겠지요.
"신체검사 받을 때가 제일 괴로웠지요. 팬티만 입고 검사를 받는데 엉망인 몸이 다 드러났으니. 일률적인 사회였잖아요,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물(異物)처럼 취급받는. 그래도 휘문고 시절이 재미있었어요. 3년 내내 여름방학 때마다 무전(無錢)여행을 다녔으니까요. 밥도 굶고 고생도 했지만 추억이 됐어요. 강경철, 조원홍, 심흥우, 이중근 같은 친구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걷지도 못하는 절 데리고 다녔으니까요."
"…이원형의 작품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가 만들어낸 형태로부터 우리 안에서 꿈틀대는 영혼이라는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매우 서정적인 언어로 잃어버린 인간성 회복의 세계로 우릴 인도한다."(모건 프랫 인스티튜트 교수)
미술과 유학
―몸을 고쳐볼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요.
"외대 영어과에 진학한 뒤 6개월 만에 휴학했어요. 재수를 해볼까 하고. 그때 성모병원 정형외과 의사들이 최신 척추교정기술을 도입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가족들이 강제로 끌고가 입원을 시켰지요. 발목부터 목까지 석고를 대고 척추를 펴는데 3개월쯤 지나고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 기술이 입증이 된 게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수술이 잘 돼도 회복하는 데 2년이 걸린다기에."
―참지 그랬습니까.
"모르모트처럼 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에게 부탁해 병원에서 도망쳤지요. 친구가 사는 영종도로 가 두달을 숨어지냈어요."
―영어를 전공했는데 조각은 어떻게?
"복학한 뒤 인생관이 바뀌었어요. 한양대 건축과에 다니는 고교 동창이 '데생을 해야 하는데 학원에 여자가 많다. 혼자 가기 민망하니 같이 다니자'고 했어요.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 함께 다녔어요. 제게 권유했던 친구는 몇주 만에 그만두고 전 계속 그림을 그렸지요."
―외대 미술부를 선생께서 만들었다면서요.
"1968년에 복학했는데 미술부는 1년 뒤 만들었지요. 전국으로 스케치 여행도 다니고 국전(國展)에도 출품했는데 제목을 잘못 달아 떨어졌어요."
―무슨 제목이었기에.
"'인터코스(Intercourse)'라는 전위적인 작품이었는데, 그 단어가 예전엔 '섹스'와 동의어로 쓰였어요. 그렇지만 전 미술에 푹 빠져 있었어요. 대학 다니는 내내 '졸업하면 미국에 가서 미술을 하겠다'고 하고 다녔으니까요."
―페퍼다인대(大)였지요.
"미국에 가기 전 한국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었어요. 당시엔 유학시험을 통과해야 했어요. 시험에 붙은 후 서해안을 따라 울산까지 여행을 했어요. 페퍼다인대가 그리 유명한 대학은 아니었어요."
―미국에선 고생을 안했습니까.
"유학생들이 가져가는 외화 상한액이 200달러였어요. 당시엔 미국 대학에 등록한 뒤 관련 자료를 한국에 보내야 송금받을 수 있는 이상한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어요. 돈이 없으니 일단 흑인들이 사는 월세 30달러짜리 집을 잡고 아르바이트를 했지요."
―접시닦이였나요.
"당시 동아일보에서 LA에서 신문을 냈어요. 활자 뽑고 광고 디자인을 했어요. 시간당 2달러를 받았어요. 나중에 월급을 보니 세금을 다 제했더라고요. 유학생이 일하는 게 불법인데 왜 세금을 공제하느냐고 따졌지요. 그리고 '후임자가 올 때까지만 일하겠다'고 했더니 '필요없다. 지금 당장 나가라'고 하더군요."
―어머니가 미국에 있었다면서 도움은.
"어머니께 신세를 절대 안 지려 했어요. 두번째로 들어간 데가 '토마스 브라더스 맵'이라는 지도제작사였어요. 거기서 지도를 그렸지요."
―아르바이트를 굉장히 특이한 곳에서 했습니다.
"톰 트리포데스라고 어머니의 세번째 남편이 운영하던 회사였어요. 이른바 '빽'을 쓴 거지요."
―어머니가 결혼을 세번씩이나 했습니까.
"하하. 그분은 거부(巨富)였어요. 몇 년 전 돌아가셨지만. 지도회사 외에 공인회계사였고 지점(支店)이 스물아홉개나 되는 은행도 갖고 있었어요. 지도회사에선 아무도 톰과 저의 관계를 몰랐어요. 톰이 '한번 테스트해보고 쓸 만하면 고용하라'는 얘기밖에 안했거든요."
"그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의욕과 재능, 그리고 환상까지 지닌 뛰어난 작가였다. 신체적 결함을 극복하고 이겨낸 의지와 결심은 우리에게 하나의 교훈이 됐다. 그의 품성은 작품 속에서 빛을 발한다."(에디 파월·영국 큐레이터)
다시 캐나다로
―미국에서 다시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오티스라고 아주 유명한 미술대학원에 합격했는데 돈이 없었어요. 제가 수석졸업을 하자 모교인 페퍼다인대에서 강사 자리를 제의했어요. 좋은 기회다 싶었는데 월급의 80%를 주 정부에서 떼어가는 겁니다."
―그렇게나 많이요?
"유학생이 돈을 버는 건 법에 저촉됐으니까요. 처음엔 실망했지만 월급의 20%라도 받고 일하려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최저임금법에 걸렸어요. 법에서 정한 최저임금보다 적으니 일을 할 수 없게 된 겁니다. 결국 오티스 대학원을 포기했지요. 가난은 유학생활 내내 계속됐어요."
―얼마나 심했기에.
"1976년에 잠시 서울에 들어와 결혼을 했어요. 얼마 뒤 아내가 미국으로 따라왔는데 제가 살던 집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엉망이었어요. 밤에 문을 열러 나가면 발 밑에서 버석버석하는 바퀴벌레 밟히는 소리가 들렸어요. 저녁만 되면 바퀴벌레들이 줄 지어 집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매일 봤을 정도니까요."
―으이구!
"게다가 미술 한답시고 제가 보헤미안 같은 생활을 했어요. 10여명의 미국 친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집으로 쳐들어왔어요. 아내가 자다보면 옆에 남모르는 남자들이 술에 취해 누워있을 정도니 얼마나 견디기가 힘들었겠어요. 아무 때나 냉장고도 다 뒤지고, 대마초 피우고. 그런 일들이 겹쳐 캐나다로 떠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회화 얘기만 하고…, 조각은 언제부터 한 겁니까.
"회화를 하려 했는데 이상하게 그림은 한 점도 안 팔리는 거예요. 미술대에서 조각도 배웠는데 그건 만드는 족족 팔려나가는 겁니다. 어리둥절했어요. 제게 조각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거든요."
―캐나다에선 공인회계사가 됐지요.
"미국을 떠나면서 뭘로 돈을 벌어볼까 궁리했습니다. 어머니의 셋째 남편 톰을 떠올렸어요. 아! 공인회계사가 되면 부자가 되겠구나라고 생각한 거지요. 밴쿠버로 가 브리티시 컬럼비아대(UBC) 상과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공인회계사가 진짜 돈을 많이 법니까.
"UBC를 수석 졸업한 뒤 딜로이트라는 회계법인에서 3년간 인턴을 했어요. 당시 캐나다에는 공인회계사가 부족했습니다. 어느 회사든 공인회계사를 스카우트하려 했습니다. 인턴 마치고 토론토로 가 회계법인을 만들었어요."
―회계법인은 아직도 있나요.
"제 외대 후배가 파트너로 들어와 지금도 운영하고 있어요. 그 친구가 가끔 용돈을 보내주는 정돕니다."
―그런데 다시 미술병(病)이 도졌지요.
"낮에는 회계사무실에서 일하고 밤엔 스튜디오에서 작품을 했지요. 아내는 그런 저를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제가 그림에 막 빠져드니 옛 악몽이 떠올랐던 모양입니다. 아내는 교회생활을 열심히 했는데 전 교회를 멀리했고요."
―그렇다고 이혼합니까.
"1996년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나왔지요. 그 사람을 아이들 때문에 요즘도 가끔 보긴 해요. 큰딸은 토론토에서 그래픽디자인을 하고 있고 아들은 하버드 의대에 다닙니다."
―2002년에 존슨스테이트 칼리지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가 57셉니다.
"그 학교가 미국 버몬트주(州)에 있는데 1년에 두달만 합숙하면서 작업하고 월 1회 세미나에만 참석하면 되는 조건이었어요. 돈 벌면서 공부하기엔 딱이었죠. 그때 2주 동안 정말 깊은 고민을 했어요. 내가 왜 미술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하는 자기 확신 같은 게 필요했거든요.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렸지요. '하지 않으면 안되니까'라는."
"전 참선(參禪)을 합니다. 마음을 정돈하고 잡념을 버린 후엔 마음을 비우려는 그 생각 자체까지 버립니다. 보통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작업하는데 그 시간 동안 흐름을 깨트리지 않지요."(이원형이 말하는 '만남의 순간')
미켈란젤로와 로댕
―본격적으로 조각을 한 것도 그때부터지요?
"늦은 나이에 다시 미술을 시작하려니 집중이 필요했어요. '내가 피카소나 마티스 같은 색(色) 감각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나 로댕보다는 더 잘 만들 자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켈란젤로나 로댕보다?
"제가 조각에서 좋아하는 작가가 그 둘입니다. (다비드상에 대해 묻자) 그건 그리 생명력이 있는 조각은 아닙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은 오히려 시스틴 성당 벽화에서 찾아야 하고요. 로댕은 '생각하는 사람'이 유명하지만 진짜 걸작은 '칼레의 사람들'이라는 조각이지요."
―조각을 시작하자마자 두각을 나타냈습니까.
"존슨스테이트 칼리지에 다닐 때부터 잘 팔리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건 2007년입니다. 뉴욕에서 열린 아트 엑스포에 출품한 적이 있는 영국의 딜러와 미국 코네티컷주에 있는 딜러가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이런 것 물어보면 실례인 걸 알지만, 가격은?
"소품은 6500~7000달러 정도이고 1m가 조금 넘으면 1만5000달러쯤 합니다. 제일 비싼 건 1억쯤 되고. 전 다작(多作)을 해요. 1년에 50점 정도를 만드는데 청동(靑銅)은 에디션이 있잖아요. 에디션은 주물로 같은 작품을 여러 개 만들 수 있다는 뜻이지요. 보통 넘버가 10개 이하여야 예술작품으로 분류되는데 전 7개만 만듭니다. 그러니 1년에 작품 오십개를 만들어도 실제론 350개가 나오는 셈이지요."
―딜러와는 어떻게 배분합니까.
"두가지예요. 재료비, 운송비를 딜러가 다 부담하는 대신 50대50으로 나누거나 제가 재료비, 운송비를 내고 66대34로 나누거나. 비슷비슷합니다."
―작품을 보니 우뚝우뚝 서있는 형상이 많습니다. 머리는 작고 대신 하반신은 우람하고. 혹시 본인의 장애에 대한 한(恨) 같은 게?
"전 하체(下體)가 튼튼한 걸 좋아해요. 대신 두뇌는 그리 믿지 않습니다."
―작품 중에 시골 아낙네들을 형상화한 게 많더군요.
"언젠가 시골에서 아이에게 젖먹이는 아낙네를 본 적이 있어요. 가슴을 드러내지만 전혀 부끄럼을 타지 않는 모습에서 강한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게 '파머스 시리즈(Farmer's series)입니다. 요즘은 '카수라' 연작(連作)을 하고 있고요."
―'카수라'는 뭡니까.
"라틴어로 '자르다'라는 의미인데 그건 제가 존슨스테이트 칼리지에서 '드루즈 미학(Deleuzean Aesthetics)'을 전공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드루즈 미학이 당시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포스트 모더니즘이 쇠퇴하면서 지금은 주류가 됐어요."
―시간을 자른다?
"문 부장께서 오후 2시에 사무실에 있다 태양이 내리쬐는 밖으로 나오는 겁니다. 순간적이지만 시간 개념이 바뀌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드루즈 미학은 기존의 사상, 이론에서 탈피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 때 차이(差異)를 얘기하는데 그 차이는 '같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돈된 세상에서 벗어나면 '차이'가 '반복'되는 걸 느끼지요. 그게 핵심입니다. 작업실을 캐나다, 멕시코, 중국에 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환경이 바뀌면 새 영감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 수 있거든요."
―버몬트 아트 스튜디오 센터 이사, 캐나다 토론토 스쿨 오브 아트 이사, 네덜란드 국제조각협회 자문위원…, 직함이 참 많습니다.
"버몬트 아트 스튜디오는 매월 전 세계에서 50명의 예술가들을 초청해 한달간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면서 예술활동을 하도록 돕는 곳인데 16명의 이사 가운데 유색(有色)인종은 저 하나입니다. 제가 조각뿐 아니라 미학 강의도 하고 다녀요. 전 세계로."
―근데…, 어머니뿐 아니라 본인도 결혼을 세번이나 했네요? 이게 마지막인가요.
"나이 차이가 많아요. 스물네 살. 장인의 반대가 심할 줄 알았는데 딱 두 가지만 묻고 의외로 선선히 수락해주셨어요. '상대가 이 선생이냐?' '평생 마음 변하지 않고 살 자신있느냐'고. 장모는 장인이 설득해주셨고. 이번이 마지막이죠, 그럼."
남과 북, 미국과 캐나다, 이제는 캐나다, 멕시코, 중국을 오가며 이원형은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비 내리던 지난 18일 그를 촬영하러 경기도 용인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숨이 턱턱 막히는 질문을 당했을 때 당황했다"고 했다.
인적 드문 산중(山中)의 집에 그가 만든 한국 시골 아낙네 조각들이 놓여 있었다. 비에 젖은 청동 조각들이 그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헤이, 원리(Won Lee·이원형의 영어 이름)! 당신의 64×365는 무엇을 남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