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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8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루카 7,31-35
어리석음의 자녀와 지혜의 자녀
‘마리아 발토르타’의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는 제가 사제가 될 마음이 전혀 없었을 때 읽기 시작해 마칠 때쯤엔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해 준 책입니다.
그런데 신학교 들어갔더니 이 책은 거의 금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놓고 읽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전에 이불 속에서 랜턴을 비추며 몰래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유학을 가보니 로마에서 바티칸 방송국에서 어떤 사제가 이 책을 해설해주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때는 금서였지만 지금은 바티칸 방송국에서도 해설해주는 책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때 금서였다는 이유로 많은 분이 책 이름만 듣고 그것을 읽는 사람들을 안 좋은 눈으로 바라보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좀 지나친 듯 보이나 그런 분들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들과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우리는 좋은 책과 나쁜 책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좋은 가르침과 나쁜 가르침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열매가 그리스도께서 맺어주시려는 것과 같다면 그 책은 좋은 책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지혜와 좋은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분별력이 없었고 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집불통이었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제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행복의 기준이 ‘돈과 여자와 성공’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제가 될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났더니 그런 것들은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의 원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열매가 지혜의 기준이라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지 않은 것은 구약의 ‘광야’의 삶을 의미합니다.
광야의 삶이란 ‘돈과 여자와 성공’을 떠나는 삶입니다. ‘파라오’를 떠나는 삶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먹고 마신 빵과 포도주는 바로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먹고 마신 천상의 ‘양식과 음료’입니다.
광야에서 먹고 마실 것이 없다면 파라오가 제시하는 세속-육신-마귀를 벗어나는 삶은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파라오라는 자아를 떠나 삼구를 죽이는 광야의 삶을 당신이 주시는 살과 피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음이 곧 ‘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파라오가 나를 괴롭히는 뱀과 같은 자아임을 깨닫고 그를 떠나 광야로 나오게 하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의 삶을 사는 모든 이들은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이끄는 모든 것은 지혜를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주님은 그런 여러 도구를 통해 지혜의 자녀를 탄생시키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귀와 눈을 막고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기만 합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부분적인 기억력을 상실한 두 대비되는 환자가 나옵니다.
이 환자들은 어느 시간 이후의 기억이 모조리 삭제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기억도 1분만 지나면 다 사라집니다.
과거의 짧은 기억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삶은 매우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40대 중반이지만 딱 군대 있을 때까지만 기억합니다.
그러니 쾌활하고 젊었을 때의 삶을 계속 즐기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그때 신앙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미사에 참례합니다.
기억이 20대 초반에 머물러있지만, 자기중심이 명확히 잡혀 있습니다.
올리버 색스는 그 사람 안에는 영혼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또 한 사람은 기억이 사라져 버린 것을 사람들이 알아채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자아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식료품 주인으로 여기며 “어떤 치즈를 드릴까요?”라고 말하고 끊임없는 말을 해 댑니다.
아니면 가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냅니다.
물론 혼자 있을 때는 잠잠해집니다.
올리버 색스는 이 사람 안에는 영혼이 없는 듯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 다 기억력이 소멸하였지만 한 사람은 주님을 주인으로 따르는 삶을 살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을 주인으로 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주님을 주인으로 삼으니 정체성이 명확하고 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자아의 희생양이 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지혜의 자녀이고 한 사람은 어리석음의 자녀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카라바지오는 천재 화가였습니다.
그러나 자아에 지배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싸우기 일쑤였습니다. 이때마다 추기경은 그를 감옥에서 빼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추기경이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재능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여자 때문에 싸우다가 살인까지 하게 됩니다.
추기경은 더는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머지 인생을 나폴리와 말타섬에서 도망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다 후회하며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골리앗의 머리를 손으로 들고 있는 유명한 그림을 그립니다.
자신 안의 자아인 골리앗을 이제 죽였다는 뜻으로 추기경에게 용서를 빌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칼에는 “겸손이 교만을 죽인다”는 글을 새겨넣었습니다.
참 행복이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자아인 골리앗의 머리를 자르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그림을 추기경에게 전해주지 못하고 죽습니다.
어쨌든 그는 어리석음의 자녀에서 지혜의 자녀로 넘어오게 된 것입니다.
참 지혜는 교만한 자아를 죽이고 겸손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행복임을 아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를 파라오로부터 탈출시켜 광야로 이끌려고 하고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려 하십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주는 모든 것들은 지혜의 자녀가 탄생하게 하는 도구들입니다.
하지만 자아를 키우는 것들은 모두 악에서 오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음의 자녀가 아니라 지혜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18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7,31-35
낯선 이웃에게도 친절과 호의를 베풉시다!
다들 고향을 찾아 떠난 여유로운 시간, 근처 방파제로 고도리 낚시를 갔습니다.
시장표 판매용이 아닌 사이즈가 좀 작은 고등어를 고도리라고 하는데, 나름 손맛이 쏠쏠합니다.
만조 전후로 잘 잡히는데, 떼로 왔다 갔다 하다가 쑥 물고 들어가는데, 도착한 시간이 딱 타이밍이라 정신없이 잡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어린이들을 포함한 대가족이 낚시를 왔는데, 전혀 조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낚시꾼들은 다들 열심히 낚아 올리는데, 꽝 치고 있으니, 아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슬쩍 바라보니 바늘이며, 미끼며 전혀 아닌 도구들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입질 타이밍에도 불구하고 잠깐 낚시를 멈추었습니다.
찌도 달아주고, 바늘도 바꿔주고, 미끼도 잘게 잘라 끼워주었습니다.
즉시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싱싱한 고도리가 번쩍이며 올라오자 아이들은 탄성을 내질렀고, 드디어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었습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컫는 이유는 아무래도 인간이 지닌 이타적 성향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낯선 이웃에게도 친절과 호의를 베풀 줄 아는 그런 태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참인간은 자기라는 울타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돈 한 푼 나오지 않는 일이지만 이웃이 당하고 있는 부당한 현실 앞에 기꺼이 발 벗고 나섭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낯선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긴박한 상황에 처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위기 상황에 뛰어듭니다.
이웃이 겪고 있는 깊은 슬픔에 연민의 정을 느끼는가 하면 이웃의 아픔에 적극적으로 동참합니다.
오늘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 하나는 소통의 단절입니다.
인간 각자가 마치도 고립된 섬과도 같습니다.
같이 살아도 진정으로 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대화를 하고 있지만 진정한 대화가 아닙니다.
공감(共感)할 줄 안다는 것, 이 시대가 요청하는 참으로 큰 미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감의 능력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2)
인간관계 안에서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 냉담함입니다. 무표정입니다.
분위기 한번 반전시켜보려고 생쇼를 다해도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별의별 짓을 다 해도 그저 심드렁한 얼굴입니다.
온몸과 마음을 다해 극진한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저 소 닭 보듯 멀뚱멀뚱 쳐다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똑같은 체험을 하셨습니다.
그릇된 신앙, 왜곡된 논리에 젖어 허우적거리며 죽음의 길로 빠져들던 율법학자들, 두렵고 경직된 얼굴로 하루하루 두려움 속에 힘겹게 살아가던 바리사이들의 삶이 너무나 안타까우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선구자로 세례자 요한을 당신에 앞서 파견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새 출발을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자는 마귀 들렸다’며 거부합니다.
그리고는 참수형으로 몰고 갔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고대했던 메시아 예수님이 도래하셨습니다.
이분까지도 ‘먹보요 술꾼’이라며 거부합니다.
십자가형으로 몰고 갔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결정적 실수 그 배경에는 경직된 신앙이 있었습니다.
새로움을 죽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최고라는 뻣뻣한 목덜미가 있었습니다.
결국 따지고 보니 부드러움이 인류를 구원합니다. 편안함, 친절함, 편안함, 넉넉함, 통틀어서 호감이 새 세상을 건설합니다.
호감이 지닌 매력은 생명력입니다.
따뜻한 미소, 부드러운 음성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창출하는 호감 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런 사람은 존재 자체로 매일 이웃들에게 큼직한 선물을 건네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에너지를 건네는 사람이며 행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강론>
(2024. 9. 18. 수)
(루카 7,31-35)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루카 7,31-35).”
1) 그 당시 아이들은 장터에서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흉내 내면서 놀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라는 말은, “결혼식 놀이를 하자고 해도 싫다고 하고”이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는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해도 싫다고 한다.”이고,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회개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 세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도 거부하고,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거부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세대 사람들’은 당시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회개도 거부하고 복음도 거부하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이고, 당연히 오늘날의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2) 세례자 요한이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았다는 말씀은, 그의 ‘엄격한 극기고행’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 생활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라는 말은, ‘저자는 미쳤다.
정상이 아니다.’ 라는 뜻인데, 이 말은, 자기들이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가 미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요한 탓을 하는 말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라는 말씀은,
당신의 평소의 생활 모습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시 나게 극기고행을 하시지는 않았고, 사람들이 식사에 초대하면 언제든지 응하셨습니다.
<그러나 풍족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평소의 생활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루카 9,58) 아주 힘들고 고달픈 생활이었습니다.>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라는 말은, “예수는 예언자나 랍비다운 모습이 하나도 없는, 시정잡배 같은 사람이다.” 라고 비난하는 말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리 같은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것을 비난하는 말인데, ‘저자는 죄인이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하는 말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생활 모습이 전혀 예언자답지도 않고 랍비답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예수님 탓을 하는 말입니다.
3) 마태오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와 예수님의 복음 선포가 똑같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4,17).”
이렇게 표현은 똑같은데, 세례자 요한의 선포는 ‘회개’에 초점을 맞춘 선포이고, 예수님의 선포는
‘하늘나라’에 초점을 맞춘 선포입니다.
어떻든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 또는 회개해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두 선포의 공통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거부한 일과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거부한 일은, 둘 다 ‘회개’를 거부한 일이고, 사실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셔서 못 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들이 들어가기를 거부해서 안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들어가려고 하지 않으면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왜, 회개하기를 거부했을까?
사람들과 요한의 대화에서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 3,8).”,
즉 “온 삶으로 실행하는 회개를 하여라.” 라고 가르쳤을 때, 군중이 그에게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루카 3,10).
그때 요한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라고 대답했고,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군사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라고 말했습니다(루카 3,13-14).
요한의 말을 정리하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버려라.”이고, “기득권을 내려놓아라.”입니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누리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과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말에 거부감과 반감을 느꼈을 것이고, 회개하기를 거부했을 것입니다.
4) 오늘날에도 ‘회개’ 라는 말 자체를 듣기 싫어하는 이들이 있고, 회개할 죄가 없다고 자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 “가지고 있는 것들을 버려라.”, 또는 “내려놓아라.” 라는 말에 대해서 반감과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반발을 의식해서 회개하라는 말을 못하거나 안 하는 종교 지도자들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는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와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계속 살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한 번 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끊임없이 계속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