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6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요한 14,1-6
그리스도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만난 사람의 삶의 방식
금쪽같은 내새끼 116회에서 ‘게임 캐릭터가 죽자 동생의 머리채를 잡고 무섭게 돌변한 금쪽이,
심지어 주먹질까지?!’란 내용이 방영되었습니다. 금쪽이는 게임 캐릭터가 죽자 동생들을 심하게
괴롭힙니다.
그 캐릭터의 가치가 자신에겐 너무 큰 것입니다.
아이들이 서로 싸우고 때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싸움은 나의 귀한 것을 누군가 때문에 잃었다고
여길 때 일어납니다.
누가 나의 똥을 훔쳐 갔다면 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이 아이들은 게임 캐릭터가 자기 삶의 전부입니다.
왜 이렇게 집착하게 되었을까요? 어른으로 성장할 탈출구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숲에 있는데 뒤에서는 불이 나서 계속 내가 있는 곳으로 타고 있고 앞은 큰 강이 흐르는
수렁으로 막혀 있다고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불안하고 두려워서 숨을 곳을 찾게 되고 그 장소를 다른 사람이 노리고 있다면 싸움을 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 그 수렁 절벽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발견한다면 어떨까요?
그 자리 때문에 싸울 일은 없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곧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는 다리입니다.
진리란 말은 그 다리가 하나뿐이란 뜻이고, 생명이란 말은 그 다리를 건너지 못하면 죽음뿐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용서’가 그 생활 방식이 됩니다.
이 세상 것들이 모두 죽음과 관계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에사우로부터 도망칠 때 하늘로 오르는 계단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그 계단을 만나야 합니다.
위 금쪽이들의 이야기에서 금쪽이들의 다리는 바로 부모입니다.
부모는 아이들의 다리입니다.
그런데 그 다리가 휘청거려 아이들의 평화가 깨진다면 아이들은 아이들의 세상에 갇히고 맙니다.
형제끼리 싸우고 용서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위 아이들의 부모는 매일 싸우고 이혼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저희 집이 가난하다고 아이들 앞에서 인격적인 모욕을 하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을 좋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미워할까요? 저는 아이가 아닙니다.
제가 장난감 가지고 아이와 싸운다면 저는 아직 어른이 되는 다리를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두 주인공 중 하나는 군대를 제대해서 여자도 사귀며 결혼할 일을 생각하고 그 이전의 일은 다 잊었지만, 또 다른 하나는 평생 군인으로 살 것처럼 죄책감에 사로잡혀 결국엔 자살을 선택합니다.
파올로 코엘료 ‘연금술사’에서 현자는 행복을 배우려는 사람에게 기름 두 방울을 숟가락에 주며 쏟지 말고 성을 한 바퀴 돌면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성의 아름다운 것들에 정신이 팔려 숟가락의 기름이 쏟아지는 줄 몰랐습니다.
현자는 두 번째 기회를 줍니다.
그랬더니 두 번째는 기름에 주의를 더 기울이다가 주위의 것들은 그냥 스쳐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현자는 행복의 비법은 기름을 쏟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즐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현자는 그 사람에게 기름 두 방울을 주면서 그 사람이 이 세상 것들에 정신을 쏟을 존재가
아님을 알려준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은총과 진리라는 두 방울의
기름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집착할 존재가 아님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미워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진정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만났습니까?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26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복음: 요한 14,1-6
오늘 내가 걸어야 할 길은 어떤 길입니까?
젊은 시절 산을 자주 다녔습니다.
그것도 높고 험준한 산을. 한번은 산 정상에 올라갔다가 눈도 내리고 있고, 시간적 여유도 없고, 안전하게 올라온 길로 신속히 내려가는 게 상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객기가 발동했습니다.
내 사전에 올라온 길로 내려가는 법은 없다며 홀로 능선을 타고 다른 방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제 생각에 어느 정도 능선을 타고 가다 보면 머지않아 옆으로 빠져 내려가는 길이 있겠지 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가도 가도 능선만 이어졌습니다.
눈송이는 점점 더 커져 함박눈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어느새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순간, 이러다 얼어 죽겠구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 능선 타기를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길도 아닌 길고 긴 계곡을 타고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죽을 고생 끝에 동사 및 아사 일보 직전, 그것도 심야에 겨우겨우 한 민가에 도착했습니다.
기진맥진해 한 집 문을 두드리다가 간첩으로 오해받아 경위 조사까지 받고 귀가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길도 길이 아닌 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가지 말아야 할 길, 가면 ‘개고생’이 분명한 길, 멸망으로 가는 길, 인생 종치는 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네 인생에서 돈이나 명예, 권위나 자리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된 것은 아닌지요?
사실 돈이라는 것은 돌고 돈다 해서 돈이 아닌가요?
없다가도 생기는 것, 목돈 좀 손에 쥐었다 하면 어느새 손에 쥔 한 줌 모래알처럼 빠져 나가버리는 것이 돈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차지하게 되는 권한이나 직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히 그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맡겨진 임기가 채워지면,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 물려주고 내려와야 할 부초나 뜬구름같이 허망한 별 것 아닌 자리입니다.
오늘 내가 걸어야 할 길은 어떤 길입니까?
결국 우리가 선택할 최종적인 길, 진리와 생명의 길은 예수님께서 먼저 올라가셨던 길입니다.
정말 가기 싫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니 올라갔던 예루살렘 언덕길입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끔찍해서 생각하기도 싫은 길이었지만 아버지께서 계획하셨으니 올라갔던 골고타 언덕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4주간 금요일 강론>
(2024. 4. 26. 금)(요한 14,1-6)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 14,1-4).”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1) 이 말씀 바로 앞에는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는 예고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13,38).
그리고 그 앞의 21절에는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시는 말씀도 있습니다(요한 13,21).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거나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의 배반을 예고하는 말씀을 하시니까, 그들은 더욱더 두려워하고 의기소침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님의 구원 사업이 실패로 끝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심과 불안감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라는 말씀은, “지금 이런 상황 때문에 의심하거나
불안해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수난 예고 말씀을 하실 때마다 부활 예고 말씀도 하셨는데, 제자들은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들었고, 수난과 죽음 예고 말씀은 듣기 싫어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예고 말씀이 주는 충격이 너무 커서 그랬을 것입니다.>
2)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실패란 없다는 것을 믿어라.
또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려고 온 내가 하는 일도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뒤의 30절의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요한 14,30).”
적대자들과 박해자들은 예수님에게 아무 권한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막지 못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또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도 연결됩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저승의 세력’은 ‘악의 세력’일 수도 있고 ‘죽음의 세력’일 수도 있는데, 어떤 세력이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쓰러뜨릴 수 있는 세력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과 예수님의 힘은 세상의 그 어떤 세력보다 강하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의심과 불안감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인류 구원 사업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왜 꼭 그런 과정을 거쳐야 했는가? 그냥 처음부터 부활로 직행하면 안 되는 것이었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모릅니다.
모르니까 ‘파스카의 신비’ 라고 표현합니다.
‘신비’ 라는 말은, 인간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파스카의 신비’ 라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가리키는 말이고, 그 일들은 사실상 하나의 사건이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일이었고, 그 일들을 통해서 인류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하느님의 섭리’ 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섭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하느님은 ‘악’에서도 ‘선’을 만들어내시는 분입니다.
‘악’이 하느님의 뜻은 아닌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거스르는 ‘악마저도’ 당신의 뜻을(선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 모든 과정과 결과를 ‘하느님의 섭리’ 라고 표현합니다.
4)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자격을 갖추기만 한다면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나라다.” 라는 뜻입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활동의 끝’이 아니라, ‘한 과정’이라는 것을, 즉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기 위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다시 와서”는, 여기서는 재림이 아니라 부활을 뜻합니다.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라는 말씀은, ‘부활 후의 현존’을 뜻하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아야 하고, 나를 따라야 한다.”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당신만이 유일한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고, 흔들리지 말고 당신만 믿으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의심과 불안’은 믿음을 흔들어대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믿음이 흔들릴 때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면서, 더욱 굳게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