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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6.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묵상글 ( 10/05. 21:50, 04:55, 05:40.)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2시반 이전 > : 고인현 신부님.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10/05. 21:50.)
2차 공유할 묵상글< 04시 ~ 05시반, 07시 이후 > : 호명환 신부님.: 04:55 추가
< 김찬선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05:40 추가. >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8월 15일 이후에도 당분간 현재와 같이 운영*하며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인계, 인수는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위 사항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는 11월 대림시기(11/29) 부터는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하고, 카페의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키고, 적당한 때(2027년 상반기 또는 그 이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 * 위에 따르며 가능하면 1차 공유는 전일 22시반 전까지 2차 공유는 04시- 05시반까지, 안되면 07시쯤(이후) 할 계획입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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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당신의 아드님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1,13-24)
형제 여러분 13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14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
15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16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17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18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19 그러나 다른 사도는 아무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만 보았을 뿐입니다.
20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글은 하느님 앞에서 말합니다만 거짓이 아닙니다.
21 그 뒤에 나는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22 그래서 나는 유다에 있는 그리스도의 여러 교회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3 그들은 “한때 우리를 박해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자기가 한때 그렇게 없애 버리려고 하던 믿음을 전한다.”는 소문만 듣고 있었습니다.
24 그리고 그들은 나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복음<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10,38-42)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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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6.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585995
2026.10.05 21:23
2026년 10월 6일 화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0,38-42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드십니다.
마르타는 귀한 손님을 ‘모셔 들이고’ 정성껏 시중을 듭니다.
―이 환대는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어제 사마리아인처럼).―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르타가 ‘분주함’에 지쳐 불평합니다.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그 말에는 ‘혼자’, ‘내버려 두는데도’ 하는
외로움과 서운함이 배어 있습니다.
마르타는 주님을 ‘모셔 들였지만’, 어느새 주님은 잊은 채
‘일’이 마음의 중심이 되어 일에 끌려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나무람이 아니라 다정한 부르심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이름을 두 번 부르시는 것은
깊은 애정의 표시입니다. 먼저 그 마음을 가라앉혀 주십니다.
그러고는 마르타가 ‘자기 상태’를 보게 하십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리고 방향을 일러 주십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말씀처럼, 이것은
‘활동적인 삶이나 친절한 환대를 폄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참으로 필요한 한 가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 를
일깨우시는 간곡한 호소입니다.
말씀을 듣는 그 순간,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다른 모든 것은 지나가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하며,
우리의 온갖 활동에 ‘참된 의미’를 부어 줍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옳고 마르타가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들음과 행함, 관상과 활동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다만 ‘순서’가 있습니다.
행함이 빠진 들음은 허공의 구름을 쫓기 쉽고,
들음이 빠진 행함은 자기를 드러내는 분주함에 그치기 쉽습니다.
어제의 ‘사마리아인(행함)’과 오늘의 ‘마리아(들음)’는
이렇게 한 몸입니다. 먼저 발치에 앉아 들은 사랑이,
가서 손수 돌보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 열매 성월의 눈으로 보면
여기서 ‘절제’의 열매가 깊어집니다.
절제란 ‘많은 것’에 흩어져 끌려다니지 않고,
‘필요한 한 가지’를 고요히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걱정 많은 마르타의 분주함이 아니라,
발치에 앉은 마리아의 ‘한 가지’가 성령의 열매(평화)입니다.
성 대 바실리오가 수도 생활에서 가르쳤듯,
모든 참된 활동은 ‘그분 곁에 머무름’에서 흘러나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며’ 끌려다니지 않는가?
나는 주님을 ‘모셔 들이고도’ 정작 그분은 잊고 있지 않은가?
나는 ‘필요한 한 가지’를 날마다 선택하고 있는가?
나의 행함은 ‘발치에 앉아 들은 사랑’에서 흘러나오는가?
주님,
많은 걱정에 끌려다니지 않게 하소서.
먼저 당신 발치에 앉아 ‘필요한 한 가지’를 택하게 하시고,
그 들음에서 참된 행함이 흘러나오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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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6.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74?boardtype=L&referrerAllArticles=true
2026.10.06. 04:25
자연과 우리의 연결됨을 재발견합시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자연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성사이며, 하느님 눈에 보이는 은총의 표징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프란치스코와 자연의 세계
자연과 우리의 연결됨을 재발견합시다!
2026년 10월 5일 월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그리스도교가 역사 속에서 자연 세계를 은총과 하느님 현존의 자리로 인식하는 감각을 잃어버린 과정을 성찰합니다:
세상의 성사적 본성은 오랫동안 잊혀져 왔으나, 근래에 이르러 우리가 흔히 "세속적"이라 부르는 자연의 신비가들, 시인들, 예술가들—예컨대 시애틀 추장, 존 뮤어, 레이첼 카슨, 월트 휘트먼, 웬델 베리, 애니 딜라드 등—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성물을 성패, 축복받은 초, 성수와 같은 것들로만 한정해 버렸습니다. 사실 그것들을 이루는 광석과 밀랍, 물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거룩함을 담고 있음을 존중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점을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1]
우리는 교회의 공식 성사를 일곱 가지로 제한했습니다(여성에게는 성품성사를 제외하여 여섯 가지). 그러나 탄자니아에서 한 노인이 제게 말하길, "성사는 칠백 가지쯤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느님의 세상을 성스러움에서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이교도" 혹은 "애니미스트"(정령 숭배자)라 불렀던 이들은 오히려 우리보다 앞서 있었는데, 그들은 적어도 세상을 영으로 가득 찬 자리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의 세계는 텅 비고 낯설며, 영혼을 위로하는 자연의 향유를 잃어버렸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야생"은 늘 나쁘고, "길들여진 것"은 늘 좋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C.S. 루이스는 하느님을 사자 아슬란의 모습으로 묘사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은 야생적이십니다, 알지요!" 길들여진다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종속됨을 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세계보다 우리의 세계를 더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대부분 동안 우리는 성스러움이 사라지고 작고 외로운 우주 안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곳에는 인간이나 그리스도교적이지 않은 것들 안에 자연스러운 거룩함이나 본래적 선함이 존재하지 않는 듯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께서 단지 인간 영혼만이 아니라 "세상의 구세주"(요한 4,42)이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 외로움을 책과 사상으로 채우려 했습니다. 위와 아래의 세계가 지루하고 단순히 기능적이며, 우리가 원하는 예측 가능성에만 종속된 것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미를 단지 정신적인 차원에서만 붙잡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우리 곁에,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방식으로 가득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발 딛고 선 땅에 입 맞추지 못하고, 오히려 하늘로 날아가려 했습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지각의 첫 단계는 외적이고 물질적인 대상에 향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단계에서 존중과 사랑으로 바라볼 때에만, 우리는 두 번째와 세 번째 단계의 온전한 영적 시야로 '오를' 수 있습니다. [2]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께서 '형상 속으로 들어가심으로써 에너지를 잃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가르쳤니다. 신시아 부르조가 힘주어 말하듯, 참된 초월은 오히려 내재성과 물질성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3] 얼마나 놀라운 깨달음입니까!
우리 대부분은 플라톤주의적 사고에 길들여져, 몸과 영혼을 서로 적대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성육신적 신앙은 몸과 영혼을 벗과 같이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육화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모든 곳, 모든 순간입니다. 그것은 소위 성스러운 장소나 특별히 "교회적"이고 "종교적"이라 불리는 곳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항상 기도해야 한다"(1테살 5,17)고 자신 있게 권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는 제 삶의 전반기와 후반기에 깊이 울림을 주는 인물들입니다. 그들의 단순함에 대한 가르침과 자연을 ‘첫 번째 성경’으로 이해하는 통찰은 제가 하느님과 더욱 깊은 친밀함으로 나아가는 길을 인도해 주었습니다.
—Drake S.
Reference
[1] A classic definition of a sacrament is "an outward, visible sign of an inward, invisible grace.” Read more about the sacramental nature of reality in this Daily Meditation.
[2] Bonaventure, The Soul’s Journey into God, The Tree of Life, The Life of St. Francis, Ewert Cousins, trans. (Paulist Press, 1978).
[3] Cynthia Bourgeault, The Holy Trinity and the Law of Three: Discovering the Radical Truth at the Heart of Christianity (Shambhala, 2013), 72.
Adapted from Richard Rohr, Eager to Love: The Alternative Way of Francis of Assisi (Franciscan Media, 2024), 50–5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창조의 신비는 우리가 잠시 멈추어 아주 작은 것, 이를테면 한 줄기 풀잎 위에 맺힌 이슬을 바라볼 때 가장 깊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마치 하느님께서 피조물 안에 숨겨 두신 은총의 흔적을 발견하는 순간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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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6.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06 05:34
- 기도 사랑과 활동 사랑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루카 복음에만 있는 오늘 얘기는 두 가지 생활 양식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으로 우리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해해왔습니다.
그것은 잘 아시다시피 활동과 관상
곧 마르타의 활동 수도회 생활과 마리아의 관상수도회 생활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 어떤 생활이 더 중요하고 나은 생활이라고 하지 않고
둘 다 중요하고 둘 다 우리에게 필요한 생활이라고 교회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고 한 것이
반대로 마르타가 택한 것은 나쁜 몫이라고 이해해선 안 되지요.
다만 마르타가 마리아의 삶의 자세를 한 몫으로 여기지 않는,
더 나아가 좋은 몫이라고 여기지 않는 마르타의 활동 중심의
생각이 옳지 않은 생각이라고 교정해주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르타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나무람인 것 같지만 실은 가르침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마르타가 너무 많은 일을 한다고 지적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지 않고 염려와 걱정으로 하는 것에 대한 지적하시는 겁니다.
사실 그럴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면 염려와 걱정으로 하지 않을 것이고,
사랑으로 하고 염려와 걱정으로 하지 않으면 많이 할수록 좋지요,
사랑으로 하면 많이 일하는데도 지치지 않고,
더 나아가 불만이 생길 리 없고 그래서 불만하지도 않겠지요.
어쨌거나 교회 안에서 두 가지는 각기 다 좋은 몫이고,
내 안에서도 관상과 활동,
기도 사랑과 활동 사랑이 조화를 이루면 참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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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6.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75?referrerAllArticles=true
하느님의 숨
2026.10.06. 05:21
삶으로 결실을 맺는 관상!~~~
세기를 거치면서 많은 많은 주석들이 두 자매에 대해 쓰여졌는데, 대부분은 마리아를 더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8)는 마르타를 마리아보다 더 높이 여겼습니다. 마리아는 가장 좋은 몫을 택한 것으로 칭송받았지만, 에크하르트는 마르타의 삶 또한 매우 큰 유익을 주었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마르타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을 직접 섬기는 봉사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곧, 그녀의 활동은 사랑으로 드러난 신앙의 실천이었고, 이는 공동체 전체에 은총을 흘려보내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혼합된 삶"—곧 활동과 관상을 결합한 삶—이 순수한 관상만의 삶보다 더 나은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활동 안에서 우리는 관상 속에서 체험한 것을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흘려보내기 때문입니다.
같은 논리로 이야기하자면, 성모님의 모성은 사실 동정성보다 더 우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성에는 그 결실인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삶으로 결실을 맺는 관상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관상은 삶으로 결실을 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마르타가 마리아에 대해 예수님께 불만을 털어놓지 않고 그냥 자기 일을 하는 데 집중했다면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겠지요?!
사실 요한 복음 저자는 마르타의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고백을 강조하여 전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이 믿음의 고백 전에 요한 복음 저자는 라자로의 죽음과 되살아남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있었다."라고요.
마르타는 생각한 것은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다는 뜻이겠지요... 물론 요한 복음 저자가 어떤 의도로 이런 표현을 썼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요한 복음 저자는 마르타의 행동하는 믿음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14세기의 『무지의 구름』이라는 책에는 관상적 삶을 더 높이 평가하면서도 활동적 삶을 그것에 필수적인 것이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거룩한 교회 안에는 두 가지 삶의 길이 있다. 하나는 활동적 삶이고, 다른 하나는 관상적 삶이다. 활동적 삶은 낮은 것이고, 관상적 삶은 높은 것이다. 그런데 활동적 삶에도 상위와 하위가 있고, 관상적 삶에도 하위와 상위가 있다. 이 두 삶의 길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다르지만 서로에게 의존한다. 활동적 삶의 상위 부분은 곧 관상적 삶의 하위 부분과 같다. 온전히 활동적이 되려면 부분적으로 관상적이어야 하고, 온전히 관상적이 되려면(적어도 이 땅에서는) 부분적으로 활동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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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5.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5991
2026.10.05 20:28
축시 전주지구형제회 설립 50주년을 경축하며
형제들이여, 다시 시작합시다.
오십 년의 시간이
오늘 우리 앞에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납니다.
그러나 이 꽃 한 송이가 피기까지
얼마나 많은 계절이 지나갔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름 없이 씨앗이 되었는지,
얼마나 많은 기다림과 그리움과 기도가
이 땅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렸는지
우리는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오십 년을 넘어 새로 맞게 될 오십년 앞에서
성 프란치스코가 생의 마지막 자리에서 형제들에게 남긴
그 간절한 당부를 다시 듣습니다.
“형제들이여, 이제 다시 시작합시다.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평생 복음을 살았던 사람이
마지막에 남긴 말은
“이제 다 이루었다.”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시작하자는 말이었습니다.
그에게 복음은 한 번 선택하고 완성하는 길이 아니라
날마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회개란 어제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다시 주님께 얼굴을 돌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십 주년을 맞는 이 시간이
우리 성소의 뿌리와 복음적 삶의 기초를 돌아보는
회상의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형제회 한국관구의 성장과 변화 과정 안에서
노송동에서 시작한 본당 사목이 전주교구로 이양되고
작은형제들이 떠나면서 재속프란치스코회 형제자매들은
긴 시간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때로는 목자 없는 양처럼 느껴지는 세월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움이 부족한 시간에도 성령께서는 형제회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누군가는 모임을 지켰고,
누군가는 기도를 이어갔으며,
누군가는 새로 들어온 형제자매의 손을 잡았고,
누군가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형제회의 작은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오늘의 오십 년은 바로 그 이름 없는 충실함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의 희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팔백 년 전 포르치운쿨라 곁에서
알몸으로 땅 위에 누워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자매인 죽음을 맞이했던 사부님처럼
우리도 따르고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희망의 불을 지피게 되었습니다.
재속프란치스코회의 자리는
바로 그 세상 한가운데입니다.
가정이 우리의 수도원이고,
직장이 우리의 선교지이며,
시장과 골목과 이웃이
우리가 복음을 살아야 할 자리입니다.
외로운 이에게 다가가는 한 걸음,
상처받은 이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한 시간,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먼저 내미는 손,
가난한 이의 곁에 머무는 작은 선택,
상처 입은 피조물을 돌보는 소박한 실천이
오늘 우리가 세상 속에 쓰는
프란치스칸 복음서입니다.
우리가 50년의 역사를 기초삼아
복음의 씨앗으로,
형제성의 씨앗으로,
평화와 화해의 씨앗으로,
가난한 이들과 모든 피조물을 품는
작음과 겸손의 씨앗으로,
관계 안에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흐르게 할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려는 마음으로
우리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다가갑시다.
아직 사랑해야 할 사람이 남아 있고,
아직 용서해야 할 사람이 남아 있으며,
아직 찾아가야 할 가난한 이들이 있고,
아직 화해해야 할 관계가 있고,
아직 세상에 심어야 할 평화가 있습니다.
오십 년을 넘어 새로운 오십 년을 향하여,
사부 성 프란치스코가 걸었던
그 가난하고 아름다운 길을 따라,
오늘, 여기에서, 다시 시작합시다.
주님!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상호간에 자신을 내어주시는 삼위의 하느님으로부터
내어주는 사랑을 배우고
관계 안에 선이 흐르도록
자신의 자유를 주님의 손에 내어맡기면서
도구적 존재로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우리의 생각을 뒤집고,
우리의 움켜쥔 손을 펴게 하며,
가난한 이에게로 내려가게 하는
살아 있는 복음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주님!
‘다시 형제성으로.’돌아가게 하소서.
나와 다른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관계 안에서 필요성을 채우며
견디고 기다려 주는 마음으로
형제성이 꽃피게 하소서.
주님!
‘저희가 다시 세상 속으로.’들어가게 하소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셨듯이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을 길 위로 파견하였듯이
세상 안에서 복음을 발생시킬 수 있도록
사람들이 살아가는 관계의 현장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갈등과 상처가 있는 곳으로,
평화가 필요한 곳에서
평화의 도구로 살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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