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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택하신 하나님
살후 2:13-17
13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14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5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살후 2:13-17 / [구원에 대한 감사] 주님의 사랑을 받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택해 주시고, 또한 성령의 역사와 진리를 굳게 믿게 하시고 여러분을 성결케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14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누어 주시려고 여러분을 초청하셨습니다. 15)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고 굳게 서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편지로나 함께 있을 때 가르친 진리를 굳게 간직하십시오.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또 우리를 사랑하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자들에게 영원한 위로와 희망을 내리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17) 여러분을 위로하고 여러분이 말과 행동으로 선을 나타내도록 도와주시기를 빕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주님의 사랑을 받는 대상이며, 그들로 인해 자신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13-14) 바울이 감사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구원 받을 수 있도록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선택은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베푸신 은혜입니다. 선택하심을 받지 못하면 복음을 믿지도 못합니다. 중생과 신앙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은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중생하고 신앙이 있는 자라면 영원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사람들만 구원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선택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도록 만듭니다.
바울의 권면과 기도(15-17)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부르심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형제들을 돌아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소망해야 했습니다. 바울은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서야 한다고 권면하며 말로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대로 전통을 지키라고 합니다. 그 전통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교회가 만들어 전해 내려오는 어떤 규율을 가리키지 않고 바울과 일행이 가르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강건해져야 할 필요성이 있었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격려와 힘을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이 세상의 시련에 봉착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위로의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장래에 대한 소망도 주십니다. 바울은 두 가지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잘못된 지식으로 고민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또 하나는 모든 선한 일과 복음을 변명하고 확정하기 위해 하는 모든 말에 그들을 강하고 굳건하게 해 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기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격려와 힘을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적용: 당신은 무언가를 이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구원하여 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며 살고 계십니까?
인간은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토기를 빚은 것과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임을 성경은 확실하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사 영원한 새 생명을 약속하시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신 큰 은혜를 깨닫지 못함으로 이에 대한 감사를 잊고 삽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받고 있는 존재임을 깨달을 때에 감사와 찬송이 가득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 설 교 >
사도 바울의 감사와 권면과 기도
데살로니가후서 2:13-17 / 이상철 목사
이제 2018년도 한주 남았다. 세월이 참 빠르다. 그러면서 연말이 찾아올때마다 참 바쁘다. 몸도 바쁘지만 마음도 바쁘고 또 분주해 지는 것을 보게된다. 연말이 찾아오면 많은 연말 회식자리와 뱅큇모임을 참석하면서 정말 바쁘게 우리가 연말을 맞이하는 것을 보게 된다. 또 그동안 연락하지 못해던 지인들에게 카드를 보내기 위해서 준비하고 또 준비한 선물들을 주고 받는 그런 분주한 연말을 보내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런 분주한 연말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정말 놓치지 말아야 하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지난 일년동안에 나의 신앙생활과 믿음생활을 뒤돌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던 그 순간들을 기억하며 지금도 또한 이 시간에도 변함없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이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 사도바울도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을 생각할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였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나서 새롭게 하나님의 자녀로 세움을 받는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인내의 소망으로 성장하는 그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사도바울 마음속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있는 것이다.
비록 지금도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지만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며 감사의 시간을 드리고 있는 장면이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이다. 특별히 우리가 읽은 말씀을 자세히 살표 보면 세가지의 주제를 담고 있다. 세가지의 중요한 메세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성도와 교회를 바라보면서 사도바울의 감사, 사도바울의 권면, 사도바울의 기도, 이 세가지의 주제를 담고있다. 함께 이 아침에 살표보며 은혜를 나누기를 원한다.
1. 사도바울의 감사(데살로니가후서 2:13-14)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성도들이 구원받은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본문의 말씀 두 구절을 자세히 살표보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셨는지에 대한 구원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사도바울이 다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본문의 말씀을 살표봐라. 13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들을 택하셨다.’ 라고 말하고 있다. 아무 공로가 없고 자랑할 것이 없는 연약한 데살로니가성도들을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14절 말씀에는 ‘복음으로 너희들을 부르셨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백성을 전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직접부르셨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13절 말씀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다.’ 선택과 부르심 가운데 우리의 영혼에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예수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고백하게 하셨다라고 말씀하신다. 13절 말씀에 ‘성령의 거룩하심’ 이 거룩한 과정, 성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것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신다는 것이다.
13절 말씀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장차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때에 그 날에는 예수님께서 이미 가지신 그 놀라우신 영광이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할것이다라고 약속하신 말씀을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을 마음에 품고 감사의 고백을 할때 사도바울의 감사의 내용을 그들의 자녀들이 일이 잘 풀리고 좋은 직장을 갖게되고 비지니스가 정말 잘되고 육신이 강건하고 매일매일 삶가운데 필요한 것들이 채워지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진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양적으로 성장하고 출석성도가 늘어나고 또 많은 헌신자들을 통해서 헌금이 늘어나고 있다고 감사하는 내용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이 내용으로도 감사할 수 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감사는 아주 영적인 것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임한 영원한 영적인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가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믿음과 신앙이 그들의 삶의 기초가 된것이 너무나 감사한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바라볼때마다 여러분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인내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한다고 여러분들이 기억하실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구원하시고 장차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되는 약속을 받은 것이 사도바울이 보기에는 너무나 감사한 내용이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영원한 은혜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 이 자리에 나와있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의 감사의 고백이 되시길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일년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 매일매일 이 땅에서의 삶에 필요한것들을 공급해 주신것은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것이다.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일매일 필요한 삶의 건강과 또한 물질과 관계와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많은 것들을 공급해 주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의 시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세움을 받는 구원의 은혜와 영원한 은혜를 통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될것이다.
우리가 이 아침에 주앞에 기도하기 위해서 나왔다. 저는 바라기는 분주한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번 주 앞에 정돈하며 지난 한해 동안 우리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 우리에게 영원한 은혜, 영원한 생명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순간순간마다 우리를 보호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고 지금도 함께 하신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먼저 올려드리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님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바울의 권면
사도바울의 권면의 말씀을 간단히 살표보면 믿음 위에 굳건하게 서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키라는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당시에 데살로니가 교회에 처한 환경을 보면 이 세 가지의 아주 무겁고 힘든 고난의 광풍을 맞게 있었다.
1)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의 직접적인 신앙의 박해가 있었다.
2) 교회안에서의 거짓가르침으로 인해서 적지않은 성도들의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3) 많은 영적인 유혹들이 교회 안에 있었다.
이런 상황가운데 데살로니가 교회에 사도바울은 두 가지의 교훈의 말씀을 주고 있다. 두 가지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굳건하게 서라! 전통을 지켜라!’
(1) 굳건하게 서라!
여기서 말하는 ‘굳건하게 서라!’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붙잡고 담대하게 서라는 것이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믿음에 대해서 다시 한번 묵상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어떠한 것인가? 어떤 믿음을 우리에게 주셨는가? 우리가 함께 가지고 있는 그 믿음을 세상을 이길수 있는 믿음이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다. 한 순간에 있다가 없어지는 믿음이 아니다. 그냥 만질수 없고 볼 수 없는 그냥 추상적인 믿음으로 끝나는 그냥 입술의 고백으로 끝나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가지고 있는 믿음은 실제적인 믿음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의 대상이 누구신가? 이 땅에 오셔서 구원자의 역사를 이루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실제적인 예수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이 땅에 살아갈때 때로는 실표한것 같이 보이고 때로는 넘어지는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그 믿음을 통해서 날마다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시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그 믿음을 붙잡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2) 전통을 지켜라!
사도바울이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전통을 지켜라! 여기서 말하는 전통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바울과 사도들을 통해서 받은 편지와 가르침, 또 복음의 진리를 힘써 지키라는 말씀이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스스로에게 두 가지의 질문을 던져봤다. 나는 지난 일년동안 최선을 다하여 믿음을 붙잡고 사는 인생이었는가? 아니면 세상과 환경과 사람을 붙잡고 사는 인생이었는가? 나의 믿음의 생활을 뒤돌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두번째 질문을 던져 보았다. 나는 지난 일년동안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키는 인생으로 살아왔는가? 아니면 복음을 지켜보는 인생으로 살아왔는가? 복음을 지키는 인생과 복음을 지켜보는 인생, 사실 큰 차이가 있다. 서로 다른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정말 그 복음안에 거하는 인생으로 살았는가? 아니면 알기는 아는데 복음과 2미터 3미터 떨어져서 지켜만 보고 있었던 인생이었는가? 이 질문을 통해서 저는 저의 연약한, 연약했던 믿음생활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연말에 일년의 시간을 돌아보면서 다시한번 결단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에게 준 이 권면의 말씀이 저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자리에 나와 있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는 것 같이 믿음안에 굳건하게 서며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지켜나가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바울의 기도
(데살로니가후서 2: 16,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멘!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실때 이 두가지의 제목을 놓고 기도했다.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길 기도한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원한 위로는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세상사람들이 얘기하는 일반적인 위로와 다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위로는 예수님으로 부터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의 몸으로 오시어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의 죄와 사망의 권세에 묶여있는 우리의 삶을,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신 그 구원의 은혜로 부터 시작된 것인 영적인 위로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위로는 예수님으로 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만이 주실수 있는 참된 위로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있다. 자 이러한 영원한 위로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임하길 사도바울이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가지 기도한다. ‘소망한다’라고 기도한다. 보통 사람들은 우리가 ‘소망한다.’ 소망을 갖고 있다라고 이야기할때 때로는 그 소망이 이루어 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루어 지지 않을때도 있다. 본문에서 말하는 사도바울이 말하는 좋은 소망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면 그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통해서 주시는 모든 약속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소망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고 얻지 못할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이 좋은 소망은 분명하게 그 약속들이 성취되고 이루어 진다는 것을 사도바울은 강조하고 있다.
세상에는 소망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소망이 있다. 세상의 가치와 지식에는 소망이 없다. 그러나 생명의 말씀되시는 예수그리스도와 성경말씀안에는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으로 인해서 더욱 더 강하게 세워지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의 개인의 삶과 가정에 예수님으로 부터 시작된 영원한 위로와 반드시 이루어지는 지는 좋은 소망이 충만하게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살표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보통 우리가 일년, 쭉 살다보면 타주에 있는 가족들과 함께 모이는 시간이 연말이라는 생각이든다. 아마 이번 성탄절을 기점으로 또 송구영신예배때에 가족들이 많이 모이실것이다. 아마 여기 계시는 분들은 그래도 하나님앞에 기도하시는 분들이라고 믿는다. 어떤 축복의 말씀, 어떤 축복의 기도를 그 자녀와 가족과 부모님들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가?
사도 바울이 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바라볼때 마다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을 통해서 고백하는 이 기도의 내용이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나눌 축복의 기도의 내용이 되길 소원한다. 사랑하는 자녀들, 가족들을 바라보면서 함께 축복의 시간을 나누시길 바란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시는 영원한 위로, 분명하게 이루어 지고 성취되는 좋은 소망들이 우리 모든 가정에게 임하길 소원합니다라고 함께 축복할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여러분들의 삶과 가정에 임할줄 믿는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마음에 품고 생각할때 마다 마음에 뜨거움이 있었다. 감동이 있었다. 소망이 있엇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은혜를 붙잡고 계속해서 전진해 나갈때 그들의 신앙이 난로 난로 성장하고 성숙해 지길 원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오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바울과 같이 우리의 지난 과거의 시간을 뒤돌아보면서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하며 앞으로도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성장하길 원하는 그 마음을 갖고 다시 한번 주앞에 나아가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올려드리며 결단하는 귀한 기도의 시간, 귀한 아침되시길 다시한번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올 축원합니다.
기도
올 한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니님! 나의 삶가운데 그렇게 어려웠던 순간에 함께 하신 하나님!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할때 나의 인생의 방향을 인도하신 그 하나님, 홀로 서있는 것 같은 그 외로움 가운데서도 나를 위로하시고 함께 하신 그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의 삶을 이끌어 가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감사의 조건
살후 2:13-17 / 박종순 목사
객관적으로 볼 때 감사할 조건이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사할 조건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사할 조건이 많으면서 전혀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사할 조건이 없는데도 조건을 찾아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데반, 베드로, 바울, 디모데 등 하나님의 사람들은 감사할 이유가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사의 조건을 찾고 만들어 감사했습니다.
그 가운데 바울 사도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시쳇말로 빈털터리 인생이었습니다. 율법교사도 포기했고, 결혼도 포기했고, 성공도 다 포기했습니다. 건강도 좋지 않았습니다. 생활도 가난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입 열 때마다 강조한 것은 감사였습니다. 감사란 찾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원망이나 불평도 찾으면 얼마든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감사 쪽으로 눈을 돌리면 감사가 보이고 불평 쪽으로 눈을 돌리면 불평이 보입니다.
감사와 불평은 공존합니다. 그 거리가 아주 가깝습니다. 바라보면 감사, 뒤짚으면 불평, 그래서 손바닥의 양면과 같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불평은 사탄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번도 불평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습니다. 감사와 불평은 그 결과가 전혀 다릅니다. 하늘과 땅이 다른 것처럼 그 결과가 너무도 다르고 차이가 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날마다 체험하고 받은 사람이었습니다만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고 원망 불평하다가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개인도 감사를 외면하고 불평 불만을 가슴에 품고 토해내기 시작하면 그 영이 병들고 삶이 실패로 기우러지게 됩니다.
감사하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 내 마음이 기쁘고 평안해 집니다. 감사는 긍정적 행동 표현입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생각을 품고, 긍정적인 말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평안해지게 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은 얼굴로 드러납니다. 성난 짐승의 얼굴을 보십시오. 일그러지고 사납습니다. 그리고 눈빛이 무섭습니다. 사람의 얼굴 역시 성난 사람은 무섭게 일그러지고 눈빛이 무섭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을 품으면 얼굴도 평안해지고 눈도 말도 순해집니다.
둘째, 분위기가 좋아집니다. 언젠가 어느 회사에 들어간 일이 있었습니다. 현관 벽마다 벽보가 난잡하게 붙어 있었습니다. "몰아내자 깨부수자 타도하자 물러가라 쟁취하자"등 붉은 글씨로 쓴 구호들이었습니다. 살벌한 분위기였습니다.
다른 회사에 들어간 일이 있었습니다. 단정한 글씨로 쓴 벽걸이가 여기 저기 삽화와 암께 걸려 있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족자들이었습니다.
제가 들어갔던 두 회사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회사뿐이겠습니까? 가정 분위기, 교회 분위기도 다를 바 없습니다.
국가 분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나 장관이나 국회위원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는 나라가 왜 어려워지겠습니까? 왜 문제가 안 풀리겠습니까? 전투적인 사회, 공격적인 분위기는 좋지 않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원망 불평은 마귀가 기뻐하는 제사입니다만 감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시편 50:14을 보면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라고 했고, 50:23을 보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감사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 제사를 드리며 행위를 옳게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만큼 감사로 드리는 제사가 중요하고 위대하다는 것을 설명해 줍니다.
넷째, 감사할 일이 일어납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계속 일어난다는 것은 영적 조건 반사인 것입니다.
한숨쉬는 것을 되풀이하면 한숨쉬는 일이 익숙해집니다. 포기를 자주하면 포기가 익숙해집니다. 그러나 감사를 반복하면 감사가 익숙해지고 그러다 보면 감사할 일이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엎드려 팔 굽혔다 폈다 하는 운동이 있습니다. 처음 하는 사람은 다섯 번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반복하다 보면 열 번 스무번 반복이 가능해집니다. 그만큼 반복이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도 반복하다보면 생활화되고 감사도 찬송도 반복하다보면 생활화되는 것입니다. 나쁜 일을 반복하다보면 익숙해집니다. 반대로 좋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역시 익숙해집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좋은 일을 계속 반복해야 합니다. 감사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본문 속에서 바울 사도가 밝힌 감사의 조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구원하심을 감사합니다
13절을 보면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택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구원하시고" 아무런 자격도 없는 우리를 뽑고, 택하시고, 더럽고, 추하고, 허물 투성이인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아무런 조건도 없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벗어 던질 수 없고 내가 풀지 못하는 죄의 사슬을 풀어주신 것입니다. 죄보다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죄는 육체도 영혼도 다 파멸시킵니다. 그리고 지옥에 떨어지게 만듭니다.
미국의 과학자들은 최근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같은 병균이나 기생충이 사람의 정신까지도 파괴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고 합니다.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라임병, 강박장애, 양극성 장애, 정신분열증, 자폐증, 거식증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는 현미경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미세한 생물입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신까지 좀먹는다는 것입니다.
헬리코박터라는 박테리아가 있습니다. 이놈은 주로 위벽에 붙어 기생하는데 위벽을 갉아 상처를 냅니다. 상처 난 위 속에 김치나 커피를 집어넣으면 그 아픔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그 균도 역시 눈으로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죄는 작아도 죄입니다. 안보여도 죄입니다. 숨겨도 죄입니다. 그러나 그 죄는 육신을 망가뜨리고 영혼을 갉아 먹어버립니다. 그런데 그 죄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해결하시고 용서하시고 믿기만해라! 용서받는다는 사죄의 은총을 선포해 주신 것입니다. 그 어찌 감사치 않을 수 있습니까?
바울은 그 사실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다"고 설명했습니다. "감사합시다.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합시다. "감사합니다"라고 찬양합시다.
2.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16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영원한 위로를 주셨고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것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왜 구원하셨습니까? 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까?
요한복음 3:16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했고, 에베소서 2:4을 보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라고 했습니다.
사랑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죽으셨고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이란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얼마 전 친구 목사님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밤늦게 문상을 갔습니다. 늦은 밤이라 문상객이 거의 없었고 가족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새벽 2시가 가까워 왔습니다. 새벽기도 인도 때문에 더 이상 있을 수도 없고 피곤도 겹쳐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낮 시간에는 앉을 겨를도 없이 조문객이 줄지어 찾아왔지만 새벽이 되면서 발길이 끊어진 상가를 보면서 뭘 느꼈겠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위로하는 건 다분히 의례적이고 형식적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은 영원히 곁에 있을 수도 없고 함께 할 수도 없다는 것.
그러나 주님의 위로는 바울의 말씀대로 영원히,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좋은 소망이 뭡니까? 나쁜 소망도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거는 소망들, 사람에게 걸었던 기대들 그런 것들은 좋은 소망이 아닙니다. 이유는 흔들리고, 무너지고, 기대대로 안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소망을 주셨습니다. 찬송가 539장 가사가 좋은 소망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그렇습니다. 예수가 소망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저자는 12:2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힘들고 불평스런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정치도 짜증나고, 경제는 악화되고, 하는 일은 잘 안되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누구 탓을 하다보면 더 꼬이고, 힘들어지고 짜증스러워 집니다.
그러나 눈을 돌려 소망이신 예수님 바라보고 감사의 마음을 쏟으면 수천, 수만 가지가 감사한 것들뿐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일생동안 참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살아 왔습니다. 저를 도와 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잊지 못합니다. 낱낱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일생동안 많은 사람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단 한번도 감사하다는 말도, 글도 보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도와주면서도 돕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계속 도우십니까?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입으로, 마음으로, 물질로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감사의 조건은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아멘.
은혜, 위로, 소망
데살로니가후서 2:13-17 / 목사 이진수
데살로니가 전후서의 말씀은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주님의 재림, 그리고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로 인해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면서 더욱 굳건한 믿음으로 그 믿음을 지키라고 쓴 편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받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의 일로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조금전에 나누었지만 그들이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더 큰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알려 줍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3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를 믿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처음부터 여러분을 택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보다 먼저 감사해야 할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게 된 것, 우리가 예수를 믿어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놀라운 하늘의 복, 영원한 복을 받게 된 것이 우리의 선함이나 노력, 간절함으로 인한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택하여 주신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가 말씀을 배우면 배울수록, 하나님을 알아갈 수록 깨닫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기에 우리가 갈수록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놀랍고 고마움을 감사함으로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음으로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예수 안에 있는 복음, 십자가 안에 있는 복음의 진리를 믿게 하여 구원을 얻도록 택하신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믿고 섬기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두 번째 이유는 부르심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음으로 여러분을 부르시고,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셨습니다” 택하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택하신 것만이 아닌 우리를 하나님의 일군으로, 복음의 사람으로 쓰시기 위해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택하신 이유가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셨다는 것이 이 세상에 어떠한 직분이나 자리보다 큰 축복이요 명예라는 것입니다. 바울 역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것으로 인해 감사함으로 힘을 다해, 목숨을 다해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바울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세 번째 이유는 세상의 잠시 얻고 누리는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시기 때문에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이렇게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음으로 여러분을 부르시고,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셨습니다” 예수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며, 주님의 길에 동참하여 이 땅에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놀라운 하늘의 영광을 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를 택하셔서 구원하신 일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부족한 우리를 충성되이 여겨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교회의 일군으로 부르신 일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하늘나라와 영원한 생명, 하늘의 복과 상과 면류관의 영광을 주시는 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 세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고, 믿고, 깨닫고 산다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세 가지 감사의 제목이 얼마나 큰 축복임을 안다면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형편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외양간에 모든 가축을 다 잃고, 나라를 잃었을지라도 감사한다고 고백합니다. 욥도 모든 것을 하루 아침에 잃었어도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들은 어렵고, 당하는 것은 고난일지라도, 핍박이 있을지라도,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원망과 불평과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시고, 영광을 줄 것을 알고 믿음으로 언제나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이 세 가지를 깨닫고 믿었기에 그러한 고난과 어려움,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사랑의 풍성함과, 예수님의 재림과 천국을 소망하며 살수 있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런 믿음에 대한 감사를 말한 후에 다시한번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이 15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든든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시고, 영광을 얻게 하실 것이기에 “그러므로” 굳게 서서 주신 말씀과 명령을 지키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은대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대로 죄 가운데 살지 말고, 사단의 유혹과 영적 공격에 흔들리지 말고 든든히 서서 붙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셨기에,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놀라운 영광을 주시기에, 나의 삶을 지치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고난과 어려움, 주님의 재림이 길게 느껴지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게 할 때, 우리의 삶을 흔들 때 말씀을 붙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위해 바울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16-17절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로 영원한 위로와 선한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세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 기도는 사도 바울이 경험에서 우러러 나오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함께 하는 선교팀을 사랑하셨고 영원한 위로와 선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구해 주시고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고난과 어려움을 없애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편하게 살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바울의 기도는 고난과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 하늘의 소망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와 소망이 없으면 굳게 설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이 알고 경험했기에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그것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과 같은 고난을 이미 받았었기에, 같은 환난, 같은 낙심, 같은 흔들림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기에 하나님의 은혜, 위로, 소망을 구하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당한 고난과 핍박을 당해 본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위로가, 소망이 얼마나 자신을 굳게 설 수 있게 하는지 바울은 아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로 영원한 위로와 선한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세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할께요” 라고 빈 말로만 하는 기도 말고 내 삶의 증거가 된 것들을, 내가 하나님께 받은 놀라운 은혜와 위로와 소망을 가지고 그 은혜, 그 위로, 그 소망이 필요한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내 삶에 경험되고, 받고, 누려서 든든하게 영적으로 서고 승리하게 된 확인된 것들을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 줄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 기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위로하심으로 어떠한 아픔과 고통, 상처 속에서도 믿음에 든든히 서서 승리하는 자가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도움과 보호하심을 입고,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험한 세상, 수많은 고난과 영적이 있는 광야 같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기쁨과 자랑이 되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합당한 자로 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라!
살후 2:13-17 / 정인량 목사 / 워싱톤영광장로교회
본문에서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구원의 확신 뿐아니라 진리의 말씀의 확신으로 굳게 서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잘한다는 것 과 말씀을 잘 가르친다는 것은 어디서 증명되어야 할까요? 그것은 말씀을 들은자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그 어떤 이단이나 사이비들의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서 나타나며 또 한 가지는 구원의 확신 뿐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분이 우스개소리로말씀을 잘 쪼갰더니 교회가 쪼개지더라는 말을 해서 한 바탕 웃었습니다만, 적지않은 목회를 통하여 경험하는 바는 소위 말씀을 잘 쪼갠다고 하는 사람들중에 교인들을 불신자 보다 못한 결과를 낳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양무리를 치되 저들이 구원의 확신과 진리의 말씀으로 생활의 변화를 가져오는 열매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개척하고 설립한 모든 교회와 그 성도들에게서 이런 열매를 얻기위하여 교훈하고 책망하고 위로 격려 칭찬하기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위하여 중점적으로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가운데 "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 "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목사는 교회안의 성도들의 믿음을 바르게 굳히는 일에 매진하여야 합니다.
1.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구원의 복음을 확실히 전하고 확신을 갖게 하였습니다.(13)
"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 사도는 이방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였습니다. 정말 그도 "어떻게 이런 일이! "하면서 스스로 감탄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자신의 피땀어린 노력이 있었지만 정녕 이 일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알고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처럼 어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께 이런 감사 기도와 간증을 할 수 있다면 말 할 수 없는 축복이 될 것입니다. 도미니카 선교이야기입니다. 도미니카에는 한국의 중소기업 봉제공장들이 많아서 현지인들이 한동안 일자리를 많이 얻었습니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와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만 인건비가 올라 공장들이 타국으로 옮기자 선교사들도 덩달아 떠나버려 선교의 공동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한 노인 선교사는 끝까지 남아 이 복음을 현지인들에 전하면서 사모도 그 땅에 묻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도미니카인들이 복음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기적이라고 하면서 밥을 굶는 한이 있더라도 이 복음을 죽을때 까지 계속전하겠다는 간증을 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만세전에 택하사 복음을 전하게도 하시고 받게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진리를 저들이 믿어지게 하시고 또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는 작업을 쉼없이 하시는 까닭입니다.
2. 복음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부르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함이다.(14)
"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구원 얻은 자의 목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활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였고 빌립보서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받은 구원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추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도,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도, 복음 진리를 믿음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도, 마침내 받게 될 부활의 영광도 다 놀라운 복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런대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영광은 워즈워드가 노래한 초원의 빛의 영광처럼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세세무궁토록 영원히 빛나게 될 것입니다.
3.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굳게 서서 믿음을 지키라고 합니다.(15-17)
15절에 ‘이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은 ‘너희가 이 놀라운 구원을 받았으므로’라는 뜻입니다. 성도들의 성화 생활을 위한 모든 교훈과 권면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구원과 약속된 영광에 대해 그들편에서 마땅히 응답하고 행해야 할 바인 것입니다.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권면한 것 같이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은 받은 구원의 지식과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지식과 믿음이 부족한 자는 넘어지고 낙심하고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진리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확신이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신약교회와 성도들에게 성경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믿음에 견고히 설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였고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굳게 서서 말로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사도적 유전(遺傳), 곧 전해 받은 전통을 지켜야 합니다. 여기에 유전이란 구약의 유전을 말함이 아니라 사도들이 가르친 말씀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도적 교훈은 오늘날 대부분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내용은 그리고 신학으로는 개혁신학에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주신 구원의 복음 진리와 모든 복음적 교훈들은 불변적이고 영원합니다(갈 1:8-9; 계 22:18-19). 우리는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이 역사적 기독교, 개혁신학, 옛신앙을 잘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보수신앙의 본질입니다. 기독교는 새 것을 만들어 내는 종교가 아니고 옛 것을 지키는 종교입니다. 우리는 이 옛신앙을 귀히 여기며 보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이탈한 인간의 모든 전통들을 버려야 하고 성경을 떠난 모든 종류의 이단을 용납하지 말고 배격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성경적 기독교, 역사적 기독교, 사도적, 전통적, 정통적 기독교만을 믿고 보수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세상의 그 무엇도 줄 수 없는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 곧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을 은혜로 주셨습니다. 이 세상은 요동하는 바다 같고 인생의 행로는 수고와 고생이 가득하며 우리는 시시때때로 위로가 필요합니다. 삶의 현실 속에서 불안하거나 낙심치 않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일마다 하나님의 위로를 필요로 합니다. 또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생활목표는 선한 생활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위는 선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런 은혜를 주실 것을 기도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13~17절까지의 중요한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확신하고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만세 전의 선택에 근거하고 또 장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목표로 합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구원을 은혜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로, 또 복음 진리를 믿게 하심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둘째로, 우리는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 즉 성경적 교훈, 개혁신학, 옛신앙을 확신하고 보수해야합니다. 특히, 이 시대에 교회들의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보수적 교회와 보수 신앙이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지 바로 깨닫고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고 개혁신학의 귀한 유산을 열심히 연구하고, 성경적 교훈, 즉 전통적, 정통적 바른 교훈을 확인하여야 지킬수 있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항상 요동하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날마다, 일마다 큰 위로를 주시고 우리를 모든 선한 말과 행위에 굳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시시때때로 위로가 필요한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아 힘을 얻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굳게 서서 모든 선한 말과 행위를 실천합시다. 이것이 복된 성도의 삶입니다.
항상 감사
살후 2:13-17
본문 13절입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본문은 데살로니가후서입니다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이하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처럼 항상 감사하는 삶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한 항상 감사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아야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이 가능할까요? 감사가 신앙의 본질이고, 항상 감사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바울이 말했는데,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할까요? 사람이 어떻게 항상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까? 맥추감사절이나 가을에 지키는 추수감사절 때 한두 번 감사하는 것이야 누구나 그럴 수 있다지만, 어떻게 살면서 항상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올해만 해도 우리는 감사한 일보다는 우울한 일, 슬픈 일, 억울한 일, 짜증나는 일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지금도 다들 몸과 마음이 잔뜩 지쳐있는데, 감사가 무슨 말입니까? 당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항상 감사하란 말인가? 이것이 무슨 터무니없는 이상주의고 낙관주의냐며 항상 감사하라는 바울의 권면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너희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항상 감사하며 살 수 있다고 말하며 그 근거를 제시한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우리가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옳은 첫 번째 이유가 무엇입니까?
13절 하반절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이것이 우리가 항상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근거로 바울이 우리에게 제시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절대 남보다 더 낫고 착하고, 남보다 더 잘 나서, 더 주님을 사랑하고 잘 믿고, 기도도 더 많이 해서, 그 모든 것을 합산한 최종 점수가 더 높아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바울이 말한 처음은 태초를 의미합니다. 아니 태초 이전, 창세 이전을 가리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 이하입니다. “곧 창세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여기서 처음부터 우리를 택해주셨다는 말씀은 우리의 믿음, 기도, 회개, 창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것이 우리의 원초적 감사의 근거라며, 항상 감사하며 사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선택하신 사건에는 그 어떤 조건이나 자격도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택하신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공동 합작이 아닙니다. 그것도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지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믿기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을 붙잡고 살면 우리는 항상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할 일이 있다면 항상 감사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논리입니다. 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을 생각하며 어떤 처지와 환경에서도 항상 감사하며 사는 것이 옳고, 그것이 올바른 도리라는 것이 바울의 역설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우리가 항상 감사하며 살 수 있는가 라고 문제를 제기하니까, 바울은 할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선택하신 것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천후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13절 하반절입니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의 은총이 우리 감사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선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 성령으로 우리를 관리하십니다. 어떻게 관리하십니까? 거룩하게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성화라고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과정이 성화입니다. 성화는 선택받은 하나님 자녀들의 최대 과제이자 지상 목표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장차 갈 천국이 거룩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거룩하십니다. 천군천사가 다 거룩합니다. 24장로가 다 거룩합니다. 하나님 보좌 주변의 네 생물도 거룩하고, 앞서 간 성도들이 다 거룩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흰 세마포를 입고 있습니다. 거룩하다는 상징적 뜻입니다. 천군천사가 늘 찬송하는 가사가 거룩하다 거룩하다입니다. 우리가 장차 그 세계에 갈 사람이기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 세상에서 살 동안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훗날 천국에 갔을 때 문화적 충격이나 정서적 이질감을 최소화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사람이 천국에 가면 그 세계에 쉽게 적응합니다. 우리는 모두 죽으면 천국에 갑니다. 천국은 이 세상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복된 완전한 세계입니다. 그곳은 아픔이나 슬픔이 없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좋다는 천국에 빨리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모순투성이인 이 세상에 있기를 원합니다. 왜 그럴까요? 천국은 영원한 낙원인데, 왜 천국 가기를 부담스러워할까요? 왜 최대한 버티다 가려고 할까요? 일단 만에 하나 천국이 없다거나, 지옥에 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일 겁니다. 아니면 삶에 대한 미련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아직 주님 앞에 설 준비가 안 되었다는 영적 불안감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가겠지만 당장 죽어서 갈 자신은 없다는 겁니다. 내가 아직 죽을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한마디로 내가 아직 성화가 덜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직은 내가 부끄러운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집니다. 구원받은 당신의 자녀들을 하루라도 빨리 데려가고 싶지만, 최대한 이 땅에 더 두시는 이유는 우리의 성화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말미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더 성화된 다음에 천국에 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기대요 바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더 두시는 선하신 뜻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천국에 가서 누릴 영화가 우리의 성화 정도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많이 성화된 사람은 그만큼 영화를 누립니다. 각자의 성화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달이면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으로 곧장 인도하지 않고, 무려 40년간 광야에서 뺑뺑이를 돌린 이유도 40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노예의 때를 벗고 들어가라는 조치였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살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성화된 뒤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 전에 이루어진 선택은 그 주체가 전적으로 하나님이시지만, 성화는 그 주체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내가 성화의 주체입니다. 성화는 내가 노력하고 결단하면서 이루어야 합니다. 내가 힘쓰고 애쓰고 노력하고 기도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며 열심히 주님의 거룩한 성품을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경건생활, 영성훈련을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성화를 위해서입니다. 구원은 은혜입니다. 성화는 내가 결단하고 노력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론상으로는 그것이 맞습니다. 성화의 주체가 분명 내 자신입니다. 그러나 그 성화조차도 사실상 성령께서 도와주셔야 가능합니다. 본문 13절 하반절에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라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거룩해져야 하는데, 그 일 조차도 성령이 내게 힘을 실어 주셔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순절인 바로 오늘 맥추감사절에 강림하셨던 성령께서 지금도 우리 안에서 우리의 성화를 격려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품성을 닮는 일이 꼭 필요하다. 자제하라. 말씀을 가까이 하라. 선하게 살아라. 도우며 살아라. 희생을 감수하며 살아라. 성령이 부단히 우리 안에서 그런 깨달음과 자극을 주십니다.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와 계시에 바르게 응답을 하는 사람이 성화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 사실에 우리가 감사하며 살아야 옳다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그 사실을 늘 깨달으며 감사하면서 살면, 얼마든지 우리가 항상 감사하며 사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망각하고 외면해서 문제일 뿐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성화를 돕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망입니다. 16절 하반절입니다.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는 벌써 올해 상반기를 살았습니다만, 우리의 삶의 환경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무너지지 않고 하반기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위로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이 위로하셨고, 기도할 때 희망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신다는 사실로 우리로 하여금 안도하게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위로와 소망은 다 기만이고 헛되고, 그것을 따라가면 더 깊은 공허뿐이지만, 하나님의 주시는 소망은 우리 삶에 큰 용기와 격려가 됩니다. 흔히 우리는 강한 척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속으로는 다 울며 삽니다. 신음하며 삽니다. 얼마나 자주 위기에 몰리고, 절망감과 좌절감으로 흔들립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각오를 새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위로와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정하고 감사하면, 주님이 더욱 큰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시편 90편은 모세의 시입니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모세가 숱한 역경의 삶을 살며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인생은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 모세의 결론입니다.
세상은 늘 우리를 속이고 기만하지만 주님이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영원한 소망으로 함께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포기하지 않고 견디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결국은 이기게 하십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원초적인 감사의 근거들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우리의 생애를 통해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옳은 이 세 가지 은혜를 늘 마음에 새기고 살면서 감사함으로 평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기원합니다.
항상 감사
살후 2:13-17 / 조성노 목사
본문 13절입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본문은 데살로니가후서입니다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이하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처럼 항상 감사하는 삶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한 항상 감사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아야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이 가능할까요? 감사가 신앙의 본질이고, 항상 감사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바울이 말했는데,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할까요? 사람이 어떻게 항상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까? 맥추감사절이나 가을에 지키는 추수감사절 때 한두 번 감사하는 것이야 누구나 그럴 수 있다지만, 어떻게 살면서 항상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올해만 해도 우리는 감사한 일보다는 우울한 일, 슬픈 일, 억울한 일, 짜증나는 일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지금도 다들 몸과 마음이 잔뜩 지쳐있는데, 감사가 무슨 말입니까? 당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항상 감사하란 말인가? 이것이 무슨 터무니없는 이상주의고 낙관주의냐며 항상 감사하라는 바울의 권면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너희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항상 감사하며 살 수 있다고 말하며 그 근거를 제시한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우리가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옳은 첫 번째 이유가 무엇입니까?
13절 하반절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이것이 우리가 항상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근거로 바울이 우리에게 제시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절대 남보다 더 낫고 착하고, 남보다 더 잘 나서, 더 주님을 사랑하고 잘 믿고, 기도도 더 많이 해서, 그 모든 것을 합산한 최종 점수가 더 높아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바울이 말한 처음은 태초를 의미합니다. 아니 태초 이전, 창세 이전을 가리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 이하입니다. “곧 창세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여기서 처음부터 우리를 택해주셨다는 말씀은 우리의 믿음, 기도, 회개, 창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것이 우리의 원초적 감사의 근거라며, 항상 감사하며 사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선택하신 사건에는 그 어떤 조건이나 자격도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택하신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공동 합작이 아닙니다. 그것도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지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믿기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을 붙잡고 살면 우리는 항상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할 일이 있다면 항상 감사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논리입니다. 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을 생각하며 어떤 처지와 환경에서도 항상 감사하며 사는 것이 옳고, 그것이 올바른 도리라는 것이 바울의 역설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우리가 항상 감사하며 살 수 있는가 라고 문제를 제기하니까, 바울은 할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선택하신 것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천후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13절 하반절입니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의 은총이 우리 감사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선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 성령으로 우리를 관리하십니다. 어떻게 관리하십니까? 거룩하게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성화라고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과정이 성화입니다. 성화는 선택받은 하나님 자녀들의 최대 과제이자 지상 목표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장차 갈 천국이 거룩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거룩하십니다. 천군천사가 다 거룩합니다. 24장로가 다 거룩합니다. 하나님 보좌 주변의 네 생물도 거룩하고, 앞서 간 성도들이 다 거룩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흰 세마포를 입고 있습니다. 거룩하다는 상징적 뜻입니다. 천군천사가 늘 찬송하는 가사가 거룩하다 거룩하다입니다. 우리가 장차 그 세계에 갈 사람이기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 세상에서 살 동안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훗날 천국에 갔을 때 문화적 충격이나 정서적 이질감을 최소화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사람이 천국에 가면 그 세계에 쉽게 적응합니다. 우리는 모두 죽으면 천국에 갑니다. 천국은 이 세상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복된 완전한 세계입니다. 그곳은 아픔이나 슬픔이 없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좋다는 천국에 빨리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모순투성이인 이 세상에 있기를 원합니다. 왜 그럴까요? 천국은 영원한 낙원인데, 왜 천국 가기를 부담스러워할까요? 왜 최대한 버티다 가려고 할까요? 일단 만에 하나 천국이 없다거나, 지옥에 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일 겁니다. 아니면 삶에 대한 미련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아직 주님 앞에 설 준비가 안 되었다는 영적 불안감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가겠지만 당장 죽어서 갈 자신은 없다는 겁니다. 내가 아직 죽을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한마디로 내가 아직 성화가 덜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직은 내가 부끄러운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집니다. 구원받은 당신의 자녀들을 하루라도 빨리 데려가고 싶지만, 최대한 이 땅에 더 두시는 이유는 우리의 성화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말미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더 성화된 다음에 천국에 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기대요 바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더 두시는 선하신 뜻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천국에 가서 누릴 영화가 우리의 성화 정도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많이 성화된 사람은 그만큼 영화를 누립니다. 각자의 성화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달이면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으로 곧장 인도하지 않고, 무려 40년간 광야에서 뺑뺑이를 돌린 이유도 40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노예의 때를 벗고 들어가라는 조치였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살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성화된 뒤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 전에 이루어진 선택은 그 주체가 전적으로 하나님이시지만, 성화는 그 주체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내가 성화의 주체입니다. 성화는 내가 노력하고 결단하면서 이루어야 합니다. 내가 힘쓰고 애쓰고 노력하고 기도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며 열심히 주님의 거룩한 성품을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경건생활, 영성훈련을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성화를 위해서입니다. 구원은 은혜입니다. 성화는 내가 결단하고 노력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론상으로는 그것이 맞습니다. 성화의 주체가 분명 내 자신입니다. 그러나 그 성화조차도 사실상 성령께서 도와주셔야 가능합니다. 본문 13절 하반절에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라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거룩해져야 하는데, 그 일 조차도 성령이 내게 힘을 실어 주셔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순절인 바로 오늘 맥추감사절에 강림하셨던 성령께서 지금도 우리 안에서 우리의 성화를 격려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품성을 닮는 일이 꼭 필요하다. 자제하라. 말씀을 가까이 하라. 선하게 살아라. 도우며 살아라. 희생을 감수하며 살아라. 성령이 부단히 우리 안에서 그런 깨달음과 자극을 주십니다.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와 계시에 바르게 응답을 하는 사람이 성화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 사실에 우리가 감사하며 살아야 옳다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그 사실을 늘 깨달으며 감사하면서 살면, 얼마든지 우리가 항상 감사하며 사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망각하고 외면해서 문제일 뿐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성화를 돕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망입니다. 16절 하반절입니다.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는 벌써 올해 상반기를 살았습니다만, 우리의 삶의 환경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무너지지 않고 하반기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위로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이 위로하셨고, 기도할 때 희망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신다는 사실로 우리로 하여금 안도하게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위로와 소망은 다 기만이고 헛되고, 그것을 따라가면 더 깊은 공허뿐이지만, 하나님의 주시는 소망은 우리 삶에 큰 용기와 격려가 됩니다. 흔히 우리는 강한 척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속으로는 다 울며 삽니다. 신음하며 삽니다. 얼마나 자주 위기에 몰리고, 절망감과 좌절감으로 흔들립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각오를 새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위로와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정하고 감사하면, 주님이 더욱 큰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시편 90편은 모세의 시입니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모세가 숱한 역경의 삶을 살며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인생은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 모세의 결론입니다.
세상은 늘 우리를 속이고 기만하지만 주님이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영원한 소망으로 함께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포기하지 않고 견디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결국은 이기게 하십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원초적인 감사의 근거들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우리의 생애를 통해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옳은 이 세 가지 은혜를 늘 마음에 새기고 살면서 감사함으로 평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기원합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살후 2:13-17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후서 1장 3절에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내용을 편지 서두에 먼저 썼다. 그런데 편지를 한참동안 써 내려가던 바울은 본문인 2장 13절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감사하는 내용에 대하여 힘을 주어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항상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무엇에 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언급하고 있는가. 바울은 저들을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 등을 통해서 저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다. 그 전파된 복음으로 저들을 부르셨다. 그 목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바울은 그런 저들에게 권면하는 말들도 빠트리지 않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라
곁에 있을 때에 말로 전한 복음과 지금 떠나 있으면서 편지로 한결같이 가르치는 그 가르침의 전통을 지키라.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길 원한다. 모든 선한 일과 선한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전하고 싶은 진심을 담아 편지하고 있다.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기억하면 기도하며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처음부터 택(擇)하심.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 땅의 모든 성도들은 한 사람, 한 사람 그 누구나 각 사람을 하나님이 택하여 복음으로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수 많은 성도들 중에서 우리는 이 곳, 예수사랑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신앙생활하는 이들로 택하여 부르신 것이다. 서울 장안에 수만개의 크고 작은 교회가 있다. 그 중에 우리는 이 곳에 정한 마음을 두고 이 곳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성도들 간의 기쁨과 슬픔과 즐거움과 고통 등 그 모든 것들을 더불어 같이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 각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혹시 가족들과 친척들 중에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이 있다면 우리는 저들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고 있나.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어떠하여야 할까.
“하나님. 나의 양가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과 나의 남편, 나의 아내, 나의 아들딸, 나의 사위, 며느리, 나의 손자손녀들이 주님께서 자녀 삼으시기로 예정하여 택하시고 부르신 은혜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 하지 않는가.
맞다. 하나님 아버지의 택하심과 부르심이 없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구원 받은 주의 자녀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우리 각 사람을 택하고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16)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주를 믿는 자로 택하신 목적을,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이다.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고 교훈하고 약속해 주셨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가.
늙기까지 아들딸 없이 사는 것이 외로워 보이니까 이제라도 아들 낳아서 무릎 위에 앉히고 노년기에 외롭지 않게 살아가라고 아들 이삭을 주신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언약을 세우시고 아들 이삭을 낳으셔서 그 언약을 계승해 가는 언약 자손의 삶을 살아가길 원하셨던 것이다.
언약의 아들을 기다리다 지친 아내 사라가 자신의 몸종 하갈을 남편 아브라함의 침소에 들어가게 하였다.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원하신 언약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아내 사래의 나이 9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언약의 아들 삼으셨다. 이것이 “처음부터의 택하심”이다.
우리의 신앙은 택하심의 신앙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다. 구한말인 1885년에 이 땅에 복음이 들어 왔다. 그것이 우리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택하심이다. 제가 태어나고 자라난 강화도 섬 마을에 전기도 안 들어오고 다리도 없던 그 곳에 여기 저기 복음이 전파되고 마을마다 예배당이 세워지고 은혜를 알게 된 성도들이 생겨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이며 부르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야곱을 통해서 태어난 아들들이 열둘이다. 그 중에서 요셉은 배다른 열 명의 형들에 의해서 애굽의 노예 시장으로 팔려 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꿈의 사람으로 택하신 요셉과 날마다 동행하셨다. 하나님은 요셉으로 하여금 장차 애굽의 총리가 될만한 그릇으로 준비해 가셨다.
하나님은 이처럼 모세를 택하셨다. 여 사사 드보라를 택하시고 다윗을 택하시고 에스더를 택하시고 느헤미야를 택하시고 엘리야를 택하시고 엘리사를 택하시고 세례 요한을 택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12 제자들을 택하시고 다메섹성을 향해 가던 사울을 택하셨다. 살기가 등등하던 핍박자 사울로 하여금 이방 선교의 사도가 되도록 택하신 것이다.
어제 은평 지방 찬양제의 모든 순서가 은혜로웠지만 특별히 주 사랑농아교회 성도들의 수화 찬양 시간에 가슴이 뭉클하였다. “요게벳의 노래”수화 찬양 중에 삼개월짜리 어린 아들 모세를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 강에 떠내려 보내는 어머니 요게벳의 심정을 몸찬양으로 찬양할 때에 누구나 뭉클한 감동이 있었을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그것이 택하심이 아닌가. 그 당시에 모세처럼 불운한 시대에 애굽 땅에서 태어난 히브리 노예의 아들들이 얼마나 많았겠나.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악어 떼가 우굴 대는 죽음의 나일 강에서 살려 내셨고 아기 모세를 나일강에 떠내려가는 갈대 상자 안에서 건져 내셨다. 하나님은 바로 왕의 딸 공주를 통해서 일하신 것이다.
그리고 장차 80년 세월이 흐른 후에 80세의 노인이 된 양떼를 몰던 모세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애굽의 동족을 출애굽하게 하는 선봉에 붙들어 쓰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신앙으로 살아가야 할까. 그냥 이 시대의 벳세다 들판의 무리 가운데 뒤섞여 앉아서 기적의 보리떡과 물고기로 배부르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눈을 들어 주를 보며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며 따르는 주의 신실한 제자들이 모두 다 되기를 축원한다.
성령(聖靈)의 거룩하게 하심.
우리 각 사람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또한 우리 각 사람 안에서 그 구원 사역을 완성해 가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서 주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다.
도우시는 성령, 가르치시는 성령, 깨달음을 갖게 하시는 성령, 은혜 주시는 성령, 감동과 감화와 감격과 회개와 결단과 변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믿음으로 살아가는 각 사람의 마음에 찾아 오셔서 일하시고 힘주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죄와 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성도들 각 사람의 삶을 거룩하게 하신다. 죄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신다.
성령은 거룩하게 하시는 영이시다.
성령은 진실하신 영이시다.
성령은 깨끗하게 하시는 영이시다.
성령은 온전케 하시는 영이시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후에 애굽으로 피신하였다가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다. 아기 예수는 마리아의 남편될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 안겨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25절부터 35절까지에 보며 예수 그리스도 즉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리며 살아가던 그 당시에 성령 충만한 한 사람 시므온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나온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고 이스라엘의 위로이신 메시아를 기다리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성령이 그 위에 계셨다. 그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다. 25, 26, 27절에 계속하여 시므온은 성령의 사람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맞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시므온처럼 성령의 임재 앞에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고, 성령의 지시를 받고, 성령의 감동으로 출입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께 찬송하며 살아가는 날마다의 삶이어야 한다.
이처럼 예배를 잘 드리고 성령님을 예배당 안에 머물러 계시도록 하지 말고 각 사람의 마음 속에 성령을 모셔 드려서 성령이 내 안에 임재하시고 동행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성령의 지시에 순복하며 성령 안에서의 생각과 말과 행실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바를 따르는 신자의 모습이 아니겠나.
우리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목사님은 성령 안에서의 <거룩한 삶을 위한 일곱 가지 질문>에 대하여 교훈하였다.
1.항상 기도하는가.
2.매 순간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가.
3.모든 경우에 감사하는가.
4.욕심내는 것은 없는가.
5.두려워하는 일은 없는가.
6.내 중심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가.
7.무슨 말이나 일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가.
또 존 웨슬리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 일곱 가지>도 강조하였다.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라.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시간에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네가 할 수 있는 한 오래도록...
Do all the good you can,
By all the means you can,
In all the ways you can,
In all the places you can,
At all the times you can,
To all the people you can,
As long as ever you can.
그러므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 안에서 성령과 동행하는 날마다의 삶이 되기를 축원한다.
진리(眞理)를 믿음으로 구원(救援)받게 하심.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관하여 항상 감사하되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하는 또 하나의 내용이 무엇인가.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구원의 길은 진리를 믿는데서 출발한다.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아무 종교를 믿든지 사람이 착하게 살면 구원 받는 다는 말은 엉터리다. 사람이 선을 행하는 것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구원 받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유일한 길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는 길 밖에는 없다.
요즘 우리나라에 극성을 부르는 각종 이단과 사이비의 교주를 따라 다닌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다. 때가 되면 저들은 다 이 세상을 떠나고 저들을 쫓던 무리들은 뭐를 좇던 뭐들처럼 허망한 생각을 갖고 뿔뿔이 흩어지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진리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바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252장 찬송 "나의 죄를 씻기는”찬송의 고백 그대로이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나를 정케 하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나의 죄 속하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평안함과 소망은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영원토록 내 할 말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O precious is the flow That make me white as snow;
No other fount I know, Nothing but the blood of Jesus.
493장 찬송 “하늘가는 밝은 길이”의 2절 후반부에서 우리는, “예수 보배로운 피 모든 것을 이기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라고 찬양한다. 맞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로 하여금 이 세상의 죄와 악과 어둠과 죽음을 이기게 하시는 유일한 길은 골고다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예수의 보배로운 피 밖에는 없다.
우리는 인간의 허탄한 신화를 믿는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신앙 즉 미신에 빠져 사는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바위 앞에 빌고 큰 나무 앞에서 절하며 금과 은과 돌과 나무로 깎아 만든 우상 앞에 제물을 드리는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무당과 박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을 신격화하며 사람에게 굽신거리고 사람에게 절하고 사람에게 맹종하는 자들이 아니다.
1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묘사하고 있나.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영원한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위로 하시는 하나님. 모든 선한 일과 말에 우리를 굳건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다.
맞다. 우리가 믿고 섬기고 따를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다. 미국의 전도자 D. L. 무디는 이런 말을 남겼다. “너 자신을 믿어 보라. 그대는 스스로 실망할 것이다. 그대는 가까운 친구를 믿어 보라. 그도 때가 되면 그대 곁을 떠나가고 말 것이다. 그대의 명성을 믿어 보라. 그 명성이 너에게 찌르는 가시처럼 될 날이 오고 말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보라. 현세와 장래에 그리고 영원히 후회함이 없게 될 것이다.”진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각 사람이 주 안에서 온전한 구원을 선물로 받아 누리를 축복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구원에 대한 감사
살후 2:13-17 / 최건수 목사
어떤 소년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물가에 서있는 소년의 어머니는 놀라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소리지르고 몸부림치고 있는데, 그의 옆에 있는 건장한 청년은 그저 물끄러미 허우적거리는 소년을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소년의 어머니가 그 청년에게 다급한 나머지 어떻게 좀 해보라고 애걸도 하고 소리도 지르지만 그 청년은 좀체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소년의 힘이 다 빠져 허우적대지도 못하고 축 늘어져서는 수면 위로 떠오르자, 청년은 서서히 소년이 떠있는 물로 수영해가서 그 소년을 무사히 건져 내왔습니다. 소년의 어머니는 “왜 진작에 이 아이를 건져오지 않았습니까?”라고 고마움보다는 원망 섞인 말을 던집니다. 청년은 그 어머니에게 대답합니다: “아주머니, 아이가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동안에는 구해낼 수가 없습니다. 구하러 들어간 사람을 죽기 살기로 붙잡고 늘어지기 때문에 두 사람 다 죽게 됩니다. 그렇지만, 지쳐서 허우적거림을 멈출 때에는 쉽게 구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노력이나 생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겠다고 발버둥칠 때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노력이나 판단이나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교만케 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을 멈추고 온전히 주님께만 의지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께서 우리의 협조 없이도 얼마나 완벽하게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시작부터 끝까지 구원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 편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전적으로 주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 어느 날 시카고의 한 목사님이 기도하는데 어느 사람의 아파트를 찾아가 보라는 하나님의 감동이 임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그 사람이 평소에 예수 믿는 사람을 조롱하는, 예수님을 믿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 것을 알기에 좀체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강한 감동이 임하였기에 거절할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해서, 그는 내키지는 않지만 한 번 그 사람의 아파트를 방문하기로 결심하고 찾아가 문을 두드립니다. 조금 후에 그 사람이 절망의 얼굴을 하고 문을 엽니다. 목사님은 “형제님과 함께 예수님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말을 시작하였지만, 이 사람이 뭐라고 조롱하는 말을 할까 걱정이 앞섭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조롱의 말을 하는 대신에 울음을 터뜨립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여기 보내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목사님이 문을 두드리시기 직전에 저는 아내와 함께 아파트 문을 모두 닫고 가스를 틀어놓고 죽으려고 했습니다. 사실 얼마 전에 저희는 사랑하는 아이를 땅에 묻고 왔는데 그 슬픔을 견딜 수가 없어서 죽고자 했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의 아파트에 들어가서 절망과 슬픔에 빠져 있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위로의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며 그들 부부도 참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이 위로와 소망의 하나님을 믿을 때, 이 모든 고통과 슬픔을 온전히 견딜 수 있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는데,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 난 필요 없으니 너나 열심히 믿으라고 무관심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일, 아침 일찍 시작한 주일학교 예배가 끝나고 아직 어른 예배까지는 시간이 있어 교회 문 앞에 나왔는데, 그 친구가 절망의 얼굴로 교회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반가움에 “네가 여기 어쩐 일이냐?”하고 물었더니, 그 친구는 자기의 얘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약혼한 사람과 파혼하고 상심한 마음으로 한 동안을 지내다가 그 날은 마침 노는 날이기에 무작정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다가 교회건물이 보이기에 버스에 내려서 오다보니 여기였다고 대답합니다.
그 일 이후에 그 친구는 성경을 읽는 일과 교회봉사에 전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택하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되, 그 사람들에게 시련을 주시며 연단시키기도 하시고, 여러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도 하십니다.
13절: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하여서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구원을 허락하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주님의 사랑하시는 성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택하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택하시되 “처음부터”(from the very beginning)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처음부터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셨습니다.
처음부터 택하신 자들을 성령으로 거룩하여지게 하시고 진리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14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처음부터 택하신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바울과 그의 일행을 사용하셔서 복음을 듣게 하심을 그들을 부르시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에서 바울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기쁨으로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하여 그 즐거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맞이하는 그들은 결국 영광 중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15절: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바울의 일행을 통하여 복음을 듣게 하시고 그들을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실 것이므로, 바울은 그들을 권면하되 말로나 편지로 듣고 가르침을 받은 유전들을 잘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16-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6-17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서술함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사랑하십니다. 부모된 사람이 그의 자녀가 양순하던 방탕하던 사랑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그를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의 자녀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에게 주시는 위로가 “영원하다”고 함은 그의 위로를 누구도 방해하거나 변개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좋은 소망”을 주셨다고 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 특히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관련하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소망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러하신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기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음은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해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 받음을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대신에,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에게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을 증거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다가오신 주님께 늘 감사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들을 감당하되 감사함으로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