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벨 선교사
유진 벨은 호남 지역에 여러 학교와 광주기독병원을 세웠다.
그는 호남 지방 선교에 헌신하다가 격무로 건강이 악화되어
1925년 9월 28일 57세로 별세하여 광주 양림동 묘역에 안장되었다.
1898년 유진 벨과 그의 일가가 함께 찍은 사진으로, 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이 유진 벨 선교사이다.
유진벨은 선교 사역을 하는 도중에 부인과 아들을 잃기도 하였으나
한국을 떠나지 않고 평생 한국의 복음화에 힘썼다.
위 사진은 첫 부인 로티 위더스픈(1867-1901)과 자녀 헨리와 샬롯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로티 위더스픈은 심장병에 걸렸으나 치료도 받지 못하고 고생하다가
남편이 전도 여행하는 중에 홀로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묻혔다.
유진 벨은 1904년 마가렛 벨(Margarlet W. Bell)과 재혼했으나,
마가렛 벨은 1919년 3월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을 조사하고 광주로 돌아오다가
수원 병점역에서 열차와 자동차가 충돌하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위 사진은 두 번째 부인인 마가렛 벨 및 자녀들과 함께 찍은 장면이다.
마가렛 벨은 양림동 선교사묘역에 유진벨 목사님과 함께 나란히 묻혀 계신다.
윌리엄 린튼은 미국 조지아 주 출신의 선교사로 캔자스 출신이었던
유진 벨과 마찬가지로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되어 한국에 들어와
군산과 전주를 중심으로 선교 사역을 펼쳤다.
위 사진은 윌리엄 린튼과 그의 아버지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윌리엄 린튼의 부친은 농장 경영으로 큰 부를 쌓았지만
남북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한다.
샬롯 벨과 결혼한 윌리엄 린튼은
교육 사업에 주력하여 전주 기전여고와 전주 신흥고에서 교장으로 재직했다.
신흥고에 재직하던 중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미국으로 추방당하기도 하였다.
샬롯 벨과 윌리엄 린튼의 결혼으로 두 가문의 연합 사역이 이루어진다.
윌리엄 린튼 부부는 해방 후에 다시 한국에 돌아왔으며,
대전에 한남대학교(HNU)를 세워 해방 후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갈
젊은 기독교 지도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위 사진은 윌리엄 린튼이 세운
한남대학교(당시 대전대학, 1956년에 설립)의 초창기의 모습이다.
윌리엄 린튼 부부는 네 아들을 두게 된다.
큰 아들(William Linton)이
군산에서 1923년 4월 1일 출생하여 유럽에서 지내다가 1982년 내한한바 있다.
둘째 아들(Eugene Linton)은
군산에서 1924년 4월 21일 출생하여 미국에서 의사로 있다가 한국으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셋째 아들 휴 M. 린턴(Linton, Hugh Maclntyre, 한국명: 인휴)은
1926년 군산에서 출생하여 1947년 5월 31일에 베티(Elizabeth Flowers, 일명 Betty)와 결혼했다.
1950년 콜럼비아 신학교를 졸업하고 1953년 프린스턴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부부선교사로 1953년 내한하여 순천지방의 농촌선교사로 활동하였다.
한국에서 31년간 선교사 사역을 담당 하다가
1984년 4월 10일 자동차 사고로 별세하여 순천에 안장되었다.
넷째 아들 드와이트(Linton, Thomas Dwight, 한국명: 인도아)는
전주에서 1927년 12월 4일 출생하여 광주에서 교육자 및 순회복음 선교사로
그의 부인 Margie와 함께 1978년 귀국할 때까지 31년간 활동했다.
윌리엄 린튼의 아들인 휴 린튼은 자신의 부모와 외조부처럼 선교사가 되어
로이스 린튼과 결혼한 후 전라남도 섬 지방과 벽지에 많은 교회를 세웠다.
검정 고무신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될 정도로 검소하고 소박한 자세로
전라도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위 사진은 휴 린튼과 로이스 린튼의 결혼식 사진이다.
그의 별명이 검정고무신이었다.
휴 린튼의 부인 로이스 린튼은
1960년 순천 일대에 큰 수해가 나면서 결핵이 만연해지자,
결핵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우는 등 결핵 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봉사하였다.
이 공로로 1996년에 호암상을 수상하였으며,
이때 받은 상금 5,000만 원으로 북한에 앰뷸런스를 기증하였다.
위 사진은 로이스 린튼이 세운 순천기독결핵요양원의 모습이다.
유진벨재단 이사장 스티브 린튼은
자신의 어머니가 남녘 땅에서 평생을 봉사해왔던 결핵 퇴치 사업을 밑거름으로 하여
현재까지 10여년 동안 북녘의 동포들을 위해 결핵 퇴치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위 사진은 스티브 린튼 유진벨재단 이사장이
문덕군 결핵요양소의 환자들을 방문하고 있는 장면으로 2004년에 찍은 것이다.
사진의 가장 오른쪽 이마 벗겨지신 분이 스티브 린튼이다.
말이 좀 복잡한데 다시 가닥을 잡아보겠다.
유진벨 선교사는 아들 헨리와 딸 샤롯 이렇게 1남 1녀를 둔다.
둘다 위더스푼에게서 낳은 자녀이다.
이중 샤롯은 당시 군산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21살의 젊은 윌리엄 린튼과 결혼한다.
그 들에게는 아들 넷이 있는데
그중 세째아들이 휴 린튼이다.
휴 린튼이 장성하여 로이스와 결혼을 한다.
이들은 4남 2녀를 두게 되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스티브 린튼이다.
스티브 린튼의 막내동생 존 린튼(1959년생)은 연세대 의대를 졸업했고
현재 세브란스병원 외국인진료소장을 맡고 있다.
**************************************************************************
그러니 유진벨 선교사가 1대
샤롯과 윌리엄 린튼이 2대
휴 린튼이 3대
스티브 린튼(인세반)과 존 린튼(인요한)이 4대이다.
4대에 걸쳐 이땅에서 신앙과 교육 그리고 의료 등에 헌신적으로 사역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가문에 머리를 조아려 감사를 드린다.
2008. 8. 29. 오 영 석
여기에 사용된 사진은 유진벨재단에서 제공해준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제가 광주 기독병원에 입원해 있을때 유진벨님의 기념비를 보았어요. 참 고마우신 분들입니다. 소중하게 담아갑니다 ^^
강희선배님! 많이 바쁘신가봅니다. 아니면 마음이 멀어지셨나요? 광주가 고향이면서도 호남신학대학교를 몇 주전에 가보았습니다. 아들 노래공부 시작하게 되어서 가보게되었는데, 선교사님들을 모셔놓은 자리를 보니 저도모르게 울꺽 눈물이 쏱아지더이다. 짧은 생이지만 저들처럼 한번 살아보야야할텐데..생각하면서도요. 일년에 두번쯤? 여름, 겨울에는 얼굴 좀 보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