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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상담
이 글은 2001년도에 현재의 나의 활동상황을 기록한 그 당시에 쓴 글입니다.
작년 한 해는 나에게 너무도 많은 일이 일어났으며, 어느 때보다 바쁜 한 해를 보냈다. 그것은 자립생활을 위한 동료상담과 자립생활 세미나를 통해서 이제까지 마음에만 담아 두어야 했던 나의 미래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 보고, 현실에 좀 더 충실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2000년 3월에 정립회관 마이크로소프트플라자 개관식 때 그곳에서 다양한 기능의 마우스로 컴퓨터를 사용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아니 생각하고 있었던 그런 마우스들이 그곳에 있었고, 또 그것을 사용하는데 매우 편리하고 또 빠르게 사용할 수 있는 마우스들이었다. 나는 지금 입으로 마우스 스틱을 이용하여 이 글을 어렵고 힘들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자씩 써 내려가고 있다. 그전에는 나무젓가락을 사용했었는데 이가 너무 아프고 또 물었던 자리가 잘 부러지고 해서 마우스 스틱으로 바꿨는데 참 좋다. 그런데, 장애인용품이 그렇듯이 그곳에 있는 다양한 마우스들이 장애인들에게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있는데 문제는 너무나 비싸다는 것이다. 마치 장난감처럼 보이는 마우스가 7~80만원이고, 비싸게는 350만원까지 있었다. 그것은 장애인들에게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시설에 가야만 마우스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래도 다행스럽다면 그곳에 다양한 마우스들이 비치되어, 또 그것들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어서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95년 1월 16일에 대학로 부근에서 차가 빙판길에 미끄러지면서 경추신경이 크게 손상되어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보통 경추손상 장애를 보면 손목까지 사용할 수 있어 보조기구를 이용해 컴퓨터도 하고 밥도 먹고 그러는데 난 워낙 심하게 다쳐 그것마저도 허락받지 못해 밥도 먹여줘야 한다. 어느 날이었다. 정립회관 사회복지사 박**씨가 자립생활을 위한 동료상담이 있다고 하면서 그 프로그램에 형은 꼭 참여해야 한다며 권유했다. 하지만 나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립생활, 동료상담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내는 못 이기는 척하면서 자립생활을 위한 동료상담 기초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자립생활은 1970년대 초에 들어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버클리에서 최초의 자립생활 센터가 탄생했다. 소아마비로 사지가 마비된 에드 로버츠라는 산소호흡기 중증장애인이 버클리 대학 졸업 후, 학생시절 교내에서 누릴 수 있었던 서포트 시스템을 지역에서 실현한 것이 자립생활의 시작이었다. 그 프로그램을 일본에서 받아들여 미국의 자립생활센터의 활동이 소개되면서, 세계장애인의 해(1981년)를 조금 앞두고 일본에 동료상담이 들어갔다. 동료상담은 자기신뢰의 회복, 인간관계의 재구축, 사회의 변혁 등을 목표로 장애가 있는 우리가 사회의 여러 면에서 억압에 의한 상처를 위로받고, 자기신뢰를 회복하는 것,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인간 신뢰의 기본에 둔 것이다. 장애가 있는 우리 자신이 힘 있는 존재가 되어 생생한 로룰모델 역할로 억압적이었던 사회를 변화시켜 가는 것과 장애를 수용하는 것뿐만이 카운셀링의 기능이 아니고 사회의 시민의 권리, 말하자면 소비자로 사는 생활, 자립한 지역생활전반에 걸친 정보를 교환, 원조, 소개 활동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나는 처음 동료상담 기초과정에 참여하면서 3박 4일 동안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기숙사에서 생활하지 않고, 집에서 다녔다. 그것은 내가 다른 장애인들에 비해 좀 더 중증장애인이라 정립회관에서 배려라면 배려고 특혜라면 특혜를 받은 샘이다. 내가 첫날 기초과정에 참여하면서 나는 기도를 했다. “하나님, 이 시간은 하나님이 저에게 허락한 시간입니다. 이 프로그램이 저에게 기회가 되게 하시고, 저로 인해서 이 프로그램이 지장이 없게 하시며 기초과정을 마칠 때까지 건강을 지켜주시고,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라고 말이다. 난 처음 그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내가 장애인이면서 그동안 몰랐던 것들을 새롭게 알게 되면서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것은 첫째 날 참여했던 장애인 인권, 복지, 역사, 운동 등 몰랐던 사실들을 하나씩 알게 되면서 내가 얼마나 무관심하게 살아왔는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둘째 날부터 본격적인 동료상담 기초과정에 참여하면서 일본에서 온 나까하라 에미꼬라는 중증장애인 여성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중증장애인이면서 지금 일본 Human Care에서 동료상담가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는 대단한 여성이었다. 한편으로 생각하니 그녀와의 만남은 우연이 아닌 듯싶었다. 그녀는 근육병으로 전신마비가 되었으며 그녀 곁에는 하루 24시간 활동보조(개호)인이 있다. 동료상담기초과정을 하면서 그동안 장애인들이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 의해 얼마나 억압받아오고 무시당해왔으며 그로 인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신을 잃어버리는 무기력한 말이나 소극적인 행동에 쉽게 포기하고, 스스로 나약해져 그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가 선택하고 결정하기보다는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 의해 계획되고 관리됐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동료상담을 통해서 그동안 억압받아온 상처와 아픔들을 감정의 해방을 하고 자기 신뢰를 회복하고 자신감을 얻어서 의존적이고 나약했던 마음들을 나 스스로가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신뢰를 회복하게 되며 자연스럽게 자립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3박 4일의 기초과정을 마치고, 그녀가 말했던 그리고 그녀와 함께 왔던, 개호인(활동보조) 서비스를 알게 돼 정립회관 시범사업으로 1주일에 24시간씩 7월부터 활동보조 서비스에 참여하게 되어 그동안 나와 오랜 세월 인연이 되었던 한양대학교 키비탄 봉사동아리 학생들을 유료활동보조인으로 하기로 했지만, 그들이 순수봉사목적에서 유료화한다는 것과 또 방학이 시작되면서 활동보조 시작은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우리는 자원봉사자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래서 활동보조인이라는 말이 조금은 생소할 것으로 생각한다. 활동보조인이란 자원봉사자와는 달리 임금을 지급함으로써 좀 더 책임감을 주고, 장애인 봉사자와의 관계를 떠나 좀 더 대등한 관계, 서로 필요한 존재로 관계를 유지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장애인 당사자인 내가 필요한 일에 필요한 때에 활동 보조인을 쓸 수 있다는 것과 장애로 인해 내가 하지 못하는 일과 잘하지 못하는 일등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다. 장애인은 그렇게 넉넉한 편이 아니다. 이 문제를 정부에서 해결해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정부에서는 항상 예산 타령만 하고 있다. 나는 다행히도 정립회관에서 활동보조인 비를 일부나마 지급해주어서 활동보조인과 함께 내가 필요한 일들을 할 수가 있다. 그렇게 우리는 동료상담 기초과정을 마치고, 매주 목요일, 정립회관 상황실에 모여 동료상담 서포터모임을 시작하였고, 또 자립생활에 관심 있는 20~30명의 사람이 모여 세미나를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자립생활을 시작한 미국, 일본, 캐나다 등과 기아, 기근, 인종차별, 그리고 장애인복지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자립생활까지 자료(책)를 번역해가며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자립생활 세미나를 하면서 우리는 『한국자립생활NETWORK』라는 단체를 구성하게 되며 나는 그곳의 회장을 맡게 되었고 그 이유로는 누구보다 중증인 내가 자립생활을 한다면 우리나라 중증장애인 대부분이 자립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자립생활NETWORK』에서는 중증장애인들의 자립생활을 돕고, 그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며, 잃었던 자기 신뢰와 자신감을 회복시키고, 지역사회에서 자기 일을 찾아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다음 위에서다. 그렇게 『한국자립생활NETWORK』가 구성되었지만, 자립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들이 또한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들은 자립생활 기술훈련과 활동보조서비스, 이동서비스, 주택서비스, 직업서비스 등 필요를 느끼면서 지원과 후원 없는 상황에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만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서울역에서 장애인 이동권 확보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에 우리도 동참하기로 하고, 『한국자립생활NETWORK』가 이동권 연대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자립생활을 위한 동료상담과 목요 IL세미나(중증장애인 자립생활 세미나)를 계속하면서 이동권 확보를 위해 적극적인 참여를 시작하였다. 내가 자립생활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지하철을 좀 더 이용하게 되었고, 대중교통인 버스에도 관심을 끌게 되었다. 사실 난 이동권 문제로 외출할 때마다 고민한다. 아니 그것은 우리들의 풀리지 않는 고민이다. 지하철을 이용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리프트조차 설치되지 않은 역도 많고, 리프트를 이용하려 해도 고장이 잦고, 불안하고,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니다. 그렇다고 버스를 타자니 승차 거부는 몰론 아예 이용할 수조차 없으며 택시를 타자니,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고, 무료차량 지원을 받으려면 아침부터 전화번호를 불나게 눌러대야 어쩌다 연결되고, 그것도 편도만 이용할 수 있는 날이 대부분이라 보니 외출하는데 제한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니며 장애인이 한 달에 다섯 번도 제대로 외출하지 못하는 게 우리들의 현실이라 보니 장애인 이동권은 꼭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합당한 일인 것이다.
이동권 확보를 위해 2001년 8월 23일 서울역에서 버스를 타고, 세종문화회관 앞까지 가려고 했지만, 경찰들의 저지로 서울역을 벗어나지도 못한 채, 우리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때 나는 서울역에 나가는 김에 편지를 쓰면서 알게 된 친구를 만나기로 했고, 그 친구를 만나면서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동생도 함께 만나기로 했다. 그 동생은 2000년 만기 출소를 얼마 두지 않고 8·15 때 특별 사면되었다. 나는 재소자들과 편지를 쓰고 있으며 출소한 사람들도 몇 명 있다. 내가 좀 더 편지를 자주 하고, 열심히 해야 하는데 요즈음 바쁘다는 핑계로 편지를 자주 못해서 항상 미안한 생각이 든다. 나는 제 작년에 마산 교도소에 있는 친구를 면회 간 적이 있었다. 그 친구도 편지 쓰기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사실 면회는 처음이었고, 그와 면회하면서 그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내가 처음이라 아무것도 넣어주지 않고, 왔던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려 청송에 있는 동생에게는 괜찮다고 하더라도 무언가를 넣어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청송에 간 적이 있다. 그런데, 초행길이라 내가 도착했을 때는 안타깝게도 이미 면회 시간이 끝났다고 하면서 거절을 당했다. 정말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너무도 아쉽고 서운했다. 하지만 그 녀석은 다행히도 2000년 가을에 만기 출소를 했다. 사실, 출소한 후에 잘 살았으면 하는 그런 마음과 바람을 가져보지만, 다시 수용되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밖에 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고,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는 여름날의 뜨거운 태양을 피해 시원한 호프집에서 생맥주 한잔을 하면서 지난날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 여동생은 일산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기쁨과 뿌듯함을 느꼈다. 그렇게 버스를 타려고 했던 우리들의 계획이 무산되고, 우리는 다시 8월 29일 날 혜화동 세븐일레븐 앞에서 다시 모여 왜 우리가 버스를 타야 하는가를 대외적으로 알리고, 대학생, 봉사자 등과 함께 8-1번 버스 4대에 나누어 타고, 세종문화회관으로 출발을 했다. 내가 장애를 겪고, 처음으로 타는 버스였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우리가 모두 처음 타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종문화회관 앞에 도착했을 때, 마지막 버스에 탔던 우리는 그 차를 바로 점거하면서 농성에 돌입했다. 그것은 분명 불법이고,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우리는 합법적으로 계속해서 정부에 우리의 요구를 강력히 전달했지만, 정부를 비롯한 관련기관에서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라”라면 휠체어와 몸에 쇠사슬을 감고, 버스를 둘러싸며 계속해서 농성을 시작했지만, 경찰들의 검거 작전으로 인하여 한 명씩, 한 명씩 연행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더 굳게 뭉쳐 우리의 요구를 시민과 매스컴에 알렸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비를 맞아가면서 계속 농성했지만, 비가 워낙 많이 내려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 위로 자리를 옮겨 그곳에서도 계속 농성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모두 연행되어 각 경찰서로 옮겨가 조사를 받았지만, 곧 풀려 날 수 있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한 달에 한 번씩 버스를 타기로 했다. 그리고 서울과 수원에 있는 성균관대 사회봉사론 시간에 학생들에게 장애인봉사에 관심을 둘 것을 강연했다. 그 결과 제법 많은 학생이 찾아왔고 그들은 겨울방학이 시작될 때까지 열심히 장애인들의 관심을 두고 봉사를 시작했다.
2001년에는 좀 더 많은 학생이 참여하여 장애인을 사랑하고 장애를 이해하며 관심을 두고 학점 때문만이 아닌 친구로 생각하여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9월에 들면서 동료상담기초 1~4기 48명 중 24명이 3박4일 심화과정에 참여했다. 나는 기초과정 때와 같이 집에서 다니려고 생각을 했었는데, 일본 연수와 자립생활을 배우고 있는 내가 기숙사에서 생활하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은 무책임한 행동 같고, 한번 기숙사에서 생활해보자는 주위 사람들의 말에 따라 가족을 떠나 처음 해보는 일들이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한번 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고,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 이번에는 기숙사에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심화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게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심화 과정에서는 동료상담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이고, 더 깊이 있는 내용으로 3박 4일 동안 교육을 받았다. 그 심화 과정 때에도 기초과정에 참여했던 나까하라 에미꼬씨가 강사로 왔고, 활동보조인도 같이 왔었다. 심화과정을 하면서 나는 하루하루가 모두 새롭기만 했다. 그것은 이제까지 내가 장애로 인해서 하지 못했던 일들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러므로 인해서 나도 모르게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 심화과정에 참여할 때, 어떻게 할지 몰라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그런 생각들로 가득했었는데, 막상 심화과정을 마치려니 서운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교육에 참여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심화과정을 마치고, 계속해서 동료상담 서포터와 자립생활 세미나를 계속했으며 그러는 중에 일본에서 동료상담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교류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어 우리는 모두 기뻤고, 또 자기 자신들의 Vision을 생각하는 그런 시간과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피노키오자립생활센터에 일본에서 노구찌 라는 중증장애인이 온다고 해서 피노키오자립생활센터로 향했다. 나는 그를 처음 본 순간 나와 같은 경추손상 장애인인 줄 알았다. 정말 나와 똑같았다. 그런데, 그는 근육병으로 인해서 전신마비 장애를 갖게 되었다고 했다. 내가 왜 그 사람을 만나려고 갔었느냐면은 그는 나처럼 손발을 전혀 쓸 수가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전동휠체어를 혼자 탈수 현상이 있다고 해서 어떻게 타는지 또 그 전동휠체어는 어떻게 생겼는지 보려고 갔었는데, 그날은 유감스럽게도 수동휠체어를 타고 왔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온 일행들과 『한국자립생활NETWORK』의 회원이고, 피노키오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이원교, 김기정(각, 뇌성마비 1급) 부부의 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 둘은 2000년 5월부터 자립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본에서 온 노구찌 일행들과 이원교, 김기정 가정을 둘러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는 다른 스케줄로 인해서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다음 날 나는 중앙대를 갔다. 중앙대 학생회관 앞에서 민중의 복지, 노동권․생활권 쟁취를 위한 연대 한마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장애인 단체를 비롯한 산재 노동자, 이주 노동자, 실업 노동자, 장애 노동자, 비정규 노동자 등 민주노총 소속에서 많은 노동자가 나와서 인권과 고용안정, 차별노동 폐지, 삶의 질 향상, 주택, 건강 교육 관련 등 노동자의 현실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그런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이동권 확보를 위해 마로니에 공원에서 장애인 인권 사진전과 함께 장애인 이동권 확보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계속하였다. 어느 날 우리가 원하던 저상형 버스를 타게 되었다.
그것은 대우자동차에서 협찬으로 이루어졌지만, 모든 것이 우리의 노력과 계획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이슈였다. 그날도 우리는 일반버스를 탔다. 그 이유는 일반버스에 휠체어 장애인이 타기란 얼마나 힘들고, 불편한가를 알려주고, 저상형 버스가 도입되면, 얼마나 장애인을 비롯한 노약자, 임산부, 어린이가 편리하고, 안전하게 그리고 빠르게 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시간이 되었다. 정말 저상형 버스를 처음 타는 우리는 그 버스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누구의 도움 없이도, 쉽게 탈 수 있는 버스가 하루빨리 도입되어서 장애인 이동권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본다. 그렇게 저상형 버스 타는 행사 아닌 행사를 마치고, 동료상담 기초과정(48명)과 심화과정(24명)을 마친 장애인 7명과 사회복지사 3명은 6박 7일간의 일본 연수를 다녀왔다. 처음 일본 나리타공항에 도착했을 때, 공항 직원의 친절과 배려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가식적인 행동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일본 사람들이 친절하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되었다. 그날은 Human Care에서 리프트 차량을 2대 지원해 주었다. 난 처음에 정립회관과 지체장애인협회 심부름센터에서 운행하는 리프트 차량을 생각하고, 운전석 옆자리에 앉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 리프트 차량은 차고가 높고, 휠체어가 자동으로 이동하여 나와 같은 중증장애인도 쉽게 탈 수 있도록 설계되어있었으며 정부에서 지원해 준다는 말에 너무 부러웠고, 기가 죽었다. 그렇게 3시간가량을 달려 하치오지에 있는 Human Care에 도착했다. 그리고 사무실을 들어서는 순간 우리가 그곳에 출발하기 전에 아니 제 작년에 피노키오자립생활센터 정만훈 소장이 KBS 수요기획을 통해서 방송되었던 프로그램을 통해서 봤던 아끼야마 히로꼬를 보게 되었다. 아끼야마 히로꼬 또한 근육병으로 엄지손가락 하나만 사용할 수 있는 중증장애인이었으며 그녀는 하루 24시간 활동보조인과 생활하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가 앞으로 숙이더라도 혼자 힘으로는 머리를 들 수 없는 그래서 활동보조인이 들어 줘야 하는 중증장애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립생활을 하고 있다. Human Care에서 잠깐 인사를 하고, 몇 명은 호텔로 저를 비롯한 3명(사회복지사1명, 활동보조인(뇌성마비 4급))은 자립생활 체험실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체험실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곳에 설치되어있는 전동문과 전동침대, 또, 고정식, 이동식 리프트 등을 보고, 이것은 오래전부터 내게 필요한 것들인데, 그것들을 사용하지 못하고, 먼 일본 체험실에 와서야 체험할 수 있다는 현실에 조금은 아쉽고,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6박 7일간의 생활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느끼도록 했으며 경험하게 했다. 내가 동료상담을 통해서 처음으로 집과 가족을 떠나 낯선 곳에서 활동보조인만의 도움으로 생활한다는 것이 조금은 불편하기도 했지만, 이제부터 자립생활의 시작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고, 비장한 각오까지 들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일본에 있는 동안은 엄마를 비롯한 내 가족이 나로 인해 그동안 힘들고, 고달픈 생활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고, 나 또한 가족을 떠나 활동보조인과 함께 있으면서 내가 자립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우리 일행은 Human Care 사무실에서 나까니시 쇼우지를 비롯해서 나까하라 에미꼬, 아끼야마 히로꼬 등을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며 Human Care에서 하는 일과 장애인들에게 미치는 영향들을 듣게 되었다. 문득 나까니시 쇼우지께서 나에게 자립생활을 할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여러 가지 여건이 갖추어지면 자립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된 생각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사실 내 자신이 자립생활을 하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주변의 환경이 아니라, 욕창과 신변처리 문제다. 나는 이 문제로 상당히 많이 고민하고 있으며, 지금도 욕창으로 고생하고 있고, 실수라도 할까 봐 모든 것이 조심스럽기만 하다. 내가 꼭 집을 떠나 혼자 사는 것만이 자립생활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지금 자립생활을 시작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나도 자립생활을 할 수 있다는 의식과 인식의 변화다. 그것은 나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과 활동보조인 있기 때문이다. 1박 2일간의 동료상담 워크숍 때에는 기초심화 과정에서 우리가 배웠던 동료상담이란과 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인간의 본질과 감정의 해방에 대해서, 패턴과 신뢰를 받는다는 것 등에 대해서 평가받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자립생활 프로그램으로 지하철을 이용해서 노구찌가 일하는 다찌가와 자립생활센터와 한즈 세다가야 자립생활센터로 나누어 가기로 했다. 나는 지하철을 이용하여 노구찌가 일하는 다찌가와 자립생활센터로 가기로 했다. 지하철을 이용하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역무원이 지하철 입구까지 내려와서 승강장과 지하철의 턱에 경사로를 놓아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목적지가 어디냐고 물어봤으며 그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역무원이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곳에서도 경사로를 설치해 주었다. 이 일은 정말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리프트가 고장이나 역무원에게 인터폰을 하면 바쁘다는 이런저런 핑계로 잘 내려오지도 않는데, 이곳 일본에서 장애인 한 사람이 이동할 때마다 불평 한마디 없이 장애인과 동행해 준다는 사실에 우리 모두 놀랐다. 또한, 우리가 목적지에서 내리지 않을 때는 역무원이 목적지가 다 왔다고 알려주기도 한다고 한다. 그렇게 지하철을 이용해서 그리고 승강기를 이용해서 노구찌 사무실에 도착했다. 1층은 자립생활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자립생활을 알리기 위한 사무실이고, 2층에는 자립생활 체험실 등 노구찌가 업무를 보는 곳이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노구찌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가 결혼했는데도 24시간 언제나 활동보조인이 있었다. 그날 통역은 전에 노구찌와 함께 한국에 왔던 한 여성분이 통역해주었고, 자립생활센터에서 하는 일들을 들으면서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고, 우리가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그런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나는 노구찌가 타고 있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싶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노구찌가 전에 타고 있던 휠체어가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내게 내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턱을 이용해서 전동휠체어를 탈 수가 있었다. 정말 신나고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에서는 전동휠체어가 지급되고 있으며 노구찌나 히로꼬등과 같은 중증장애인에게는 개조비까지도 지급하고 있다고 하니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말이다. 노구찌는 그렇게 개조한 휠체어를 턱을 이용해 15년을 탔다고 한다. 그리고 다찌가와 역 승강기가 설치되기까지 또한 지하철에 역무원이 경사로를 설치할 때까지 너무도 많은 힘겨운 나날을 보냈으며, 그것이 결코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며 쉬운 일이 아니기에 오랜 시간동안 투쟁하고, 요구를 계속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 그곳에 승강기가 설치되기까지 15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나는 일본 장애인들의 자립생활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시작하고 있는 일들이 쉽게 이루어질 거라는 생각보다는 5년이든 10년이든 지속적인 우리의 요구와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나는 아끼야마 히로꼬와 함께 자립생활프로그램에 하나로 그녀와 활동보조인과 저와 활동보조인(뇌성4급)은 함께 저녁을 초밥으로 먹기로 했다. 그래서 그녀를 따라 한 음식점 앞에 도착해서 무엇을 먹어야 할지 또 어떻게 먹어야 할지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림을 보고 각자 먹고 싶은 대로 골라 먹기로 했다. 초밥 맛은 우리나라에서 먹던 맛과 별 차이가 나지 않았고, 가격 또한 그렇게 비싸지도 않았다.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한글 첫걸음과 일어 첫걸음을 뒤지면서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사실, 히로꼬는 엄지손가락 하나만으로 개조된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그래서 나나 히로꼬는 전신마비라 body language로도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로 웃기도 했다. 식당에서 나와 서로에게 선물을 하기로 했다. 나는 그녀에게 머리 끈을 선물해 주었고, 그녀는 나에게 명함집을 선물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 명함집을 사용하고 있다. 자립생활프로그램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영화 보는 것, 쇼핑하는 것, 음식을 만드는 것, 청소하는 것 등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자립생활프로그램인 것이다. 다음날 우리는 한 여성장애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고바야시이며 나와 같은 경추손상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나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그녀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집 앞에는 무선으로 조종할 수 있는 수직형 리프트가 설치되어있고, 방안에 들어서자 전동침대를 비롯한 그녀가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개조되어있었으며 화장실에는 고정형 리프트가 설치되어있었다. 여자분이라서 인지 방은 잘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취미는 여행이라고 한다. 농담 삼아 한국에 한번 오라고 하니 추워서 안 된다고 하더라. 이해한다. 그녀 역시 옆에는 활동보조인이 있고 하루 10시간 함께 생활한다고 한다. 그녀는 지금 자립생활을 하고 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좀 알려진 장애여성이라고 한다. 그녀는 한참 사춘기 때인 17세에 사고로 장애를 경험하게 돼 그로 인해 낙심하고, 인생과 자립을 포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우연한 기회에 Human Care 나까니시 쇼우지를 알게 되면서 자립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녀는 지금 동료상담가가 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으며 그만큼 되기까지 일본 장애인 선배들이 얼마나 큰 노력과 투쟁을 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보고 느낀 우리는 마치 사명감에 불타있었고, 우리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하고, 또 우리의 노력으로 인해서 우리 후배 장애인들에게도 희망이 될 수 있는 좋은 환경과 편의시설에서 자립생활을 할 수 있고, 장애로 인해서 편견과 차별받지 않는 사회가 되도록 우리 스스로가 큰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자립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나 스스로가 지금 당장 자립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섣불리 서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립생활에 관심이 있는 반면에 실패하는 예도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변화의 삶 그것은 나 자신의 신뢰와 나도 할 수 있다는 의지와 인식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그동안 장애인의 삶은 억압받아오고, 무시당해 왔으며 그로 인해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한 말이나 행동에서 우리 스스로가 나약하고 의존적인 삶을 살아왔으며 항상 보호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강하다. 마음먹은 것은 그대로 할 수 있으며, 생각했던 대로 이루는 힘이 있다. 억압적인 사회에서는 그 힘에 대한 오해와 힘의 독점이 있었다.
억압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닌 힘을 어떤 한 사람이 권력이라는 형태로 독점하여 공포를 만들어 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그 억압받아온 감정과 상처 그리고 아픔을 표출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이제 동료상담을 통해서 감정의 해방하고, 우리는 결코 뒤떨어진 인간도 아니고, 생명의 소중함은 누구에게나 같은 것이기에 그동안 우리가 잊고 살아왔던 우리의 권리를 찾고, 장애가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내어 언제나 자기가 생각하는 최선의 길을 걸어왔다는 자기 신뢰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당신은 위기에 강한 사람이다. 장애 해방과 자립생활을 위하여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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