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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쓰임받는 인생
2012.7.22 사사시 6: 11-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 치듯 하리라"
여러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떻게 살면 축복받은 인생이 될까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입니까, 아니면 돈 많이 벌고 성공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살다 죽는 것입니까, 아니면 나는 희생하며 살더라도 무엇인가 세상에 많이 기여하며 사는 것입니까? 지나가는 한 세상에서는 어느 것도 온전한 축복은 없습니다.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 붙잡혀 쓰임받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기준은 부자나 가난한 자난 성공 자나 실패 자나 죽으면 끝입니다. 결국은 일반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 전도서 9:2) 전도서 저자의 고백입니다. 그는 왕으로써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눈이 원하는 대로 다 하고 누려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해 아래 수고하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였습니다(전도서 1-2장). 30세의 젊은 나이에 세계를 정복하고 죽은 알렉산더 대왕은 죽을 때 관에 구멍을 뚫어 자신의 손을 밖으로 내어 놓으라고 유언했습니다. 인생인 빈손으로 떠나게 된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성공자자 실패자나 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멋져 보여도 결국은 허무로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붙들려 쓰임 받는 자는 다릅니다. 자신의 구원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삶을 살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비록 자신은 부족하고 가문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 없을지라도 최상의 열매를 맺으며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과도 허무하지 않고 영광스럽습니다. 성경에는 바로 그렇게 오늘날 하나님께 붙들려 귀하게 쓰임을 받은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일강에 버려져 죽을 운명의 노예 자식인 모세, 이새의 일곱째 막내 아들로 무시받던 다윗, 두려워 포즙틀에서 밀을 타작하다 부름부음 받은 기드온, 뽕나무 배양하다가 부름 받은 하박국이나, 시골처녀 마리아,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잡던 어부 베드로 등등 많습니다. 이들은 가문이나 족벌이나 세상에 나타낼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 붙잡혀 귀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후회 없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 기드온에 대해서 배워보고자 합니다. 11절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아 쉬었습니다.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었다하였습니다. 당시는 아직 이스라엘이 건국하기 전이라 왕도 없고, 하나님의 사사들이 다스리던 사사시대였습니다. 가나안에 이르렀지만 이스라엘은 정착하지 못하고 주변 나라들에 의해서 침략을 받으며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추수를 할 때쯤 되면 주변 강국들이 쳐들어와서 곡식이며 짐승을 약탈해갔습니다. 청년 기드온도 너무 두려워서 소리 없이 하려고 밀을 포도즙틀 안에서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메시지를 전해주셨습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기드온은 이런 갑작스런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가 되기보다는 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왜 이런 일이 생겼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말한 출애굽의 이적은 어디 있으며, 오늘날 이렇게 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이런한 그에게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시고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그 때 기드온이 다시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고백합니다.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5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은 므낫세 중에 극히 작고, 아비집은 그 중에서도 제일 작다는 것입니다. 제일 작은 지파 제일 약한 가문에 제일 두려움 많은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느냐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기드온의 고백과 심정은 오늘날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돌아보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같을 것입니다. ‘나같은 자가 뭘 할 수 있느냐?’ 그래서 시도 조차 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나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내가 너를 붙잡고 쓰겠다는 것입니다. 너의 약하고 부족한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치듯 하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이 틀린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말씀 하시면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까? 창세기를 보시시오. 가라사대 말씀 하실 때마다 다 ‘그대로 되니라’ 하지 않았습니까? 기드온이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바라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여 순종하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사사기 7장을 보면 300 용사만으로 메뚜기떼 같은 아말렉 군대를 섬멸하고 대 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쟁은 단지 부족 간에, 나라 간 국가 간에 실리를 따지는 그런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고 영적이 터가 세워지는 중요한 전쟁이었고 여기에 기드온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도 연약하고 부족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이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얼마던지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똑똑하고 강하다고 자랑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약하다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인생에 + 알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혀 쓰임 받는 인생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20세기 성녀로 불리우는 테레사는 ‘소박한 기적’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우리 주님이 쥐고 있는 몽당연필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연필을 자를 수도 있고 깎을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무언가 쓰고 싶으면 쓰시고 그리고 싶으면 그리실 겁니다. 멋진 그림을 보거나 감동적인 글을 읽은 때 우리는 미술 도구나 연필을 칭찬하지 않고 그것을 사용해서 작품을 만든 사람에 대하여 감탄합니다. 온갖 명예와 영광이 영원히 우리 주 하나님께 함께 하기를!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인간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들은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되지 않았다단 말입니까? 그럴리가요. 가난한 사람들도 인간이고 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구하나 거들떠 보는 사람도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는 바로 그 일을 하라고 저를 사용하셨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자신을 보잘 것 없는 몽당연필이라 하였습니다. 키가 150cm 정도 단신이지만 영적으로는 거목입니다. 그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녀 역시 큰 일은 못하고 인도 캘거다 거리에서 죽어가는 한 사람을 데려다 보살피는 일부터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몽당연필 같은 자를 들어 쓰실 때 20세기 성녀라 불리울 만큼 큰 일을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 사사기의 하나님이 귀하게 쓰신 사사 기드온도 몽당연필 같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본인 스스로가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사실 우리 자신이 작고 큰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철부지 아이의 손에 있으면 부러져 못 쓰는 몽당 연필이 될 수도 있고, 훌륭한 문학가의 손에 잡히면 노벨평화상을 받는 문학작품을 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전 세계 160여개국 1억명의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사랑받고 있는 작가 파울로 코넬료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할머니가 연필로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어린 손자가 다가와서 묻습니다. “ 할머니 무슨 이야기를 쓰고 계세요” 할머니는 쓰던 손길을 멈추고 손자에게 대답합니다. “그래 너에 대한 이야기란다. 하지만 무슨 이야기를 쓰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쓰고 있는 이 연필이란다. 이 할머니는 네가 커서 이 연필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 할머니! 하지만 늘 보던 연필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는데요!” “그건 네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거란다. 연필에는 다섯 가지 특징이 있지. 그걸 네 것으로 할 수 있다면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게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다섯가지 인생의 귀한 교훈을 말해주었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말이다. 연필은 누군가에게 붙들려야 쓰일 수 있는 거란다. 연필이 제 스스로 쓰여 질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누군가가 붙들어야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거란다. 사람을 붙들고 있는 그 누군가 그 존재를 신이라고 부르지. 그 분은 너를 당신 뜻대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가 너를 꼭 붙들어 그의 뜻대로 쓰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여러분 아무리 좋은 기계 몇 천 만원 자동차라도 사람에게 붙잡히지 않으면 소용이 있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하나님께 붙들려야 귀하게 쓰임 받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안 붙들리면 한 세상에 누리며 살다가 끝나는 소모품과 같은 인생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몽당연필 처럼 그 자체로 폐기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가끔은 쓰던 걸 멈추고 연필을 깎아야 할 때도 있다는 사실이다. 깎여지지 않은 연필은 쓸 수가 없는 것처럼 단련되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어디에 쓸 수 있겠느냐. 신은 가끔 너를 깎아내는 고통의 시간들이 있을게다. 당장은 좀 아파도 더 예리하게 쓰기 위한 과정임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단다. 너에게 고통의 시간이 왔을 때 그 아픔을 잘 견뎌내는 법을 배워야 할게다. 그래야 좀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테니까! 인생이 언제나 잘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따금은 더 예리해지고 성숙해지기 위해서 연단의 과정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시련이 올 때 원망하지 말고 자기 성찰의 기회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가장 어려울 때 하나님이 나에게 두신 뜻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연필에는 실수를 지울 수 있도록 지우개가 달려 있다는 점이란다. 아무리 바르게 쓰려고 해도 때로는 잘못 쓰여 질 수가 있는 것이 글씨가 아니겠니? 사람도 때로는 잘해보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큰 실수로 나타날 때가 있단다. 그러나 잘못을 저지르고 실수를 했다 해도 그 자리 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면 안 되느니라. 잘못된 글씨는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써야 하는 것처럼 설령 실수와 잘못이 있었다 해도 다시 시작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다시 시작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분이니까. 사람이 가끔 실수도 하고 잘 못 할 때도 있기 마련인데 그 때 겸손히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네 번째는 연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외피를 감싼 나무가 아니라 그 안에 든 심이라고 생각지 않느냐? 겉모양이 화려하고 보기 좋아도 심이 약해서 쉽게 부러진다면 누가 그 연필을 좋아하겠니.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지 않느냐. 외모가 화려하고 겉모양이 보기 좋아도 그 사람이 인격이나 성품이 잘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러니 늘 네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렴. 연필심의 특징은 강하고 질 좋은 것이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치장이 아니라 내면의 성숙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인성과 영성을 가꾸어 나가는데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연필은 항상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이란다. 마찬가지로 네가 살면서 행하는 모든 일 역시 흔적을 남긴다는 걸 명심하렴. 우리는 스스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 늘 의식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거란다.
연필이 지나간 자리에는 쓸데 없는 낙서도 있고, 그림도 있고, 유명인의 싸인도 있고 시 수필 소설, 중대한 계약도 남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자취는 사람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것도 있고 어떤 연필 자욱은 몇 천 만원, 몇 억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말씀이 남기도 합니다. 사람이 지나간 자리 어떤 모양이던 자취가 남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서산 대사의 말처럼 그 뒤에 누가 따라올지 모르지 눈 길을 걸어도 바르게 걸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인생은 누구가 똑같습니다. 태어나서 병들고 늙고 죽고... 건강 능력 지혜 거기가 거기입니다. 일반입니다. 나중에 다 달라서 버려지는 몽당연필 같은 존재가 됩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옛날 어린 시절에는 이런 몽당연필을 시용하였습니다. 너무 작아서 볼펜껍데기에 끼워서 기도 하였고, 연필심이 안 좋으면 침을 묻혀서 쓰기도 하였습니다. 운동회가 소풍이 되면 연필 몇 자루를 상으로 받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 달리기도 하였습니다. 몽당연필 그 자체로 가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누가 붙잡고 쓰는가에 따라서 결과는 상상을 못할 정도로 차이가 나게 됩니다. 그런 몽당연필과 같은 존재인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 붙들려 쓰임 받는다면 그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면 누구나 귀한 존재가 됩니다. 예레미아는 하나님이 자신의 부르심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1:5) 저와 여러분 모두 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입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하나님께 붙잡혀 쓰임 받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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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쓰임받는 인생이 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아버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