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매헌공 묘갈명(墓碣銘) 병서
退溪之門有林公亨秀 亨秀從子 有觀海公之賢 鶴城梅軒 李公 實往師之 以成其學 公開學之誠 渕源之正 是令人起敬也 公之後孫 持憲覲吾甫 ,袖正言南公景羲氏所撰狀 來請表群之文 台佐何敢當是役。其於孝孫之託 有不敢終辭 謹按狀公之諱謙益 字子裒 鹤城之李 皆祖中樞院使藝 國初對馬島有事 中樞公涉海者 十三刷還六百 大捷而歸 專對折衝之才 名振華夷 生諱 宗實 官至嶺南水軍節度使 亦三討島夷 遇風不還 朝廷遣官招魂以葬 生諱直剛 是為公高祖 曾租諱植 祖考諱變林訓練院正 考諱遇春直長 妣朴氏 禦侮將軍自恭女 以萬曆乙亥正月二十九日戌時 生公 幼有器局性至孝 五歲丁外艱 奉母夫人定者溫清 靡不用極 壬辰亂 公年十八 避兵入 圓寂山 母夫人 觸風露疾劇 公竭力供養 如居家時樵探路 遇賊數人 挺刃趁追 見公超過大溪隔水投刀 公取刀斫賊 刀傳于家 明年秋 母夫人 卒阬葬途 伯兄 判官公謙受 赴戰 多斬獲事聞 除軍資監參奉 陞奉事 公 讓功不居 亂未定 公 慨然謂季兄謙福曰 生為男子 武不能封侯 文不為聞道 恥也 雖干戈中 豈無閒靜地可學 兄弟以童 非徒步千里 往登于林觀海 之門 觀海公愛而留之 三年學成歸 奉母夫人柩 合葬直長公墓 以亂中未遑持服 追服居臚 至今過其墟者 指點李孝子 所居云 林公 以廣州牧 立殣于 仁祖甲子之亂 公聞卽 趨哭 心喪如禮 林公夫人 感其誠 贈書籍傳守寶 晚築精舍 號梅軒 蒔花種竹 日讀書其中 尤好中庸大學 教子侄有法 割田民給 兄子以奉祀 乙酉十二月二十五日卒 享年七十一葬于府西蓮田 辛坐之原 配一直孫氏 格齋諱肇瑞六代孫 諱諟復女 生六男 廷元早沒 廷憲 廷義 廷禮 廷智 廷信 皆以孝友文學稱 孫曾以下凡幾人 嗚呼 公雖生長巔海之陬 忠與孝 自是家傳之物 天賦之性 而方其干戈搶攘之際,不憚遠而負岌從師 琢玉以成其器 又何韙也 其桑榆之收 必有卓然樹立者 以文獻散佚不傳 殊若可限然 垂裕之慶 式至于今 蔚然門戶之昌大 天所以報善人者 其在斯歎銘曰 竭力而事親 終始以禮 孝也 隨兄而舉義 以赴國難 忠也 千里而從師·事之如一學之所由成 而垂啓佑之功也
通政大夫 承政院 同副承旨兼 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豊山 柳台佐 撰
崇禎紀元後四 乙酉十月 日
六代孫 種驊 謹書 六代孫 種德 立
檀紀四仟參百參拾六年 癸未 十月 日
梅軒公門會 謹竪(세움)
퇴도(退陶)의 문하(門下)에 임공(林公) 금호형수(錦湖亨秀)가 있었다. 형수(亨秀)의 종질(從姪) 관해공(觀海公) 회(檜)라는 현사(賢士)는 학성(鶴城) 매헌이공(梅軒李公)의 학문(學問)을 성취(成就)시킨 스승이시다. 공은 글을 배울 때 성심껏 묻고 익혀서 논리적인 근원을 바르게 깨닫게 되면 일어나 존경의 절을 하니, 이를 지켜본 사람들로 하여금 만족감을 느끼게 하였다.
공의 후손(後孫)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근오(覲吾)가 정언(正言) 남공(南公) 경희(景羲)께서 찬(撰)한 매헌공(梅軒公) 행장(行狀)을 소매에서 표정(表證)과 함께 내밀면서 매헌공의 묘갈문(墓碣文)을 청(請)하므로 대좌(台佐)는 어찌 감히 이 벅찬 일을 감당하리오. 그러나 그 효손(孝孫)의 부탁(付託)을 끝내 사양(辭讓)할 수가 없었다
삼가 공(公)의 행장(行狀)을 살펴보니 휘(諱)는 겸익(謙益)이요. 자(字)는 자부(子裒)이며, 본(本)은 학성이씨(鶴城李氏)이다. 비조(鼻祖) 중추원사(中樞院使) 예(藝)는 선초(鮮初) 대마도이(對馬島夷)의 침탈(侵奪)사건이 있어 중추공께서 40여 회나 해도(海濤)를 누비면서 피로인(被擄人) 육백여 명을 쇄환(刷還)하는 등 대첩(大捷)을 거두어 돌아옴에 공(公)은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써의 재능(才能)을 대마도이(對馬島夷)에게 발휘(發揮)하였으니 그 명성(名聲)이 중화(中華)에까지 떨쳤다. 아들 휘 종실은 벼슬이 영남수군절도사(嶺南水軍節度使)로서 또한, 대마도이(對馬島夷)를 세차례나 정복(征服)하였으나 불행히도 풍랑(風浪)을 만나 생환(生還)하지 못하니 조정(朝廷)에서는 관원(官員)을 파유(波遺)하여 초혼장(招魂葬)을 치렀다. 손자의 휘(諱)는 직강(直剛)이니 공의 고조(高祖)이며, 증조(曾祖)의 휘(諱)는 식(植)이요 조고(祖考)의 휘(諱)는 변림(變林)인데 훈련원정(訓鍊院正)을 지냈고, 선고(先考)의 휘(諱)는 우춘(遇春)으로 벼슬은 직장(直長)이었다.
선비(先妣) 박씨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자공(自恭)의 여식이었다. 공은 만력(萬曆) 을해(乙亥)(1575) 정월 29일 술시(戌時)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생각하는 바가 크고 깊었으며, 천성(天性)이 효성(孝誠)스러웠다. 5세(1579) 때 아버지를 여의고 모부인(母夫人)을 정성(定省)과 온청(溫凊)으로 봉양하여 보살피고 뜻을 따르며 보양하였다. 임란(壬亂) 때 공의 나이 18세(1592)였으며, 원적산(圓寂山)으로 피란시(避亂時) 중풍증(中風症)으로 고생하는 모부인을 집에서 살 때처럼 모셨다. 어느 날 산에 땔나무를 하러 가는 길목에서 수명의 왜적을 만나 저들이 긴칼을 뽑아 휘두르며 좇아 왔다. 이를 본 공(公)은 급히 큰 개울에 뛰어 들었다. 물을 사이에 하자 공을 죽이려 칼을 던졌다. 공이 왜적의 칼과 작도칼을 잡고서 왜적을 쳤으니, 그 칼이 집안에 전해오고 있다.
이듬해 가을 어머님이 돌아가심에 언덕에 가매장을 했다. 형(兄) 겸수(謙受)는 전장(戰場)에 나아가 많은 적(賊)을 참수(斬首)하기도 하고 사로잡기도 했다.
公은 군자감참봉(軍資監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며 그 후 봉사(奉事)에 승진(陞進)하셨다. 그러나 공은 전공(戰功)을 사양하고 관원(官員)에 나아가지 않았다. 임란(亂中)인데도 공은 계형(季兄)인 겸복(謙福)에게 탄식(歎息)하며 이르기를 “남아(男兒)로서 태어나 무(武)에 능(能)하지 않으면 우후(虞侯)가 될 수 없고 문사(文士)의 길을 좇지 아니하면 부끄럽지 않겠느냐. 비록 전쟁 중이라도 어찌 바쁨이 없이 조용히 살기만 하고 이찌 배움을 멀리하랴.
형제(兄弟:겸익,겸복)는 이제 아이가 아니니 천리길의 산등(山登)을 넘어 임관해(林觀海)의 門人이 되어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형제는 관해공(觀海公)의 집에서 사랑을 받으며 3년간 배우고 돌아와 모부인(母夫人) 관구(棺柩)를 직장공묘(直長公墓)에 합폄(合窆)으로 봉안(奉安)했다
난중으로 급하여 의복을 가지고 오지 못하였으나 움막에서나마 상신(喪身)의 예(禮)를 다했다 지금도 그곳을 이효자(李孝子)가 살았던 곳이라 이른다. 임관해공(林觀海公)께서는 광주목사(廣州牧使)로 계실 때 돌아가셨다. 그때가 인조반정(仁祖反正, 1624) 때라 임공(林公)의 부음(訃音)을 들었으나 즉시 달려가 심상례(心喪禮)하지 못하고 마음으로 상인(喪人)처럼 예곡(禮哭)하였다
임공(林公)의 부인(夫人)께서 그 성심(誠心)에 감복(感服)하여 임공의 서적(書籍)을 내리심에 이를 가보(家寶)로 전(傳)해 온다.
늦게야 정사(精舍)를 짓고 호(號)를 매헌(梅軒)이라 했으며 꽃모종과 대나무를 심고 그곳에서 독서하였다. 특히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읽기를 좋아하고 아들과 조카들에게 글과 예법을 가르쳤으며, 장질(長姪)로 하여금 봉축(奉祀)케 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전답(田畓)을 나누어 주었다.
공은 을유(乙酉) 1645년 12월 25일 돌아가시니 향년 71세였다. 부서연답(府西蓮畓) 신좌원(辛坐原)에 예장(葬禮)했다. 배(配) 강성문씨(江城文氏)는 천일(天日)의 여식이고 자식은 이남(二男) 창발(昌發) 융발(隆發)(無后)이고, 배(配) 일직손씨(一直孫氏)는 격제(格齊) 휘조서공(諱肇瑞公)의 6대손인 휘 시복(諟復)의 여식이고 자식은 육남(六男)으로 정원(廷元)은 조졸(早卒)하고, 정헌(廷憲) 정의(廷義) 정례(廷禮) 정지(廷智) 정신(廷信)을 두었다. 모두 효우(孝友)와 선비로서 칭명(稱名)되었으며 집집마다 손자 증손자를 몇 명씩 두었으며, 손증이하(孫曾以下) 약기(略記)한다.
슬프다 公은 비록 영남해읍(嶺南海邑)에서 생장(生長)하였으나 충효례(忠孝禮)의 가문으로서 자수(自守)하며 문물이 전해진다는 것은 하늘이 부여(賦與)한 음덕(陰德)이 아니랴.
그러나 바야흐로 그처럼 전쟁의 참상 속에서 멀다고 싫어하거나 부담스럽거나 흔들리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을 쫓아 옥을 쪼아 그릇을 짓듯이 정직하고 바르게만 살았도다.
그것은 만년(晩年)에 와서 반드시 뛰어난 자손들이 우뚝 설 것이니라. 다만 문적(文籍)이 산실(散失)되어 전하지 아니하니 가슴을 치고 싶도록 한스럽다. 그러나 늦 바탕에 맞는 경사가 이제야 드러났도다. 문호(門戶)가 울창(蔚昌)한 것은 하늘이 선자(善者)에게 내리는 보답일지니 이제 글을 맺음에 있어 그것을 명(銘)하노니 힘써 어버이를 섬기고 시종의 예는 효(孝)요. 형을 따라 국난(國難)에 의거(義擧)함이 충(忠)이요. 천리길의 스승을 쫓아 받들기를 하나같이 하여 배움에의 이룩한 까닭은 하늘이 도우심의 공(功)일지니라.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풍산 유태좌 찬
通政大夫 承政院 同副承旨兼 經筵參贊官 春秋館 修撰官 豊山 柳台佐 撰
崇禎紀元後四 乙酉 十月 日
六代孫 種驊 謹書
六代孫 種德 立
西紀2003年 癸未 十月 日
梅軒公門會 謹竪(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