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의 손이 짓는 예술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살고 싶고 가보고 싶은 곳이 고향입니다. 푸근한 고향 인심이 닫았던 마음도 열어놓게 만듭니다.……”
프롤로그 내레이션과 함께 누가 자전거를 타고 들판을 가로 질러 달려가고, 마을회관 처마 밑에 달린 ‘살고 싶고 가보고 싶은 전국 100대 마을’ 지정패를 보여주면서 활짝 열린 어느 집 대문이 화면을 채운다. 조씨가 집 지은 이후로 한 번도 대문을 닫아본 적이 없다고 하며 대문 없는 집들을 보여주다가 뒷집 수도에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고 잠가준다.
“네 집 내 집 할 것 없이 서로 살펴주며 살아가는 곳이 고향입니다.”
사람들이 마을 정자로 모여 든다. 정자에 앉은 사람들 모두 함박웃음을 머금은 얼굴이다.
“문 다 열어 놨어요. 확 열어 놨어요. 밤낮으로 열어놨어요.”
마을에서 제일 연로하신 막실할아버지가 대문도 없이, 문이 있더라도 닫을 필요가 없이 사는 마을 사람들의 인심을 카랑한 목소리로 자랑한다. 그리고 이장은 마을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을 다시 한 번 자랑삼는다.
마을 정경이 화면을 덮으면서 “정 깊은 고향 못고개에 살렵니다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라는 자막이 큼직한 글씨로 떠오른다.
<고향 에세이 ‘사노라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피디는 하룻밤을 마을에 묵으면서 마을의 모습과 그 마을 속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내기에 애썼다. 주제는 대문을 활짝 열어놓듯 마음도 활짝 열고 서로 돕고 나누며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삶이다. 그렇게 촬영하여 모우고 추린 이야기들이 녹음이 짙어져 가던 유월 어느 날 저녁 무렵 텔레비전을 타고 흘러나왔다. 마을 사람들은 집집이 혹은 누구네 집에 함께 모여 마을의 따뜻한 이야기들을 뿌듯한 마음으로 즐기고 있었다.
멋쟁이할머니 오천댁은 오늘도 읍내의 노래교실에 가서 노래를 배우고 돌아오며 집으로 들어가는 고샅에서 오늘 배운 노래를 흥얼거린다. 남편도 없이 사형제 아이들을 다 키워 모두 내보내고, 헛헛한 마음을 마당 텃밭에 자라는 채소며 화초로 채우며 즐겁게 살고 있는 오천댁에게 피디가 말을 건넨다.
“이 동네에 오니까 전부 나눠 먹고 오며가며 그냥 손짓해 오라고 하고 그렇게 사네요?”
“그게 시골 인심 아이라요? 그래그래 사는 게 시골이지 뭐!……”
서로 나누며 사는 따뜻한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데 앞집 옥천할매가 떡을 쪄 놓았다고 부른단다. 카메라가 오천댁의 뒤를 따르고, ‘뭐 해 놨어여? 형님!’하고 들어가자 옥천할매는 떡을 내오고, 그 떡을 집어 피디에게 권하는 오천댁. 서로 정을 나누며 사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엮어져 나간다.
이야기는 조 씨 과수원으로 옮겨진다. 통실하게 달린 푸른 사과 알이 클로즈업되면서 조 씨 부부가 사과에 봉지를 씌우기 위해 바쁘게 손을 놀리고 있는 모습으로 옮겨간다. 이 때 카메라를 든 어느 할아버지(?)가 등장하여 조씨네의 일하는 모습을 찍어댄다.
내레이터는 “……하루하루 변해가는 고향의 모습을 놓칠세라 이일배 할아버님이 사진에 담으시네요. 교직생활을 하다가 퇴임을 한 후 제2의 인생을 못고개마을에서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정 깊은 어르신들의 모습에 반해 고향 그리운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있지요.”라고 하면서 이야기의 시점을 나에게로 바꾸어 나간다.
아, 그런데 나를 두고 ‘할아버지’라니! 어린 손주들에게서 말고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나와는 상관없을 것 같은 낯설기 짝이 없는 말이다. 그러나 시골 풍경을 그리는 작품의 분위기, 말하자면 아우라(aura)를 위한 말로 새기기로 하고 웃었다.
카메라는 우리 집으로 옮겨져 집 안으로 드는 나를 따른다. 내가 집을 배경으로 하여 문 앞에 선다.
“처음에는 모르고 집을 새로 지으면서 대문을 달아 놨는데, 몇 달 살고 보니까 이 동네에서는 대문이 전혀 필요가 없더라고요.”
피디가 ‘여기도 대문이 활짝 열려 있네요?’란 물음에 대답한 말과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나왔다. 그 때 나는 촬영 중인 줄도 몰랐다. 피디의 기민한 포착이 놀라웠다.
그 때 마침 먼갓할매가 머위줄기 한 줌을 들고 등장한다. 다듬어서 삶아 자시라며 내민다. 서로 정을 나누며 사는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데, 먼갓댁의 등장은 자연스럽고도 기막힌 우연이다.
“오고가며 정을 나누는 어르신들의 모습에 마음을 열었습니다.”는 내레이터가 흐르면서 먼갓댁이 나물을 건네주고 간다.
그런데 내가 하는 말과 모습을 언제 카메라에 담았던가.
“……서로 나누면서 사는 생활에 익숙하지가 못했지요, 여기 와서 보니까 네 것 내 것 없이 나누면서 사는 생활이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서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다가, 참, 사람이 이렇게 사는 수도 있구나, 이렇게 살아야 하겠구나 하는 느낌을 많이 가지게 됐지요”
내가 한 말이 자막도 없이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그 때 나는 내 말이 카메라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게 피디의 연출 기술인 모양이다.
화면은 망초꽃 하늘거리는 마을 앞 논들이 펼쳐지면서 “잊고 살던 나누는 재미를 얻은 거지요.”라는 내레이터가 겹쳐진다.
다시 장면은 먼갓댁 집 뜰, 먼갓댁이 방망이를 두드려 빨래를 하고 있다. 고향 마당에서 들려오는 빨래방망이 소리가 참 정겹다고 했다.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방망이질 소리다. 피디는 “여기는 서로 갈라 먹고 그렇게 하시나 봐요?”하며 동네 인심을 다시 확인이라도 하듯 묻자 먼갓댁은 “서로 나눠 먹고, 좋아요. 동네 인심이 좋아. 서로 막 주고 서로 부르고 그렇게 화목해요.……”하고 좋은 인심을 확인해 주며 환하게 웃었다.
“일찍이 홀로 되어 남매를 키우며 힘든 날도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메워주는 든든한 자리 덕에 먼갓댁이 웃을 수 있는 게 아닐까요?”하는 내레이션이 화면에 흐르는 사이에 먼갓댁은 빨래를 떨어 줄에 는다. 훈훈한 고향 바람에 젖은 빨래도 먼갓댁의 젖은 마음도 말라간다고 했다.
서른여섯 가구가 살아가는 못고개 마을 문경에서도 오지로 통하는 이곳이 어르신들의 정 깊은 고향이라며 정겹게 흐르는 시냇물을 비추는 사이에 장면은 조씨네 대문간으로 바뀐다.
늦은 오후 아낙네들이 모여 앉아 나물을 다듬고 있다. 젊은 조합댁이 와서 함께 손을 거들며 머위나물은 웬 거냐고 물으니 먼갓할매가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낮에 우리 집에 갖다 준 나물이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먼갓댁 덕에 오늘은 도시에서 맛보기 어려운 귀한 나물 맛을 보겠다며 아낙네들이 이렇게 함께 하는 것도 못고개마을 살아가는 낙이 아니겠느냐고 내레이터가 이어진다.
다시 마을 정경이 비쳐지더니 카메라는 조씨네 집 안으로 옮겨간다. 남정네들은 거실에 둘러 앉아 술잔을 나누며 찾아오는 마을 식구들을 반기고, 아낙네들은 부엌에서 정성들여 맛을 짓는다. 손을 모아 된장국을 끓이고 나물을 무친다. 갖은 양념을 넣은 국이 자박자박 끓고, 머위나물 볶는 냄새가 고소하다.
드디어 탁자 위에 저녁상이 차려진다. 마을 식구들이 서로 나눌 음식들이라며, 집집마다 음식 맛이 다르지만 서로 나누고 사는 못고개마을의 맛은 어르신들 마음처럼 한결같다는 내레이터가 흐른다.
큰 양푼에 밥이 쓱쓱 비벼지고, 서른여섯 가구가 숟가락 부딪치며 살아가는 것,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는 내레이션과 함께 ‘이웃과 같이 나누어 먹는 저녁’이라는 자막이 떠오른다. 맛있게 볶인 머위나물을 집어 들면서 “논에 벌레가 많이 일어 큰일 났네…….”라며 들일을 걱정하는 말들이 이어지고, 카메라는 다시 나를 클로즈업 시킨다. 피디가 나에게 이렇게 사는 모습이 어떠냐고 물었던 것 같다.
“도시에서는 이렇게 하고 싶어도 전부 바쁜 사람들이고 할 일도 많지만, 시골에는 이렇게 모여 앉고 같이 살고 하는 게, 이게 인정이고 얼마나 좋습니까?”라고 말하고 있다.
얼결에 한 말이 지금 보니 이치에 좀 맞지 않은 것 같다. 내심으로는 도시인들은 개인 중심으로 바쁘게들 살아가지만 시골은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여유롭게 살아간다고 말하려 했던 것 같다. 시골 사람들이 도시인들보다 한가롭게 사는 것도 아닌데, 그것도 잘못 말한 것 같다. 시청자들이 어떻게 이해를 했을까를 생각하니 얼굴이 붉어진다.
장면은 다시 바뀌어 골목 어귀 망두걸에 모여 앉은 할머니들 모습이 비치고 한 할머니가 “새색시 보석 반지도 좀 찍어 줘요.”라며 손가락에 풀꽃 반지를 낀 오천댁의 손가락을 가리킨다. 할머니들이 모두 웃는데, 잇골댁이 할머니들 드시라며 쟁반에 담은 수박을 들고 온다. 연출이 아니라 늘상 볼 수 있는 정경이다. 내레이터는 마을 전체가 집 안마당 같다고 한다.
사람들이 오며가며 놀다가는 망두걸에 가로등이 켜지면 밤이 이슥할 때까지 함께 정담을 나누다 간다고 하며, 막실할매가 “이키(이렇게) 좋은 동네 봤어요?”하고 묻으니 피디가 “처음 봤어예!”하며 힘주어 대답하자 모두들 파안으로 크게 웃는다.
화면이 암전되었다가 밝아지면서 이튿날 아침이 되었다. 마당 텃밭에 물을 주고 있는 오천댁 모습이 다시 등장하고 벌써 아침운동을 하고 와서 물을 주고 있다며, 피디에게 아침밥을 같이 먹자고 한다. 먼갓댁 집으로 장면이 바뀌면서 텃밭에서 아침거리 상추를 뜯고 있는 먼갓댁이 등장하여 대구의 자식들 소식을 들려준다.
집집마다 고슬고슬 밥 짓는 냄새-. 오천댁이 밥솥을 통째로 들고 조씨네 집으로 간다. 조씨댁은 부엌에서 오천댁을 맞아 함께 상을 차리며, 오늘도 사과봉지 씌우는 일을 할 것이라고 한다.
정장을 차려 입은 이일배 할아버지가 집안에서 대문 쪽으로 걸어 나온다. 피디가 어디를 가시느냐 묻는다. 볼일 보러 대구를 간다고 하니 피디도 촬영을 다 마치고 대구로 갈 거라 한다. 조씨네 문 앞에서는 피디에게 잘 가라며 손을 흔들고, 피디는 오천댁에게 ‘전국노래자랑에 꼭 나오시라’며 덕담을 건넨다. 먼갓댁도 논들 건너 저 멀리서 손을 흔든다.
정자에 모여 앉은 사람들의 모습이 페이드아웃 되면서 에필로그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정을 나누고 살아간다는 것이 이리 즐거운 일이었네요. 못고개마을 어르신들 덕에 많은 것을 얻어갑니다. 마음 외로워질 때면 못고개마을을 찾아오겠습니다.……”
그리고 <고향 에세이 ‘사노라면’> 시그널 장면 위에 ‘다음 이 시간에…’라는 자막이 뜨면서 화면이 끝난다.
방송이 나오던 날 저녁, 여느 때처럼 망두걸에 할머니들이 모였고, 방송 장면 하나하나가 할머니들의 따뜻하고 설레는 화제가 되어 논들을 다 메울 듯 넘쳐났다.
밤이 이슥하여 할머니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밤은 개구리 소리와 함께 점점 깊어갔지만 집집에 켜진 불은 오래도록 꺼지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는 더욱 밝고 따뜻한 해가 떠오르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을까?♣(2012.6.17.) |
첫댓글 즐거움과 감동으로 그 날의 아름다운 영상을 볼 때처럼 잘 읽고 갑니다.
저도 선생님이 살고 계시는 그런 인심좋고 풍경좋은 아름다운 동네를 찾아
살고 싶습니다. 저희 세대의 로망이지요.ㅎ 삶의 따뜻하고 훈훈함을
전해주시고 가르침주셔서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풍요로운 나날 되십시오.^-^
영상은 흘러가고 마는 것이라서, 방송 내용을 정리해 봤습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행복해 하며
아직도 풍성한 화제를 만들고 있습니다.
따뜻한 성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승하시기 빕니다.
선생님 영상 잘 봤습니다.
역시 우리 선생님! 건강하신 모습 잘 뵈었어요.
오랜만이군. 잘 지내고 있는지?
나도 영상에서 보는 것처럼 잘 지내고 있네.
가끔식 찾아주어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