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은 그곳에 있다--로스트로포비치
나는 세계적인 첼로의거장 로스트로포비치를 좋아한다. 그가들려주는 낮은음의 첼로소리도
좋아하지만, 그의 인품을 더 존경한다. 몇 년 전에 그가 보여 준 무대에서의 모습을 보고 난
후부터이다.
어느 해 가을 저녁.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 연주회가 있어 우면산 밑에 있는 예술의 전당에
갔었다. 이제는 노년에 이른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그러나 그의 음악은 나이와 관계없이
여전히 훌륭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을 마지막 곡으로 연주하고 일어나자, 앙코르를
청하는 박수 소리가 예술의 전당 음악당을 떠나가게 울렸다. 노(老) 음악가는 잠시 서 있다가
갑자기 의자를 돌려놓고 앉는다. 그리고는 객석의 청중들을 뒤로 한 채 앙코르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처음에는 의아해하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그뜻을 알고 그의뒷모습을 바라보며
숙연히 음악을 듣고 있었다.
예술의 전당 무대 안쪽에는 많지 않은 좌석이 있다. 그곳은 오케스트라와 공연하는 합창단이
앉을 수 있도록 만든 합창석이다. 예술의전당 음악당의 객석표가 매진되었을 때는 청중석으로
이용하기도 하는 곳이다. 가격이 비싸지 않아 주로 학생들이 많이 이용한다. 그 날도 그 자리에
앉아서 두 시간 가까이 자기의 등만 바라보며 음악을 들어야 했던 사람들을 배려해서 답례의
뜻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는 첼로의 대가일 뿐 아니라 사랑이 많은 예술가였다. 앙코르 곡이
끝났을 때 청중들은 환호했고, 음악가는 기립박수를 보내는 무대 쪽의 사람들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음악회는 끝났지만,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노 음악가의 모습을
더 보기 위해서이다.
지금까지 예술의전당에 와서 연주했던 많은 음악가중에서 그렇게 뒤돌아앉아 연주한 음악가는
로스트로포비치 단 한사람뿐이라고 한다. 그가 그렇게 한것은 즉흥적인 행동이 아니라 겸허한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의 한 부분을 보여 준 것이었다. 그는 어려운 환경의 음악가를 돕는 일은
물론이고, 어린 천재들을 세계 곳곳에서 찾아내 키우는 데 정성을 다한다. 우리 나라의 11세의
천재 첼리스트 장한나도 그가 찾아내 키우고 있는 소녀이다. 성악가인 그의 부인은 그의 그런
인품에 반해 만난지 사흘만에 결혼했다는 일화도 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옛 소련 사람이다. 그러나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여 살고 있다. 그는
소련에서 음악 활동을하면서도 꾸준히 민주화 운동을 했다. 또한 같은 뜻을가진 작가 솔제니친
을 자기 집에 숨겨주고 계속 작품을 쓰도록 도와주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소련 정부의 추적이
시작되자, 솔제니친을 먼저 미국으로 보내고 그도 뒤따라 소련을 떠났다. 소련 정부는 그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추방을 선언하며 귀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조국은 있으나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된 것이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수 있는 20년을 다른 나라에 살면서 그는조국을 향해서
늘 말했다고 한다.
“내 가슴은 그곳에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되던 날, 로스트로포비치는 첼로를 들고 달려가 무너진
장벽 앞에서 축하의 연주를 했다. 장벽은 없으나 돌아갈 수없는 조국을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그에게 독일인들은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머지않아 로스트로포비치가 조국 러시아로 돌아가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그곳에도
정치적인 변화가 왔기 때문이다. 그는 서방 세계에서의 명성, 뒤따르며 존경하는 음악인들,
그리고 수많은 제자들을 뒤로 하고 조국으로 돌아갈 뜻을 밝혔다. 연주자는 있으나 악기가
낡아 좋은음악을 연주할 수 없는곳, 음악을 사랑하나 그것으로 생활하기 어려워 음악을 떠나는
사람이 많은 나라 러시아로 그가돌아간다. 고희(古稀)를 넘긴 노(老) 음악가가 이제 그들에게는
등불이 될 것이다. 동포들은 환영하고 음악인들은 모여들고, 젊은 음악가들은 꿈을키우며 살수
있다. 그에 의해서 또 다른 첼로의 거장이 러시아에서 탄생할지도 모른다.
그는 얼마전 파리의남서쪽, 베즈레이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9백 년 된 성당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을 녹음했다. 자기 음악 인생에 큰 영향을 준 바흐의 곡을 조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녹음해 놓기 위해서이다. 전원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 있는 오래 된 성당안에 울려 퍼지는
깊고 은은한 첼로음이 들리는듯하다. 그음악에는 바흐의 음악성과 함께 그가 살아온 지난날들,
오랫동안 가볼 수 없었던 조국, 그리고 평생 사랑했던 모든 이들의 모습까지도 함께 들어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후, 러시아 고향집 벽난로 옆 흔들의자에 앉아있는 로스트로포비치를 상상해
본다. 무릎에는 담요를 덮고 앉아 자기가 녹음한 바흐의 첼로 곡을 듣는 모습이다. 그는 음악을
들으며 무엇을 생각할까. 젊은 날의 민주화 투쟁, 망명, 세계적인 명성, 그가 키운 제자들,
그런 것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보다는 다시 찾아온 조국의 눈 덮힌 산하(山河), 집 앞 느티나무
가지에 불던 바람까지도 사랑했던 어린 시절의 고향, 그리고 다시볼수 없는 어머니를 그리워할
것이다. 훌륭한 예술가도 평범한 사람도 삶의 긴 여정을 마치고 돌아가 쉬고 싶은 곳은 조국과
고향과 어머니의 품이 아니던가.
“내 가슴은 그곳에 있다.” 말하며 조국의 하늘쪽을 바라보며 살다가 이제는 그곳으로 돌아가는
무스티 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나는 그를 좋아한다. 그가 들려주는 그윽한 첼로 소리도 좋아하지만, 그가 살아온 삶을
더 존경한다. 그리고 몇 년 전 그가 보여 준 무대에서의 뒷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바흐 무반주 첼로조곡 1번 전주곡-생전의 연주모습(1927.3-2007.4)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