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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인생》 2018년 3월호
망국의 역사 위에서 (2)
이 원 규
김석원 장군 이야기
《만인보》의 시 두 편
지난 호에서 이종혁 의사를 이야기하다가 김석원 장군 이름이 나왔으니 그의 이야기를 마저 해보려 한다.
고은 시인의 장편 연작시《만인보》는 시로 쓴 대하소설이라고 일컬어지는 전 30권의 대작이다. 제16권에 <김석원 장군>, 제23권에 <교장 김석원>이 실려 있다. 특이하게도 한 사람을 두 번 썼다.
전쟁이 한 장군에게 다시 철모를 쓰게 했다
그 뒤 수도사단은
한국전쟁 야전의 중앙이었다.
후방의 아이들이 그 이름을 가지고 놀았다
김석원이다
김석원이다 후퇴하라
살고 싶으면 후퇴하라
호랑이 김석원이다.
그는 윤선도와 한용운이 누구인지 몰랐으나 제 부하들은 잘 알았다.
<김석원 장군> 후반부
《만인보》는 ‘개인의 망각과 역사의 그늘 속에 닫혀 있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인데 김석원은 이름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용맹한 장군으로 유명했다. 얼마나 용감했으면 병정놀이하는 아이들이 ‘내가 김석원이니 살고 싶으면 후퇴하라’고 했을까.
그리고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윤선도와 한용운’ 때문에 피식 웃게 된다. 김석원 은 1893년 한성 재동(齋洞)에서 탁지부(度支部) 관리의 아들로 출생, 광성학당과 재동소학교를 나와 무관학교에 입학했다. 1년 만에 일본으로 가서 육군유년학교와 육사를 나와 평생 군인으로 살았다. 그러니 윤선도와 한용운을 알 리가 없다. 고은 시인은 ‘제 나라 문화예술은 젬병이었으나 부하들 이름을 금방 외었다. 그는 오로지 군인이었다’는 뜻으로 그렇게 쓴 것 같다.
학생복들이 플래카드를 폈다 플래카드가 달려갔다
의에 죽고 의에 살라
경찰복이 덮쳤다
곤봉으로 때리고 총대로 치고 구둣발로 깠다
긴장이 부서졌다 두들겨 맞아 피 흘리고 학생들이 쓰러졌다
성남고교 교장 콧수염 김석원이 나섰다
학생들을 제지하기는커녕 경찰을 꾸짖었다
경찰을 두려워하기는커녕 학생을 격려했다
너희들 용감하다 정의의 길 누가 막느냐
용산경찰서장이 교장을 노려보았다
어디 보자 저 신종 빨갱이 늙은이 늙은 콧수염을 뽑아줄 테다.
<교장 김석원> 후반부
4·19 학생혁명을 부른 1960년 3월 15일의 마산의거 이틀 뒤인 17일 서울에서는 처음 시위를 감행한 성남고등학교 학생들과 경찰이 충돌하는 상황을 리얼하게 그렸다. 교장이 보통의 스승 인상이 아니다. 앞의 시의 ‘후퇴하라 김석원이다’ 구절처럼 통 크고 거침없는 대인배로, 가장 애국적이고 정의로운 인물로 보인다. 그래서 고은 시인이 두 편을 썼을 것이다. 친일인물에 대해 머리를 내젓는 분인데 위의 시들을 쓸 때는 아직 그것이 본격적으로 파헤쳐지지 않아 간과한 듯하다.
끈질긴 생명력과 두둑한 배짱
1909년 여름 일본군은 곧 단행할 합병조치에 저항할 수 없게 대한제국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극비작전을 벌였다. 명맥만 남은 군부를 페지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문건들이 암호전신으로 현해탄을 건너오고 건너갔다. 무관학교를 폐교하고 생도들을 일본으로 데려가는 계획도 들어 있었다. 현재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에는 그때 작성한 김석원을 포함한 생도 44명의 성적순 명단이 보존돼 있다. 김석원은 만 15세 10개월이었다.
순위 30, 김석원(金錫源), 15년 10월, 1학년, 일어-병, 기타학과-을, 교련-중, 체조-중, 성질-민첩, 궁행-방정, 체격-강장.
‘순위’는 1학년 23명, 2학년 21명을 합한 석차이다. 김석원은 1학년이었으므로 중상(中上)에 해당되는 성적이었다. 학과성적은 낮은 편, 태도가 단정하고 몸이 민첩하며 체력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김석원은 그 해 9월 3일 경부선 기차를 타고 남대문역을 출발, 부산으로 갔다. 이키마루(壹岐丸)라는 최신형 선박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9월 7일 오전 육군중앙유년학교에 도착했다. 예과 3년, 본과 2년 과정을 두고 있었는데 예과 2학년에 편입했다. 삼청동 무관학교의 1년 선배였던 지석규(이청천) · 이응준 · 홍사익 등은 3학년에 편입했다.
한국학생반을 따로 운영했으나 1년 뒤 합병하면서 일본인 생도 구대(區隊)에 한두 명씩 분산 배치되었다. 일본인 생도들의 경멸과 따돌림 속에 44명 중 11명이 탈락했다. 김석원처럼 일어에서 ‘병(丙)’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다. 김석원이 얼마나 끈질긴 생명력을 가졌었는가를 알게 한다.
유년학교와 육사의 기본이념은 일본 정신의 근본이라는 무사도(武士道)였다.
‘충성은 가장 고귀한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통해 완성되며 비굴하게 사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요 불명예이다.’
조선인 생도들도 이것에 젖어갔다. 일본이 원하는 대로 순치되어 갔다.
육사를 졸업한 김석원은 오사카(大阪) 소재 제4사단 예하 와카아먀(和家山) 주둔 보병 61연대에 견습사관으로 배치되었다. 보직은 중위인 기관총 교관의 조수였다. 밤잠 안 자고 분해 결합을 거듭해 기관총 도사가 되었다. 반년 뒤 소위로 임관하자 교관이 되었다. 보병학교에서 전문교육을 받은 중위들이 맡는 직책인데 그걸 따낸 것이다. 사단장 우쓰노미야(宇都宮太郞) 소장이 순시 중에 칭찬하며 “언제든지 어려운 일 있으면 찾아오라.”하고 말했다 우쓰노미야는 그 후 중장으로 승진해 조선군사령관이 되었다. 김석원은 고국에 휴가 온 김에 용산의 사령부로 찾아가 인사드리고 조선군사령부 산하로 전속시켜 달라고 요청해 뜻을 달성했다. 두둑한 배짱이 있어 거둔 결과였다.
다른 각도로 보자. 우쓰노미야는 자칭 친한파였으나 3·1운동을 무참히 진압한 공로로 대장으로 승진한 인물이다. 김석원은 장교였으므로 사령관이 수원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을 지휘한 그의 육사 선배 아리타(有田) 중위에게 군법회의에서 무죄선고를 내렸음을 알았을 것이다. 수만 명의 만세시위 참가자들을 학살한 자를 찾아가 전속시켜 달라고 매달린 걸 보면 그는 일개 일본군 장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가장 용감한 김부대장
김석원은 1920년 우쓰노미야 대장의 특별배려로 와카야마에서 용산 주둔 보병 78연대로 전속되었다. 우쓰노미야를 통해 박영효(朴泳孝)를 소개 받았다. 박영효는 철종의 사위였지만 합방에 기여한 공로로 후작(侯爵) 작위를 받았고 총독부 중추원에 몸담고 있었다. 김석원은 초급장교로서 50엔 정도 월급을 받고 있었는데 신혼생활에 보태 쓰라며 200엔을 주어 고맙게 받았다고 회고록에 쓴 걸 보면 박영효의 총애가 컸던 것 같다. 한 마디로 친일거물인 박영효 후작과 김석원 중위는 죽이 맞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들들 이름 돌림자를 영(泳)으로 했다던가.
1920년대를 그렇게 보내고 1931년 특기인 기관총 부대 중대장으로 만주사변 전장에 출정해 마잔샨(馬占山)부대를 상대로 싸워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의 지휘의 특징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서운 돌격이었다. 군도를 뽑아들고 앞장서 “나를 따르라” 외쳤다. 마잔샨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만주의 마적 출신이지만 중국의용군 대장으로서 한국 독립운동 세력에게 많은 도움을 준 인물, 즉 독립군 편이었다.
승전하고 경성에 돌아온 뒤 김석원은 “중국군 수천 병력 가운데 단 몇 놈 남기고 내 손으로 전부 몰살했다.”하고 자랑했다. 훈장과 함께 포상금으로 700엔의 거금도 받았다. 오늘날 사립 명문이 된 성남중고등학교는 이것을 종자돈으로 하여 설립하였다. ‘의에 죽고 의에 살자’는 교훈을 가졌던 학교, 4·19 혁명에 앞서 시위를 감행한 성남 학생들의 의거는 정의롭지만 설립의 유래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
1937년 6월 상순, 김일성(金日成)이 이끄는 만주 조선인 유격대가 국내진공을 감행해 함경남도 갑산군의 보천보(普天堡)를 습격했다. 소탕작전에 나선 것은 김석원의 동기생으로 함흥수비대에 소속돼 있던 김인욱 소좌였다. 간삼봉 등 여러 곳에서 격전을 벌였고 다리에 총상을 입는 부상을 당했다. 김일성 · 최현 등 유격대 지도자들은 그것을 김석원으로 잘못 알았다. 김석원은 함흥수비대와 무관한 용산 주둔 78연대 소속이었으며 6월 30일 간삼봉 전투가 일어날 때 용산에 있었다. 7월초 중일전쟁이 일어났고 그는 7월 13일 만주가 아닌 텐진(天津)으로 출정했다. 억울한 오해인 것이다. 김일성의 첫 애인인 김혜순을 김석원이 살해해 김일성과 이래저래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는 야야기도 있다. 그래서 6·25 남침 때 김일성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김석원, 너를 잡으러 내가 간다.”하고 말했다는데 낭설로 보인다.정확한 기록은 북한에서 김일성의 탄생 70년에 맞춰 완간한『조선전사』일 것이다. 제19권에 ‘일본군 19사단 함흥 제74연대장 김석원이 간삼봉전투에서 토벌군으로 참가했다가 심한 다리 부상을 입었다’고 썼다.
중일전쟁에서 중국군과 싸우며 김석원은 다시 용맹을 떨쳤다. 2개 중대로써 중국군 1개 사단을 물리쳐 일약 영웅으로 떠올랐다. 《동아일보》는 그가 전투 중에 부상당한 소식, 승승장구하고 개선한 소식, 지원병 권유 강연 등의 소식을 보도한 데 비해 친일신문 《매일신보》(애국적 신문인《대한매일신보》가 강제합병 후 총독부기관지로 돌아선 것이다)에는 영웅적인 전투상황이 실려 있다. 이 신문만 종군기자를 파견했던 것이다.
1938년 3월 11일자에 실린 <김부대의 분전기(奮戰記)>는 장렬한 육탄전 끝에 4면을 포위한 적을 격퇴하고 중요 거점인 둥위안(東源)을 함락시킨 전투상황을 담고 있다. 포위당하자 김석원 소좌 부대는 야간에 육탄공격을 감행했다. 탄약이 떨어지자 민가의 지붕으로 올라가 연통을 뽑아 던졌다. 중국군 300여 명을 사살했는데 24명이 장교였다. 김석원 부대 전사자는 20명이었다.
다음해인 1939년 봄의 또 다른 기사는 <김석원 소좌의 전진여담(前震餘談)>이다. ‘추상같은 전진명령, 명(名) 부대장 대갈일성에 제(諸)장병 기갈 극복하며 전진’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김부대장이 직접 참호위에 올라서며 뒤따르는 장병들의 돌격으로 행궁(行宮) 고시의 한 모퉁이를 점령하였다 한다. 이 전투에 우리 부대장의 부하 장졸들은 벌거숭이로 육탄전을 감행하였음은 물론 집중사격과 아울러 군사를 그 반대방향에 진쳐 두는 등 가진 신고를 다 겪었다 한다. 그동안 적군은 퇴각하였다가 야습으로 몇 번이나 항전하는 것을 끝끝내 물리치고 나니 그때에 난위안(南苑) 공략의 명령이 내려 쉴 사이 없는 김소좌 부대는 적 의 시체와 군마가 거꾸러진 데를 짓밟으면서 전진하였다 한다.(《매일신보》 1939년 3월 29일자)
김석원의 전투 상보를 읽어보면 늘 ‘나를 따르라’ 하고 앞장서고 병사들의 절대복종을 이끌어내는 카리스마와 무서운 돌파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김석원 소좌를 찬양하는 노래’를 들으며 개선하여 경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생애에 치명적인 흠결이 될 중대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4월 5일 부민관에서 열린 개선간담회를 시작으로 전국을 돌며 중국 침공의 당위성을 선전하고 지원병 입대를 독려하는 강연을 펼쳤다.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용약! 군문에 진입하라. 홍대무변(鴻大無邊)한 황은에 보답하는 길은 성스런 싸움터에 나가 죽을 각오로 영 미 귀축의 적을 때려잡는 데 있다.”
그리고 중좌로 진급하고 훈3등 서보장이라는 훈장을 받았다.
그 후 일본 본토 근무, 중국 산둥성(山東省) 주둔 독립혼성 제6여단, 지난(濟南)의 군사령부의 간부교육대장이 되어 근무했다, 1944년에는 대좌로 승진, 평양병사부 제1과장으로 배속되어 근무했다.
일본에 대한 충성은 아들에게 이어졌다. 1923년생인 장남은 1943년 가을 지원병으로 입대했고 1924년생인 차남 영수(泳秀)는 경기중학교를 나와 육사에 입학해 동1944년 임관했다. 그래서 <매일신보>는 ‘3부자 군문(軍門)에 봉공(奉公)’이라고 대서특필했다. 그는 가네야마(金山)라는 창씨 성을 썼고 그래서 가네야마 샤쿠겐 대좌로 불리웠다. 일본 육사 57기, 아버지의 30년 후배로 임관한 차남은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꿔 가네야마 히데오(金山秀雄)였는데 1945년 4월 필리핀 레이테 섬에서 미군과의 교전 중 전사했다.
8·15 광복 후의 삶
김석원 대좌는 일본군 항복 후 사복으로 갈아입고 38선의 소련군 검문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해 서울로 왔다. 해방조국의 창군 주도권을 잡으려고 수많은 단체들이 경쟁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나서지 않았으나 1947년 육해군동지회 회장을 맡았다. 그 후 군사영어학교가 열렸으나 들어가지 않고 있다가 1949년 1월 입대하여 제1여단장을 맡았고 여단이 사단으로 확대되자 사단장이 되고 별을 달았다. 6·25전쟁 전인 5월, 그가 지휘하는 사단은 개성 송악산에서 북한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때 박격포탄을 들고 북한군 진지로 몸을 던진 ‘육탄 10용사’가 탄생했다. 그때 깨진 부대가 최현의 부대, 일제 강점기에 간삼봉 전투를 겪은 부대였다.
김일성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난날 백두밀림에서 그놈과 싸우던 우리 동무들이 오늘은 38분계선에서 또 그놈과 맞서 싸우고 있다. 김석원을 처형해 복수하겠다.”
역시 보천보 전투와 간삼봉 전투에서 항일유격대와 맞붙었던 부대를 김석원이 지휘했다고 잘못 안 것이다.
그해(1949년) 여름 이승만 대통령이 장제스(蔣介石)를 초청해 경남 진해별장에 머물 때 “건군 초기라 우리나라는 지휘관이 부족해서 걱정입니다”라고 말하자 장제스가 “한국에는 김석원이라는 용감한 군인이 있지 않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중국 국민당군이 여러 번 참패한 터라 기억했던 것이다.
그러나 앞뒤 안 가리는 김석원의 직선적 성격은 북어사건으로 군복을 벗게 했다. 그의 사단 관할구역에서 군 간부들이 북한산 북어를 밀무역해 이익을 챙긴 ‘북어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두고 총참모장인 채병덕(蔡秉德)과 대립하다 예편하고 성남중학교 교장 자리에 앉았다. 채병덕이 누군가. 김석원의 육사 동기생 백홍석의 사위이자 일본 육사 49기로 22년 후배, 1950년 7월 경남 하동전선에서 전사했다.
김석원은 6·25 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복귀해 수도사단장이 되고 중국전선에서처럼 용맹을 떨쳤다. 일본군 시절처럼 카이젤 수염을 했다. 미군 장군들이 그를 우습게 알았다는 증언, 일본군 장군이 쓰는 장군도를 빼어들고 부대를 지휘했는데 그다지 비범하지 못했다는 증언도 있지만 그는 천생 군인이었다. 용감하다는 명성, 교육자라는 명성을 등에 업고 민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는데 정치적 술수 따위는 모르는 사람이니 정치도 곧 그만두었다. 《국회 20년》이라는 책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철두철미하게 군인정신이 몸에 배었으며 고집이 세기로 유명. 한국전쟁 당시 미고문과 맞서 싸우다가 보직을 잃은 적이 있음.
김석원의 좌우명은 ‘의에 죽고 의에 살자’였다. 지난호에서 이야기한 대로 그를 포함한 대한제국 마지막 무관생도들은 일본유학 중 강제합병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조국이 부르는 날 독립전쟁에 한 몸을 던지기로 맹세했다. 그 맹세를 저버렸는데 도대체 어떤 의에 죽고 어떤 의에 죽는단 말인가? 모순된 말이며 허언에 불과하다.
지금 김석
원을 보는 눈은 냉정하다. 임중빈 선생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파 99인》(1993)에 실은 <일본 군국주의 화신 가네야마 대좌>라는 글에서, 친일문제연구가 정운현 선생은 자신의 저술《친일파는 살아 있다》(2011)에서 매서운 눈으로 그의 행적을 비판했다. 그리고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일제 강점기 말기 친일반민족행위 관련자 705명’에 그를 포함시켰다. 그해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친일인명사전》도 그를 비중 있게 올렸다.
김석원은 난세에 태어났으나 앞에 놓인 길을 그냥 열심히 산 사람이다. 선배 이청천과 동기생 이종혁처럼 독립전쟁에 몸을 던졌다면 우리 역사가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홍범도와 김좌진처럼 독립전쟁 전선에서 용맹을 떨친 일로 유명해서 아이들이 ‘독립군 대장 김석원이다 살고 싶으면 후퇴하라’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다음 늙은 교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쳤다면 또 얼마나 좋을까? 아쉬움이 크고 원망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생애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쓸쓸해진다. 우리민족이 굴종하지 않고 좀 더 저항했으면 하는 아쉬움 속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다.
사진 1.고은의 장편연작시 《만인보》의 한 편인 <김석원 장군>.
2-1.대한제국 마지막 무관생도들의 일본 유학 직전 작성한 생도명부 30등 석 차의 김석원 생도.
2-2.1915년 5월 25일 일본 육사를 졸업한 27기 760명의 일선부대 배치를 명령한《일본군 관보》클로즈업.
3.김석원 소좌의 승전을 보도한 《매일신보》 기사 <김부대의 분전기>.
4.난위안 혈투를 보도한 《매일신보》 기사 <김석원 소좌의 전진여담 추상같 은 전진령>.
5.6·25 전쟁 사단장 시절의 김석원 장군. 《동아일보》1973년 12월 1일자 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