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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구 열강의 침략과 조선의 대응
1) 서양 세력의 통상 요구
산업 혁명을 거쳐서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한 서구 산업자본주의 세력들은 상품을 판매할 시장과 원료를 공급할 수 있는 땅을 구하기 위해 아시아 대륙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서구 산업자본주의 세력들은 강압적인 수단으로 청국·일본과 통상 관계를 맺은 여세를 몰아 조선에 대해서도 통상을 요구해 왔다.
순조 32년(1832년) 영국의 동인도 회사 소속 상선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호가 충청도 해안에 나타나 무역을 요청해왔고, 헌종 11년(1845년) 남해안과 제주도 인근 바다에서 측량을 하고 있던 세마랑(Semarang)호가 무역을 요청해왔다. 남하 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는 철종 5년(1854년) 4월 팔라다(Pallada)호와 러시아함대 보스토크(Vostok)호가 다시 조선의 동해에 나타나 무력시위를 펼치면서 함경도 덕원군 용성진과 영흥부 대강진에서 조선의 어민 여러 명을 학살했다.
청나라가 아편전쟁(1840년)에서 영국에 패배해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고, 애로우호 사건(1856년~1860년)이 발생해 영국・프랑스・독일의 연합군이 청국의 수도인 베이징(北京북경)을 점령하였다. 1858년 청국은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무력에 의한 위협에 굴복하여 처음으로 톈진(天津천진)에서 4개 조약을 맺었다. 청국이 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의 4개국과 맺은 톈진조약(天津條約천진조약)은 일방적 최혜국 조약이었다.
영국이 제2차 아편전쟁(1856년∼1860년)을 일으키자, 선교사가 처형당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프랑스가 영국과 손잡고 1860년 청국 수도 베이징(北京)을 점령했다. 이 무렵 남진정책(南進政策)을 펴고 있던 러시아가 나서서 청국이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각각 베이징조약(北京條約북경조약)을 체결하도록 했다. 그 결과 영국과 프랑스는 상하이· 닝보· 푸조우 ·아모이· 홍콩· 마카오 등 청국의 주요 항구를 개방시키고, 내륙의 하천을 통행하는 권리를 얻었고, 러시아는 청국으로부터 프리모르스키 지구((Primorsky Kray: 沿海州연해주)를 얻었다. 이로써 러시아는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대원군이 조선 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직후인 고종 원년(1864년) 2월에 러시아인 5명이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는 문서(文書)를 제출하고 회답을 요구하였다. 대원군을 비롯한 정부 고관들은 이에 당황하였고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고종 2년(1865년) 2월과 9월에도 러시아인들은 두만강을 건너와 각각 통상을 요구하였다. 그후 러시아인들은 여러 차례 두만강을 건너와 경흥부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거절하였다. 러시아의 통상요구는 의외의 결과를 야기시켰다.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와 그로 인한 프랑스 극동함대의 강화도 원정이 바로 그것이다. 대원군정부가 러시아의 통상요구로 고심하고 있을 때 홍봉주(洪鳳周)·김면호(金勉浩) 등 천주교신도들은 프랑스·영국 등과 동맹을 맺으면 러시아의 통상요구를 저지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러기 위해서 당시 국내에 잠입해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을 것을 대원군에게 권고하였다. 대원군은 선교사 베르뇌(Berneux)를 서울로 불러오도록 하였다. 천주교인들은 당시 선교차 지방에 가 있던 베르뇌주교를 서울로 불러오기로 주선하였으나, 시일을 너무 지체하였고, 또 그 사이 러시아의 통상요구는 뜸하여졌다. 한편 조정의 정국은 지금까지 천주교에 대해 호의적이던 상황에서 탄압으로 급선회하였고, 대원군도 더 이상 천주교도들에게 호의를 베풀 수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되면서 당시 한국에 와 있던 12명의 프랑스 선교사 중 9명이 순교를 당하였다. 살아 남은 리델(Ridel), 페론(Féron), 깔래(Calais) 3인의 선교사 중 리델신부가 텐진(天津천진)으로 가서 조선에서의 선교사 살해와 천주교도박해의 소식을 전하였다. 따라서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Roze) 제독은 강화도 원정을 단행하였다.
―우철구, 「구미 열강의 통상요구」,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37· 서세동점과 문호개방』,국사편찬위원회(탐구당 번각 발행), 2013, p.74.
그 후 고종 3년(1866년) 독일인 오페르트(Oppert)가 영국 상선(商船) 로나(Rona)호를 타고 충청도 해미 부근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했다.
2) 병인박해
고종 3년(1866년)부터 고종 8년(1871년)까지 6년 간에 걸쳐 계속되었던 조선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 사건을 통틀어 병인박해(丙寅迫害)라고 부른다. 병인박해는 1866년 봄, 186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1868년, 1871년 등 네 차례나 있었다. 이 네 차례의 천주교 탄압으로 남종삼 등 천주 교인 8000여 명 이상이 죽임을 당했다.
순조(재위 1800년∼1834년)와 헌종(재위 1834년∼1849년)이 왕위에 있을 때 천주교에 대한 혹심한 탄압이 있었다. 그러나 철종이 왕위에 오른 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천주교에 대해 묵시적으로 이해를 지니고 있던 대원군은 천주교가 궁궐 안까지 전파되는 등 무시하지 못할 만큼 세력을 넓혀가자, 미온적인 태도를 버리고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제사를 폐지하고 유일신 사상을 주장하는 천주교는 유교 사상과 융합될 수 없었다. 강력한 왕권의 확립을 목표로 하고 있던 대원군에게 천주교의 만민 평등사상과 박애사상은 위험한 사상으로 보였던 것이다.
서양 열강의 통상 요구로 대원군과 조선의 고위 관리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 천주교 신자인 남종삼의 건의에 따라 대원군은 조선에 와 있던 프랑스 주교 베르뇌(Berneux)를 통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를 물리칠 생각으로 교섭했다. 그러나 지방에 내려가 있던 베르뇌 주교가 한 달이 지나서 한성에 도착하는 바람에 대원군으로 하여금 천주교에 대한 불신과 증오감을 가지게 했을 뿐 대원군과 프랑스의 교섭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고종 3년(1866년) 1월에 베이징(北京)으로 간 사신의 편지가 한성(漢城)에 도착했다. 편지 내용 가운데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北京)을 함락시킨 후 청국 사람들이 많은 서양인을 마구 죽였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유림 등 대원군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천주교인들과 접촉하고 있던 대원군에게 천주교인들을 비호한다면서 정치적인 압력을 가하였다. 게다가 운현궁에도 천주교가 침투했다는 소문이 퍼져 신정왕후 조씨까지 천주교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조두순 등 대신들이 천주교를 억눌러서 전도를 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 대원군은 천주교를 탄압하는 명령을 내렸다.
고종 3년(1866년) 2월 베르뇌 등 9명의 프랑스 신부를 비롯해서 남종삼·홍봉주·김면호· 정의배·전장운·최형 등 천주교인 8000 여명을 붙잡아 참혹하게 마구 죽였다.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몸을 숨겨 위험을 피해 있던 프랑스 신부 리델(Ridel)이 같은 해 7월 비밀리에 조선을 탈출했다. 그는 청국의 톈진으로 가서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Roze,P.G.) 제독에게 천주교도 학살을 보고하고 구원을 요청했다.
3) 병인양요(丙寅洋擾)
조선 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대원군의 프랑스 신부 학살에 대한 보고를 접한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Bellonet) 등은 분하고 노여운 감정이 복받쳐 올라 조선 원정을 계획하게 되었다. 벨로네는 조선에서 일어난 일을 자기 나라의 외무성에 보고했다. 청국으로부터 프랑스가 조선을 침략하고자 함대를 보내려는 계획을 짜고 있다는 제보를 받은 대원군은 천주교인에 대한 탄압을 더욱 극렬하게 했다. 동시에 변경(邊境: 나라의 경계가 되는 변두리 땅)의 방비를 엄중하게 하도록 했다,
프랑스 정부는 조선 원정을 실행하도록 로즈에게 명령을 내렸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뿐만 아니라 이를 계기로 문호를 굳게 닫고 있는 조선을 중국에서와 같이 무력 시위를 통해 통상 관계를 맺어 보자는 의도도 있었다. 고종 3년(1866년) 8월 로즈는 군함 3척을 이끌고 조선으로 향했다. 마침내 강화도를 지나 한강의 양화진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3척의 군함으로 조선의 도성인 한성을 공격하는 것은 무모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 되겠다. 일단 정찰만 하고 돌아가자.”
로즈가 명령했다.
10여 일 동안 머물던 프랑스 함대는 청국으로 되돌아갔다.
고종 3년(1866년) 9월 로즈는 7척의 프랑스 군함과 600여 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조선 침략에 나섰다.
강화도 해역에 이른 프랑스 함대 7척은 물치도 앞바다에 정박했다. 이 보고를 들은 조선 정부는 훈련대장 이경하를 기보연해 순무사(畿輔沿海巡撫使)로 임명하고 8,000명의 군사들을 주어 도성 방위를 담당하게 하고, 순무중군(巡撫中軍) 이용희를 선봉장으로 삼아 3,000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통진부에 머물러 있도록 했다.
9월 7일 로즈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강화성 남문을 공격했다. 조선 수비군과 맞붙은 프랑스군은 우수한 무기와 전략으로 조선 수비군을 제압했다. 마침내 강화부가 프랑스군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
9월 18일 프랑스군 120명이 문수산성으로 접근했다. 한성근이 지휘하는 조선 수비군은 프랑스군을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다. 문수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군은 강화도 남쪽 요새인 정족산성을 점령할 계획을 짰다.
10월 1일 프랑스군 60명이 정족산성의 지세를 정탐하고 전등사의 기물을 파괴하고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 정부는 순무중군 이용희가 순무천총(巡撫千摠) 양헌수에게 명령하여 초관[哨官: 조선 시대 병사집단인 초(哨)를 통솔하던 종9품 관직] 17명 등 543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가 정족산성에 잠복하도록 했다.
10월 3일 로즈가 프랑스 해군대령 올리비에(Olibier)에게 160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가 정족산성을 점령하게 하였다. 프랑스군은 정족산성의 동문으로 진격했다. 잠복하고 있던 양헌수의 조선 수비군이 일제히 프랑스군을 공격했다. 습격을 받은 프랑스군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6명이 죽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자, 프랑스군은 물러갔다.
10월 4일, 두 차례의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군은 강화읍에 불을 질렀다. 이때 조선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인 외규장각((外奎章閣)이 불탔다. 그로 인해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수천 권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 프랑스군은 외규장각 의궤(儀軌)를 포함한 359권의 서적과 은괴(銀塊)· 지도· 천체도(天體圖)· 투구·갑옷 등을 강탈하여 군함으로 옮겨실었다. ‘의궤’는 나라에서 큰일을 치를 때 후세에 참고하기 위하여 그 일의 전말·경과·경비 따위를 자세하게 기록한 책이었다.
40여 일만에 프랑스군은 퇴각하였다. 병인양요는 조선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더욱 자신을 얻게 된 대원군은 천주교인을 통외초구(通外招寇: 외부와 통하여 도적을 불러들임)의 무리로 몰아 체포하는 대로 처형하였다.
4) 제너럴 셔먼호 사건
고종 3년(1866년) 7월 11일 밤,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호우로 물이 불어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부 초리방 일리의 신장포에 닻을 내렸다. 평양부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양선(異樣船)이 출몰했다 하니 가서 내항 목적과 그 동태를 살피고 오라.”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중군 이현익에게 명령했다.
이현익이 군사들을 이끌고 신장포로 갔다. 그들이 제너럴 셔먼호 가까이 다가가자, 배에서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Robert Jermain Thomas)가 배에서 내려와 통역으로 나섰다. 런던 선교회 소속인 그는 최란헌(崔蘭軒)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가, 제너럴 셔먼호에 항해사 겸 통역으로 탑승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상거래를 하기 위해 조선으로 왔습네다. 서양의 각종 물품과 조선에서 나는 금· 인삼· 종이· 호랑이 가죽 등과 교역을 하고 싶삽네다. 우리는 천주교도가 아니라 신교도들입네다.”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가 선장이 한 말을 재빨리 한국어로 통역했다.
“우리 조선은 서양인들과 교역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교도 천주교와 함께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니 돌아가기 바랍니다.”
이현익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현익은 서양인들의 요청에 따라 식량을 지급하여 주고, 평양부로 돌아와 박규수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7월 13일 곧 떠나겠다고 약속했던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만경대 아래 도루도에 닻을 내리고 작은 배로 대동강변을 휘젓고 다니며 평양부를 정탐했다.
7월 16일 이현익이 대동강변으로 가 이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러나 서양인들이 이현익을 납치하여 제너럴 셔먼호에 감금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박규수가 서윤 신태정을 보내 이현익읗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응하지 않았다.
7월 19일 아침 제너럴 셔먼호가 다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황강정 앞에 정박했다. 서양인들의 행동에 분노한 평양부 백성들이 대동강변으로 몰려들었다.
“이현익을 돌려보내라.”
사람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제너럴 셔먼호를 향해 돌을 던졌다. 조선의 군사들도 활과 총을 쏘아댔다. 박춘권이 제너럴 셔먼호에 몰래 접근하여 이현익을 구출해가지고 돌아왔다.
평양부 백성들의 공격이 더 맹렬해지자, 제너럴 셔먼호는 양각도로 후퇴하였다.
서양인들은 대동강변의 민가(民家)를 습격해 식량과 재화(財貨)를 약탈하였다. 그들은 저항하는 평양부 백성들을 죽였다.
“서양 오랑캐놈들이 살아서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
평양부 백성들의 두 눈에 붉은 핏발이 섰다.
박규수는 서윤 신태정, 철산 부사 백낙연과 더불어 의논하여 제너럴 셔먼호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7월 22일 아침. 조선군은 제너럴 셔먼호를 향해 화공(火攻)을 가했다. 서양인들이 총을 쏘며 반격했다. 그러나 서양인들의 화력과 인원은 조선군에게 미치지 못했다.
7월 23일 아침.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 하류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하류에 배치되어 있던 조선군이 제너럴 셔먼호를 공격했다. 서양인들은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호우로 불어났던 대동강물이 점점 줄어만 갔다. 제너럴 셔먼호는 모래톱에 걸려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조선군은 작은 배 여러 척에 땔나무를 실어 불을 붙여 떠내려보냈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작은 배들이 제너럴 셔먼호와 연방 충돌했다. 불길이 제너럴 셔먼호에 옮겨붙었다. 제너럴 셔먼호가 시뻘건 불길 속에 휩싸였다. 서양인들이 뱃머리로 뛰어나와 살려달라고 외쳤다. 서양인들이 대동강 물속으로 뛰어내렸다.
평양부 백성들은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와 중국인 통역 조능봉(趙凌奉)을 끌어올려 죽였다.
5) 오페르트의 도굴 사건
고종 5년(1868년) 유태계 도이칠란트의 상인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가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 교섭에 실패한 후 미국인 프레더릭 헨리 배리 젠킨스(Frederick Henry Barry Jenkins), 프랑스 선교사 스타니슬라스 페롱(Stanislas Féron) 신부, 조선인 천주교 신자 2명, 백인 8명, 말레이시아인 20명, 청국 선원 등 총 100여 명으로 구성된 도굴단(盜掘團)을 차이나호(號)에 태우고 중국 상하이(上海)를 출항해 충청도 덕산군 구만포(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구만리)에 상륙했다.
어둠을 밟고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묘에 도착한 오페르트 일당은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덕산군수 이종신과 묘지기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달려왔다.
“뭣들 하는 짓이냐?”
이종신이 소리쳤다.
묘지기와 주민들이 제지했다. 오페르트 일당이 달려들어 총으로 그들을 위협했다.
오페르트 일당은 이구의 묘를 파헤쳤다. 시체와 부장품(副葬品)을 꺼냈다. 석회(石灰)를 만난 그들은 도굴을 단념했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충청도 관찰사 민치상이 군관 100여 명을 출동시켜 오페르트 일당을 추적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오페르트의 도굴(盜掘) 사건으로 인해 흥선 대원군의 서양 세력에 대한 강경한 태도는 더욱 강화되었다.
6) 신미양요(辛未洋擾)
고종 8년(1871년) 3월 17일, 중국 베이징(北京) 주재 미국 공사 로우(A. Low)가 로저스(J. Rodgers)와 함께 기함(旗艦: 함대의 군함 가운데 사령관이 타고 있는 군함) 콜로라도호(The Colorado號)에 몸을 싣고 조선을 향해 떠났다. 알래스카호(The Alaska號) 등 5척의 군함과 1230명의 군사들을 거느린 미국 함대는 리델 신부(Father Ridel)의 안내를 받아 4월 3일 조선의 남양 앞바다에 진출했다. 미국 함선이 손돌목(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지역에 있는 목)을 거쳐 광성진(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성)에 이르렀다. 미국 함선을 향해 조선군 포대가 먼저 공격하자, 조선군과 미군 사이에 포격전이 벌어졌다.
4월 23일, 물치도로 후퇴했던 미군이 모노카시호(Monocacy號)와 팔로스호(Palos號)의 엄호 사격을 받으며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했다. 이어서 덕진진과 광성보에서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과 미국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지휘관 어재연을 포함하여 53명이 전사하였고, 24명이 부상하였다. 4월 25일, 미국군은 물치도로 철수하여 조선 정부의 움직임만을 살피고 있었다.
광성보 전투 소식을 들은 조선 조정(朝廷)은 소스라치게 깜짝 놀랐다. 몹시 분개한 조선 정부는 끝까지 미국의 개항(開港)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은 20여 일 만에 조선의 개항을 단념하고 군대를 조선에서 철수시켰다. 이 사건을 신민양요(辛未洋擾)라고 한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자기측에게 불리한 사태가 발생하면 미해군의 포함(砲艦)이 배우에서 무력적 시위를 가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유리하게 해결하려는 이른바 포함책략(砲艦策略 Gunboat tactics)을 사용했던”(김원모, 『근대한미교섭사』, 홍성사, 1980, p.133) 미국은 상업적· 정치적 목적의 달성을 위해 다음과 같은 정책상의 표현 방법을 강구했다.
미국의 전통적 국가정책이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완전한 독립국가 유지’ 정책에 따라 북아메리카의 서해안에서는 모든 아시아 국가의 해군기지(a nava vase)를 허용해서는 아니 된다는 ‘고정된 결의안(asettled resolution)’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Donnet, Amreican Policy in the Far East, pp.598∼599). 중국에 있어서의 무역평등(貿易平等)이란 헤이 국무장관이 구상한 바와 같이 무역 특권의 평등과 상품 교환을 의미하고 잇다. 그것은 곧 통상상의 특권의 평등을 의미하며, 이를 정치적 외교에 적용할 때는 ‘정치적(政治的) 세력(勢力)의 펻등(equality of political influence)’을 획득하는데 있어서 미국 정부는 아시아 제국에 대해서 어떠한 정책상의 구현방법(具現方法)을 강구했었던가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정책 구현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즉 (1) 위협(威脅)과 회유(懷柔 intimidation and conciliation), (2) 고립정책(孤立政策)과 협조정책(協助政策 a policy of isolation and one of co-operation with other interested powers), (3) 영토적 침략(trrritorial aggression) 등 세 가지이다(Donnet, Amreican Policy in the Far East, p.599).
- 김원모, 『근대한미교섭사』, 홍성사, 1980, p.138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號) 사건과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우발적 사건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아시아 제국에 대해서 펼치려고 했던 정책을 구현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군사력 행사를 배경으로 압력을 가하면서도 외교 자체는 합법적으로 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강제외교의 일종인 포함외교(砲艦外交, gunboat diplomacy)로 벌어진 것이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號) 사건과 신미양요(辛未洋擾)이다. 경제적 제국주의(economic imperiaism)를 추구하던 미국은 조선 철종 4년(1853년) 매튜 C.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가 이끄는 미국 해군 동인도 함대의 증기선 2척을 포함한 함선 4척이 일본에 내항(來航)한 사건인 페리 원정(Perry Expedition, Chrisko Expedition) 사건[흑선내항 사건(黒船来航事件)]을 일으켰다. 조선 철종 5년(1854년) 미국 해군 제독 페리(perry)의 무력 시위에 굴복한 일본의 에도 막부(江戸幕府강호막부)는 미국과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 Treaty of Kanagawa, 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하였다. 미·일화친조약은 “① 미국 선박에 연료 및 식량을 공급한다. ② 2개 항구의 개항과 영사의 주재를 인정한다. ③ 미국에 최혜국 대우를 인정한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7) 척화비
미군이 물러나자, 서양 열강과의 무력 충돌에서 연이어 승리한 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서울의 종로 거리와 전국 각 도회지(都會地)에 “오랑캐들이 침범하니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고종실록』 권8, 고종 8년 4월 25일).”라는 글을 비(碑)에 새긴 척화비(斥和碑)를 종로와 전국 가지에 세우도록 했다.
척화비는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군과 신미양요를 일으킨 미군을 물리친 대원군이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강화하려는 의지의 표시였다고 할 수 있다.
고종 3년 병인년(1866) 이래 대원군은 오로지 서양의 문물이나 세력을 거부하여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천주교인 20여 만 명을 잡아죽였고 외국을 깔보아 업신여겼으며 바닷가에 잇닿은 지역 곳곳에 포대를 쌓아 올려 만들었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돌을 캐내어 종로(鐘路: 서울 중앙에 있는 거리. 종각을 짓고 큰 종을 달아 저녁을 알려 주었으므로 종가(鍾街)라고 불렀다)에 비석을 세웠다. 그 비면에 글을 새겨 이르기를,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을 때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양이침범, 非戰則和비전즉화, 主和賣國주화매국).”이라고 하였다.
自三年丙寅以來(자삼년병인이래), 大院君專主斥攘之義(대원군전주척양지의), 誅西敎人二十餘萬(주서교인이십여만), 輕侮外國(경모외국), 築砲臺於沿海各處(축포대어연해각처). 至是伐石竪碑於鍾街(지시벌석수비어종가),【街在京城中央(가재경성중앙), 而建閣懸大鐘(이건각현대종), 以報昏故(이보혼고), 名鍾街(명종가)】 書其面曰(서기면왈) 洋夷侵犯(양이침범), 非戰則和(비전즉화), 主和賣國(주화매국),
―정교(鄭喬), 『大韓季年史(대한계년사)』卷1(권1), 高宗 8年(고종 8년) 辛未(신미)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프랑스와 미국 등 서양 세력의 침략을 막아서 하지 못하게 하는 성과도 거두었으나 일시적인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조선의 근대화를 지연시키기도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3. 개항과 불평등 조약 체제
1) 고종의 개화 정책과 통상 정책
고종이 20대의 성인이 되었다. 고종 10년(1873년) 10월 서원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에 반발한 최익현을 비롯한 유림들이 대원군을 탄핵하라는 상소문(上疏文)을 올렸다. 이를 계기로 대원군에 대한 비난이 거세게 일어났다. 게다가 북학파와 청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 19세기 후반에 청국의 증국번, 이홍장 등이 벌인 근대화 운동)의 영향을 받은 개화파들이 “문호 개방이 불가피하다.”며 대외통상론(對外通商論)을 주장하고 나섰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취해 오던 흥선 대원군은 실권을 장악한 지 10년 만에 권세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고종이 직접 조선을 다스리게 되면서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일족인 여흥 민씨 세력이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명성황후 민자영은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의 외동딸이다. 민태호· 민규호· 민영목 등 명성황후 일족은 노론의 북학(北學)을 계승한 인물들이었다.
18세기에 들어서자 노론 내부에서 호락논쟁(湖洛論爭)이 벌어졌다. 인간의 성(性)과 인간을 제외한 동물의 성이 같다고 주장하며 본성의 선함을 중시한 이론인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과 인간의 성(性)과 인간을 제외한 동물의 성이 다르다고 주장하며 기질의 발현을 중시한 이론인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 간의 논쟁을 거치면서 노론(老論)은 호론(湖論)계와 낙론(洛論)계로 분기(分岐)되었다. 호론은 한원진·권상하 등 충청도 지방에 기반을 둔 노론으로 위정척사 사상[衛正斥邪思想: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배척한다는 벽이론(闢異論)에 기반을 둔 유교적 정치윤리사상]에 영향을 주었고, 낙론은 이간·김창협·이재·김원중 등 서울 경기 지방에 기반을 둔 노론으로 북학사상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명성황후 일족은 개화사상(開化思想)을 받아들여 문호 개방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세력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개화사상’은 조선 시대 말기에, 봉건적인 사상·풍속 등을 없애고 근대화를 꾀하려던 사상을 말한다. ‘개화(開化)’라는 말은 본래 『주역』의 ‘개물성무 화민성속(開物成務 化民成俗)’에서 따온 어구로 모든 사물의 지극한 곳까지 이치를 밝혀 일을 성취하고, 백성을 교화하게 하여 풍속을 이룬다는 뜻이다.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여흥 민씨의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대외 정책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2) 강화도 조약과 개항
일본의 개항과 메이지유신
조선 철종 9년(1858년) 일본의 에도 바쿠후(江戸幕府강호막부)는 미국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미·일수호통상조약」은 ‘① 5개의 항구를 개항하고, 에도(江戸강호)·오사카(大阪대판)의 시장을 개방한다. ② 일본의 관세를 미국과 협의하여 결정한다. ③ 미국의 영사 재판권을 인정한다. 등’의 불평등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 일본의 에도 막부(江戸幕府강호막부)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 네덜란드 등과도 차례로 불평등한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개항 이후 에도 막부(江戸幕府)의 굴욕적인 외교에 대한 비판이 일본 내에 거세졌다.
개항을 한 일본은 값싼 외국 면직물이 수입되면서 전통적인 수공업이 타격을 받았다. 물가가 치솟고 백성들의 불만이 커졌다. 사쓰마 한(薩摩藩살마번)·조슈 한(長州藩장주번) 등 일본 서남부 지역 한(藩번)의 무사들이 메이지 덴노(明治天皇명치천황)를 내세우고, 외세를 배격하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을 통해 봉건 체제인 토쿠카와 바쿠후(德川幕府덕천막부)를 타도하고 왕정복고(王政復古)를 단행해 새 정부를 수립했다. 이렇게 탄생한 메이지 정부(明治政府명치정부)는 개화 정책을 통해 서양의 자본주의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덴노 중심(天皇中心천황중심)의 근대 국가를 세우려고 계획을 추진하였다. 메이지 정부(明治政府)는 에도(江戶)를 도쿄(東京)라는 이름으로 고쳐 수도로 삼았다. 그리고 영주(領主)의 지방 통치기구인 ‘한(藩번)’을 폐지하고, 중앙 정부가 직접 통제하는 ‘현(縣)’을 설치하는 폐번치현(廢藩置縣)을 단행하고 봉건제를 폐지하여 중앙집권적 통일국가 체제를 수립하였다. 덴노 중심 통일국가를 형성한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富國强兵)과 문명개화를 내세워 근대산업을 육성하고 우편· 철도 등 근대산업 시설들을 도입하는 등 근대화의 길로 가는데 힘을 쏟았다. 모든 백성이 평등하게 자유의 권리를 가지는 사민평등(四民平等) 정책을 실시하여 봉건적인 신분 구조를 개혁하였고, 소학교를 세워 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징병제도와 통일적인 조세· 화폐제도를 실시하였다. 이것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명치유신, 1868년)이라고 한다.
정한론(征韓論)
일본 메이지 정부(明治政府)의 조선에 대한 외교 교섭이 실패로 끝나자,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의하여 여러 가지 특권을 잃어버리게 되어 불만을 품고 있던 무사들은 일본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메이지 정부(明治政府)는 이러한 불만을 해외로 돌리고 작은 일본내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해외 진출을 시도하였다. 1873년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서향융성),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판원퇴조) 등이 교착 상태에 빠진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병함(兵艦: 전쟁에 쓰는 배)을 이끈 외교 사절을 조선에 보내어 교섭해보다가 조선 정부가 듣지 않으면 전쟁을 벌려 조선을 정벌해버리자는 무력 외교(武力外交)를 주장했다. 이렇게 조선을 정벌할 것을 주장한 근대 일본의 한반도 침략론을 정한론(征韓論)이라고 부른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등이 조선을 정벌할 것을 주장하며 나서자, 당시 서양 여러 나라를 차례로 방문하고 돌아온 이와쿠라 도모미(岩倉俱視암창구시),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목호효윤),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대구보리통) 등을 비롯한 일단의 온건파들은 아직 일본은 내적으로 충실을 기하지 못했으니, 지금 당장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것보다 먼저 내치(內治)에 힘쓰면서 적절한 시기를 엿보아야 한다며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등의 정한론을 반대하였다. 이러한 논쟁 끝에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등은 물러나고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운요호 사건
고종 12년(1875년) 정월, 일본 외무대승(外務大丞)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삼산무)와 히로츠 노부히로(廣津弘信광진홍신)가 외교 관계의 개선을 요구하는 외교 문서를 가지고 군함을 타고 부산 항구에 들어왔다. 일본은 외교 문서에 ‘대일본(大日本)’, ‘황상(皇上)’ 등 조선을 자극하는 문구를 사용했다. 게다가 당시 조선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하는 신하들 사이에 일본 내부의 정한론(征韓論)을 경계하는 등 배외적(排外的)인 경향이 지배적이어서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조선의 내정을 살핀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와 히로츠 노부히로(廣津弘信)는 외교적 접근 대신 무력(武力)으로 위협해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다는 건의서를 일본 정부에 제출했다.
군함을 파견하여 쓰시마 근해를 측량케 하면서 조선의 내홍에 편승하여 우리들의 협상에 대한 후원을 해 줄 것을 청하는 일
조선국에 파견된 우리들 모리야마 시게루와 히로츠 노부히로 두 사람은 2월 25일부터 이달 1일까지 사이의 협상 진전 상황을 보고합니다. 이 나라는 정치 싸움 때문에 지난 9월 우리에게 약속한 조건을 아직도 이행하지 않고 있는 상태인데, 동래 훈도 현석운은 상경하여 돌아올 날짜를 연기한다고 전해 왔습니다. 서울에서 돌아와도 그가 내놓을 제안이란 또 어리석은 내용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관해서 훈령을 바라는 몇 통의 글은 저희들이 이미 보낸 바 있고, 그 중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각하의 검토를 거쳐서 내려진 결정을 통고받은 적도 있습니다. 모리야마가 진작에 청하였던 것과 같이, 우리를 지원해 줄 문제에 관해서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좋은 기회라고 판단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이 행동할 때이므로, 어째서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느냐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히로츠가 지금 이 나라의 정황을 탐지하건대, 재상은 횡사하고 대원군이 입성하여 바야흐로 두 세력이 생사를 다투고 있는 형편입니다. 한 쪽은 재기를 꿈꾸고, 다른 쪽은 이를 저지하고자 서로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백성은 거의 반이 대원군의 가렴, 폭정에 원한을 품고 있는 까닭에 갑자기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적절히 행동하기만 한다면 암암리에 개화의 기세를 도울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만일 훗날 대원군이 득세하여 전에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게 된다면, 우리도 부득이 크게 힘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가 올 것입니다. 정황이 그러한 즉, 지금 저들이 서로 싸우고, 쇄국파가 아직 그 기세를 되찾지 못하고 있을 때에 힘을 사용한다면 가벼운 힘의 과시로써도 목적을 이루기는 용이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 군함 한두 척을 급파하여 쓰시마와 이 나라 사이를 드나들게 하고, 숨었다 나타났다 하면서 해로를 측량하는 체하여 저들로 하여금 우리가 의도하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가끔 우리 정부가 우리들 사신의 협상 처리의 지연을 힐책하는 듯한 표시를 보임으로써 저들에게 위협적으로 받아들여질 언사를 쓴다면, 안팎으로부터의 성원을 방패삼아 일 처리를 다그칠 뿐 아니라, 국교 체결상 웬만큼의 권리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는 것도 틀림없는 일입니다. 미리미리 저들의 바다를 측량해 두는 것은 훗날에 일이 있건 없건 우리에게는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힘을 저들에게 행사할 수 있는 절호의 시기는 바로 지금입니다. 이처럼 무력 시위를 요청하는 이유는 오늘 한두 척의 작은 출동으로 능히 훗날 대규모의 출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지 결코 경솔하게 이웃 나라를 흉기로 농락하려는 생각에서는 아닙니다. 삼가 이상과 같이 상신하오며, 지체없이 영단을 내리시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메이지 8년(1875년) 4월 외무성 6등 출사 히로츠 노부히로
―『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 8권, pp.71∼72(최덕수, 「강화도조약과 개항」,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37· 서세동점과 문호개방』, 국사편찬위원회(탐구당 번각 발행), 2013, pp.232∼233.).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와 히로츠 노부히로(廣津弘信), 두 사람의 건의서는 무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굴복시켜 현상 타개를 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서구 열강의 포함외교(砲艦外交)에 굴복하여 개항(開港)했던 일본의 경험을 조선에 적용하고자 한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와 히로츠 노부히로(廣津弘信)의 보고서를 받아들여 조선 정책을 추진하였다. 외무경(外務卿) 데라시마 무네노리(寺島宗則사도종칙)는 정부의 수반인 태정대신(太政大臣)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삼조실미)와 우대신(右大臣)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암창구시)의 승인을 얻어 해군 군함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최덕수, 「강화도조약과 개항」,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37· 서세동점과 문호개방』, 국사편찬위원회(탐구당 번각 발행), 2013, p.233 참조).
고종 12년(1875년) 4월, 운요호(雲揚號운양호), 가스가호(春日號춘일호), 제2 데이보호(丁卯號정묘호) 등 군함 3척이 조선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부산 동래 앞바다에 도착해 함포 사격으로 무력 시위를 벌인 뒤, 동해안을 따라 함경도 영흥만까지 올라갔다가 영일(迎日)을 거쳐 일본 나가사끼(長崎장기)로 귀항하였다.
고종 12년(1875년) 8월 20일, 중무장한 군함 운요호(雲揚號운양호)는 황해안을 측량한다는 구실 아래 다시 조선을 침입했다. 운요호는 서해안을 거슬러 올라가 강화도 초지진으로 접근했다.
8월 21일, 운요호(雲揚號)는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 부근에 닻을 내렸다. 이어서 음료수를 찾는다며 단정(短艇)을 내려 함장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정상형) 이하 수십 명의 해병들이 단정에 나누어 타고 마음대로 연안을 탐색하면서 초지진(草芝鎭)으로 침입했다.
해안 경비를 서고 있던 조선의 포대 수병(守兵)은 이들에게 포격을 가하였다. 단정이 출수했다. 이어 운요호(雲揚號)가 신식 함포로 초지진 포대에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초지진 포대는 무너졌다. 일본군은 뱃머리를 돌려 후퇴하면서 영종진에 다시 함포 공격을 가하였다. 일본군의 급습을 받은 조선의 수병 400~500명은 근대식 무기를 휴대한 일본군을 대적할 수 없어서 첨사 이민덕을 비롯한 대부분이 흩어져 달아났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 35명이 전사하고, 16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대포 36문, 화승총 130여 정을 비롯한 많은 군기(軍器)를 약탈당하였다. 또한 관청을 비롯한 많은 민가가 불타고 노략질당했다. 일본군은 2명이 경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8월 29일, 강화도와 영종진에서 방화·살륙·약탈을 자행한 운요호는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귀환했다. 이것이 일본이 통상조약을 맺기 위해 무력으로 조선을 협박한 운요호(雲揚號) 사건이다.
일본의 특명전권판리대신(特命全權辦理大臣)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흑전청륭)는 조선 대표 전권대신 신헌(申櫶) 등에게 운요호(雲揚號) 사건에 대해 조선 정부의 사죄를 요구하는 한편, 수호 통상 조약을 맺을 것을 강요했다. 이에 대해 조선 정부는 의견이 제각기 달라 그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마침내 1876년 2월 2일 강화도 연무당(鍊武堂)에서 신헌과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사이에 12조로 된 「조 ·일 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체결하였다.
필자 소개
김종성(金鍾星)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여 삼척군 장성읍(지금의 태백시)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및 고려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4년「한국현대소설의 생태의식연구」로 고려대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84년 제8회 방송대문학상에 단편소설 「괴탄」 당선.
1986년 제1회 월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검은 땅 비탈 위」 당선.
2006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으로 제9회 경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연작소설집 『마을』(실천문학사, 2009), 『탄(炭)』(미래사, 1988) 출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 『말 없는 놀이꾼들』(풀빛, 1996), 『금지된 문』(풀빛, 1993) 등 출간. 『한국환경생태소설연구』(서정시학, 2012), 『글쓰기와 서사의 방법』(서정시학, 2016), 『한국어어휘와표현Ⅰ:파생어ㆍ합성어ㆍ신체어ㆍ친족어ㆍ속담』(서정시학, 2014), 『한국어 어휘와 표현Ⅱ:관용어ㆍ한자성어ㆍ산업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Ⅲ:고유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Ⅳ:한자어』(서정시학, 2016), 『글쓰기의 원리와 방법』(서연비람, 2018) 등 출간. 『인물한국사 이야기 전 8권』(문예마당, 2004년) 출간.
'김종성 한국사총서 전 5권' 『한국고대사』(미출간), 『고려시대사』(미출간), 『조선시대사Ⅰ』(미출간), 『조선시대사Ⅱ』(미출간), 『한국근현대사』(미출간), ‘김종성 한국문학사 총서’『한국문학사 Ⅰ』(미출간),『한국문학사 Ⅱ』(미출간), 『한국문학사 Ⅲ』(미출간), 『한국문학사 Ⅳ』(미출간), 『한국문학사 Ⅴ』(미출간).
도서출판 한벗 편집주간, 도서출판 집문당 기획실장 , 고려대출판부 소설어사전편찬실장, 고려대 국문과 강사, 경희대 국문과 겸임교수, 경기대 문예창작과 및 동대학원 강사,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