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이 모신 임금은 중종이다. 대장금이 어디 사람이라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정읍과 궁중여인들, 상궁, 왕비 등등의 역사적 인물에 관한 자료를 보면 의문이 풀린다.
고려 충열왕시대, 세계를 통일한 원나라 황제가 중병으로 눕게 되자 전세계의 식민지 나라에서까지 치료의원을 소집하였는데, 유일하게 완치시킨 사람이 태인사람 설경성이었다. 그 여파로 정읍 송씨가 궁중권력을 장악하였으니 그 의술은 근세까지 계승되었다.
그 의술의 능력으로 태인사람 궁녀 시무비의 몽고황제 딸인 제국대장공주(충열왕비) 독살사건, 그리고 세종때에 이곳에 부처되어 향약집성방이라는 의술책을 옹동사람 권채(권근의 조카)가 출판한다.
그후에도 선조임금의 개똥이 김상궁의 선조 독살사건, 숙종의 최상궁(태인출신 영조임금의 모친)의 경종 독살사건 등 뛰어난 의술이 구테타나 반정의 노하우로 기능하는 공통점이 보인다.
이 사건은 진실인지 허위인지는 몰라도 문헌기록에는 확실하다. 태인지역의 궁인이나 후궁들의 세력이 강할 때에 의술과 무속의 힘으로 무혈 구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바꾼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산내면 장금리 장금산,그리고 그 마을 이화동(梨花洞 )마을이 떠오른다. 요즘은 이화동 마을은 상이, 하이로 부르고 있으나 이아동, 이연동으로도 부르는데 필자의 마을에 산내면 장금리에서 시집 온 이아동댁 노인(1947년 당시70세 추정)이 약방문을 잘 이야기한 것이 생각난다.
마을의 이름 '이화'는 '의원'의 사투리로 '이연골'이라는 뜻으로 짐작된다. 대장금이 여기서 궁중으로 선발되어 시무비, 개똥이, 최상궁으로 올라간 것인지 아니면 죽어서 여기에 뭍히고 인종이나 명종이 산이름을 명명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우선 중종실록 1524-1533 년간에 이런 글이 있고, 태인 사람들이 자주 오른다. 1524년(중종 19년)의 기록에 의하면, "의녀 대장금(大長今)의 의술이 그 무리 중에서 조금 나으므로 바야흐로 대내(大內)에 출입하며 간병(看病)하니, 이 전체아(全遞兒)를 대장금에게 주라" 고 되어 있다. 중종은 의녀들 중에서 대장금의 의술이 최고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533년(중종 28년). "내가 여러 달 병을 앓다가 이제야 거의 회복이 되었다. 약방 제조와 의원들에게 상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의녀(醫女) 대장금과 계금(戒今)에게는 쌀과 콩을 각각 15석씩, 관목면(官木綿)과 정포(正布)를 각기 10필씩 내리고'라고 되어 있다.
대장금의 신상에 관한 기록은 없다. 중종의 병이 완쾌하고 장금산(산내면 장금터널의 산) 남북의 두 100세 장수노인에게 수차레 상경을 명령한 것은 대장금의 인척에게 상을 내리려는 뜻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리가 멀고, 건강상 이유로 상경하지 못하자 이들에게 후한 식량과 옷감등 재물을 주도록 전라관찰사에게 하명한 기록이 있다. 이는 대장금이 가족이 아니면 고향이웃으로 의술에 전문적 기능인이 아닌가 한다.
1533년 7월 17일 (중종33년)에 대장금이 중종의 병을 치료하면서 태인현 산내면의 송효행씨 부인 김씨와 순창의 마유량씨 부인 조씨가 100세 이상으로 전국최고 장수노인으로 알려져 중종이 수차례 두사람을 궁중으로 올려오게 하여 중종의 병, 노인병의 표본으로 관찰하고 치료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은 대장금이 자기의 고향에서 소문난 100세이상 노인의 존재를 중종에 알린 때문일 것이다.
"홍침(洪沈) 및 내의녀(內醫女) 대장금"라는 중종실록의 기록은 중종시대 후궁홍씨를 (연생이로 표현한 )홍씨 후손들이 토속성씨로 지칭하는 두월리 장금리 홍씨 집성촌으로 보인다.
대장금이 중종임금을 치료하는 방법은 침술이나 몸을 만지는 치료는 불가능하다. 그방법은 위의 장금이 기록처럼 왕의 소변과 대변의 색, 냄새, 모양 등을 보고 처방한다고 하였다. 그 방법은 당시 상당히 성행하였던 것 같은데, 이 지역의 K씨의 족보를 보면 조선 선조시대 사람으로 효자로서 부친의 병을 항상 대변을 맛보며 진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그 성씨 가문은 명예상 생략함)
그리고 산내면 두월리 사승(너디)에서 일제시대 이주해 온 박삼봉(작고)씨는 농사짓는 논밭의 흙을 혀로 맛을 보면서 비료와 논갈기 등 처리하였다. 참으로 특이한 방법이라서 1960년에 물어보았더니, 어려서부터 장금산 지역에서 어른들의 방법을 보고 그대로 지어왔다고 한다.
여기의 모든 자료는 대장금이 중종임금을 치료하는 방법, 즉 미각, 취각, 시각, 청각을 이용한 방법과 동일하다.
회문산, 장금산 일대를 묘사하고 있는 빨치산 소설과 영화 "남부군"을 보면, 원작자인 이태(안성기 분) 씨가 장금산 근처의 마을에서 중병(늑막염)으로 사경을 헤메일 때에 장금산 줄기의 마을의 보통사람 의원이 침으로 완치시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1946년경 굿을 하며 경을 읽고 하는 당시 60대의 김영선이라는 사람이 침술과 정바치굿을 겸비하는 신통한 효력으로 보여 산내면과 칠보지역에서 명성을 떨쳤던 사실을 필자는 기억한다.
산내면이‘21세기 친환경 청정농산물 생산의 메카’로 발돋움하기 위한 첫발을 내딛었다고 한다. 정읍시는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청정환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옥정호 상수원보호구역인 산내면 일대를 ‘친환경 청정농산물’ 생산지역으로 육성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17일 오전 ‘무농약청정지역’으로 선포했다고 한다.
이는 지역여건을 살린 농촌관광자원 개발 시책의 하나로 농업소득의 향상과 함께 그린투어리즘(생태관광)의 거점지역으로 삼아 지역발전을 꾀하겠다는 전략이라 하기에 이 글로 덧붙인다.
전술한 바와 같이 탁월한 의술의 전통과 무관치 않다는 생각이다. 침울하고 어려운 농촌의 고향에서 의학과 건강농산품의 메카가 될 근거로써 이 정도의 자료면 충분하지 않을까.
대장금에 대한 유일한 아래의 기록이 방송극으로 방영되었다. 방송극은 이 자료를 근거로 살을 붙여 극화하였다. 다시 한번 그 내용을 소개한다. 그 중종실록 대장금 기록자료의 요약은 아래와 같다.
1515년(중종 10년)의 실록에 의하면, 인종을 낳은 후 산독으로 세상을 떠난 장경왕후 윤씨(중종의 제1계비(繼妃))의 치료를 맡았던 의관들의 처벌을 놓고 논쟁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의녀인 장금은 호산(護産: 왕실비빈의 출산을 돌보는 일)하여 공이 있었으니 당연히 큰상을 받아야 할 것인데, 마침내는 대고(大故)가 있음으로 해서 아직 드러나게 상을 받지 못하였다.
1524년(중종 19년)의 기록에 의하면, '의녀 대장금(大長今)의 의술이 그 무리 중에서 조금 나으므로 바야흐로 대내(大內)에 출입하며 간병(看病)하니, 이 전체아(全遞兒)를 대장금에게 1533년(중종 28년). '내가 여러 달 병을 앓다가 이제야 거의 회복이 되었다. 약방 제조와 의원들에게 상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의녀(醫女) 대장금과 계금(戒今)에게는 쌀과 콩을 각각 15석씩, 관목면(官木綿)과 정포(正布)를 각기 10필씩 내리고'라고 되어 있다.
1544년(중종 39년) 1월 29일, '내가 저번에 감기가 들어 해수증(咳嗽症: 기침)을 얻어서 오래 시사(視事)하지 못하였다. 조금 나아서 경연(經筵: 군주에게 유교 경서와 역사를 가르치던 자리)을 열었더니, 그 날 마침 추워서 전의 증세가 다시 일어났다. 의원 박세거(朴世擧)와 홍침(洪沈) 및 내의녀(內醫女) 대장금과 은비(銀非) 등에게 약을 의논하라고 이미 하유(下諭)하였거니와, 이 뜻을 내의원 제조에게 이르라.'
1544년(중종 39년) 2월 9일, '의녀 대장금에게는 쌀과 콩을 도합 5석(石), 은비(銀非)에게는 쌀과 콩 3석을 하사하고'라는 기사가 이어진다. 감기가 걸려 고생하던 중종은 약 10일만에 감기가 나았고, 그 공로로 장금에게 상을 내리고 있다.
1544년(중종 39년) 10월 25일, '이날 의녀 장금이 나와서 말하기를 "어제 저녁에 상께서 삼경(三更,저녁 11시∼1시)에 잠이 들었고, 오경(새벽3시∼5시)에 또 잠깐 잠이 들었다. 또 소변은 잠시 통했으나 대변이 불통한 지가 이미 3일이나 되었다"고 했다.'
종합해 보면, 수면과 소변 대변을 대장금이 관찰하고 건강음식과 탕약으로 치료한 것이 확실하며, 전국최고의 장수노인이 장금산 지역에서 살고 있었고, 장금의 고향으로 장금산 보다 더 유력한 곳이 있다는 고증은 아직까지 없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가 새로운 연구 조사를 통해, 환경 농산물 생산의 세계적 메카로 약진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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