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어깨에 메고 있는 형벌을 받고 있는 아틀라스(Atlas)를 구원해야 하는 까닭
-『아틀라스 한국사』(사계절출판사)를 읽고
1. 좌도우서(左圖右書) : 지도를 통한 역사 읽기
도서관(圖書館)이라는 단어 속에는 ‘지도와 책’을 모아둔 곳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옛 선현들은 ‘좌도우서(左圖右書)’라 하여, 왼쪽에 지도를 두고 오른쪽에 책을 두고 가까이하며 치국과 경륜의 바탕으로 삼았다고 한다.
인간의 삶은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 있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체계적으로 기록한다. 인간이 삶의 영역을 넓히고 삶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과 다른 지역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필요하다. 지도는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공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발달하였다.
인간은 원시시대부터 장소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하였다. 먹을 것이나 물을 구할 수 있는 곳, 사냥하기 좋은 곳, 잠자리로 이용하기에 적합한 동굴 등의 정보를 체계화시키고 정리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정보를 지도로 만들어 이용하였다. 선사시대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에도 지도와 가까운 요소들이 많다.
지도란 ‘지구 공간의 일부 또는 전부를 일정 비율로 축소하여 문자와 부호, 색채로써 평면에 재현한 도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알기 위하여 지도를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길(道)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공간적 의미의 길이고, 둘째는 정신적 의미의 길이다. 지도를 읽어나가다 보면 자연지리를 통하여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인문지리의 의미까지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확장시키게 된다.
우리 역사에서 지도를 통한 역사 읽기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는 1402년(태종 2)에 김사형-이무-이회 등이 제작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서 볼 수 있다. 이 지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이다. 지도의 윗부분에 중국 역대 제왕(帝王 )의 도읍지가 적혀있어 역사부도의 역할을 겸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남방 한족 중심의 세계관을 담은 지도는 ‘화이도(華夷圖)’라는 이름을 붙였고, 북방의 이민족이 중원 대륙을 장악했을 때의 세계관을 담은 지도는 ‘혼일도(混一圖)’라 불렀다.
우리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통해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다. 우선 동서 문명교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인도가 반도로 표현되지 않은 점과 나일강의 수로 형태로 보아 이 지도는 톨레미(Ptolemy)식 지도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톨레미식 지도의 영향을 받은 이슬람지도가 원나라에 전해지고, 그 지도가 다시 조선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지도에는 당시 사람들의 중화적 세계관이 표현되어 있다. 지도 한 가운데 중국이 그려져 있으며 세계 육지의 절반 이상이 중국이다. 게다가 조선이 일본보다 4배정도 크게 그려져 있다.
이러한 지도를 통한 역사 읽기의 전통은 최근 출판된『아틀라스 한국사』(사계절출판사)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아틀라스 한국사는 디지털 시대의 좌도우서(左圖右書)를 표방한 현대적 의미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고 할 수 있다.
2.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형벌을 받은 신, 아틀라스(Atlas)
아틀라스(Atlas)는 티탄족의 신으로 프로메테우스-에피메테우스 등과 형제다. ‘먼저 깨달은 자‘라는 뜻의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제우스를 속이고 불을 훔쳐서 인간에게 주었다. 제우스는 이를 벌하기 위해 인류 최초의 여성인 판도라(Pandora)를 만들어 ’나중 깨달은 자‘라는 뜻의 에피메테우스(Epimetheus)에게 보냈다. 에피메테우스와 결혼한 판도라는 호기심 때문에 신들이 결혼선물로 준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고야 말았다. 상자 속에서 인간의 모든 번뇌와 괴로움을 주는 불행들이 튀어나왔고, 판도라가 급히 뚜껑을 닫았을 때 상자에는 오직 하나 희망만이 남았다고 한다. 훗날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장래에 관한 비밀을 알려주지 않아 코카서스의 큰 바위에 묶여 독수리가 간(肝)을 쪼아 먹는 형벌을 당한다. 프로메테우스의 간은 밤이 되면 다시 회복되어 다음날이면 또 다시 독수리에게 똑같은 고통을 당해야만 하였다.
아틀라스가 제우스에게 받은 형벌도 형제들 못지않게 고통스러웠다. 티탄족은 제우스와 같은 올림포스족 신들 보다도 먼저 탄생한 신들인데, 올림포스족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세상의 지배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제우스는 전쟁에서 진 아틀라스에게 창궁(蒼穹)을 어깨로 떠받치는 벌을 내렸다. 아틀라스가 하늘을 떠받치는 일을 쉰 것은 과수원에서 황금사과를 가져오라는 11번째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온 헤라클레스가 잠시 동안 하늘을 떠받치고 있을 때뿐이었다고 한다.
그럼 왜 아틀라스가 지도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을까? 16세기 중반에 세계 최초의 지구본을 만든 게하르트 메르카토어(Gehard Mercator)는 1595년에 새로운 개념의 세계지도를 만들자마자 죽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결과물을 지도(Landkarte)라고 하지 않고 아틀라스(Atlas)라고 불렀다. 리비아의 임금이었던 아틀라스가 인류역사에서 최초로 천체도를 그린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기념하여 아틀라스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으나, 아마 그리스 신화의 불운의 신 아틀라스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당시 유럽에서 제작된 지구본이나 세계지도를 보면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아틀라스를 찾아볼 수 있다.
훗날 해부학자들은 사람의 척추 중에서 첫 번째 목뼈(제1 경추)를 아틀라스라고 명명했다. 사람의 머리를 떠받치고 있는 뼈를 신화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작명한 것이다. 또한 지도를 부르는 이름이 된 아틀라스는 해부학 그림이나 병리학 도해圖解)라는 뜻으로도 쓰이게 되어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3. 블록버스터 역사지리서 :『아틀라스 한국사』
자 그러면 이제『아틀라스 한국사』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이 책은『월간 말』의 김성환 편집위원이 편집을 했고, 교원대 역사교육과의 송호정-이병희-김동진-김정찬-김한종 등의 교수진이 나누어서 집필을 했다. 고대-남북국시대-고려-조선-근대-현대로 시대구분을 한 모두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183장의 지도와 93개의 사진, 46개의 다이어그램으로 한국 역사를 설명한다. 역사를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서 화려하고 세련된 천연색 지도와 도판, 고품질의 종이, 그리고 상당한 제작비를 투여한 ‘블록버스터 역사지리서’라는 것을 첫 눈에 느낄 수 있다.
제1장 고대편의 책장을 처음 펼치면 고아시아 인류-몽골 인종의 이동 경로와 동아시아의 인종 분포를 알 수 있는 두 장의 지도가 있다. 그리고 고조선의 건국과 관련한 설명과 지도도 있다. 제1장 고대와 제2장 남북국시대는 고조선사를 전공한 송호정 교수가 집필했다. 송호정 교수는 최근『단군, 만들어진 신화』(산처럼)에서 단군은 ‘역사적 상황을 담고 있는 신화’일 뿐인데 1970년대 말~80년대 초에 극우적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 재야사학자들에 의해 ‘역사적 사실’로 왜곡되었다고 주장했다.『아틀라스 한국사』의 고대편은 재야사학의 입김에서 벗어나 학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한 서술이 돋보인다.
송호정 교수는 재야사학자들이『한단고기』나『규원사화』같은 고기류(古記類)에 근거하여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역사적 인물이며 우리 민족의 조상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지만 이러한 책들은 모두 위서(僞書)일 뿐이라는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이들 고기류가 위서인 근거는 첫째, 한단고기에서 인용되고 있는『단군세기』와『북부여기』-『태백일사』에는 '영고탑'과 같은 청나라 때부터 사용된 지명이 자주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영고탑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다"는 표현을 한 것을 보면 영고탑을 탑으로 잘못 알고 있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영고탑이란 지명은 청나라 시조 형제와 관련해서 생겨난 이름으로 만주어로 '영고'는 여섯이라는 뜻을, '탑'은 앉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둘째, 근대 이후에 사용하기 시작한 '문화(culture)'나 '원시 국가'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단고기]나 [규원사화]에서는 문화를 'culture'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이러한 언어사용은 근대 이후에 형성된 것이다. 셋째, 고려 우왕 말년까지의 대외항쟁사를 기록한『태백일사』에는 당연히 언급되어야 할 '왜구'와의 싸움에 대해서 한마디도 없다는 점에서 이 책이 일본군국주의에 의해 오염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현대사학자들은 이 책의 편자의 성향과 관련하여 민족주의 인사가 아닌 식민사관에 젖은 "친일적 인사들이 자신을 민족주의자로 호도하기 위한 합리화론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오류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학계의 최신 연구 성과를 반영한 것과 더불어 이 책에서 가장 큰 특징은 지도와 다이어그램으로 역사의 흐름을 보여주는 독특한 방식에 있다. 예를 들어, 조선후기의 ‘세도정치’에 관한 항목에는 세도가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가계도, 홍경래의 난의 전개 상황을 보여주는 지도를 보여준다. 지도는 구체적으로 홍경래와 관군의 전투 지점-이동경로-거점을 표시했고, 홍경래의 난을 기회로 봉기를 선동한 벽서사건 발생지를 표시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지도를 통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보는 방식이 있음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당시의 해전을 묘사한 지도는 일본 열도를 위에 놓고 남해안을 아래쪽에 배치했다. 이것은 조선의 왕이나 명나라의 원군이 왜군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우리들은 평소 북쪽을 위로해서 지도를 보는데 익숙하다. 그러나 지도를 뒤집어 봄으로써 왜 부산에 경상좌수영이 있었는지, 해남에 전라우수영이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는 관점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관점에서 지도를 바라보면 확실히 다른 관점에서 세계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지도 읽기는 1998년 가을 오오사카에 있는 일본 국립민족박물관에서「대몽골전-초원의 유목문명」특별전을 개최할 때 아시아 지도를 뒤집어 배치해봄으로써 몽골고원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새로운 시도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에서도 1998년 6월에 경기도박물관에서「몽골 유목문화」특별전을 할 때, 일본 국립민속박물관의 고나리 유키(小長谷 有紀) 교수와 정강대학(靜岡大學)의 양 하이잉(楊 海英) 교수의 관점을 소개하며 아시아 지도를 뒤집어 배치한 적이 있다.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한국전쟁, 광주민주화 운동 등을 지도와 함께 설명한 현대사편은 아틀라스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중산간 마을과 해안 마을의 민간인 학살지를 지도에 일목요연하게 표시했고, 여순사건 당시의 14연대 군인들의 이동경로와 국방경비대의 진압경로 뿐만 아니라 민간인 학살 장소와 희생인원을 밝혔다. 최근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에 관한 진상규명을 위한 학계와 시민단체의 다양한 노력을 꼼꼼하게 반영한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른 국군-미군-유엔군과 인민군-중국군의 전투현황을 지도에 표현했고,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1980년 5월18부터 27일 사이에 일어났던 공수부대 진압에서부터 시민군의 최후까지를 4장의 상황도에 정리했다.
하지만 약간 아쉽거나 사실과 다른 오류도 눈에 띄었다. 우선 우리나라와 중국-일본-이슬람-유럽 등 세계의 고지도를 활용한 역사지도가 거의 없다는 점이라든지, 옛날 조선이나 중국에서 제작하였던 ‘역대지도’류의 역사 지도를 이용하거나 소개하지 않은 점도 아쉬웠다. 그리고, 서울의 5부를 설명한 18세기 중반의 한양지도(p 101)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여지도(輿地圖)』라는 지도첩에 들어있는「도성도(都城圖)」인데 지도 이름이나 출처를 명확히 밝혔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한편, 주요 유배지 및 실학 활동지라는 제목으로 실학을 소개(pp 134~135)의 경우는 마치 실학이 유배지에서 탄생한 학문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다. 일제시기 이전까지 ‘실학(實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학문적 경향들을 ‘실학’이라고 명명한 것은 1930년대 위당 정인보가 ‘실사구시지학(實事求是之學)’이라는 말을 사용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의 계보도를 통하여 ‘붕당’을 설명한 부분(p 125)에서는 노론 김석주의 예에서처럼 각 당파의 중심인물인 영수의 이름이 잘못 들어가기도 했다. 이러한 아쉬움과 오류들은 편집자와 필자들이 추후 보완하여 바로잡았으면 좋겠다.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한 ‘고구려사 왜곡’과 관련하여 고대사와 남북국의 역사는 언론과 정치권, 국민들의 관심이 고조되어 있다. 그러나 할 일을 안하는 정부와 역사학자들의 안이한 연구태도, 그리고 이데올로기만 강요해온 역사 교육에 의해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사실 규명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 책의 편집을 맡은 김성환 편집위원은『월간 말』(2004년 220호)에「왜 역사지도가 필요한가」라는 글에서 우리나라의 지도 인프라가 얼마나 부실한가를 폭로하였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펴낸 지도에는 북한에 관한 지리 고해상도 등고선 테이터가 없어서 캐나다 국적의 한 위성지도 업체를 통하여 평양 지역에 대한 높이 10미터까지 식별이 가능한 상세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지도 위에 여러 가지 역사 정보를 담아야 하는 역사지도는 등고선을 그려 넣으면 지도가 너무 복잡해지기 때문에 음영기복도를 사용해야 하는데, 국토지리정보원에서는 등고선 데이터만 제공할 뿐 음영기복도는 제공하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아틀라스 한국사』를 만들기 위해 국토지리정보원으로부터 등고선 데이터를 받아 3D 프로그램을 통해 입체화시켜 판매하는 민간업체의 음영기복도를 비싼 가격에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김성환 편집위원은 역사지도의 인프라가 부족한 대표적인 예로 고조선부터 조선까지의 정설로 확정된 국경선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발해의 경우, 중국 학계와 한국 학계가 제시하는 남쪽 국경선이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또한 고려 때 윤관이 함경도 지방의 여진족들을 몰아내고 쌓았다는 동북 9성의 위치도 한국과 일본의 학계가 서로 통일된 견해를 내놓고 있지 못한 것을 지적했다. 일본인 학자들은 함흥 일대에 9성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한국의 민족주의 사학계에서는 두만강 건너 만주 평원에 9성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은 되도록 고려의 영역을 축소시키려 하고, 한국은 고려의 영역을 과도하게 넓히려 하다보니 국가이익을 추종하는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사실규명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지도 인프라는 하루아침에 구축될 수는 없을 것이다. 지도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The History of Cartography (Volume 1~8)』와 같은 서양 지도의 역사-이슬람 지도의 역사-한국 지도의 역사-중국 지도의 역사-일본 지도의 역사-남미나 아프리카 등 기타 문명권의 지도의 역사 등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 자료가 번역-소개되고, 조로아스터교-기독교-유대교-힌두교-불교-유교-이슬람교-각 지역의 토착종교 등의 세계관과 저승관이 지리학과 지도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는 연구 결과들이 출판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오방위 개념-이슬람의 지도에서 북남방향으로 지도를 그린 지리 개념-중세 기독교의 지도에서 위쪽을 동향으로 설정한 개념 등 종교가 세계관과 지도에 미친 영향 분석도 연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근대 세계의 출현과 국경선 개념 발생의 상호 영향이나 역사인식의 변천에 따른 지리인식의 변화와 같은 주제들도 학제간 연구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정부의 예산 지원과 국내의 기술 개발, 전문 학자들과 일반인들의 인식 전환이 있어야 지도 인프라의 구축이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아틀라스 한국사』는 우리 사회에서 지도 인프라 구축의 구체적인 필요성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옛 선인들의 ‘좌도우서(左圖右書)’의 전통을 복원하여 무거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형벌을 받고 있는 아틀라스(Atlas)를 구원하는 일은 『아틀라스 한국사』를 읽은 독자들의 손에 달려있다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