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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60주년 기획인터뷰> 기장과 한신신학의 미래―김경재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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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지난 6월 19일 한국기독교장로회 60주년을 맞아 기장 교단과 한신 신학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한신신학의 전망에 대해 조언을 듣기 위해서 수유리에 위치한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의 집을 찾았다.
김교수는 칼 바르트, 폴 틸리히, 라인홀드 니버, 본 훼퍼, 위르겐 몰트만 등의 서구신학자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인격적이고 인간의 채취를 통해서 신학적 영향을 받은 선생'으로 고백한 사람은 장공 김재준 목사와 함석헌 선생이었다. 그는 두 신학의 거장에 대한 한국교회의 신학적 평가가 아직도 제대로 되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평가절하 되고 있는 것에 대해 통탄을 금치 못했다. 여생동안 제대로 된 장공 평전에 대한 집필 의지를 피력하기도 한 김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기장과 한신의 역사, 한신 신학의 미래에 대해 조언을 들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35년 한신의 역사와 함께한 선생 건강과 근황은 어떠신지요. 작년 1월에는 조금 힘들었는데 지금은 괜찮다. 35년간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만 하고 있어서 목회에 대한 마음에 빚이 있었는데 은퇴 후 삭개오작은교회를 시작한지 8년이 됐다. 애초 큰 교회를 지향하지는 않았고 백 명 정도의 교회를 생각했는데 현재 평균 60여명 교인들이 출석하고 있다. 이제 70세도 넘어 교회를 후임에 넘겨주고 마지막 신학 작업으로 폴 틸리히에 대한 글을 쓰려고 준비 중에 있다. 한신은 70세 이상은 출강을 못하는 규정 때문에 한신에서의 강의는 못하고 있고 이번 학기 까지 성공회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해석학을 가르쳤다. 그것도 이번 학기가 마지막이다. 한신 강단에서 처음 가르치셨던 때가 언제인지요. 그 당시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내가 한신 모교에서 일하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학교가 당시 혼란기였던 시대적 상황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 봉사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학교 상황이 정상적이었다면 아마 내가 임용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한다. 1960년대 말 한신교수진의 혼란이 있었다. 시국과는 상관없이 학교발전문제와 관련해 당시 이여진 학장과 교수단 사이의 갈등이 심했었다. 결국 교수진 전체가 이사진 앞에서 사직서를 제출하고 교수진이 해체가 된 상태였다. 이후 김재준 목사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한신을 떠나 당시 연세대신학대학 학장으로 있던 김정준 박사를 설득해 한신의 교수진을 새롭게 조직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김정준 학장을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된 교수진의 핵심으로 안병무 교수가 있었고 기존 교수 중 박봉랑, 전경연, 문동환 박사가 다시 새롭게 초빙됐다. 그리고 젊은 소장 학자들을 영입했는데 황성규, 정웅섭, 장일조, 그리고 내가 막내로 초빙된 것이다. 당시 나는 전임조교로 시작했고 1971년 5월 전임강사가 되면서 강단에 서게 됐다. 한신에 들어온 1970년대 초는 그야말로 시대적으로 격동기였다. 정치사회적으로 아주 어려운 시기였다. 당시 30대 초반인 나로서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던 시기였으나 핑계 같지만 학생들이 연행되면 경찰서로 찾아가 대신 각서를 써주고 데리고 나오고 이런 일을 매일같이 하다 보니 유학도 공부도 늦어버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학문적인 공헌보다는 6,7,80년대 격동했던 한신, 그리고 기장의 역사를 몸소 체험한 세대이다. 그렇게 내 자리매김을 했다고 본다. 35년 동안 한신에 있었다. 제일 오래 근무한 셈이다. 일생을 한신에서 지냈다. 그러다보니 이 지역을 떠나지 못하고 수유리에 남아있다.(웃음) 기장의 심장으로 존재하는 한신 기장교단의 시작은 기장신학의 태동과 그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장신학의 유일한 교육기관인 한신과 기장교단과의 관계설정이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한신은 다른 교단과는 달라서 신학이 먼저가 되고 그 다음 교단이 뒤따라온다.’라는 견해가 존재한다. 물론 이 말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것이지만 자칫 과장이 되거나 강조되면 오히려 역기능을 준다고 생각한다. 60주년을 맞아 차제에 왜 그런 말이 나왔고 그런 말을 우리가 강조하는 이유가 뭔가를 분명히 해야 된다. 왜냐하면 장공을 포함해 한신의 초창기 신학자들인 전경연, 박봉랑, 문익환, 문동환 교수 같은 분들은 일반대학의 종교학과 교수가 아니었다. 쉽게 말해 예일대학의 Divinity school(신학교)이나 시카고 대학이나 독일의 종합대학안의 신학부 교수가 아니었다. 우리학교는 근본적으로 신학대학(Theological seminary)이다. Divinity school와 어떻게 다르냐면 처음부터 목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고등교육기관이라는 것이다. 결국 성직자를 양성한다는 것은 교회를 위한다는 것을 전제로 세워진 교육기관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전통적 신학에서는 ‘신학은 교회를 섬기는 학문이다.’라는 말로 압축하는 것이다. 아까 말한 기장은 학교가 앞서고 교단은 뒤따른다는 말은 자칫 학교가 교단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즉 학문의 오만과 교단과 교회의 목회적 현실의 절박한 상황을 학문성이라는 이름으로 도외시하고 현장교회와 목회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학문을 위한 학문, 신학을 위한 신학이라는 풍조가 실제로 있어왔다고 생각한다. 기장과 한신의 관계를 절대로 그런 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어느 것이 위고 아래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신학교와 교회라고 하는 하나의 선교의 기능과 직책 면에서 전문적 분야가 다를 뿐 수평관계로 보는 게 옳다. 다른 교단은 거꾸로 교권아래 신학교육을 두고 교권이나 총회가 하라고 하는 것만 가르치고 주문하는 내용에 맞춰 목회자들을 생산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것이 대부분의 한국교회 신학교육의 문제이다. 어느 한 쪽이 지배받고 지배하는 방식의 관계가 아닌 서로간의 수평적 관계에서 교회로 하여금 교회답게 하고 비판적 지성을 가지고 선교의 방향이 복음적인가 아닌가를 끊임없이 자기 성찰하는 교회공동체로서의 학문적 지성적 작업이 신학행위이다. 그 점에 있어서 장공이나 한신의 신학 선생님들은 교회를 우습게보거나 교단을 신학교 아래에 종속시키는 그런 모습은 전혀 없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되면 기장의 교회사이야기를 안할 수 없다. 38회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출교 조치한 후 그에게 수업을 받는 목회자들에게 안수를 주지 않자 호헌총회가 열렸고 그 중심인물로서 김재준 목사가 전면에 나선 측면이 없지 않다. 이념이 뚜렷했고 보수적 교권과 교단과 외래 신학과 선교사, 신학적 문화제국주의를 따르지 않고 주체적인 교육을 하겠다는 노선이 뚜렷하다 보니 다른 교단과의 차이가 크게 보인 것이다. 지금은 잘 정리되어 교단을 대표하는 분은 분명 총회장이고 한신대학은 한신학원 이사회로서 여러 가지 기장의 기관 중 하나인 것이다. 총회 교단의 정치적 질서는 정리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기장의 역사적인 배경을 무시하다보니까 잘못하면 신학교 교수단 자체도 교단을 진정한 의미에서 섬기고 존중하려는 의지가 약해지면 안 되고 또 교단은 교단대로 여러 기관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 교회정치적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것도 문제이다. 신학교육은 영적인 생명운동이다. 심장이 신체에 큰 부위를 차지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피를 송출해야 몸이 건강하듯이 신학교로 하여금 건강한 소리와 자기 발언을 하게끔 하고 귀중히 여기고 우리교단의 심장과 같은 부서라는 인식과 풍토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잘해왔지만 앞으로 더욱 잘해야 기장이 살고 학교가 산다. 속된말로 밥그릇 찾기 식으로 나간다면 다 망할 수밖에 없다. 그 점에서 한신과 기장과의 관계는 중요하다. 한신도 구체적으로 교회와 교단에서 제대로 된 복음을 선포할 목회자들을 생산하는 교회를 섬기는 학문으로서의 신학교육의 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 좋겠다. 기장과 한신의 설립이념으로 돌아가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만나야 한다 기장신학, 한신신학 60년을 소회한다면 어떻습니까.
김경재 교수는 대답에 앞서 본인이 2001년 집필한 『김재준 평전』 중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출범 선언과 장공이 발표한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의 전신)의 교육이념을 복사해 보여주었다. 조선신학교의 교육 이념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이념적 선언내용 간단한 것 같아도 이 속에 우리 기장이 아무리 변해도 변해서는 안 될 statement(성명)가 있다. 장공을 포함한 초창기 신앙선배들의 마음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는다.’ ‘복음의 자유’ 등의 선언을 ‘너무 흔해빠진 그 소리가 그 소리다’라고 듣는다면 곤란하다. 장공은 굉장히 신앙적인 사람이었다. 성령의 내주하심과 그리스도가 일생에 동행하신다는 것을 믿으면서 평생을 사신 분이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심장과 만나라.” 그것이 장공이 내게 가르쳤던 것의 핵이다. 장공은 신학교를 세우고 학장까지 했지만 신학을 경계한 신학자였다.
그 점에 있어서 한신신학이 60주년을 맞이하면서 재천명해야 할 것은 근사한 용어가 아니라 선배들이 처음 시작했던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온갖 형태의 바리새주의를 배격하고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구원 얻는 복음의 자유를 확보한다.’는 우리 선배들이 제시했던 비전과 꿈은 정말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그 비전에 걸 맞는 내용을 우리가 갖췄느냐는 물음에 우리는 겸손하게 냉철하게 반성하면 좋겠다는 것이 내 솔직한 고백이다. 구체적 예로 얼마전 어느 신학연구단체에서 신학자 5,60명이 김재준을 연구하는 세미나를 한다고 해서 참석했는데 솔직히 실망했다. 장공에 대한 이해가 아직도 멀었다. 그 내용을 종합하면 장공의 신학적 비전이나 열려진 복음주의 열려진 세계 그분의 자리매김의 평가를 아직도 못하고 있었다. 기껏 한다는 말이 ‘그분이 너무 앞서버려 분열의 원인제공을 했다.’ 여전히 그들에게 장공의 레테르는 자유주의 신학자, 신신학자, 너무나 앞서가 버린 신학자, 교회의 덕성을 무시한 채 교육한 신학자, 인본주의 신학자 그런 투로 이야기를 했다. ‘큰일 났구나’ 생각했다.
한신신학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해주십시오. 기장이 그간 설움도 많이 당했다. 교단장들이 모이면 신도수가 몇이냐고 예산이 얼마냐 따지니까. 역대 총회장들이 우리도 숫자 좀 불려 보자고 3000교회 운동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게 되나. 차라리 기장은 기장교회로서 (자생적인 큰 교회는 막을 이유는 없다) 다른 여러 교단을 제처 놓고 ‘기장’하면 ‘개신교회 소속된 교회로서 기본적으로 교회가 2,3백 명을 기본모델로 하고 순수하고 성실한 목회를 하는 교파’라는 특징으로 자리매김이 되길 바란다. 퀘이커 교도 숫자가 전 세계에 1,20만밖에 안되지만 숫자와 상관없이 독특한 역할을 해내고 있잖은가. 기장도 그래야한다. 우리의 정체성을 말로는 주장을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우리 정체성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고 현실의 논리에 따라가려고 했다. 정직한 자기반성을 할 필요가 있다. 장공을 이해 못한다는 것은 기장을 이해 못하는 것이다. 타 교단에서 보기에 기장은 기껏 그들이 자기들이 차마 교권주의 때문에 말 못하는 사회정치경제적 부정에 대해 종종 입바른 소리를 해대는 교단정도로 여기고 있다. 또 노동, 빈민운동 등 특수선교에 앞장선 교단 정도로 여긴다. 문제는 앞으로 변천해 가는 세계문명사 속에서 교회가 뒤따라가고 뒤처리하는 문명의 지진아가 아니라 문명의 한복판에서 문명의 본질을 향도하고 치유할 것은 치유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그런 교단으로서의 비전과 가치에 대해서 인정을 못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배태진 총무가 기장성을 갖고 정체성을 잃지 않고 활동하는 모습을 좋게 보고 있다. 신학교육 면에서 다시 본다면 세계가 바뀌었다. 20세기를 크게 본다면 1960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가 다르고 20세기 후반 특히 1990년 이후부터 신학계가 급속도로 달라졌다. 그렇게 급박하게 문명의 변화 속도가 빨라졌다. 신학교육의 컨텐츠면에서 한신과 기장이 해야 할 것은 새롭게 변하고 있는 시대를 읽어내는 눈을 가져야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천기는 분별하면서 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하셨던 것처럼 지구촌의 인류문명사가 흘러가는 거대한 시대의 변화에서 신학적으로 태클해 들어가야 하는 핵심 화두를 갖되 우리의 뿌리는 흔들리면 안 된다. 개혁파 교회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되 계속해서 과거사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별 의미 없다. 과거사는 1/3정도만 하고 나머지 2/3는 ‘새로운 신학적 주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천착해야한다. 그런 것의 구체적인 첫 번째 주제가 에큐메니칼 신학운동에 대한 한국교회의 천박한 입장이다. 가령 WCC 부산대회를 앞두고 한국 보수교회가 하는 소리가 점입가경인데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 구분도 못하는 그런 이야기를 언론을 통해 하고 있고 대부분의 교인들이 아무 문제의식 없이 그러한 것을 접하고 있다. 문화신학을 하는 내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시대의 흐름에서 완전히 뒤떨어져 게토화 된 것에 불과하다. 섬처럼 되어버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결국 저들이 갖고 있는 기존의 신학교리, 도그마는 결국 역사와 문화가 버린다. 조금만 길게 보면 한국기독교는 위기다. 이게 한국 신학적 지성계의 위치이다. 그런 점에서 기장은 아직도 해야 할 소리와 역할이 많이 남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과학기술문명과의 대화에 대한 몇 가지 화두이다. 생명과학문제가 그것이다. 현대인 대부분이 학문이론으로 보면 물질적 환원주의자들이 되어가고 있다. 인간의 두뇌라는 게 컴퓨터와 마찬가지고 죽으면 고철이되 듯 모든 게 끝이라고 인식하는 유물론적 환원주의가 우리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 과학적 최첨단의 지성을 충분히 이해하는 과학자 중에서도 ‘그렇지 않다. 인간의 정신, 영혼, 심령, 속사람 자체는 그렇게 물질적 환원주의로 해소 되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기장이 개입해서 막 치고 나가야 한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에서는 진화론 만 말하면 이것은 반기독교인 것으로 매도 되어버리는 이런 종교가 앞으로 무엇을 하겠는가. 진화의 신비를 설명하는 여러 이론이 있는 것뿐이지 생명 자체가 진화한다는 것을 부정하면서 무슨 진리담론이 가능하겠는가. 그렇게 발목이 잡혀 한국 목사, 신학자들 중 70%이상이 진화론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소리 아닌가. 그것을 박차고 나아갈 교단은 기장 밖에 없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 크게 말하면 과학과 신학과의 대화이다. 문명충돌이라고 하면 핵심이 결국 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기독교의 실존 고백적인 것을 분명히 하면서도 하나님의 우주섭리를 더 깊고 폭넓게 이해해야 한다. 다원주의 담론까지 안가도 좋다. 최소한 WCC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는 포용적 입장까지 만이라도 가야한다. 한국교회를 변혁시키는데 기장이 안하면 할 데가 없다. 다른 교단은 교수들이 그런 말 못하는 실정이다. 사실 우리 기장 안에서도 그런 소리가 쉽지는 않다. 문화적 차원에서의 선교정도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동서인 김상근 목사가 총무 할 때부터 줄곧 얘기해왔는데 7,80년대 선교대회를 하면 5번하면 3,4번은 사회정치적 이슈로 하되 한번정도는 순수한 문화적 변혁에 임하는 기장의 새로운 비전을 이야기 하라고 말했었다. 60년대 이후부터는 WCC안에 종교 대화국이 설치 된 이후 무수히 많은 문서와 이론이 나오고 있는데 한국교회에서는 전혀 소개가 되지 않고 기장마저도 너무 사회정치적 이슈가 시급하다보니 문화적 종교적 사상적 차원에서 치고 나가야할 면에 있어서는 우리가 본의 아니게 시간과 정력을 쏟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래서 기장신학이 좁아진 측면이 있다. 기장이 사회, 노동, 정의, 정치 입바른 소리만 하는 집단이 되어버린 측면이 없지 않다. 우리의 선교지평을 넓혀야 한다. 우리보다는 감리교에서 변선환 학장이후 기장보다 생산물만 보면 감리교가 훨씬 생산적이다. 과학과 종교, 문화, 종교다원현상은 앞으로 이슬람 모스크가 많아지고 노동인구가 유입되면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때문이 기장이 본래 개방적인 그러나 복음의 뿌리를 철저히 내리는 입장을 천명해야한다고 본다.
나는 함석헌 제자는 아니지만 장공과 더불어 함석선 선생을 가장 큰 선생으로 고백한다. 그 다음 세대로서는 서남동, 유동식 선생을 꼽는다. 바르트, 틸리히, 니버, 본훼퍼, 몰트만 등 서구신학자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을 사실이다. 허나 인격적인 인간의 채취를 통해서 신학적 영향을 받은 선생은 김재준 목사와 함석헌 선생이다. 한국 개신교 역사 130년이다. 그간 수많은 목회자와 학자가 많이 나왔지만 그 중 동아시아의 영성을 밑에 깔고 서구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하고 체화해 자기 생명의 밥줄에서 흡수해 정말 주체적인 자기신학을 형성했던 이는 결국 장공과 함석헌이다. 조선시대 율곡과 퇴계, 정약용이 있었고 불교에 원효가 있듯이 한국 개신교를 대표할 거목은 장공과 함석헌이다. 그들의 문헌이 말한다. 사상의 글이 그것을 증언한다. 그 두 사람이 ‘그리스도교는 이런 것이다.’ 라고 파악하고 제시해주는데 그들에 대한 평가와 자리매김은 한국기독교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함석헌이야 일찍이 기독교 울타리 밖으로 내팽개쳐 버렸고 장공은 신신학, 자유주의 신학자,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 지나치게 사회참여를 주장한 양적성장을 저해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한국개신교에 내일이 어디로 가겠는가. 그들에 대한 제대로 된 재평가가 필요하다.
현재 한신 신학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이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은 무엇입니까. 오해이기를 바라는데 신학 학문의 수준은 최첨단의 것을 소화하니까 어느 정도는 잘 되리라 보는데 신학의 열정으로서의 신학적 패션 불꽃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일생을 돌아보면 7,80년대는 정말 행복했었다. 당시는 선생들이 똘똘 뭉쳤다. 김정준 학장을 중심으로 문동환, 박봉랑, 문익환 교수와 젊은 교수들 12명밖에 안됐지만 뭉쳐지니까 밖에서 그것을 깨려는 힘들이 무뎌지는 것을 수도 없이 느꼈다. 만일 김정준 학장이 자기 신변의 살길이나 찾고 문교부에 잘 보이려고 했다면 아무것도 안됐을 것이다.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교수가 그렇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김정준 학장이 같이 백업해주고 발맞춰줬기 때문이다. 그 시절 어려웠지만 참 행복했다. 학생들도 선생들을 진정으로 아꼈고 몸으로 선생들을 보호하려했다. 현재 한신신학의 교육측면에서는 역사를 뒤로 바꿀 수 없다. 지금 보면 한신대 종합화 교육은 실패했다고 본다. 꿈과 현실에 괴리가 많았다. 좋은 뜻으로 시작했지만 종합화 이후 학교의 구성원 중 6,70%가 비기독교인으로 구성됐다. 니버가 말하는 ‘세상의 아들들’과의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신학교육에 쏟아야할 우리의 역량이 다른 곳에 투여되면서 우리가 놓친 게 많았다. 오산캠퍼스는 그대로 돌아가게 놔두고 우리의 역량은 수유리에 집중하면 좋겠다. 수유리를 남기신 성령의 뜻이 있다고 본다. 가급적이면 오산 신학부까지 수유리로 올려 와야 하고 안 되면 본과 3학년부터는 수유리로 올라와서 다시 한 번 한신의 신학, 제3의 신학운동을 벌여야할 것이다. 이대로 이것도 저것도 놓지 못하고 교수들의 에너지도 분산하면서는 대안이 없다. 둘 다 안 된다.
신학교육은 본 훼퍼가 말하듯 생명공동체요 예수 제자공동체의 기숙학교이다. 교수들과 새 시대를 꿈꾸는 신학생들이 한 몸, 한 덩어리가 되어 고민하고 학문을 토론하고 당대의 신학과 모든 인간이 당면하는 학문의 질문을 신학적으로 대면하면서 배울 것 배우고 극복할 것은 극복하면서 새로운 진통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 잘은 모르지만 필수 통과의례로, 기장교회 목사가 되기 위한 제도적 교육과정으로만 신학교육이 진행되는 것 같아서 불꽃같은 뜨거운 심장이 느껴지질 않는다. 내 착각이길 바란다. 앞으로 비전을 말한다면 소위 물리적인 신학교육은 지금 충분하다. 신학교수들도 15명이면 충분하다. 문제는 교수들이 정말로 초창기 장공선생의 정신으로 돌아와야 한다. 학생들도 학점이나 라이센스 얻어가는 신학교육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한다. 여기가 얍복 나루터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환도뼈가 부러지는 영혼의 고투의 밤으로서 3,4년을 여기서 지내는 교육과정이 되느냐 못되느냐, 그것이 앞으로 우리 교단의 운명과 한국기독교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우리 교단이 바로서면 한국개신교도 바로 설 것이다. 우리 교단 밖에 보수교단을 비판을 많이 하지만 사실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제 기능을 못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대가 인물을 만들고 인물이 시대를 만든다고 하듯이 한신초창기 선생들은 인물자체 그릇이 컸고 훌륭한 점도 있지만 시대가 그렇게 만든 면이 있다. 특히 김재준과 송창근이 1세대,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이 2세대인데 2세대는 6,7,80년대 군부독재시대 역사적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어느 지성인들보다 앞서서 투신했던 것은 그들이 기독교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정치권력의 우상화될 수 없다.’는 확신이 불길로 치솟아 나온 것이다. 그것이 민중신학으로도 이어진 것이다. 우리 신학교수들이 가져야할 ‘신학지성으로서 불태워야할 제단이 무어냐.’라는 새로운 자각을 해야 한다. 그것은 몸 자체가 불덩어리가 되어 타는 것이다. 신앙교육은 1차적으로―교수란 소리도 하고 싶지 않고―전통적 용어로 ‘선생의 자세’가 중요하다. 선생들이 자신의 전공 학문을 펼치고 담론을 전수하는 학자로서 전공 설하고 내 할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미진한 것이다. 본질은 김재준 용어로 말하면 ‘예수의 심장을 닮으라’는 것이다. ‘예수의 심장에 합치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세파에 휘둘리다 보면 불이 약해지고 꺼지는데 세상에 나가기도 전에 불이 꺼져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일단 신학교수들의 학문적 회심은 둘째문제이다. 지금 그들이 갖고 있는 신학적 지식으로 말하면 7,80년대 교수들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배우는 학생들이 보기에 학문적 컨텐츠의 차이를 느끼겠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별 차이 없다. 문제는 신학적 지성이라는 게 단순히 신학적 지식이 아니고 일종의 spiritual passion(영적 열정)이다. 그런 측면에서 신학부 교수들이 정말 신앙적 신학적 회심을 한번 해야 한다. 인력으로는 안 될 것이다. 바람이 한번 불어야한다. 그렇게 회개해야 하는데 지금 그것이 안 되는 이유가 종합화 과정에서 총장이라고 하는 행정직의 권력의지와 결부된 분열의 요소가 많다. 솔직히 말하면 그까짓 게 뭐냔 말인가. 한신대 총장 된다고 그 누가 알아주는가. 그것을 둘러싸고 이상한 교수단 간의 암투가 존재하고 있다. 이런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초연해 져서 얼마 후가 될지 모르지만 일반 교수들에게 총장직은 맡겨버리고 신학부 교수는 신학교육에만 전념했으면 좋겠다. 총장은 행정직이니 총무 임기제 마냥 임기제로 돌리면 될 일 아닌가. 그리고 교수단이 복음적 열정으로 몸이 불붙어 움직인다면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호응을 하게 되어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졸업식 때만 되면 기쁘면서도 허전하다. 병아리로 들어와 4,5년 같이 지내다 장성한 독수리로 교정을 떠나는 모습을 보아 왔다. 학위식 오후 텅 빈 교정을 35년간 보아왔다. 그것은 자식을 길러 시집장가 보내는 늙은 노모의 마음과 같다. 그러나 유일한 기쁨은 그 때 그렇게 뜨거운 가슴으로 같이 앓고 불길을 나눴던 사람들이 제주를 가든 어디를 가든 그 사람들이 그래도 성탄절, 스승의 날이 되면 전화라도 한통 엽서 한통 한다. 그렇게 학생과 교수가 다시 한 번 수유리 신학공동체로 다시 불이 붙어야 한다. 그 외에는 다 비본질적인 것이다. 교육의 핵심이 장공을 꿈꾸는 것이 이론적인 최고의 학문수준으로 가는 것인데 그것은 문자로는 존재한다. 그러나 지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기본이고 늘 그가 말하는 것은 아주 보수적 용어로 말하면 ‘예수에 한번 미쳐 보라는 것’인데 그게 쉽지는 않다. 상당히 똑똑한 소장신학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분들이 일자리가 없어서 자기 역량을 발휘 못하고 있다. 그런 분들에게도 과감하게 일거리를 나눠주는 파격이 있어야한다. 최소한 자기 일을 할 수 있게 보장해 줘야한다. 이미 전임된 사람들이 자기를 비우고 양보를 해야 한다. 교수직을 양보하란 소리가 아니라 일반교수들처럼 받을 것 다 받고 누릴 것 다 누리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지방 농목 활동을 하는 지역마다 2,30명 정도의 목회자들이 있다. 교회도 보통 3~50명 모이는 교회를 하고 있는 목사들인데 함께 모여서 스터디도 하고 절망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런 우리 소장 목회자 제자들을 보면 희망이 있다면 저기에 우리 기독교의 희망이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그 어려움이 너무 오래 지속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동안 소위 아웃사이더로 살아오면서 체득한 것은 세상이 기독교를 어떻게 보는가가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정말 개신교는 위기이다. 개신교 최고 주류는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전체의 좌표를 공중 촬영을 하면서 우리가 어디있는가 보아내는 힘이 우리 기장에 있다는 생각이 들고 기장의 엔진 심장인 신학교육은 예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살이까지는 안가더라도 예수 닮기만 되도 좋겠다. 장공이 못다 이룬 비전을 펼쳐가길 59년 입학해 1960년 4.19가 난 어느 날 밤 장공이 가운을 입고 서계신 것을 봤다. 시내에서 불길이 치솟고 함성이 어렴풋이 들리는데 당신이 자기를 반성하는 것 같아 보였다. ‘역사의 한복판에서 성육신의 영성으로 살자고 말하고 글을 썼는데, 보수 세력과의 싸움을 하다 이제 간신히 수유리에 안착했는데 역사는 이미 저만치 앞서나가 있구나.’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후 장공도 ‘학생들의 피를 보답하라’라는 격문을 남기고 4.19의 행렬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다. 장공은 그렇게 느끼면서 무엇인가 해보려고 했는데 박정희의 61세 이후 교수들에 대한 퇴교 조치로 결국 신학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온 것이다. 청사진만 갖고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나온 것이다. 헌법이 있는데 그대로 실현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엄밀히 말하면 기장도 신학의 비전과 철학과 꿈은 있는데 제대로 실천해보지 못한 것이다. 해본 적이 없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7,80년대 시대가 그렇게 우리를 몰아갔다. 한신의 역사에는 늘 부침이 있었다. 황금기가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이다. 지금은 내리막의 끝 바닥을 치고 있다고 본다. 앞으로 바닥치고 올라갈 거라 생각한다. 요즘 종로5가나 기사연 강연장에서 학생얼굴을 볼 수 가 없다. 예전에는 감신, 한신, 이대 등 신학생들이 공간적으로도 많이 차지했었다. 앞으로 분발해 선생과 제자가 함께 더불어 한신 신학공동체를 새로운 횃불로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장공이 못다 이룬 한신과 기장의 설립이념을 새롭게 세워 나가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