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충선왕(1275~1325)은 중국대륙에서 온몸으로 부대낀 인물이다.
충렬왕과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인 제국대장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충선왕은 파란만장한 생애만큼이나 다채로운 흔적을 대륙과 한반도에 남겼다. 몽고피가 섞였으나 고려국왕으로 개혁성이 강했던 그는 끊임없이 원나라의 견제와 탄압을 받았으며, 부친과의 불화로 50년 평생의 절반을 중국대륙에서 떠돌았다. 그는 불교에 심취했고 원의 유학자들과도 교분이 두터웠으며 발달된 고려의 인쇄술을 원에 전하고 조맹부 서체를 들여오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정치적인 인생은 불운했다. 부친 충렬왕에서 시작된 원 왕실과의 혼인관계로 고려는 사위의 나라로 `대우'받았다. 원은 고려를 혈통으로 장악하려는 의도를 가졌고, 고려도 혼인관계로 왕권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원은 고려왕에게 신하의 충성을 의미하는 `충'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1298년 23살의 나이에 충렬왕에 이어 권좌에 앉은 충선왕의 개혁정책은 원과 국내 신흥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했다. 1308년 원의 성종이 죽은 뒤 무종, 인종 형제의 왕위계승에 공을 세운 그는 `심양왕'에 봉해져 요동과 만주를 통치하게 된다. 그해 7월 다시 고려왕으로 즉위해 공평한 조세와 인재등용 등을 앞세우고 혁신정치에 나서지만 원의 간섭으로 또다시 좌절한다. 1313년 왕위를 아들 충숙왕에게 이양한 그는 불교성지를 순례하다 1320년엔 삭발당한 채 승려가 됐다. 그 뒤 오지인 티베트와 칭하이성 시닝시로 떠돌다 1325년 베이징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에게 가해진 정치적 탄압은 남송의 왕실 후예였으나 몽고·색목인·한인에 이어 최하위층 계급으로 남인출신이었던 송설 조맹부(1254~1322)와 깊은 우정을 맺게 만들었다. 그림과 글씨에 재능을 보인 충선왕은 자신이 직접 세운 만권당에서 조맹부와 왕운·염복·원명선 등 유명한 유학자들과 광범위하게 교류했고 조맹부의 서법을 고려에 전했다. 조선학자 서거정(1420~1488)은 <필원잡기>에서 “충선왕이 귀국하면서 글씨와 그림, 서적 1만여권을 갖고 돌아 왔다”고 기록했다. 조맹부가 충선왕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쓴 `유별심왕'의 탁본이 국내에 전해지고 있으며 그의 서법은 이후 안평대군의 독특한 송설체로 발전하게 된다.
충선왕은 고려의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주기 위해 익재 이제현(1287~1367)을 불러 자신의 문하에 두었다. 그는 고려왕이란 신분으로 활발한 불교활동을 벌였고 독실한 불교도였던 조맹부도 거기에 동참했다. 그는 1312년 50부의 대장경을 인쇄해 베이징과 항저우 등의 주요 사원으로 보냈는데, 이를 계기로 고려를 원나라의 일개 성으로 만들려던 주장이 사그라들었다고 한다. 1314년엔 이제현과 함께 관음보살이 환생했다는 저장성 보타산으로 성지참배를 떠났다. 그 절은 지금 유명한 불교도량이 돼 있다. 그는 또 고려왕자 의천(1055~1101)이 화엄교를 수도한 항저우 고려사에 대장경을 시주하고, 1315년 비석을 세우기도 했는데 고려사 유적이 서호 남안에서 최근 발굴돼 관심을 끌고 있다. 충선왕이 강제로 삭발당한 석불사의 자리는 베이징시 시청취 피차이후퉁이나 지금은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옛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또 세력다툼속에서 몽골부인 보타시린 공주를 재가시키려던 부친 충렬왕을 감금한 베이징 시내 쌍탑 경수사는 1950년대에 허물어진 뒤 현재 베이징 전보국이 들어서 있다. 충선왕이 결혼식을 올린 대명전은 지금의 자금성 건청궁 일대다.
원 불교·유학문화 전파 가교역
충선왕의 의욕적인 개혁정책은 오히려 원의 간섭을 강화시켰다. 또 왕비 보타시린 공주와의 관계도 악화됐다. 그의 부친 충렬왕이 세상을 뜬 뒤 고려로 돌아가 다시 개혁정책을 시도하지만 이 역시 좌절에 부딪히고 만다.
충선왕은 원의 불교전파와 유학문화 보급에 지대한 공헌을 했는데, 중국 항저우 등지의 여러 불교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많은 한족 유학자들과 교류했다. 이는 유학문화를 흡수하고 지친 심신을 달래는 방법이었으며, 또한 고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국체를 보존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했다.
충선왕과 가장 가깝게 지낸 조맹부는 남송 왕실의 후예로, 망국의 한을 안고 방황하다 원 세조에게 발탁돼 등용된 인물이다. 충선왕과 조맹부는 모두 표면상으로는 원 왕실의 총애를 받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내심 깊은 곳에는 모두 울적한 마음의 병이 있었다. 이들은 불교에 전념하여, 심령을 위로하고 해탈을 추구했다. 조맹부는 충선왕과 헤어지면서 석별의 정을 `유별 심왕'이란 시로 남겼다. “함께 고려의 인삼주를 음미하고, 화원의 작은 길을 걸으며 작약꽃을 감상했었네. 연경의 화려한 집에서 향을 태우며, 함께 병풍에 붓을 휘둘러 서화를 그렸었지.” 이 시로 보아 만권당에서 이뤄진 두 사람의 서화는 공동의 기쁨이며, 추구였음을 알 수 있다.
충선왕의 말년은 비참했다. 1320년 인종이 세상을 뜬 뒤 영종이 황위를 계승하면서 원의 정세는 급변하는데, 충선왕은 강제로 삭발당해 승려가 된다. 그뒤 다시 티베트 지방으로 유배되고, 1323년 타사마 지역으로 옮겨 오게 된다. 충선왕이 유배된 표면적인 원인은 고려 간신의 무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원 영종이 고려의 국호를 없애고 고려를 하나의 원나라의 성으로 삼으려는 계획에 가장 큰 걸림돌인 충선왕을 제거하려 했던 데 있었다. 원 조정에 투신해서 권력을 얻으려는 자들은 고려를 원나라내 성으로 복속시키는 일을 부추겼고, 원의 인종이 죽은 뒤 고려의 간신들은 또다시 고려를 행성으로 만드는 일을 앞장서 추진했다. 당시 충선왕과 학자 이제현 등이 적극 반대하고 나서 이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충선왕은 중국땅에서 가장 많은 곳을 순례하고 여행한 고려인이다. 불교순례와 유배로 이어진 일생동안의 여정은 항저우·산시성·간쑤성·티베트 등 수만리에 달한다. 그의 부단한 참배여행과 연경(베이징)에서의 오랜 칩거와 방황은 고려의 국체를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