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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82
11월22일[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33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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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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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Q3mJClaW3k
[의정부교구 윤성흠 베르노 신부님 집전(호원동 본당 부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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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제 집이 있는 자리에 교회를 세워주세요!>
로마 산 갈리스토 카타콤베에 가시면 꼭 들러야 하는 명소가 한 곳 있습니다.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체칠리아 성녀의 조각상이 있는 장소입니다. 한때 산 갈리스토 카타콤베에 안장되어 있던 체칠리아 성녀의 시신이 다른 곳으로 이장되고 난 다음 이 조각상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체칠리아의 무덤은 지금까지 딱 두 번 공개가 되었는데, 그녀의 무덤이 공개되었을 때 성녀의 시신은 순교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고, 이에 감동받은 스폰드라도 추기경은 스물셋의 젊은 작가 스테파노 마데르노에게 이 모습 그대로를 조각할 것을 요청하여 오늘날까지 아름다운 조각상이 남게 된 것입니다.
체칠리아 성녀는 얼굴을 땅에 묻고 두 손을 앞으로 내민 채 옆으로 누워 있는데 마치 잠을 자듯이 편안한 모습입니다.
자세히 보면 성녀의 목에 칼자국이 보입니다. 참수당할 당시 목에 칼을 세 번 맞고도 목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사실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두 손을 보면 왼손은 세 손가락을 펴고 있고, 오른손은 검지 하나만 펴고 있는데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임종 마지막 순간까지 증거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무척이나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성녀가 체칠리아 성녀지만 솔직히 그녀에 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합니다. 오직 구전으로 내려온 전설들을 통해 그녀의 삶과 신앙을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체칠리아는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의 총명하고 신앙심 깊은 딸이었답니다.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바치기 위해 동정으로 살고자 마음 먹었지만, 부모는 발레리아누스란 전도양양한 청년과 혼사를 밀어붙입니다.
하느님의 영과 지혜로 충만했던 체칠리아였기에 자신의 계획을 남편에게 설명하고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설득에 성공한 체칠리아는 비록 결혼한 몸이었지만 자신이 꿈꾸어오던 봉헌 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 한 가지, 체칠리아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이교도였던 남편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킵니다. 시댁 식구들도 차례로 개종시킵니다. 남편 발레리아누스에게 얼마나 신앙교육과 교리교육을 철저히 시켰으면 남편은 체칠리아에 앞서 순교의 영예를 얻게 됩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후 체칠리아 역시 체포당하여 법정에 소환됩니다. 그녀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당당하게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히고, 갖은 위협과 감언이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버리겠노라고 외칩니다.
구전에 따르면 체칠리아는 언제나 성경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녀는 하루 중 기도를 드리지 않는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개인적인 종신서원도 발했답니다. 부모가 강제로 밀어붙인 결혼식 날 체칠리아는 아름다운 금실로 장식된 예복을 입었지만, 속에는 거친 삼베옷을 입었답니다.
체칠리아의 깊은 신앙에 감화를 받은 남편 발레리아노는 자신은 물론 동생까지도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남편은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순교자들에게는 무덤을 제공하였습니다. 결국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참수당하여 순교의 영예를 얻게 됩니다.
그 가녀린 목에 세 번씩이나 칼을 맞고도 며칠 동안 목숨이 붙어있었던 체칠리아는 임종 직전 우르바노 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저는 당신이 제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제 집이 있는 자리에 교회를 세워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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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2YRwL-8B7V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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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 조선? 어차피 살 거면 국뽕이 낫지 않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와 비슷한 ‘미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세 종에게 각자 다른 양의 탈렌트를 맡기고 간 것으로 나오지만, 여기서는 종 열 명에게 각 한 미나씩 맡기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떠나는 이유도 추가되었는데, 바로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주인이 모진 분이라 여긴 사람은 자신의 주인이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은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대합니다. 가진 것을 빼앗아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번 종에게 줍니다. 그리고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 이들을 처형합니다.
우선 탈렌트의 비유와 같은 내용은 자신이 가진 재능을 땅에 묻어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이들은 ‘감사’하지 않는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불만이 커져 피해의식으로 더 요구하기만 하지 갚아드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재능을 썩힙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자신이 받은 미나에 감사해서 주인께 더 많은 것을 돌려드리려고 노력하는 종들은 자기 주인이 ‘왕’이 되는 것을 긍정하는 이들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의 왕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부모에게 받은 것에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감사하면 재능을 계발하여 성공에 이르고, 이것이 곧 나에게 은혜를 베푼 이를 나의 왕으로 삼는 방법이란 뜻입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흰 가루를 뒤집어쓴 채 자신의 몸을 토치로 지지는 의문의 남자’가 나왔습니다. 이분은 ‘베이비파우더’로 자기 온몸을 바르고 토치로 지집니다. 밤에도 부탄가스 토치로 자기를 괴롭히는 벌레들을 퇴치하는 일로 잠을 설칩니다. 그러다가 잠이 듭니다. 혼잣말도 하고 거의 조현병 수준입니다.
그분 지인의 말로는 어렸을 때 회사에서 머리에 구타당한 적이 있는데 그것으로 계속 약을 먹었다고 합니다. 20년 동안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고 잘 살았는데 그동안 마음의 의지가 되었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러한 증상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이분에게 자신을 지켜주던 왕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 감사한 것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망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더는 감사할 존재가 남아있지 않게 되자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대상이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나를 존재하게 해 준 분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으로부터 받은 한 미나, 곧 생명이 허물어지지 않습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을 위해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가슴이 웅장해지는 애국가 만병통치약 썰’도 있습니다. 33년 동안 몸담아온 교직에서 갑자기 교직에서 허전한 마음에 우울증과 대인기피증, 알코올 중독에 걸려버린 한 분이 어느 날 TV에 나오는 애국가를 듣고 그것을 부르기 시작하면서 모든 게 고쳐졌다는 것입니다.
애국가를 새벽부터 부르면 나라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생기고, 그러면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생겨 몸을 건강하게 지키게 되는데 어떻게 애국가를 부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자녀가 부모에게 감사하는 것과 같고 우리가 주님을 왕으로 찬미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살립니다. 이분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애국가 가사 내용이 나라 사랑, 더 좁게는 가족 사랑, 더 좁게는 개인, 나 자신의 사랑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내 몸이 튼튼하고 건강해야지만 가족도 지키고 나라도 지킨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애국가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헬 조선이라고 하며 불평해봐야 무슨 이익이 있을까요? 역사상 지금만큼 살기 좋은 때는 없었습니다. 감사하면 감사하는 대상이 왕이 됩니다. 왕은 감사하는 존재를 뱀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보호해줍니다. 그러나 감사를 잃으면 그분이 왕이 되는 것을 거부하여 결국 뱀에게 사로잡힙니다. 뱀과 하나가 되면 그동안 받던 모든 것을 잃고 지옥과 같은 삶, 더 나아가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우리가 감사할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바치라고 했던 것은 이처럼 큰 은총입니다. 그런데도 십일조를 감사히 봉헌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생명과 시간과 모든 것을 주신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뱀의 꾀임에 속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봉헌함이 주님을 주인이실 뿐 아니라 왕으로 인정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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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지난 ‘위령의 날’입니다. 퀸즈성당의 미사에 함께 하였습니다.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위령의 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은 우리가 알고 있는 분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분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분들은 하늘의 별처럼 밝게 빛나는 분들입니다. 우리들 또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살아가도록 다짐하는 날입니다. 반면에 위령의 날은 이미 세상을 떠난 영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기도한다면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정말 기뻐할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두려운 것은 여러분들이 내가 이미 성인이 된 줄 알고 저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저를 위한 기도를 멈추는 것입니다.’ 성녀처럼 살아서 많은 이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마더 데레사 수녀도 기도로 기억되길 희망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은 영혼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우리의 전구로 한 영혼이 연옥을 벗어나 천국으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세상을 떠난 영혼을 위해서 기억하였습니다. “예수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지옥 불에서 구하시고 연옥영혼을 돌보시되 가장 버림받은 이를 구하소서.”
오늘 독서를 묵상하면서 얼마 전에 보았던 ‘영웅’이 떠올랐습니다. 영웅은 안중근 의사의 생애를 다룬 뮤지컬 영화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 독립군의 자격으로 일본의 이등박문(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였습니다. 이등박문은 조선을 일본과 합병하려 하였고, 고종을 퇴위 시켰고, 명성황후의 시해를 주도하였기에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를 위해서 그를 저격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전쟁포로로 재판을 받기 원했지만 일본은 일본의 법정에서 재판하였습니다. 옥중에 있는 안중근 의사에게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이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이에 안중근 의사는 어머니에게 마지막 편지를 이렇게 보냈습니다.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편안히 하옵기를 천만번 바라올 뿐입니다. 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안 의사 아우들)에게 들어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아들 도마(안중근 의사 천주교 세례명) 올림”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그 수의를 입은 채 당당하게 사형을 집행당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애로 옮겨감이라는 믿음과 희망이 있기에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죽일 수 있어도 우리의 영혼까지 죽일 수 없는 것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미나’를 이야기하셨습니다. 미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입니다. 미나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미나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입니다. 이 희망, 믿음,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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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9,11-28: 열 미나의 비유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으려고 ‘먼 고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는 거룩하신 아버지의 거룩하신 아들이고, ‘여행’은 그분께서 하늘 아버지께로 올라가시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갖가지 거룩한 선물을 주신다. 이것이 미나/탈렌트의 뜻이다. 이 미나를 받은 사람들은 충성스러운 종으로서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직무를 받는다. 그들은 직무를 실행하며 이윤을 낸다. 그래서 성실히 일했다는 칭찬을 듣고, 영원한 영예를 누릴 자격을 인정받는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탈렌트를 나누어 주셨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일러주신다. 그러나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14절) 한다. “그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 나와 내 아버지까지 미워하였다.”(요한 15,24) 예언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끊임없이 예고했는데도 그들은 그분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 했고, 그분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의 능력과 준비된 상태에 따라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각자에게 그 능력에 따라 그 분배가 이루어졌다. 그것을 잘 받아서 잘 활용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보도록 하자.
우리가 바쳐야 할 이자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과 행실 안에 자리 잡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산다면 주님께 이익을 남겨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만들 수 있다. 그러면 주님께 이런 칭찬을 들을 것이다. “잘 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17절) 우리는 주님께 받은 돈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거나, 땅에 숨겨두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그분은 당신의 돈이 어떤 면으로든지 이윤을 남기기를 바라신다. 수건에 싸서 두었던 종은 심판을 받았으며, 결국은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기고 만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24절) 복음에서 우리는 우리가 열 미나를 바치고 다섯 미나를 바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바친 것을 모두 돌려받는다. 하느님께는 필요한 것이 없다. 우리가 풍요하기를 바라실 뿐이다. 열매를 맺는 삶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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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연결하여 ‘미나의 비유’를 설명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올 때,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행하실 ‘심판’을 예고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처럼 제자들도 하느님 나라가 갑자기 닥쳐오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기대나 조급함을 경계하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고자 완수하여야 할 사명이 제자들에게 맡겨졌음을 비유를 들어 이야기합니다. 이 비유에서 왕권을 받아 오려고 길을 떠나는 주인은 열 명의 종에게 한 미나 씩 나누어 줍니다. 유다 화폐 단위 미나는 백 데나리온이며, 한 미나는 당시 일꾼이 백 일 동안 일하여야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한편 돌아온 주인은 종들에게 나누어 준 미나를 어떻게 관리하였는지 묻습니다. 첫째 종은 열 배로, 둘째 종은 다섯 배로 늘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작은 일에 충실하였던 종들에게 각각 고을을 맡깁니다. 그러나 다른 종은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주인은 게으르고 악의에 찬 종의 말대로 그에게 혹독한 판결을 내립니다.
물론 이 비유에서 마지막 종에 대한 주인의 처우가 조금 부당하거나 불공평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결정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한 불충한 유다인들에게 내려질 심판을 빗대어 설명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이 비유 이야기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냉혹한 심판자’로만 여기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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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미나의 비유>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루카 19,12ㄴ-13.15-17)
‘미나의 비유’는, 세부적인 사항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마태오복음의 ‘탈렌트의 비유’와 사실상 ‘같은 가르침’입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승천’을 뜻하는 말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의 통치자로, 또 심판자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먼 고장’으로 떠났다는 말은, 지금 예수님이 우리 곁에 안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비유를 구성하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신 뒤에도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마태 28,20)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종들’은 신앙인들입니다. ‘미나’는 ‘주님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아 누리는 생활이고, 그 은총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은총의 열매’는 ‘구원’입니다. <성경의 부록에 있는 도량형 표에 의하면, ‘한 미나’는 60데나리온입니다. 그리고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계산 방식에 따라 ‘한 미나’를 백 데나리온으로 계산하는 예도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미나를 나누어 주면서 벌이를 하라고 지시한 일은, 일종의 ‘자격시험’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왕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 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자격.> 따라서 종들의 돈벌이는 주인을 위한 일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25절을 보면, 주인은 종들이 벌어들인 돈을 차지하지 않고, 종들에게 줍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첫 번째 종은 ‘열 미나’를 벌어들여서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받게 되고, 두 번째 종은 ‘다섯 미나’를 벌어들여서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받게 되는데, 이 비유에서 ‘열 미나, 다섯 미나’, 또는 ‘열 고을, 다섯 고을’은 중요하지 않고, 주인의 통치에 참여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결과가 아니라 노력을 보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을 끝까지 꾸준하게, 또 성실하게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지, 무슨 업적을 얼마나 남겼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끝까지 성실한 신앙인으로 살았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업적입니다.>
세 번째 종은, 돈을 벌어들이는 일에는 자신이 없고, 또 돈벌이하려다가 원금까지 잃는 일이 생길까봐 두려워서 한 미나를 잘 보관해 두었다고 말하는데(20절-21절), 그의 말은 ‘하기 싫어서 안 한 것’을 감추기 위한 핑계일 뿐입니다. 주인이 그를 엄하게 혼내는 것은, 그가 아무것도 안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슨 거창한 신심행위도 아니고, 무슨 대단한 희생과 봉사도 아닙니다. 각자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 바로 그것을 바라십니다. 주님은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시키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강제노동’이 아니라, ‘은총의 생활’이고, ‘기쁨의 생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의만 있으면 형편에 맞게 바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2코린 8,12)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서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이 말은, ‘헌금’과 ‘이웃 사랑 실천’에 관한 말이지만, 신앙생활 전반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억지로 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냥 ‘빈말’입니다. 만일에 ‘불우이웃 돕기’를 억지로 한다면? 도움을 받는 사람은 받았으니까 고마워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 없이’ 억지로 한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 실천’이 아니고,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사랑 없이’ 억지로 주는 것을 받는 일은, 받는 쪽에서는 기분 나쁜 일이고, 상처를 입는 일이 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자체가 은총이고 특권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신앙’과 ‘구원의 길’로 불러 주신 주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딴 생각만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은총을 받았는지를 잊어버렸으니 불쌍한 것이고, 정말로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헛된 것만 찾고 있으니 어리석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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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루카 19,11ㄴ-28)
마카베오기 저자는 엘르아자르의 순교 이야기(마카베오기 하권 6.18-31)에 이어 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의 긴 이야기(마카베오기 하권 7,1-42)를 전하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하고 유대인들의 종교를 말살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이교예식을 강요하는 데에 대한 강한 대항정신이 배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머니와 그 일곱 아들에 대한 이름도 그 어떤 설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왕이 엄명한 그들의 조상들의 법을 버리고 그들의 제사음식을 먹으라는 법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체포된 것입니다.
박해자는 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은 채찍과 가죽끈으로 학대를 하고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임금은 화가 나서 첫째부터 조롱을 하며 끔찍한 고문을 가합니다.
아들들이 차례로 단 하루에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어머니는 고통을 겪지요. 저자는 그 어머니의 놀라운 신앙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 어머니는 오래 기억될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는 일곱 아들이 단 하루에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견디어 냈다.”(마카베오기 하권 7,20)
어머니는 아들에게 격려의 말을 하며 자신의 배 속에 어떻게 아들이 생겼는지도 모르고, 아들의 목숨, 생명, 몸의 각 부분 또한 자신이 준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깊은 희망의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마카베오기 하권 7,23)
어머니는 죽음을 앞 둔 아들에게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을 따라 용감히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격려의 말을 합니다.
루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들려주신 주인과 열 종들의 미나에 대한 비유 이야기(루카 19,11ㄴ-28)를 전합니다.
마태오도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탈렌트에 대한 비유 이야기(마태오 25,14-30)를 전하지요.
루카는 한 귀족이 왕권을 받으러 먼 길을 간 것이라고 설명한 데에 비해 마태오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라고 이야기의 서두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섯, 둘, 한 탈렌트를 종들에게 준 것에 비해 루카는 ‘ 명의 종들을 불러 열 미나를 주었다.’고 하면서 각각 한 미나를 주는 내용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 하나는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고, 또 한 종은 다섯 미나를 법니다. 그리고 한 종은 한 미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하고 한 미나를 주인에게 내어줍니다.
숫자와 화폐의 단위명칭은 달라도 사실 내용은 같다는 것입니다. 마태오에서는 열 탈렌트, 다섯 탈렌트, 한 탈렌트를 가지고, 루카에서는 열 미나, 다섯 미나, 그리고 한 미나를 가지고 셈을 하는 것입니다. 마태오도 그렇고 루카도 한 탈렌트나 한 미나를 그대로 보관한 종은 엄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 이야기의 요지는 자기 능력껏 성실하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 사람은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는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에게 받은 능력을 여러 가지 이유로 전혀 쓰지 않는 사람은 종말에 하느님으로부터 엄한 심판을 받는다는 교훈의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가르침을 우리의 삶에서 풀어보자면, 사람은 각자 다양한 능력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지요. 그런데 그것을 게을러서, 아니면 용기가 부족하거나 불성실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본인에게도 큰 손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각자의 고유한 능력을 받는 것이지요. 어느 능력이 좋다, 또 못하다는 비교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나름대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고유의 소질이 있는 것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질을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며 최선을 다해 발휘해야 하겠지요.
우리는 흔히 남에게 특별한 능력을 부러워하지만 정작 자신이 받은 고유하고 특별한 탈렌트를 경솔히 할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자신의 소질을 발휘하며 일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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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님]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마카베오 시대(마카베오기 하권 7,1.20-31)에 유다교를 박해하던 헬레니즘 정권에 저항한 유다인들이 많았었습니다.
그 가운데 일곱 형제를 둔 어머니는 자기 아들들이 하루에 죽어 나가는 끔찍한 비극을 겪으면서도 용감하게 견디어 냈습니다. 게다가 그 어머니는 죽어가는 아들들에게 조상들의 언어로 격려하며 죽은 후의 현실에 대한 희망을 상기시켜주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열성 유다인들이 간직했던 희망이란 죽음 이후에도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내세의 현실에 대한 희망이었고, 또한 하느님께 대한 충실한 신앙으로 죽임을 당한 이들을 받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간직했던 바 내세의 현실에 대한 희망을 넘어서는 또 다른 희망에 대해 오늘 복음(루카 19,11ㄴ-28)에서 미나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안고 죽은 이들이 그저 천당 복락을 누리는 데 그치지 않고 하느님 곁에서 천사가 되어 현세의 남은 이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희망이었습니다.
이 비유는 탈렌트의 비유와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마태오가 전해준 탈렌트의 비유는 최후의 심판에서 현세의 공로를 재어 천국의 상급을 정해주는 잣대를 말하는 것이지만, 루카가 전해준 미나의 비유는 그 최후의 심판을 통과한 후에 천국에서 하느님을 도와서 현세에 남아있는 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권한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현세의 삶을 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점에서는 공통이지만, 심판 후 내세에서 현세에 미칠 영적인 영향력의 상급을 결정하는 미나의 비유는 훨씬 더 포괄적이고 이타적입니다.
교회의 전례력에서 성인성녀들은 전 세계 교회의 전례에서 공경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복자복녀들은 출신 지역 교회에서만 전례로 공경하게 규정되어 있는 차이가 이 미나의 비유에 근거를 둔 것으로 보입니다.
마카베오 시대에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한 그 일곱 형제의 어머니의 예를 통해서 우리는 유다인들도 현세를 마친 죽음 이후에도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현실에 대한 믿음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도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며 이 세상을 살고 난 다음에는 죽어서 하느님께로 돌아간다고 믿어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었다는 표현의 존대어법이 “돌아가셨다”입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과 서양의 어느 나라 언어에서도 이러한 표현어법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고려조와 조선조 동안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불교와 유교 등에 억눌려 왔었다가 드디어 2백여 년 전 18세기 말에 천주교가 기묘한 섭리로 조선에 들어왔을 때, 처음에는 한문과 유학의 한계를 절감했을 뿐만 아니라 성리학 질서로 운영되던 조선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절망하던 선비들이 사문난적이 될 각오로 천주교 신앙운동을 시작했지만 이를 한글과 민중의 언어로 전달받은 민간에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더욱 환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현세와 내세를 관통하는 영적인 현실의 진리를 하느님 신앙으로 밝혀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백 년의 박해를 견디어 내면서도 신앙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끈질기게 저항한 배경이요 끝내 이겨낼 수 있었던 저력입니다.
하느님 신앙을 민간에서 더욱 환영한 사정을 더욱 뒷받침해 주는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하느님 신앙을 전국에 흩어진 교우촌에서 사회운동 규모로까지 퍼뜨려 나가자 마치 이를 깃발로 삼은 듯이 민간신앙을 기반으로 한 민족종교들이 19세기 중엽부터 우후죽순으로 생겨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모두 억눌렸던 하느님 신앙을 다양하게 되살려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는 이에 더해서 민간신앙의 무속이 믿어온 하느님 신앙의 영적 위계질서를 식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현세적 복을 빌어달라고 부탁하는 귀신이나 현세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부르는 잡신과 달리, 하느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예수님께서는 그 창조주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드님으로서 하느님을 가장 닮으신 인간이시고, 이 성부와 성자를 우리와 연결해주시는 신이 성령이심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죽어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미 현세를 의롭고 거룩하게 살다 가신 천국의 영혼들과 통공을 이룩해야 하는 존재이고 또 우리도 죽은 다음에 그 영혼들처럼 다섯 미나만큼이든 열 미나만큼이든 현세에 남은 이들을 도와주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 현실의 진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이 말씀은, 현세와 내세의 현실을 깨달은 이는 살아서나 죽어서 더욱 지혜롭게 살 수 있고, 이 현실을 깨닫지 못한 이들은 현세에서 어떻게 살았든지 간에 죽을 때 장례를 잘 치르기만 하면 막연하게 죽어서 좋은 데로 가려니 하겠지만 그 부질없는 희망마저 빼앗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 환호송의 말씀처럼, 우리도 세상에 가서 복음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 열매는 우리가 죽은 후에도 길이 남을 것입니다. 한 미나와 같은 초라한 성적을 내지 마시고 다섯이든 열이든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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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복음에 따라 살아가고자 우리는 ‘순명’(順命, oboedientia)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필리피서 2,8)하셨기에, 그 삶을 본받아 순명의 삶을 살아가라고 교회는 권고합니다.
사제로서 그 삶은 선택이 아닌 의무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순명의 마음을 가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주교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내 나름대로 하고 싶은 일도 있고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지만, 저에게 그 일을 명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반대되는 것을 명령하시고, 원하지 않는 것도 명하십니다. 쉬운 길이 있는데 어렵게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그 명령을 따릅니다. ‘자신을 희생하며 의지를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명령을 따르는 것이 순명’이지만, 가끔은 그 안에 희생과 의무만 있고 기쁨은 사라져 버릴 때도 있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미나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평생을 주인 곁에서 심부름만 하던 종들에게, 주인이 나누어 준 돈으로 벌이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 막막하기도 하고, 주인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잘못해서 돈을 잃으면 벌이 기다리고 있음에 두렵기도 했겠지요. 어떤 종은 주인이 이 과제를 주며 명령한 이유와 주인의 생각이 과연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행동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도와는 다르다고 비판하고 짜증 내고 불평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그 과제 안에서 자신의 이유를 찾으려 고민합니다.
그러나 어떤 종은 불평과 불만, 두려움과 나태함으로 그런 고민조차 하지 않고 그냥 “예.”라고 대답만 할 뿐입니다.
순명의 가치는 같은 것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것을 위에서 내려다볼 때와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 모습은 다르지만 분명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이해하려 고민하고, 행동하려 고민하고, 같은 것을 같은 모습으로 바라보며 고민하는 흔적이 순명의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순명의 길을 오늘도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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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작은 일에 충실해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 천상의 축복은 믿는 이들이 바라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놀랍고도 신기한 모습으로 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환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 이야기해 주십니다. 각자는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하고 적극 협력하며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은 사람들이 있었고 다섯 미나를 벌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탈렌트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 충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극히 수동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한 미나를 그냥 수건에 싸서 보관한 사람입니다. 그는 은총의 삶과는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한다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잘 활용해야 합니다. 눈먼 거지는‘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습니다.
‘자캐오는 ‘먼저 달려 나무에 올라 기다렸습니다.’ 그렇듯이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이 만나야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철은 녹이 슬고, 용수철도 느슨하게 풀어집니다.
깨끗한 물도 흐르지 않으면 썩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지금할 수 있는 것을 해야합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잘 써야지!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말고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적극 협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탈렌트가 있고 그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사용한 대로 그만큼의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과법칙을 피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주신 달렌트를 뿌리고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무엇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를 소중히 여기는 하루를 희망합니다. 어떠한 큰일도 작은 것에서, 시작되니만큼 작은 것이 결코, 작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각자가 받은 은총은 다 다르고 그것은 단순 비교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것을 분수에 맞게 쓸 수 있으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많이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루기 위한 과정을 귀히 여기는 주님이시니 하나를 가지고 열 개를 늘렸건 다섯으로 늘렸건 그것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를 위한 땀과 노력과 정성, 희생이 값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으로 부르셨습니다.”(성 마더 데레사)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젊어서 열심히 노력하면 나중에 큰 보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듯이 주님을 뵙고자 노력하면 만나게 되고 열매도 맺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지금은 힘들고 고달프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기쁨도 큽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19,26)하신 말씀은 노력한 정성과 수고는 크게 이룰 것이요, 그렇지 못함은 결국 잃는다는 것입니다.
한 번 주신 은혜를 거두어 가시지도 않지만 남의 탓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욕심을 부리지 말고 지금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신자들이 신앙심이 없다고 넋두리하고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하기 전에 신앙을 키워주지 못하고 일깨워 주지 못한 저의 잘못을 자책하는 오늘입니다. 대접받기에 익숙해지고 독불장군으로 고착되는 오늘을 봉헌합니다. 작은 일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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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947년, 재키 로빈슨은 미국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의 흑인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를 발탁한 구단주가 로빈슨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사람들에게 많은 조롱과 수모를 당할 거야.”
실제로 관중들은 로빈슨이 경기장에 나타나면 인종차별과 관련한 폭언과 욕설을 퍼부었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그날도 관중의 욕설을 들으며 대기석으로 돌아온 로빈슨은 야구를 포기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때 주장이 슬그머니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감싸 주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어떤 말도 없었지요. 그러나 로빈슨은 갑자기 힘이 솟아오름을 느꼈습니다. ‘아, 나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훗날 전설적인 선수가 된 로빈슨은 그날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그 간단한 몸짓이 나를 살렸습니다.”
많은 행동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거창하고 훌륭한 말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말 없이 상대를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어깨를 감싸주는 것만으로 세상의 그 어떤 위로보다 더 큰 위로를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강조하셨던 사랑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대단하게 보이는 사랑도 아니고, 특별히 눈에 띄는 사랑도 아니었습니다. 간단한 몸짓 하나에도 자신의 따뜻한 마음을 담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미나의 비유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똑같은 미나를 받았지만, 종마다 벌어들인 미나의 양은 달랐습니다. 누구는 열 개로, 누구는 다섯 개로, 그런데 누구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처음에 받은 미나 하나만 가지고 주인 앞에 섭니다. 하느님께 받은 선물이 열매를 맺도록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바로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사랑을 세상에 널리 전달할 수 있는 우리의 노력입니다. 그런데 누구는 하느님께 받은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열 배, 다섯 배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반면에, 어떤 이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전달될 수 없었고, 동시에 하느님의 영광도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에게 심판이 내린다고 하십니다.
대단한 사랑에만 집중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그마한 사랑이라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칭찬하십니다. 더 많은 힘과 능력을 주시면서, 하느님의 일을 기쁘게 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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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벗에게>
루카 19,11ㄴ-28 (미나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그다음에 둘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들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에게도 일렀다.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려라.’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일렀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 그러자 그들이 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
<나의 벗에게>
벗 떠난 후
홀로 남은 자리
벗 미워하는
사람들 틈바구니
벗 새긴
굳건한 믿음
벗 깃든
애타는 바램
벗 품은
뜨거운 사랑
하나로 모은
갈림 없는 우정
더욱 더 아름답게
더욱 더 또렷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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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관상적 기도가 등대가 되어>
마카베오서는 어제 이스라엘의 위대한 어른 엘아자르의 얘기를 전한 다음, 오늘 위대한 엄마의 얘기를 전하는데 일곱 아들을 한 번에 다 잃으면서도 이스라엘의 신앙과 자존심을 지키라고 가르치고 독려하는 어머니 얘기입니다.
이런 어머니 얘기가 우리에게는 비현실적인 얘기라고, 교훈을 주기 위해 지어낸 얘기일 뿐 있을 수 없는 얘기라고 치부할 수도 있는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분들에게 저는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를 예로 들어 그렇지 않다고 강변합니다.
그분은 사형을 앞둔 아들에게 수의를 지어주며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기보다는 다음 생에는 천부의 아들 곧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나라는 편지를 보내시지요.
그런데 안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나 오늘 일곱 아들의 어머니나 공통점은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을 둔다는 점입니다.
“특별히 그 어머니는 오래 기억될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는 일곱 아들이 단 하루에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견디어 냈다.”
하느님께 완전한 희망을 두면 이 세상에 살면서도 진정 이 세상의 어떤 미련도 애착도 없음은 물론 이 세상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리고 미련이나 두려움이 없는 대신 확신이 있습니다. 자식을 신앙 때문에 죽게 하는 것이 더 큰 사랑이라는 확신도 말입니다.
자식이 이 세상에서 건강과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기를 바라는 것도 어미의 사랑이지만 그것은 현세적이고 거의 본능적인 사랑인 데 반해 저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미의 더 큰 사랑이요 어미의 본능적 사랑을 초월하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 성모 자헌 축일 강론에서도 아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은 다른 엄마들도 하는 것이지만 인류 구원을 위해 바치는 것은 다른 엄마들과 차원이 다른 성모님의 봉헌이라는 점을 말씀드린 바 있는데 같은 맥락입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제 생각에 우리 인간에게 ‘미래 본능’이라는 것은 없고, 본능에는 ‘미래희망’ 같은 것이 없고 철저히 현세적입니다.
제 생각에 본능이란 눈이 멀었기에 본능이 발동하면 미래나 방향 같은 것이 없고, 철저하게 그 순간의 자기 본능을 따라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도 본능에 이끌리지 않고 늘 주님을 향하고 주님께 희망을 두도록 우리의 사랑이 어디를 향하는지 관찰하고 감시도 해야 할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이것이 우리의 기도 가운데서도 관상적 기도일 것입니다. 관상적 기도가 우리의 본능적 사랑의 등대가 되어 우리의 사랑이 하느님 사랑에 희망을 두고 그 사랑에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게 되기를 또한 희망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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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화(聖化)의 여정>
-성인(聖人)이 되는 것은 우리의 거룩한 소명(召命)이다-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지켜주시고, 당신 날개 그늘 아래 이몸을 숨겨주소서.”(시편 17,8)
"주님은 내 등불을 밝혀 주시고, 당신은 내 어둠을 비추시나이다."(시편 18,29)
지난 금요일 카메룬 출신 파토는 7년간 리비아 사막에서의 비극적 여정 후 기적적으로 지중해를 건너 로마 교황청에서 개인적으로 교황님을 만나 대화를 나눴습니다.
“내가 언젠가 교황님을 만나리라곤 상상할 수 없었다. 7년간 여정은 쉽지 않았으니 우리에게는 어떤 도움도 없었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를 도왔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를 도왔다(Only God helped us)’, 말마디가 새삼 마음에 와닿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깊이 깨달아 아는 자가 겸손한 성인입니다. 성인이 되는 것은 우리의 소명이요 믿는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성화의 여정 중에 있습니다. 파토를 도왔던 모든 이들과의 대화 중 교황님의 두 단어 역시 마음에 남았습니다.
“특권은 빚이다(privilege is a debt).”
“부유한 너희들이 하는 것은 더 많은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무다(it is a duty).”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이요 우리가 하는 사랑의 행위는 마땅히 해야하는 사랑의 ‘의무’라는 것입니다. 이런 “빚(debt)”과 “의무(duty)”에 대한 기본적 또렷한 인식을 지닌 이들이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성인입니다. 어제 수도원에서는 예수성심자매회 월례모임이 있었습니다. 사진 촬영 후 사진과 함께 메시지도 나눴습니다. 빛과 그늘, 그리고 인물들이 잘 조화된 신비롭고 아름다운 사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매님들, 모두가 멋지고 기품있는, 내면의 빛을 발하는 주님의 사랑스러운 성녀(聖女)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늘 이렇게 사세요.”
어제는 병 진단을 받고 날마다 약을 복용하게 된 수도형제에게 준 덕담의 격려도 생각납니다.
“이 또한 순종의 삶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최선의 삶을 살 때 늘 함께 도와주십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최고의 의사이십니다. 아플수록 겸손하면 됩니다. 겸손이 최고의 명약입니다. 참으로 겸손해서 성인입니다. 추호도 위축되거나 의기소침하지 마시고, 힘내시고 용기내시기 바랍니다.”
회개로 이미 용서받은 과거는 주님께 맡기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다시 성화의 여정에 오르면 됩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엑소더스, 탈출의 여정, 성화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녀 체칠리아 기념일입니다. 시종일관 주님 사랑에 몸 바쳐 살다가 아주 젊은 나이에 순교한 성녀입니다. “천상의 백합”을 뜻하는 이름대로 천상의 백합꽃 같은 청초한 아름다움을 지녔던 성녀는 교회 음악과 음악인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성녀의 순교록에 나오는 일화중 일부 감동적인 내용을 소개합니다.
-성녀는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이교도인 성 발레리아누스와라는 귀족청년과 결혼하였으며 결혼 후 자신은 동정서약을 하였고 천사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성 발레리아누스는 그 천사를 보게 해주면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약속하였으며, 성녀는 그를 교황 성 우르바누스 1세에게 보내어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도록 안내합니다. 그는 세례를 받고 돌아오는 도중 백합으로 장식된 관을 쓴 두 천사가 성녀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고 동정서약에 동의합니다.
성 발레리아누스는 그때부터 동생인 성 티부르누스와 사치스러운 생활을 멀리하고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돕는 자선활동과 신앙생활에 전념합니다. 이들은 곧 총독인 알마키우스의 미움을 샀으며 총독에게 로마의 신들을 모신 신전에 희생 제사 바치라는 요구를 거절하다 심한 매질후 그 형제들은 이들의 신앙에 감화받은 총독의 시종인 성 막시무스와 순교합니다. 이 세 순교자들의 장례를 지낸후 체칠리아 성녀 역시 심한 박해와 고문 후 순교합니다. 당시 성인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순교한 성인들이었습니다.-
오늘 성녀 기념일 아침 성무일도 시 즈카르야의 후렴도, 저녁 성무일도 시 마리아의 노래 후렴도 성녀의 거룩한 삶을 요약합니다.
"태양이 솟아 오를 무렵 체칠리아는 '그리스도의 전사들아, 어두움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하고 부르짖었도다."
"복된 체칠리아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언제나 가슴에 품고, 밤낮으로 기도하며 하느님과 끊임없이 대화하였도다."
오늘 제1독서 마카베오 하권 역시 감동적인 일곱 형제의 순교에 이어 그 어머니의 순교 행적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었기에 가능한 순교였음을 봅니다. 특별히 이들의 어머니는 오래 기억될 놀라운 사람이었으니, 일곱 아들이 단 하루에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에 용감하게 견디어 내며 아들 하나하나를 격려합니다.
고결한 정신으로 가득한 그는 여자다운 생각을 남자다운 용기로 북돋우며 아들들을 격려합니다. 마침내 막내아들 역시 안티오코스 임금의 회유를 떨쳐버리고 어머니의 충고대로 용감히 순교하니, 모전자전 그 어머니에 그 아들들입니다. 우리가 배울 바 하느님께 대한 궁극의 희망과 사랑, 믿음입니다.
죽어서만 순교 성인이 아니라 살아서도 순교적 삶에 충실한 이가 성인입니다. 11월 위령성월이자 성인성월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비범한 성인이 아니라 제본분의 책임을, 의무를 다하는 성인들입니다.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사랑에 빚진 선물 인생을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평생과제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두 종이 그 훌륭한 모범을 보여줍니다. 한 미나의 선물 인생, 나름대로 그 의무와 책임을 다하므로 칭찬받는 첫째 종과 둘째 종이 그 모범입니다.
“잘 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인 첫째 종에 이어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벌어들인 이도 주인의 칭찬을 받습니다. 선물 인생에 최선을 다해 과제를 수행한 참 성인다운 삶을 산 이들입니다. 그러나 평생과제에 소홀하여 한 미나를 그대로 바친 이는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주인의 질책과 더불어 불행하게 인생 마감합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합니까? 각자 주어진 한 미나의 선물 인생 잘 활용하여 많은 수확을 남기고 있는 성인다운 삶인지요? 살아 있는 동안은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내 삶의 손익(損益)을 계산하는, 선물 인생 한 미나의 활용도를 점검하는 시간입니다.
성화의 여정 중인 우리의 삶을 일일일생, 일년 사계로 압축하면 과연 어느 시점에 있습니까? 죽음과 더불어 내 인생 결산(決算)할 시간이, 주님께 헴바쳐야 할 시간이 점차 가까워집니다. 주님의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성화의 여정 중 진인사대천명, 과제 수행에 온갖 힘을 다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을 뵈오리다. 깨어나 당신을 뵈옴으로 흡족하오리다.”(시편17,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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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루카19,13)
<순종의 순교!>
오늘 복음(루카 19,11ㄴ-28)은 '미나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이를 두고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미나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미나의 비유'에서 왕권을 받아오려고 먼 고장을 떠난 어떤 귀족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리고 먼 고장으로 떠나는 여행은 '주님의 승천'을 뜻하고, 왕권을 받고 돌아오는 모습은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재림)'을 뜻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선물(은총)을 주셨는데, 그 선물이 바로 미나(탈렌트)이고, 이 미나를 가지고 벌이를 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루카 19,13)
'우리가 받은 미나(선물)는 무엇이고, 이 벌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받은 미나(선물)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고, 하느님의 말씀'이며, 이 미나을 가지고 벌이를 잘해야 한다는 의미는 바로 '삶의 자리에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예수님과 하느님의 말씀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음악의 수호성인'이신 '성녀 체칠리아(세실리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천상의 백합'이신 체칠리아는 배교의 강요를 물리치고 동정을 간직한 채 순교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독서(2마카 7,1.20-31)는 '박해시대 때 보여 준 한 어머니의 모습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그 어머니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일곱 아들이 단 하루에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이를 용감하게 견디어 내신 분입니다. 그리고 아직 순교하지 않은 막내 아들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2마카 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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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1Wc1LVL6L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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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루카 19, 23)
처음부터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사랑을
실천하는 법부터
다시 익히는
사랑의
시간입니다.
삶이 무엇인지
묻는 우리에게
사랑의 실천을
가르쳐주십니다.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나
나누고자 하는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
참된 정의의
실천입니다.
자아를 떠나본 적이
없는 우리 삶입니다.
정의의 실천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한
실천입니다.
피할 수 없고
피해갈 수 없는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덮어버릴 수 없고
없애버릴 수 없는
우리 인생의
참모습입니다.
두려움에 갇힌
우리의 실천을
깨우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살고 싶은 삶을
살아가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축복의 삶이며
정의의 삶입니다.
많이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다해
우리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충분하시지만
늘 우리의 실천은
빈곤합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먹고 사는
자녀들입니다.
하늘에 맡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실천하기를
싫어하는
이기적인
우리
마음입니다.
함께 나누어야 할
행복입니다.
함께 실천해야 할
사랑입니다.
실천을 외롭게
하는 사람은
우리의
사랑을 외롭게
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을
풍요롭게
하는 실천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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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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