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자본주의 사회의 남성들 나약한 남성
스기타 슌스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채 힘겹게 살아가는 남성에 관한 보고서이다. 이들을 이 책에서는 ‘약자 남성’이라고 명명하고,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잔여물’이라고 규정한다.
이들은 개별적이라 사회적 힘이 되지 못 함으로 정치적 주장도 불가능하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행위가 때로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인셀(인기 없는 남자)의 독특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문제는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약자 남성’은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공론화된 바도 없기 때문에 용어가 낯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근에는 무차별적 폭력이 수시로 일어난다는 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에서도 이를 공론화할 시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떻든 독특하지만 예리함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이는 책이다.
자본주의는 승자의 논리다. 그러므로 승자와 패자가 반드시 존재한다. 그러나 패자가 더러 최상층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승자의 자리로 올라서기도 한다는데 자본주의의 묘미가 있을 것이다. 물론 대다수는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 패자에 대해 모두 한 묶음으로 치부하기에는 사회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그 가운데는 성소수자처럼 나름의 무리를 지어 정치적 발언을 하기도 한다. 국가와 사회의 관심은 그런 발언들에 귀를 열고 주목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한쪽 귀퉁이에서 세상의 이목도 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주목한다. 저자의 눈에 이들을 “현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흐름에서 방치되고 ‘잔여물’이 되어 이제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고’ 있는 남성들”로 비추어진다.
그런 남성들이 이른바 ‘약자 남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약자 남성에 대해 확립된 정의는 없다. 그렇다면 약자 남성은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얼굴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다보니 약자 남성은 취업을 하지 못해 삶을 비관하는 남성 같기도 하다, 그도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하는 남성이거나,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마땅한 짝을 찾지 못한 채 싱글로 사는 남성 같기도 하다.
이러한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현대 사회의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하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그러면서 아직은 저마다의 복잡한 사정으로 빈곤, 박탈감, 존엄성 훼손을 떠안게 된 ‘약자 남성’들의 절망과 고뇌를 적확하게 논의할 말과 이론이 부재함도 지적하고 있다.
어떻든 그들은 실재하며, 연령과도 상관이 없다. 그저 출처를 알 수 없는 고독에 괴로워하고, 박탈감에 고통스러워하는 그런 남성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사정을 바탕에 깔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저자는 그들에게서 연민을 느끼고 다독일 생각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오히려 남성의 나약함을 풀어놓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분노하게 하고, 이를 동력으로 삼아 뭔가를 깨부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그들이 용감해지기를 기대한다.
나. ‘잔여물’로서의 약자 남성
우리는 지금 신자유주의의 격차와 사회적 배제의 시대에서 초격차 양극화와 무관용의 시대로 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탈감은 ‘인간’의 ‘존엄’ 문제와 연결된다. 우리는 국민, 시민, 노동자이기 전에 응당 한 명의 ‘인간’이어야 하나, 이 ‘인간의 존엄성’이 박탈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집단에도 속하지 못하는 또 다른 사람들, 그들이 바로 주변화된 약자 남성일 것이다. 이들은 경제적 빈곤이나 실업 문제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다양성과 포용성을 활용하는 글로벌 자유 자본주의의 ‘잔여’ 또는 ‘잔여물’로 여겨지는 약자 남성들이다.
”이들은 다수자 남성 중에 ‘잔여물’, 다수자 남성들의 내부 균열에서 나온 남성들이다. 꼭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빈곤하지 않을 수도 있고, 확연한 차별 대상도 아니지만, 인간의 존엄 자체를 박탈당한 약자 남성들이다.“(40쪽)
약자 남성들의 적극적인 속성으로 일컬을 수 있는 약함이 아니라 ‘잔여’, ‘잔여물’로서의 약함을 강요받기에 인간의 존엄이 박탈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사회 전반에 대해 피해자의식으로 가득하다.
이들은 소수자 속성이 없으므로 정치성을 띠거나 개별적이라 연대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중 몇몇은 현실도피적 행위에 빠져들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SNS ‘안티’ 활동에 빠져들거나 게임처럼 상대를 공격하는 어둠으로 빠지게 된다.
그런가 하면 가끔은 그들의 피해자의식이 사회적 규범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왜곡된 형태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들은 고된 삶과 취약성이라는 복합적인 요인들로 힘들어하다 일반적인 ‘국민’이나 ‘시민’의 틀에서 탈락했으며, 평범하고 착실한 생활을 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돈도 없고 무지하고 무능한 남성들이,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공격하는 행동을 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요즈음 묻지 마 폭력도 그런 유형 중 하나일 것이다. 저자의 분석은 예리하게 날이 서 있는 듯하다.
다. 인셀
인기 없는 남자(인셀)가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인셀의 반항과 폭력이 세계적인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인셀은 원치 않는 금욕자, 비자발적 싱글이라는 뜻이다. 결혼은 하고 싶지만 현실적 여건 때문에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남자다.
이들의 말과 행동은 여성혐오, 폭력 긍정, 인종차별 등과 깊이 연결된다. 이들은 반드시 빈곤층은 아니며 정치적 소수자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따라서 인셀을 이야기할 때는 그들의 독특한 고독감, 상처 입은 존엄, 박탈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인셀은 여러 가지 형태로 그들의 불만을 표출한다. 그 중 하나가 무차별적 살인을 동반하거나 자살이다. 그들의 폭력은 학교, 거리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세계 도처의 각종 학교에서 끔찍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난다.
그들은 살인을 “‘세상에 나를 알리는 정신병리적 욕구’의 표현이며, 자살은 ‘일상의 지옥에서 탈출을 꾀하는 방법”(118쪽)으로 활용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셀 반란의 폭력은 일부 극단적인 대량 살인자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인셀에 대립되는 말이 인기 있는 남자를 뜻하는 ‘채드’이고, 인기 있는 여성을 ‘스테이시’라고 한다. 인셀들은 모두 이런 채드와 스테이시를 타도할 것이라고 했다. 인셀들에게 남녀평등은 꿈같은 가짜이고, 이성에게 인기 없는 잔혹한 현실이 ‘진실’이다..
그들은 국민국가에서 전제한 다수자로서 ‘국민’과 ‘시민’에 서 배제되고 주변화된 소수자들로, 이들 역시 저자의 시각으로는 ‘약자 남성’에 속하는 남성들이다. 이들은 정체성 인정을 둘러싼 정치적 논의 대상이 아니다.
“어디에도 구원은 없고, 비참하고 한없이 괴롭기만 한 음지의 인생. 어떤 남성들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절망이 있다. 상상해 보자, 동정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 그저 상상하고 이해해주는 정도며 된다. 그들의 고뇌하는 목소리, 들리지 않는 외침...(12쪽)
이들에게는 상대적인 약함이 아닌, 절대적인 약함이 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우열을 매겨 강약, 행불행을 재지 않더라도 생존 그 자체로 비참하고, 존엄을 박탈당한 속수무책인 인생이 있다. 절대적인 기준에서의 ‘약함’이 있다는 것이다.
마. 약자 남성들의 이야기
약자 남성들도 거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일본에서 최근에 일어난 무차별 살인 사건의 배경에는 노동 문제, 은둔형 외톨이 고령화 문제(노부모와 중년 은둔형 외톨이 자녀 문제), 장애나 정신질환 등의 사회적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 반드시 최빈곤층이 아니어도, 문화적 차별을 받지 않아도, 질병과 장애가 없어도, 약자 남성들의 마음속에는 ‘허무의 검은 구멍’이 있고, 박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름마저 없는 박탈감이 있고, 불행이 있고, 고뇌가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모순 속에서 약자 남성들이 경련 상태에 빠진다. 이 문제를 자기책임만으로 돌릴 수 없다. 사회는 복잡한 형태의 분할 통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남성과 여성 그리고 성소수자로 분열되어 서로 다른 형태로 억압받고 있다.
우리 사회는 ‘가짜 대립’이 존재한다. 정직원과 비정규직, 파견사원 들의 관계가 그렇고 약자 남성과 페미니스트 구도 또한 그렇다. 이로 인해 우리는 ‘적’을 오인해 진흙탕 싸움처럼 서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의 시스템에 당당히 맞서야 한다.
“인셀 남성들은 인생의 굴욕에서 복받쳐 오르는 ‘적’에 대한 증오를, 자신과 적을 분열시키고 대립을 강요하는 ‘세계(시스템)’를 향한 분노로 바꿔야 한다. 용기 내어 싸우기로 결단해야 한다. 증오하지 말고 분노하라. 이 사회에 분노하라.”(149쪽)
뭐든 토해내고 나면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새로운 도약을 위한 출발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그들에게만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문제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다양한 길을 모색해야 한다. 건강한 사회는 그 뒤에 존재할 것이다.
읽고나니 뭔가 묵직한 것이 가슴 한 켠에 걸려 있는 듯하다. 나도 결국은 증상은 다소 적을지 몰라도 약자 남성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은 다행히도 증오의 감정은 가슴 밑바닥에서 잠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