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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없는 압도적 사랑 – 토저
*무엇인가를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사용하는 최상급 표현이 간혹 지나칠 때가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3장의 처음 몇 구절에 담긴 주님의 교훈의 절대적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의 교훈은 정말로 혁명적인 것이다!
그분의 교훈은 인간 사이를 명확히 분류한다. 포함하거나 배제하고, 나누고, 구별한다. 그분의 교훈은 다른 모든 종교적 교훈들과 다르다. 아니, 사실 그분의 교훈은 단순히 종교적인 교훈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대부분의 종교적 교훈들이 여기저기서 끌어온 것들을 짜깁기해서 만든 것이지만, 그분의 교훈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분의 교훈은 사실에 대한 보도(또는 보고, report)였다. 취재의 임무를 받고 나간 기자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보도한다.
그럴 경우, 우리는 이를 교훈이라고 하지 않고 사실의 보도라고 한다. 그렇다! 예수님은 보도하신 것이다. 그분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요 3:11)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분은 스스로 기자의 역할을 맡으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나는 내가 보고 아는 것을 네게 전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말씀은 이런저런 것들을 끌어다가 만들어낸 교훈이 아니라 보도였다. 천국의 주님이신 그분이 천국에 계셨을 때 보고 듣고 알았던 것을 이 땅의 사람들에게 보도하신 것이었다. 그분이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의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주님은 기본적인 대조(contrast)에 대해 강조하신다. 사도들도 성경의 다른 곳에서 이에 대해 가르친다. 이 대조는, 우선 인류의 머리가 둘이라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두 머리 중 하나는 '첫 아담'인데, 그는 자연적 인류의 머리다. 그는 우리 모두의 조상이지만, 모든 이들이 이 첫 아담 안에서 죽었다. 이에 대해 고린도전서 15장 22절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라고 말한다.
이러한 아담과 대조되는 인물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속량 받은 인류의 머리시다.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여러 언급 중에는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4,45)라는 말씀이 있다.
살펴본 것처럼, 인류에게는 대조되는 두 머리가 있다. 하나는 자연적 인류의 머리인 아담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 인류의 머리인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이셨고, 지금도 '살려주는 영'이시다. 성경은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라고 말한다.
이 두 인류는 함께 존재하며 섞여서 살아간다. '첫 아담'에게 속한 자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이며, '마지막 아담'에게 속한 자들은 선한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된 새로운 사람들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라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아담이 머리가 아니다. 그들은 아담에게 뿌리를 두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둔다. 아담에게서 생명을 취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서 생명을 취하며, 그분의 형상을 닮는다. 그리스도는 새롭게 창조된 자들의 새 머리이시며, 성령으로 난 자들의 새 머리이시다.
그런데 이 두 종류의 인류가 세상에 함께 존재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모든 도시들에서 종교적 충돌과 박해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보편적 형제 관계의 울타리를 만들어놓고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면 이 울타리 안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다. 자유주의자는 "나는 인류의 형제 관계를 믿습니다. 그리고 보편적 형제 관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습니다”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에 속한 보편적 형제 관계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5.6). 나는 타락한 인류의 형제 관계를 믿지만, 또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믿는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하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그분이 아담의 인류 전체에게 아버지가 되신다는 뜻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 즉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아버지가 되신다는 뜻이다. 그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버지가 되신다. 옛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아담에게서 나서 아담을 아버지로 삼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셨고, 아담에게 후손이 생겼고, 그 후손이 온 땅에 거하게 되었다. 우리의 보편적 형제들이 하나의 옛 아버지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의 경우는 다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속량 받은 자들의 새로운 형제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가 되신다.
*우리에게는 두 나라가 있고 두 번의 출생이 있다. 그런데 육으로 난 것에 대해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육으로 난 것은 결국 육일 뿐이다. 그것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성령의 나라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아무리 신앙교육을 많이 받아도 성령의 나라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제자들의 교훈과 가르침과 교육을 모두 동원한다 해도 우리를 '성령을 따르는 자'로 만들어줄 수 없다.
우리가 플라톤과 같은 사고력을 갖고 있다 해도, 육은 육이다.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적 능력을 갖고 있다 해도, 육은 육이다. 베토벤 같은 음악적 능력을 갖고 있다 해도, 육은 육이다.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성이 있다 해도, 육은 육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에게 알려진 그 어떤 수단을 동원한다 해도 육을 성령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게 할 수는 없다.
우리를 육으로 만드는 출생이 있다. 이 출생은 우리를 아담의 몸 안에 있게 하고, 아담 나라의 백성으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또 다른 출생, 즉 성령으로 나는 출생이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가 되신다. 육으로 난 것은 그냥 육으로 남아 있지만, 영으로 난 것은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두 번 태어난 자들은 생명의 주님이 주관하시는 곳, 즉 하나님의 빛으로 둘러싸인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두 번 태어난 자들의 운명이다.
우리는 옛 아담에게서 나온 자들, 즉 타락한 인류의 형제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에 의하면, 그들은 저 마지막 날에 땅의 먼지를 털고 일어나서 부끄러움과 경멸을 영원한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지금 옛 나라에 거하는 자들에게 돈이 있고, 상당한 교육 수준이 있고, 고위관리직으로 일한다 해도, 그들은 아담의 후손일 뿐이다.
*하나님께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그분이 다양한 감정들을 통해 그분의 마음을 표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분에게는 감정이 있다. 그분은 인격체이시기 때문이다. 인격체에게는 당연히 감정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감정적 사랑에 대해 논할 때에는 그 사랑에 대한 몇 가지 측면을 이해해야 한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것은 매우 의미 깊은 시작이다. 당신은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표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때때로 그분의 사랑을 우리의 관점에서 평가한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이것을(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라거나, 또는 "나는 저것을(저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가면,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는 감정적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사도행전 10장 34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한다. 이는 그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이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그분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확실히 붙잡아야 할 것은 그분이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그분의 감정적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또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삶 속의 죄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죄가 그분의 사랑을 짓누를 수 없다. 오히려 그분의 사랑이 내 죄를 짓누른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라고 썼다.
하나님이 처리하지 못하실 만큼 큰 죄는 없다. 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은 개인화되어 있다”라고 말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분의 사랑이 집단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분의 사랑은 각 개인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간다. 이 말에는 그분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열려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 그분은 '공평하게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하나님의 독생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내가 노력하고 수고한다고 그분의 사랑을 얻을 수 없다. 내가 매력적인 존재가 된다고 그분의 사랑을 얻을 수는 없다. 내가 그분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저 놀라운 문,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 14:6)라고 말씀하셨다. 이 모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각 사람에게 주어진다. 이 구절을 읽고 여기에 나타난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열정과 능력을 알게 된다. 때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무참히 짓밟기 원하는 '하늘에 있는 비열한 거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그분을 오해한 것이다. 또한 그분은 나를 좋아하는 어떤 신이 아니다. 그분을 생각할 때, 특히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타난 그분을 생각할 때, 내 눈에는 그분이 인간 때문에 겪으신 고통과 눈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시선을 두시고 그들에게서 부패와 죄를 보실 때 틀림없이 고통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신다. 그래서 그분은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다. 이는 우리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분의 사랑이 훼손될 수 없는 것은 그 무엇도 그분의 능력과 열정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 감정적 사랑에 대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우선,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 자체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의 사랑은 영원하고, 끝이 없으며, 무한하다. 그분이 우주 전체에서 가장 사랑하시는 존재는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인간이다. 그렇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에는 감정적 측면, 즉 불같은 뜨거움이 있다. 그분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이 감정적 사랑에 대해 내가 또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사랑의 이면에 있는 것, 즉 반역하는 자들을 향한 그분의 진노이다. 하나님을 배척하는 자들은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배척으로 인해 생긴 빈 공간은 그분의 진노로 채워질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나아오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의 반역적 본성은 그분을 밀어낸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은 회개와 고백을 통해서만 처리될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깊은 타락에 빠졌는지 또는 얼마나 많은 죄를 범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회개하며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면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경험이 많아질수록 삶 속에서 그분의 사랑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점점 더 깨닫게 되고, 그 사랑을 점점 더 누리게 된다.
마귀는 내가 쓸데없이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다가 결국 부루퉁한 표정으로 어느 구석에 틀어박히기를 원한다. 마귀는 내가 그 어떤 것도 얻을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내게 말한다. 맞다. 당신이나 나나 그 어떤 것도 얻을 자격이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모든 자격을 갖고 계신 하나님의 감정적 사랑이 우리에게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내 자격에 의지해야 한다면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실 자격이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다. 그분의 사랑이 그분의 자격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주 풍성해진다. 그분이 단지 내 삶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나를 그분 앞으로 끌어당겨 그분의 능력과 은혜를 누리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주 매력적인 것이 된다.
내가 '감정적 사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와 함께 성장하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그분을 알고 싶은 마음이 더 생긴다.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기 시작하면, 내 눈에는 전에 알지 못했던 그분의 사랑의 새로운 단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분의 사랑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그 무엇보다 크다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깨닫기 시작할 때, 나는 내 삶에서 그 사랑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내가 중요한 진리 중 하나라고 믿는 것은 이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실 수 있고 그분을 향한 내 사랑을 받아들이실 수 있다면, 나는 이 세상의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기 원하시며, 또 내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그분의 무한한 감정적 사랑을 우리의 삶 속에 부어주신다. 이 사랑은 그분에게로 다시 흘러가고, 그 다음에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흘러간다. 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나의 능력과 은혜를 누리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주 매력적인 것이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이 감정적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영생의 시작이다. 내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가 그분의 조건들에 따라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조건들에 따라 그분의 사랑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볼 때 이는 아주 중요하다.
조건들은 하나님이 정하신다. 그중 가장 핵심적 조건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시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려 한다면 그 방법은 예수그리스도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그분의 사랑이 더 나빠지거나 더 좋아지거나 더 많아지거나 더 적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랑은 언제나 동일하며, 날마다 내가 그것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되는 것뿐이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할 우리의 메시지는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당신이 이러이러한 것들을 행하고 저러저러한 것들을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사랑받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사랑을 주시지 않는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지극히 사랑해서 내 아들을 보내 네 대신 죽게 했으니, 이는 네가 내 사랑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실 수 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신다. 하나님이 놀라실 만한 일은 내 삶에서 일어날 수 없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내게 조건없는 사랑을 주신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다. 그분이 오신 목적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앎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분이 오신 목적은 자신이 진정 누구이신지를 우리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우리가 무조건적인 사랑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른다면,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신지를 알 수 없다. 요한복음 3장 17절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을 보내신 목적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종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 여기에 계신다고 가르친다. 큰 재앙이 닥치면 사람들은 즉시로 “하나님이 저 가족을, 저 사람을, 심지어 저 도시를 심판하신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의 삶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의 선택의 결과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지만, 우리가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을 막지 않으신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선택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그분의 뜻을 알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만일 그분이 정죄하기 위해 오셨다면 우리 중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잊으시게 할 만한 것이 우리 삶에는 없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잊으실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사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만 우리의 죄가 우리의 삶으로부터 영원히 제거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내 삶 속으로 들어오시면 하나님은 나를 보실 때 과거를 보시지 않는다. 그분이 우리의 삶 속에서 보시는 것은 기쁨을 주는 그분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뿐이다.
구원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그들은 "구원은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도록 건져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구원이 우리의 지옥행을 막아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구원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구원은 단지 무엇인가로부터 건져내는 것만이 아니라, 무엇 또는 누구에게 가도록 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받아 그리스도에게 가야 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만나야 한다.
*선한 것처럼 보이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닥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순간은, 그가 그리스도와 대면했을 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라는 무서운 말씀을 듣는 순간일 것이다. 그 순간에 그들은 그들에게 찾아왔던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들이 영원히 거부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땅을 치며 후회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할 이유는 전혀 없다. 누구라도 그 사랑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 읽었다면, 성경을 읽었다면,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를 이해했다면, 해 아래에서 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거부할 이유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
이 사랑에 대한 선택의 문제는 나무로 만든 5센트짜리 동전과 금괴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이냐 하는 문제만큼이나 자명하다. 그런데 어째서 그토록 많은 이들이 금괴를 거부하고 나무로 만든 5센트짜리 동전을 택하는가? 내가 볼 때,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알지 못하도록 원수가 구름으로 가려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을 우리가 거부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나는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내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풍성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그분이 내게 주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장 17절의 이어지는 부분은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모든 길들은 결국 천국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깊이 생각해보면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모든 길들이 나를 시카고나 뉴욕으로 이끌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천국에 이르는 확실한 길은 딱 하나인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천국까지 태워다주는 기차는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일단 내가 이 기차에 올라타면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내 마음의 기쁨은 내가 그분을 위해 행하는 것에서 나오지 않고, 그분이 이미 나를 위해 이루신 것, 그리고 날마다 내 안에서 나를 위해 행하시는 것들에서 나온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온 세상이 구원받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사람이 반역과 죄 때문에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모두가 구원받아 천국에 가기를 원하신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천국 가기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천국에 가는 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만일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안다면 그들은 매우 놀랄 것이며, 아마도 천국 가는 것에 흥미를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천국은 당신이나 나의 입맛에 맞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에 부합하는 곳이다. 내 삶이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춰지고 그 초점이 계속 유지된다면, 나는 천국에 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을 때마다 정말 놀란다. 나는 때때로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삶에 임한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깊이 생각한다.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내게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하지만 내 자격이 줄어들수록, 그 사랑이 그만큼 더 많이 내 삶 속으로 흘러들어온다는 것도 안다. 나를 사랑하실 자격이 하나님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나를 창조하셨다. 나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그분의 눈에는 내가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물론, 그분의 눈에는 모든 사람 각자 각자가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보인다. 나에 대한 그분의 감정은 당신에 대한 그분의 감정과 똑같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감정은 당신에 대한 그분의 감정과 똑같다. 다시 말하지만, 그분의 사랑이 내게 찾아올 때 그것은 한 개인으로서의 나에게 찾아온다. 그분의 사랑이 하나의 커다란 상자에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단체로 한 자리에 모여 있다가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각 사람은 그분의 사랑을 개별적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인기를 얻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인기를 얻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는다. 기독교계에서 높아지고 싶다는 유혹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조건적으로 내 삶으로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에 감동하고 황홀할 뿐이다.
*인간의 이성(理性)은 우리를 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타락한 이성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것은 그 타락한 상태로부터 자신을 끌어올릴 수 없다. 인간의 마음과 몸이 타락한 것처럼 인간의 이성도 타락했다. 타락한 상태에 빠진 인간의 이성이 역시 타락한 상태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 고상한 이상(理想)들로 즐겁게 해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진흙수렁에서 건져 올릴 수는 없다. 구름의 그림자가 드리운 골짜기 아래에서 저 높은 하늘로 날아오르게 해줄 수는 없다. 그늘진 어둠 밖으로 끌어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자리에 앉아 철학자처럼 깊은 사색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백발이 되어 그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부들부들 떤다 해도,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골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앞에 서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신다. 그분은 이성에게 배우신 적도 없고, 이성을 통해 무엇을 알아내신 적도 없다. 이성에게 신세지지 않으시고, 이성을 이용하지 않으시고, 이성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신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유일무이한 분이시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성육신한 이성'이시다. 옛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가 '이성'이라고 말했다. 당신과 내게 있는 이성의 작은 조각은 타락한 것이며, 마치 깨어진 꽃병처럼 산산조각 난 것이다. 당신과 내가 주워 모아 흙을 털어내고 닦아서 학교로 보낸 조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성의 깨어진 한 조각일 뿐이다. 모든 이성의 샘과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위로부터 오신 분이다. 모든 이성과 모든 과학과 모든 문명을 초월하는 곳에서 오신 분이다. 왜 그분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요 3:35)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우리는 안다. 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의 증거가 최종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안다. 왜 그분이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요일 5:12)라고 말씀하셨는지 안다. 그 아들은 위로부터 도움을 갖고 오신 분이다.
그분은 '속량 받은 자들이 거하게 될 많은 거처'(요 14:23)와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히 12:23)에 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갖고 오셨고, 영생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분은 이 땅에 내려오셨고, 그분을 영접한 자, 즉 그분을 믿은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우리는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 위에 왜 죽음이 머물러 있는지, 왜 그가 골짜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 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런 사람 위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위로부터 오신분을 멸시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구닥다리 얘기로 들릴 것이고, 어떤 이들은 나를 가리켜 '뿌리부터 바꾸어놓으려는 사람'(radical)이라고 부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큰 깨달음을 얻은 나로서는 확신을 가지고 당신에게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면 당신에게 충분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종교라는 것이 여기 진흙 속에서 사는 삶에 대해 우리에게 약간의 위로와 격려를 주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진정한 도움은 오직 한 분으로부터 온다. 그분 외에 우리의 슬픔을 이해하는 분은 없다. 마음의 평안, 영혼의 평안, 이런 평안, 저런 평안에 대한 책들이 세상에 넘치지만, 결국 그것들은 진흙 조각이요 인간의 노력의 발자국일 뿐이다. 거기에는 하나님, 영생, 그리고 위로부터 오신 분이 없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금 있는 곳에서 당신을 구원하고 당신에게 복을 주실 수 있다. 당신을 일으키시고, 당신으로 하여금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저 영생의 정수(精髓)를 미리 맛보게 하실 수 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틀을 함께 지내셨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그분을 메시아로 믿게 되었다. 믿음을 가졌을 때 그들이 그녀에게 한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그녀에게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요 4:42)라고 말했다.
정말 청량음료처럼 상쾌한 말이다! 그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그분을 향한 그들의 사랑으로 발전한 것을 보셨을 때 예수님이 얼마나 마음에 힘을 얻으셨겠는가! 바로 이런 것이 전염성 사랑이다!
만일 내가 그때 살았다면, 기꺼이 그 여인 옆에 앉아 우물가에서 만난 그분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알지 못하기에 다만 추측해볼 뿐이다. 아마도 실패로 돌아간 그녀의 모든 결혼생활들이 틀림없이 그녀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예수님이 그녀를 만나시기 전에도 이미 그녀의 형편을 알고 계셨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분은 그녀의 삶이 어떤 삶인지를 다 알고 계셨다. 그녀에 관한 이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행하고 계신 일들이 우리의 과거와 아무 상관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과거를 문제 삼지 않는 이런 태도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접근하셨다.
그분이 그녀의 과거에 대한 언급으로 대화를 풀어나가기 시작하신 이유는 그분이 그녀의 상태를 알고 계시다는 것을 그녀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분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의 과거가 아니었다. 그분은 바로 '그날의 그녀'를 사랑하셨다.
이제 이해하겠는가? 우리는 형제자매들을 너무 판단한다.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는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렸다. 그리스도를 삶 속에 모시면 과거가 현재와 아무 상관없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심지어 설교단에 선 설교자들조차 사람들의 과거를 자꾸 비판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믿도록 만들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 같은데, 과거는 바꿀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간 것'이라고 불리지 않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전염성은 우리의 과거 행위를 문제 삼지 않고 미래를 향해 새 문을 열어준다! 그런데 이와 상반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육신적인 악한(漢)들이 우리 주님의 허락 없이 교회 안으로 몰래 들어오는 것을 나는 보았다. 어쩌면 그들은 부유한 자들일 수도 있고, 세상에서 잘 나가는 가수일 수도 있다. 아무튼 유감스럽게도 교회는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문제 삼지 않고, 그들이 교회 안으로 마음대로 들어오도록 허락했다.
우리는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두 팔을 벌려 받아들이시는 것을 비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이 미워하시는 것을 허용하느라고 바쁘다. 동네로 돌아간 사마리아 여인은 그녀가 아는 유일한 사람들, 즉 그녀의 말을 들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증언했다. 주님은 그것을 아셨다. 그분에게는 계시의 밝음이 있었고, 그분은 그녀가 온전히 진실하다는 것을 아셨다. 온전히 진실한 사람은 흔하지 않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겼던 '종교적 감정'이 오늘날의 교회에게 정말 필요하지만, 우리는 차갑게 머리를 굴린다. "우리가 옳은 것을 행하고 옳은 것을 말하면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모범적 전도방법'을 만들어내는 데에만 몰두한다. 그러나 그런 '모범적 전도방법'으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볼 수 있는 전염성이 있어야 된다!
우리의 간증은 그 누구도 회심으로 이끌 수 없다. 우리의 간증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가도록 자극할 수 있을 뿐이다. 간증은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증거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증거가 사람을 구원한 적은 없었다. 또 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주님이 그에게 베푸신 것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들이 가서 그와 같이 행하도록 자극하는 것뿐이다.
우리가 기꺼이 인정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작은 죄를 사하는 것보다 큰 죄를 사하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는 사실이다. 사함 받은 죄가 클수록 그분께 더 큰 영광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분은 죄를 사하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기를 즐기신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면 과거를 잊으시고, 마치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를 믿어주신다. 그분은 큰 죄를 작은 죄만큼 빨리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다시 문제 삼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는 모든 이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분께 나아가는 사람은 누구라도 마음이 열릴 것이다. 이 우물가의 여인의 경우를 말할 것 같으면, 그녀의 영혼의 어느 부분에 창문이 생겼고, 결국 그 창문을 통해 하나님의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일을 시작하기 위해 어떤 증인이라도 사용하시겠지만, 증인이 예수님을 대신할 수는 없다.
죄인 안에 새 생명이 태어나야 한다. 그런데 죄인이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꺾고 먼지 구덩이에서 나오기 전에는 새생명이 태어날 수 없다. 새 생명을 얻은 죄인은 그분과의 만남을 언제나 기억할 것이다.
이런 만남, 즉 영혼과 하나님의 만남에는 새로운 새벽의 신선함과 밝음이 뒤따른다. 그런데 이런 신선함과 밝음이 현재 기독교의 예배들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육 프로그램에 따라 신앙을 배웠을 뿐이다.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을 그냥 받아들였을 뿐이다. 우리는 그분을 만나서 "이제는 제가 직접 알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까지 매달려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천국을 향한 우리의 소망이 인간의 말에 뿌리를 두는 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의 뜻은 그 능력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분의 임재로부터 우리의 삶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사랑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모호한 개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책임의 문제도 뒤따른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분과 관련된 문제에서 우리의 책임이 면제되는 부분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사랑을 우리의 삶 속에 부어주실 때, 그분은 우리가 그분께 책임을 져야 할 단계까지 우리를 끌고 가신다. 우리는 어떤 종교에게, 어떤 교리에게, 어떤 유명 설교자에게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 책임을 질 뿐이다. 우리의 삶 속에 사랑을 부어주신 분이 그분이시므로, 우리는 오직 그분께 책임을 진다.
성경을 읽을 때 발견되는 아주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그 누구에게도 무임승차권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교회에서도 무임승차를 좋아한다. 누군가 잘못을 범해도 그에게 무임승차권을 준다. 그를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하나님 앞에 책임을 져야한다. 성경을 연구해보면, 우리가 장차 그분 앞에 서면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될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의 피는 그분의 사랑을 충만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를 깨끗케 한다. 그러나 그분의 피가 모든 것을 덮도록 허용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추궁 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비판하는 주변 사람들 때문에 주눅이 들기 쉽다. 때로는 그들의 덫에 걸려들어 그들의 비판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는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책임을 지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은 내 삶의 지극히 놀라운 부분이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가 콧대를 높이 세우고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며 오만하게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삶은 잘못된 것이다. 내 말은 우리가 최종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내 삶이 그리스도를 공경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고, 장차 나는 그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추궁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비판하는 주변 사람들 때문에 주눅이 들기 쉽다. 때로는 그들의 덫에 걸려들어 그들의 비판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는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책임을 지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은 내 삶의 지극히 놀라운 부분이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가 콧대를 높이 세우고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며 오만하게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삶은 잘못된 것이다. 내 말은 우리가 최종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내 삶이 그리스도를 공경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고, 장차 나는 그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추궁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우리는 그분의 일부가 되었고, 그분은 우리의 일부가 되셨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그분이 죽으셨을 때 우리 모두는 죽었다. 율법이 모든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분이 모든 사람을 죽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셨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자기의 죄 때문에 죽는다는 말이 맞다. 죄인은 홀로 죽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 어떤 경우든, 모든 사람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는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죄 가운데 혼자 죽거나,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에 자기의 마음을 연합시킴으로써 죽는다. 그분의 무서운 말씀을 떠올려보자.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4).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를 그분 안으로 모아들인 후 죽으셨을 때 우리도 죽었다.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그분의 죽음은 속죄와 부활을 의미했다. 만일 우리가 홀로 우리 안에서 죽었다면 영생에 이르는 부활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영생에 이르는 부활과 신생과 장래의 영광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신의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로 내려왔기 때문에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인성을 하나님 안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인간이 되셨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품격을 떨어뜨린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품격을 떨어뜨리지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신 것은 겸손히 자신을 낮추신 것이지 자신의 품격을 떨어뜨리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품격저하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 죄악에 빠진 인간들 가운데서 행하셨을 때 품격저하는 없었다. 이 점에 대해 그리스도의 온 교회가 정확히 이해하고, 단 하루만이라도 이에 대해 기도하며 묵상한다면, 기독교의 위상은 현재보다 무한히 높아질 것이다.
성육신이 일어났을 때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취하셨다. 죄만 빼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실 때 그분은 신성을 뺀 하나님의 모든 것 속으로 인성을 끌어들이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신론자(理神論者, deist)가 아니라 유신론자다. 우리 같은 유신론자는 “신이 존재한다. 그 신은 초월적 하나님으로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고, 그분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다"라고 말한다. 논리는 “신이 우리 가운데 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하겠지만, 성육신의 신비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말해 준다.
이사야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과 고통과 죄를 짊어지셨고, 우리의 미래와 운명을 떠맡으셨으며, 이 모든 것들을 그분의 마음에 담고 어깨에 걸머지셨지만 그 어떤 대가도 받지 않으셨다. 그분은 이 땅을 떠나 승천하셨지만 인성을 버리지 않으셨다. 여전히 인성을 갖고 계시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예수님은 그분의 많은 형제들 중에서 제일 먼저 나신 자이시다. 동생이 잃어버렸기에 맏이가 찾아 나선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목자가 그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성은 목자에게 “왜 당신은 어두운 밖에 나가서 양을 찾고 있습니까? 어둠이 깔렸고, 밖에는 짐승들이 있습니다. 당신의 아내와 아이들은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난로 위에는 주전자가 놓여 있고,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습니다. 왜 여기에 있습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이성의 속삭임에 목자가 어떻게 대답할까?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저기 골짜기 위 어딘가에 양이 한 마리 있습니다.”
그렇다! 이 목자의 대답에 담긴 이유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을까? 다른 논리가 필요하겠는가? 목자는 양들을 위해 오셨다. 양들이 있는 곳! 바로 그곳이 목자가 양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만일 양들이 목자에게 갈 수 있었다면 목자가 굳이 오시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양들이 그분께 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분이 그들에게 오신 것이다. 성육신이라는 기적은 단순한 신학적 명제가 아니다. 그 기적은 뜨거운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맏이가 동생들을 위해 오셨다. 목자가 양들을 위해 오셨다.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오셨다. 구주가 잃어버린 자들을 위해 오셨고, 아직도 여기에 계신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분은 날마다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은 신비이며 기적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분의 성육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이것이 그분의 오심에 대한 그분 자신의 설명이다.
*산으로 올라가실 때 예수님은 혼자서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모든 것을, 심지어 사랑하는 제자들까지도 뒤에 남겨두셨다. 그분의 침묵의 사랑을 정말로 경험하려면 우선 우리 자신을 완전히 비워야 한다. 이것은 쉬운 일도, 즐거운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언젠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것저것을 잔뜩 비축해두는 습관들이 생기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지나치게 많이 긁어모으는 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침묵의 사랑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멀어지게 할 수도 있는 모든 것을 버리라고 요구한다.
나는 침묵의 훈련이 내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침묵의 사랑을 경험하려면 나 자신이 먼저 침묵을 배워야 한다. 당신이 말을 하고 있을 때 당신의 말을 가로막고 끼어드는 사람들을 만나봤을 것이다. 그러면 이어서 다시 말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그때 당신이 느끼는 심정과 똑같은 심정을 느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실까 생각된다.
우리는 기도할 때 말하고,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말에 대답하실 시간이나 기회를 드리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쇼핑 목록을 드리면서,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마냥 즐겁게 자신의 길을 간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침묵하면서 하나님이 그분의 뜻대로 모든 것을 행하시도록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교회 사무실에 혼자 있을 때 나는 종종 바닥에 엎드려 주님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분의 만나주심을 기다린다. 때로는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단지 나는 주님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머문다! 내 침묵을 깨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침묵의 사랑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게 할 뿐이다.
내가 볼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 특히 목회자들이 일주일에 7일, 하루 24시간 내내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좌절감과 낙심에 빠진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침묵 가운데 그분의 사랑을 통해 우리의 일을 처리해주실 시간을 그분께 드리지 않는다.
침묵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내가 어떤 기독교 신비가들에게 그토록 끌리는 것 같다. 그들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주님 앞에서 잠잠해져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싶어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질낮은 통합에 속아 넘어가지 말고 거부를 배우십시오. 하나님을 향해 언제나 '네'(yes)라고 말씀드리고, 동일한 입술로 세상에게는 언제나 '아니오'(no)라고 말하십시오"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우리는 사회의 해로운 것들을 거부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회에서 해롭지 않은 것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들과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해롭지 않은 것들의 본질을 꿰뚫어본 다음에 그것들에게 등을 돌리고 우리의 애정의 눈을 저 위, 하늘로 향하게 해야 한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사회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 거리두기가 답이다!
사회의 악하고 해로운 것들은 물론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어둡고 악하고 저질적인 것들에게는 언제나 '아니오'라고 말하라.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서 행하면 회심한 것이다. 거듭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것이다. 옛 것은 지나갔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끌어당기는 사회의 힘은 여전히 우리 사방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이 땅에 살면서 주님을 따르는 동안에는 자주 사회에서 물러나 혼자만의 장소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삶의 목을 조르는 악한 힘을 깨뜨릴 수 있다. 당신을 지배하려는 세상의 힘을 깨부수라. 그러면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수 있게 된다.
때로는 세상의 무리를 뒤로 하고, 사회적 접촉을 끊고, 가족조차 뒤로하고 물러나야 한다. 혼자만의 공간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오직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면 은혜 안에서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바깥의 세상이 비명을 지르고, 덜거덕거리고, 시끄럽게 호각을 불어대도 당신의 마음은 차분할 것이다. 당신의 영혼에 그분의 복이 임하면, 세상으로 다시 내려오라. 그리고 자기의 무덤을 지나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시끄럽고 지친 불쌍한 세상에게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에 대해 말해주어라.
어떤 규칙이나 규정을 배운다고 해서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약을 먹는다고 해서 신령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되려면, 영성을 길러야 한다.
*그러나 선장은 항해의 목적을 안다. 선장의 제1의지는 최종 목적지의 항구 부두에 배를 대는 것이다. 그의 제2의지는 승객들이 원하는 대로 쉬며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이 배 안에서 품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제2의지이다.
때로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왜 그냥 내버려두시는가?"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배를 어디로 끌고 가시는지 알고 계신다. 결국에는 그분의 모든 목적들이 성취될 것이다. 그때까지 사람들이 그분의 의지를 대적하거나 그것을 소홀히 하거나 그에 대해 무지해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그분의 제2의지이다.
시속 몇 십 킬로미터로 움직이고 있는 배를 타고 가고 있는 당신이 배에서 내리고 싶어 한다고 가정해보자. 아마도 당신은 뱃머리에서 시작해 선미를 향해 걸어가면서 마음속으로 '나는 배를 타고 계속 가고 싶지 않은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당신은 아무런 문제 없이 항해를 계속 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무언가 잘못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사실, 당신은 지금 그저 운동을 좀 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고 배가 나아가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봤자. 이 배는 당신을 싣고 유유히 계속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많은 이들이 배가 나아가는 방향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걷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 1초라도 생각하지 말라. 어차피 사람들은 천국 아니면 지옥에 도달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분의 아들을 믿고 그분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은 천국에 이를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큰 목적의 성취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사람들이 자유를 많이 누리도록 허락하시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분의 목적을 이루신다.
*믿음은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화형을 당하거나, 물에 빠뜨리는 죽임을 당하거나, 사자 밥이 되거나, 감옥에서 썩다가 참수형을 당하면서 로마제국을 회심시켰다.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그토록 참혹하게 박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회심을 통해 꾸준히 그리스도에게 돌아왔다.
그러다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시대에 기독교가 공인되자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의 목이 날아가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로마세계에 순응했고, 능력이 날아갔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은 그분의 교훈을 바꾸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갈라졌다. 그분을 말씀 그대로 믿는 자들이 있었고, 그분을 완전히 거부하는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교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변증(辨證)하지 않았다.
베드로는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예수님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요 6:56)라고 말씀하셨지만, 진심으로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기적 때문에 그분을 따랐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눈에는 그분이 하나님과 천국과 그 밖의 다른 영적인 것들에 대해 말씀해주시는 자비롭고 멋진 분으로 보였다. 그들의 마음은 따스해졌고, 그들의 눈에는 틀림없이 이슬이 맺혔을 것이며, 마음속으로는 '아, 이것은 선한 것이다. 이분의 말씀을 더 듣고 싶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랬던 그들이 더 이상 그리스도를 따라다니고 싶어 하지 않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왜 그랬을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 6:26.27).
사람들은 주께 왔지만 그분을 경제적 성공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와 똑같은 사고방식이 현대 기독교에 이단을 탄생시켰다. 우리는 자본주의와 기독교를 결합시켰고, "이런 경제적 성공을 볼 때,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이 주장하신 바로 그런 분이시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기 전에는 무일푼이었던 제가 10년이 지난 지금에는 경제적 성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굳이 야박하게 말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 사업가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형제자매들을 위해 설교하고,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좋은 친구로 여긴다. 그러나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되면 수입이 늘어날 것입니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너무 저급하다. 성경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가르친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을 믿었던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리스도인들은 경제적으로 성공하지 않았다. 그들의 손에 뭉칫돈이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많은 육신적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경제적 성공의 상징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깨뜨리신다.
“나는 너희 무리가 어떤 자들인지 잘 안다. 너희가 나를 따르는 것은 내가 내 식당에서 너희를 평생 공짜로 먹여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영적인 이유들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배불리 먹겠다는 것! 그것이 너희가 나를 찾는 이유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다. 그들은 '도덕적 진리'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기적의 진리'라는 것도 있다. 우리 주 예수님은 과거에나 지금이나 기적을 행하시지만, 무엇을 증명하기 위해 행하시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이 병에서 고침을 받아 죽지 않고 사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면, 그분은 그 사람을 고쳐주실 것이다. 그분은 어린 아기를 죽음의 요람에서 살려주실 수 있지만, 어떤 나이든 집사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지는 않는다. 광야에서 40주야를 보낸 후에 마귀를 위해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은 그분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서 그분은 기적 행하기를 세 번이나 단호히 거부하셨다.
세례 요한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지만, 광야에서 들리는 양심적 도덕의 목소리였다. 나는 지금 기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기적의 시대가 이미 지나가버리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고, 기적의 필요성이 존재하며, 그 필요가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이라면 오늘날에도 주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기적을 행하실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그런 존재로 변해 있다면,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주님의 기적을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다. 그분의 신자들에게 주어질 유일한 표적이 바로 그분 자신이시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분이 오셨고, 피를 흘리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도덕적 증거다. 성령이 소리 없이 번쩍 하는 번개처럼 하늘로부터 임하셔서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 누구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전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분 자신이 그분에 대한 증거이시다.
이 세상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거룩한 표적은 악한 세상에서 올곧게 살아가는 남자이며, 더러운 세상에서 깨끗하게 살아가는 여자이며, 더러운 학교에서 마음과 생각과 몸을 깨끗이 지키는 학생들이다. 우리가 보여줄 기적이 있다. 당신이 보여줄 표적이 있다. 나를 통해 나타날 기사가 있다.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 거룩함 자체가 증거이며, 의로움 자체가 표적이다. 이제까지 그 누구도 의(義)에 대한 변명이나 설명을 성공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원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복음은 서로 던지고 받는 놀이 같은 복음이다. 마음대로 숨길 수 있고, 손으로 가지고 놀 수 있는 것들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복음을 그들의 손에서 빼앗아 "내가 주권적 하나님이다. 내가 주관하고 내 아버지께서 주관하신다"라고 말씀하시며, 그것을 도덕적으로 준비된 사람들에게 주셨다.
예수님은 '도덕적 준비'라는 것이 있음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셨다. 그렇게 하신 것은 선한 자들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악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악한 자들이라 함은 자기가 악하다는 것을 깨닫는 자들이다. 자신의 악을 깨닫는 것이 도덕적 준비다. 주님은 의로운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얼마나 악한 자인지 알며, 하나님의 음성에 마음의 문을 여는 자는 여전히 죄인이기는 하지만 구원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경박하고, 진정성 없고, 피상적이고, 얄팍한 자들은 종교를 주크박스(jukebox: 돈을 넣으면 선곡한 음악이 나오는 기계)로 여긴다. 그들은 "10센트짜리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눌러서 '주크박스 종교'를 구매하라"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죽어가는 사람들의 손에서 종교를 빼앗으며, "전능의 하나님이 사람들 중에 계시다. 성령을 통해 그분은 준비된 자들에게 손을 뻗어 그들을 찾으신다"라는 의미의 말씀을 하셨다. 준비된 자들이란 말씀을 듣고 경청하며 자신이 얼마나 악한지를 깨달은 자들을 가리킨다. 이것이 회개에 이르는 도덕적 준비이다. 그러나 그분을 따르던 자들 중 많은 자들이 이런 메시지를 듣고 집으로 가버렸다.
복음을 들었지만 예전 삶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요한복음 6장 53-58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는 손으로 잡아서 상표를 붙이고 자기의 치수에 맞게 잘라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종교를 원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가 그런 식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너희는 나를 통해 구원을 얻든지 아니면 못 얻는 것이다"라는 취지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진리는 변치 않고 유효하다. 우리는 그 말씀 그대로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예수님의 시대 사람들은 "우리는 저런 교훈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말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종교를 입는 것'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진다면, 그분을 올바로 섬기는 것이 아니다. 먹을 것이 없는 처지가 되어도 그분을 섬길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진정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주님은 "육은 무익하니라" (요 6:63)라고 말씀하셨다. 셔츠와 코트를 맞추어 입지 않고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분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섬기는 것이다.
우리 모두를 향한 그분의 사랑의 놀라운 점은 그분이 언제나 변함없이 동일하시다는 것이다. 나를 그리스도에게 이끌어온 것이 또한 나를 그리스도 안에 계속 머물게 한다.
*이 책의 바로 앞 장(章)에서 보았듯이, 성경에는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요 6:66)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읽기에 두려운 말씀이다. 주께 등을 돌리고 떠난 사람들 중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내가 지금 어디로 돌아가는 거지?"라고 생각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그분과 어울렸다. 그들은 틀림없이 그분의 충실한 사랑의 따스함이 마치 봄날의 햇볕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분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에는, 그 어떤 것이 그분의 눈에서 나와 자기들의 눈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차분하고 듣기 좋은 그분의 설교는 그들의 귀에 즐거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친구들은 그분과 함께 걸었고 그분 곁에 서 있기도 했다. 그분의 이름을 친근하게 불렀거나, 아니면 '가르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생님'이라는 존칭으로 그분을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을 때 많은 이들은 그분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분을 떠나 어디로 돌아가는 것이었을까?
내가 보기에 그들이 돌아갈 곳은 다음과 같은 두세 가지일 것이다. 첫째, 그들은 그들의 죄로 돌아가고 있었다.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라는 베드로후서 2장 22절의 말씀처럼, 그들은 그들의 죄로 돌아가고 있었다.
둘째, 그들은 그들의 외로움과 굶주림으로 돌아갔다. 한 번이라도, 짧게라도 그분과 동행해본 사람이 그분에게서 멀어지면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분이 없다면 우리도 생명의 떡을 먹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은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요 6:35)라는 그분의 말씀에서도 증명된다.
셋째, 그들은 그들의 두려움으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우리의 두려움을 제거해주시는 예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그분이 없다면 그들의 두려움과 후회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그분을 떠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그분을 떠난 삶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분 없는 삶에는 바람직한 것이 단 하나도 없다고 나는 단언한다!
*내가 볼 때, 베드로도 그분을 떠나고 싶은 유혹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분의 말씀, 그분의 삶 그리고 사람들에게 제시된 그분의 요구에 대해 여러 날 동안 계속 이어진 논란이 결국 최고조에 달했을 때 무리 중 많은 이들이 그분을 떠났을 것이다. 물론 베드로는 사람들이 그분에 대해 수군거리는 말을 들었다. 어쩌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는 '내가 내 아버지의 고기잡이배를 버려두고 이 사람을 따른 것이 잘한 일인가? 갈릴리와 유대의 산들과 평지를 두루 다니는 이 신기하고 이상한 사람을 따라다닌 것이 옳은 일인가?'라는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자기의 마음을 깊이 살폈을 것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는 예수님 말고 그 어딘가로, 다른 누구에게로 갈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가 "우리가 '무엇'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요 6:68)라고 말했다는 점에 주목하라. 즉, 비인격적 존재인 '무엇'을 가리켜 말하지 않고 인격적 존재인 '누구'를 가리켜 말한 것에 주목하라.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다닌 후에 그의 마음에 형성된 것은 '누구'였다. '무엇'이나 '종교'나 '신경'(經)이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우리가 '무엇'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찾아 그분을 떠났지만,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인격적 존재가 들어와 계셨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 말고 그 어디로, 그 누구에게로 갈 것인가? 그분 당시에 누군가 “나는 좀 더 화려하고 멋진 종교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실제로 그렇게 말했는지 아닌지 나도 모르겠지만, 예수님의 소박한 메시지는 틀림없이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수염을 길게 기르고 긴 옷을 입은 사람이 길모퉁이에 서서 길게 기도하면, 무엇인가 대단한 종교적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며 신전의 계단을 오르고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오로지 육신에게 큰 감동을 줄 뿐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것이니라.”
아마도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런 말씀들 때문에 실망하거나 혼란스러웠을 것이고, 그래서 화려한 모습을 연출하는 외형적 종교로 돌아가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종교에 내 시간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만일 당신이 최신 유행의 장식으로 꾸며진 교회를 원한다면, 멀리 가지 않아도 당신을 완전히 만족시켜줄 교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멋지고 웅장한 교회를 원한다면 세상에는 그런 교회들이 넘친다. 그런 교회들은 필요 이상의 화려한 장식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 만들어진 교회들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무덤에서 잠자는 남자들과 여자들을 하나도 깨우지 못한다. 화려한 종교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슬픈 죄를 씻어주지 못한다. 뼈아픈 후회를 조금도 덜어주지 못하고, 마음 속의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주지 못한다. 영혼을 깨끗케 하거나 영을 씻어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종교라는 것이 화려한 모습을 연출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복음을 믿는 교회들의 소박함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예수님의 소박함에서 나온다.
살인죄를 뺀 나머지 어떤 죄를 범해도 교회에서 당당하게 행세하는 교인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교회들이 있다. 영적 당혹감을 전혀 느끼지 않고 얼마든지 다닐 수 있는 교회들이 있다. 그런 교회들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달착지근하게 가르치고, 마치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가 기분 좋을 때 내는 소리 같은 낮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설교가 선포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매끄럽고 사랑스럽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교회들이 분명히 있다.
당신이 천국에 가기를 원치 않거나, 어린양을 따르고 싶지 않거나, 십자가 지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런 교회들에 다녀도 전혀 문제될 것 없다. 그러나 명심하라!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원수들에게 비난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당신은 구식 사람이군요. 어찌 당신 같은 사람이 있는지 참 신기합니다"라는 조롱의 말을 반드시 듣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정말 이상한 것은 바로 당신이다. 현재 당신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십자가도 모르고, 원수도 없고, 좁은 길도 모르고, 발에 가시도 없고, 마음으로 십자가도 못 느끼고, 고난도 없고, 위험에 처하지도 않고, 어떤 것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교회도 교인인 당신에게 "회심했습니까?"라고 묻지 않는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요구가 너무 가혹하다고 느끼고 가시가 너무 날카롭다고 느낀다.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교회와 편하게 믿을 수 있는 종교를 선택해서 편한 길을 가기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당신이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결국 무엇에게로 돌아가게 될 것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은 죄, 번뇌, 마음의 짐, 어둠, 무덤 그리고 심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유대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나를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고, 나는 삼일 동안 땅 속에 있을 것이다" (참고, 마 20:18,19)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담대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을 행하셨다. 겁쟁이라는 비난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고, 실제로 겁쟁이도 아니셨다. 그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으셨다.
주님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자. 주님의 사람들 중에는 다른 사람들의 양심의 기준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어떤 일을 행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남들로부터 "저 사람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아니냐?"라는 비난을 들을까봐 걱정한다. 그러나 그는 자유롭게 “하나님, 저를 인도하소서"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야 하고, 또 그를 비난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당신이 내게 원하는 것과 다릅니다”라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빌라도 앞에 섰을 때도 두려움이 없으셨다. 빌라도 앞에 서기 전, 그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눅 22:44) 될 정도로 기도하셨다. 그분은 중심을 잡아 흔들림이 없으셨고, 자신감에 차 있으셨고, 여론이나 다른 사람들의 양심의 기준에 영향을 받지 않으셨고, 차분히 죽음의 길을 가셨다.
심지어 그분은 사람들의 선의(善意)에서 나온, 그러나 잘못 방향을 잡은 동정심 때문에 방향을 바꾸지도 않으셨다. 자기가 할 일을 하셨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끝내셨다. 지금 우리가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교훈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서로의 잘못된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선을 행한다고 해서 그들이 행하는 일이 모두 선은 아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우리가 항상 그를 신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아주 지혜롭게 분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선한 분'으로만 규정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그분께 순종하든지 아니면 그분을 거부하든지 해야 한다.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그분을 '관용의 대상'으로 여길 뿐이다. 지금의 문명 세계는 그분에게 관용을 베푼다. 신문과 잡지에 그분에 대한 언급이 실린다. 라디오에 그분의 이름이 등장하고, 그분에 대한 노래가 들리고, 그분에 대한 강연도 허용된다. 이제 그분은 '용납된 구주'가 되셨다.
그러나 그분이 그런 알량한 관용의 대상으로 머물고 마는 것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선지자는 아니지만, 세상을 향해 “조금만 상식적으로 판단해보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라고 외치고 싶다.
지금 우리는 담대하지 못하다. 사람들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기껏해야 "하나님께 돌아가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라는 것 정도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는 선한 분이십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편안하게 느끼지만, 그분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지는 않는다. 그들은 "나는 그분을 단지 선한 사람으로만 믿지 않고, 내 하나님과 구주와 주님으로 믿습니다"라고 딱 잘라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종교의 단계에 머물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아래에서 한 나라, 즉 분할할 수 없는 한 나라입니다”라고 말할 때는 당연히 '하나님 아래에서'라는 말을 강조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아래에서'라는 말에 담긴 뜻만으로는 부족하다.
달러 지폐에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라는 글귀를 적어 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나님을 향해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능력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와 우리의 삶을 바꿔놓으려면, 먼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주님이시다. 나는 이것을 지금 감히 주장하는 바이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마 12:30)라고 말씀하셨다. 중립지대는 없다! 그분 편에 서려면 그분을 믿고, 그분에게 순종하고, 그분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 '숨어 지내는 기독교'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의 시대에 그분을 따라다녔던 사람들 중에는 배울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소망까지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자기의 죄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의 죄를 보지 못하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저주스런 결과뿐이었다. 그들은 “잠깐! 내게 자유가 없다고 이 사람이 말하니 나 자신을 살펴봐야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내가 자유롭다는 걸 잘 압니다. 내게 자유가 없다는 이사람의 말에 모욕감을 느낍니다"라고 말하며 분노 가운데 그분을 떠났다. 그렇게 된 것은 그분이 그들에게 도전하셨기 때문이며, “너희가 내 제자가 되면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겸손한 추종자들은 그들처럼 되지 않는다. 예수님을 떠난 자들처럼 되는 사람들은 바로 종교인들이다! 종교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하다. 자신에 대한 잘못된 신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내게는 비판 받을 부분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해줄 말이 거의 없다.
우리의 영적 생활에 의문을 제기하는 말을 들을 때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면 이미 죽은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 온유하고 겸손해야 한다. 누군가로부터 "듣자니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던데, 당신 정말 그리스도인이 맞소?"라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모욕감을 느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내 신앙의 기본적인 것들을 재점검해야 하고, 내 안에 있는 것들이 정말로 진실한 것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나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 정말 정당하다고 믿는다. 나는 야망의 자녀, 욕망의 자녀, 악한 생각의 자녀, 악한 말들의 자녀인가? 아니면 믿음과 사랑과 자비와 겸손과 회개의 자녀인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지식은 바리새인들의 차갑고 교만한 지식과는 다르다. 그것은 성도의 겸손한 지식이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얻지 않고 믿음으로 얻습니다"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나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시냇물이 샘에서 흘러나오듯, 믿음에서 행위가 흘러나온다. 만일 시냇물이 더럽다면 샘이 더러운 것이다. 우리의 행위를 살피면, 우리의 삶이 깨끗한샘에서 흘러나오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당신 자신을 살펴보라. 어제를 살피고, 또 그제를 살펴보라. 그렇게 살펴본 결과, 하나님 자녀의 거룩한 성품에 합당하게 행동했다고 판단되는가? 그렇다고 판단된다면, 선한 일이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라.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마땅히 심각한 고민에 빠져야 한다.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보라.
"잠깐! 내가 잘못된 전제들 아래에서 살아왔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다. 내가 건전한 것들에 근거하여 살아왔다고 착각했었구나!" 진리를 안다고 다 된 것은 아니다. 진리를 경험해야 삶이 바뀐다. 바로 이 점에서 당신과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놀라운 부분이 드러난다! 그분은 진리, 즉 그분 자신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도록 하신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살아라. 우리의 가슴으로 늘 우리의 죄를 깨달으며 산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다윗은 목양업자 같지 않다. 그가 많은 양을 기르지는 않았지만, 한마리 한 마리의 양을 모두 인격적으로 알았다. 그러다 보니 양들은 그의 애정과 보호를 믿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오늘날 목양업자의 양들은 주인을 믿지 않는다. 심지어 그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가 양들에게 접근하여 소리치면 양들은 도망가기 바쁘다. 하지만 고대의 목자는 양이 태어날 때부터 양을 알았다. 양이 길을 잃으면 목자는 결국은 그 양을 찾아내서 어깨에 메고 돌아왔다.
이런 관계는 따뜻하고 인격적인 관계였다. 바로 이런 관계가 기독교에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아름다운 면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맺게 해주는 것이 믿음이다. 엘리자 히윗(Eliza Hewitt, 1851-1920. 미국의 찬송가 작가)의 옛 찬송가는 "내 믿음이 찾은 안식처는 인간의 말이나 신경이 아니라네!"라고 노래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믿으면서도 누가 그것을 말했는지,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것이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모른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차갑고 무정하고 기계적인 신앙뿐이다. 어떤 사람이 불신앙을 버리고 이런 신앙을 가졌다 해도 그것은 쇠사슬을 금사슬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금사슬도 사슬은 사슬이다. 쇠사슬처럼 그를 단단히 묶어둘 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모든 사슬을 다 내려놓았기 때문에 그 무엇에도 묶이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믿는 인격적인 신앙이 그에게 있다. 기독교의 놀라운 두 가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적 존재가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신자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다. 이 두 진리 때문에 현재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능해진다. 목자는 그의 양들의 이름을 부르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다(요 10:3.4).
*일단 잠자리에 누우면 다시 일어나기 싫은 것이 우리의 본능이다. 양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양들은 우리 안에 머물며 쉬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목자가 우리에서 양들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양들이 안락한 장소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자가 와서 양들을 깨우면 양들은 그제야 일어나 우리 밖으로 나온다. 성경은 목자가 그의 양들을 인도하여 낸다고 말한다(요 10:3).
하나님은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셨을까?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부활 후에 열한 제자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라고 명령하셨다. 그 후 그분의 추종자들이 모두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대부분은 거기서 둥지를 틀었다. 그러다가 주님이 박해를 일으키시자 그제야 여러 곳으로 흩어져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주님이 그들을 아늑한 침대에서 끌어내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보내신 방법은 박해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주님이 양들을 이끌어내시는 것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첫째, 우리 안에는 양을 위한 먹거리가 없다. 목자는 양들을 일으켜서 푸른 초장으로 끌고 나가야 한다. 그래야 양들이 꼴을 실컷 먹고 잔잔한 물가에서 쉴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양들은 어느 정도 운동을 해야 한다. 푸른 초장의 잔잔한 물가에 누워 있기만 하면 너무 살이 쪄서 쓸모없게 될 수 있다. 주님은 양들이 운동할 수 있도록 그들을 밖으로 인도하여 내셔야 한다.
셋째, 양들에게는 성장과 경험이 필요하다. 우리 안에만 머무는 양들은 경험을 쌓을 수 없다. 같은 이치로, 그리스도인들은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일하고, 돌아다니고, 경험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 한다. 예수님은 “나는 내 양들을 인도하여 낸다"라는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마당에 심어놓은 나무처럼 한 곳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나는 기독교가 고립되어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혼자 고립되어 있는 것이 성화(聖化)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지 않는다. 우리와 똑같은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들과는 팔꿈치조차 부딪히지 않는 철저한 도덕적, 사회적 고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방법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게 할지는 그 상황에 처해봐야 안다. 당신이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밖에 나갔을 때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경험을 해보도록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여 내시는 것이 당연하다.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 받기 위해 광야로 이끌려 나가셨다. 동일한 주님이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요일 4:17) 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이 아늑한 장소에서 우리를 이끌어내어 세상으로 들어가게 하심은 세상의 쾌락에 빠지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세상에게 '저항과 양심'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원수들과 만나야 한다. 원수들은 저 밖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가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물론 나는 내일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누구도 모른다. 장차 일어날 일들을 세세히 아는 것보다 차라리 무지 가운데 있으면서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더 낫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점쟁이나 예지자 같은 사람들을 찾아가 보라고 권하지 않는다. 나는 미래를 알고 싶지 않다. 그때 그때마다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살다 보면 위기를 만날 수 있다. 그 위기가 불과 며칠 후, 몇 주 후, 또는 몇 달 후에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런데 만일 그 위기를 미리 알게 된다면 그때까지 염려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반면, 앞으로 닥칠 위기를 모른다 해도 우리에게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위기를 무사히 헤쳐나가게 될 것이다. 나는 내일을 알기를 원치 않으며, 당신이 당신의 미래를 알기도 원치 않는다. 오직 한 가지만 기억하라.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당신보다 앞서 가신다는 것을!
그리스도는 편안한 텐트 안에 앉아서 병사들에게 적의 포화 속으로 돌진하라고 명령하는 장군 같은 분이 아니시다. 그분이 우리를 어디로 보내시든지 간에 그분은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 가 계시며, 그곳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분은 "볼지어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라고 약속하셨다. 기억하라! 그분은 그분이 가지 않으실 곳으로 우리를 보내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이 겪지 않으신 일을 우리에게 겪어보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목자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우리 모두가 목자 주변에 모여 있는 양들이며, 그분이 실제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분이 그분의 사람들 간의 교제 속에 실제로 임재하시며, 또 그들의 마음속에 실제로 임재하신다고 믿는다.
목회자를 중심으로 뭉치는 교회는 종교 집단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의 인격적 임재 안에서 모이는 교회는 진짜 교회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동시에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실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내가 결코 이해하지 못할 신비이다. 목자는 양들에게 누군가를 보내 "내가 갈 테니 흩어지지 말고 함께 있어라"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만일 그랬다면 양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하다가 광야로 들어갔을 것이고, 아마도 사자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다. 그분은 "내가 얼마 후에 너희에게 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지금 너희와 함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실제로 목자의 일을 해보았던 다윗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시 23:46)라고 증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