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느 왕이 세자빈을 얻겠다는 방을 나라 곳곳에 붙였습니다. 세자빈이 되기 위해 모인
수많은 규수들을 일일이 심사했지요. 그리고 그중에서 마지막 후보로 열 명의 규수를
뽑았습니다. 이 열 명의 규수에게 왕은 아주 소량의 쌀을 주고는 이런 숙제를 내줍니다.
“너희는 이것을 가지고 한 달 동안 먹고 지내다 오너라.”
왕이 나눠준 쌀의 양은 성인이 아무리 아껴먹어도 부족한 양이었습니다. 규수들은 고통과
시련을 얼마나 잘 견딜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눠준 쌀을 아껴
먹으면서 한 달을 보냈습니다. 그러다보니 한 달 뒤에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모두가 먹지를 못해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 명의 규수는 오히려
얼굴이 좋아졌고 머리에 떡 한 시루를 이고 궁전에 들어선 것입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다들 먹지 못해 힘들어하는데 너는 어떻게 힘이 넘치고 또 떡까지 해왔느냐?”
그러자 왕에게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쌀로 떡을 만들어서 장터에 가서 장사했습니다. 거기에서 남은 이윤으로 쌀을
사고 또 떡을 만들어 팔다보니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쌀로 임금님을
위해 떡을 만들어 가지고 왔습니다.”
누가 세자빈이 되었을까요? 고통스럽게 아주 적은 쌀로 버텨온 규수들이 아니라,
지혜롭게 숙제를 푼 규수가 세자빈이 된 것은 당연하겠지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어쩌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많은 숙제들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그냥 어렵고 힘들다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억지로 이겨내는
모습을 원하실까요? 아니면 모든 지혜를 동원해서 지금 이 순간을 기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원하실까요? 당연히 후자의 모습이 아닐까요?
하지만 많은 이들이 전자의 모습을 취하면서 많은 불평불만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 스스로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가 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가 지금을 기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고 있으며, 너무나 고통스럽다면서 울부짖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과 안에 들어 있는 씨는 셀 수 있지만, 씨 안에 들어 있는 사과는 셀 수 없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잘 판단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