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자 중앙선데이에 실렸는데 처음 제가 넘긴 원고 그대로 실어 보냅니다. 좀 깁니다. 숨 한번 돌리시고...
나훈아와 루머의 법칙
나훈아가 입을 열었다. 25일 서울 홍제동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열린 나훈아 기자회견장에는 600여명의 취재진이 몰려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대변했다. 혹자는 '황우석 줄기세포 의혹 기자회견보다 더 많이들 왔다'고까지 했을 정도다.
사실 기자회견이 열린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답은 다 나와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훈아를 둘러싼 소문들 중 그가 긍정할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도 없었다. 그는 이날 ▲콘서트 연기와 건강 이상설 ▲미녀 여배우들과의 열애설 ▲일본 폭력조직의 신체 상해설 ▲후배 연예인 아내와의 불륜설 등을 원색적인 몸짓과 표현을 동원해 해명했다.
천부적인 엔터테이너인 그는 스스로 말하듯 '40년간의 관록'을 자랑하듯 55분 동안 보는 이가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능수능란한 언변과 파괴력있는 몸짓을 과시했다. 이야기가 신체 상해설에 이르자 '시잉 이즈 빌리빙(Seeing is Believing)'이라는 영어 속담을 인용하며 단상 위에 올라 허리띠를 푼 채 "여러분 중 대표가 나오면 내가 5분 동안 보여주겠다. 보고 믿겠는가, 그냥 믿겠는가?"라고 물었고, 불륜설에 대해서는 "내가 단 한번이라도 남의 아내를 탐했다면 나는 여러분이 기르는 개XX다"라고 유난히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유머와 미소로 분위기를 풀어내는 기량도 탁월했다.
아무런 질의 응답도 없었지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많은 여성 시청자들은 61세라는 나이에도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탄탄한 몸과 구릿빛 피부, 폐부를 뚫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과 거침없는 말투에서 풍기는 남성미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남성 시청자들도 '역시 그릇이 다르다'는 식으로 그의 카리스마에 경도된 모습을 보였다. 우직하고 직선적인 말투는 결코 그가 잔재주를 부리지 않을 사람이라는 인식을,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거나 상관없지만 나로 인해 피해를 입은 김혜수와 김선아의 명예는 반드시 회복시켜 달라"는 코멘트는 그가 관대한 사람임을 드러내기도 했다.
나훈아는 이번 루머로 인해 어떤 피해를 입었을까. 굳이 따지자면 얻은 것이 훨씬 더 많다. 이미 기자회견 이전부터 나훈아는 더 이상 흘러간 명가수가 아니라 21세기 한국이 애타게 찾아 헤매는 대형 스타임이 분명해졌고, 61세의 나이에도 한창 때의 미녀 스타들과 염문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아마도 한국에서 유일한 남자 연예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는 25일 회견을 통해 '언론이 나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고 했지만 전술했듯 소문 자체가 그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대중들에게 일깨워주는 효과를 냈기 때문에 사실상 손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게다가 나훈아는 마음만 먹었다면 이런 루머를 조기에 진화할 수도 있었다. 모든 루머는 지난해 2월 나훈아의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던 세종문화회관 대관이 갑자기 취소됐고, 이 사실이 한 스포츠지에 보도되면서 시작됐다.
당시 수많은 언론사들이 예약 취소의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나훈아와 소속사, 주변 인물들에게 접촉을 시도했지만 정작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나훈아 본인과 소속사 아라기획의 윤모 대표는 외부와의 연락을 단절해버렸다. 나훈아는 25일 회견에서 처음으로 의혹 보도가 나갔을 때 "대관 자체가 나는 모르는 일이었고, 당시 나는 소속사 직원들과 여행중이었다. 이 소식을 TV를 통해 접했지만 '내버려 두라'고 했다"고 말했다.
나훈아가 '내버려 둔' 결과 지난해 12월까지 10개월 동안 유언비어는 수없이 싹트고, 서로 교배해가며, 덩치를 불려나갔다. 처음엔 그냥 건강 이상설 정도에 그쳤던 루머는 나중엔 일본 폭력조직 보스의 애인인 국내 유명 여배우와의 부적절한 관계 때문에 신체 중요 부위를 훼손당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로까지 발전했다.
'왜 갑작스레 공연이 취소됐을까'에 대해 한마디만 해명했으면 막을 수 있었던 일이었다. 나훈아는 25일 "기자들이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아무 얘기나 써서 상황이 이렇게 됐다"고 질타했지만, 정작 기자들이 그의 '확인'에 애태우고 있을 때 '내버려 두라'며 연락을 거부한 사람은 그 자신이었다.
아무튼 이번 나훈아 현상에서 보듯, 거의 모든 소문은 '궁금하지만 당장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을 대상으로 발생한다. 여기서 연예계 루머 발생의 가장 중요한 두 조건이 등장한다. 첫번째는 유명하고 인기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두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생활에 대해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 앞에서 활동하는 연예인들은 인터넷의 활성화 이후 가끔씩 '온 세상이 파파라치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엘 가도 유리 집 안에서 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한숨을 토해내곤 하지만 여전히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연예인들의 생활은 궁금하기 짝이 없는 신비의 세계다. 부지런히 활동하며 쉴새없이 TV와 스크린에 얼굴을 드러내는 스타들은 또 모르지만, 활동을 쉬는 동안에는 철저하게 대중과의 연결고리를 끊는 소위 '신비주의' 컨셉트의 연예인들은 훨씬 더 소문에 취약한 편이다. 나훈아도 지난 20년간 언론과의 인터뷰 횟수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철저한 신비주의 전략을 구사해왔다.
가장 흔한 것은 '사망설'이다. 나훈아도 그랬고, 음반을 내지 않을 때에는 완전히 사라진 사람이 되는 서태지가 그랬다. 지난해 연말에는 오지에서 영화를 찍고 있던 중국의 슈퍼스타 훙징바오(홍금보)의 사망설이 언론에까지 보도됐다.
세번째 조건은 좁쌀알만한 언턱거리라도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건더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훈아와 특정한 관계라고 소문이 난 연예인이 '하필이면' 김혜수와 김선아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근 10년 동안 나훈아와 한 자리에 있었고 대중이 기억할 만한 여자 연예인은 김혜수와 김선아뿐이었기 때문이다.
김혜수는 지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진행했던 SBS TV 토크쇼 '김혜수 플러스 유'에 나훈아를 게스트로 초대한 일이 있었다. 나훈아가 이런 토크쇼에 출연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으므로 당시에도 '역시 김혜수가 대단하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김선아는 MBC TV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최고의 여배우가 됐던 2005년 나훈아의 '아리수' 콘서트 무대에 게스트로 초대돼 무대에서 '난 여자이니까'를 함께 부른 적이 있다.
재벌과 연예인 사이의 소문도 마찬가지다.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인 스타가 큰 회사의 광고에 메인 모델로 출연하면 그 기업의 고위층과 특정한 관계에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고, 심지어 시청자들은 젊은 연예인들이 함께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본 뒤 "A와 B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물론 방송이니까 어느 정도 짜고 나왔겠지만 둘 사이는 예사롭지 않았다"며 '커플 만들기'에 들어가기도 한다.
지난해 한 일간지의 이혼 오보 사건을 진화하느라 곤욕을 치른 노현정 전 KBS 아나운서도 지난해 8월과 올해 1월, 두 차례나 국내에서 병원 치료를 받은 것이 소문에 불을 지른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해당 병원은 두 번 모두 언론의 사실 확인 요청에 '입원 기록도 없다'고 딴소리를 해 의혹을 부추겼다.
네번째로 사회의 투명성 역시 중요한 요소다. 소문이란 또 한편으론 언로가 극히 제한돼 있던 권위주의 시대의 유물이다. 역대 대통령 중 여러 사람이 당대의 유명한 여자 연예인들과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소문에 휩싸였다. 아프리카 어느 나라 국가원수를 '접대'하고 피부가 검은 아이를 낳았다는 루머로 인해 30년을 고생했다는 탤런트 정소녀의 경우도 그렇다. 그 시절만 해도 충분히 그런 일이 가능했을 거라는 사람들의 생각이 이 루머에 그토록 오랜 생명력을 갖게 했다.
마지막으로, 사실로 드러난 선례의 존재는 루머에 신빙성을 부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새로 부임한 젊은 여교수에 대해 '분명히 고위층의 비호가 있었을 것'이라고 뒤에서 수근대는 것은 신정아-변양균 사건이 실제로 존재한 데서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재벌 그룹 고위층과 젊은 여배우 사이의 소문이 끊이지 않는 것은 신격호 롯데그룹 창립자와 70년대의 미스 롯데 서미경(서승희)씨 처럼 단지 소문으로만 존재했던 관계가 세월이 흘러 사실로 드러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최근 롯데그룹의 후계자 중 하나로 부상해 언론에 그 존재가 알려졌다. 재벌2세와의 비밀 결혼설로 곤욕을 치른 김태희는 루머의 진원지로 추정되는 네티즌들에 대한 법적 조치까지 단행해가며 결백을 밝혔지만 비슷한 소문은 언제든지 되살아날 수 있다.
그럼 소문은 어떻게 사라질까. 정소녀는 "방송에 나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었고, 아니라고 한다고 믿어주는 세상도 아니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다행히 요즘은 세상이 많이 투명해진 덕분인지 '아니라고 하면 믿어 주는' 추세가 역력하다.
김혜수와 김선아가 잇달아 '나훈아 괴담과의 무관'을 밝힌 뒤 여론은 호의 일색이었고, 나훈아의 해명에 대한 지지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인터넷 등을 통해 소문의 확산 속도가 훨씬 빨라진 반면, 사람들의 관심이 식어가는 속도도 훨씬 빨라졌기 때문에 루머의 생명이 예전에 비해 훨씬 짧아졌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대중의 호기심과 그 통로로서의 인터넷 환경이 건재한 한,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의 정보의 흐름이 좀 더 투명해지고 특권층이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대중이 납득하지 않는 한 음습한 루머의 세계는 언제든지 새로운 희생자를 찾을 준비를 갖추고 있다. (끝)
첫댓글 그렇트라 하면서 진실을 호도하는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