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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내가 살고 있는 당호를 나는 내 마음대로 隱窟堂을 한적도 있다만
다산 초당을 갔었다
한때 주소지를 여기에 두고 거주하신분의 흔적을 음미하고자 산을 올랐더라
茶를 얼마나 좋아해서 호가 茶山일까.
다산초당....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뒷산 중턱에 있는 다산초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상가인 정약용(丁若鏞)이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와 사의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던 이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0여 년간 생활하면서, 목민심서등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함으로써 실학사상의 산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땅의 첫손 꼽히는 개혁사상가이다.
설경구 출연작 자산어보에 등장하는 정약전 선생과는 형제간이다.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 독살설로 왕이된 영조의 세손 정조는 노론과 소론의 권력다툼에서 잃어버린
아버지(사도세자)를 찾아 매년 몇 차례에 걸쳐
수원의 능행길에 올랐는데 이때 한강에는 배다리가 놓였다.
정약용은 이 배다리 설치를 맡게 되었고 이 일을 해냈다.
이어 정조 이산이 수원성을 쌓을 적에 설계도와 기구를 만드는 일 또한 그가 맡았다.
그는 일꾼들이 무거운 돌을 힘겹게 지고 올리는 것을 보고 기구의 발명에 골몰했다.
또한 기하학적 방법으로 성의 거리, 높이 따위를 측량해 가장 튼튼하고
단단한 성을 쌓기 위해 연구했다.
마침내 그는 거중기와 활차(滑車, 도르래), 고륜(鼓輪, 바퀴달린 달구지) 따위를 발명해 성 만들기에의 써먹었다.
거중기를 써서 돈 4만 냥을 절약했구나.”
정조 이산의 말이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나무뿌리들이 자연적으로 계단으로 만들어 놓았더라
땅바닥을 보고 걷지 않으면 걸려 넘이진다.
사진은 날아가고 설명문만 덩그라니다.
정약용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흔히 그의 대표 저술을 1표 2서(一表二書)라고 말한다.
《경세유표》와 《흠흠신서》, 《목민심서》를 일컫는 말이다.
《경세유표》가 국가의 기본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내용인 반면,
《흠흠신서》는 인명을 중시해 원옥(寃獄)이 없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인권관계의 저술이요,
《목민심서》는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수령을 통해 민생의 고통을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정석은 다산이 석벽에 친히 글씨를 새긴 것이라고 한다
역사의 인물중. 천재로 칭송되는 정약용 선생.
정약용(丁若鏞)이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던 이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0여 년간 생활하면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함으로써 실학사상의 산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다산초당(茶山草堂)은 원래 작은 초가집이었고 세월이 지나면서 허물어진 것을
1958년 해남윤씨 후손들이 다산유적보존회를 조직하여
기왓집으로 새롭게 지었다고 한다.
해남윤씨는 내 기억이 맞다면 정약용선생의 처갓집 성씨가 아닌가.?
눈치가 빠르고 오지랖이 넓은 사람은 여기 이 초당에서 차한잔 얻어 마실수 있다
내가 간 그날.
일본 관광객들이 초당 안내인으로 부터 다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