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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의 천재 가수 김정호는 평생 할아버지 판소리 대가 박동실 외할아버지를 그리며 기다리다 노래로 절규하면서 어린 두딸을 두고 폐병으로 간 님!
예전에는 6·25 때 월북한 소리꾼을 '박ㅇㅇ'이니, '조××'이니, '공××'으로 표기했었다. 나중에 이름을 알고 보니 '박ㅇㅇ'은 박동실, '조××'은 조상선, '공××'는 공기남이었다. 이 세 사람이 월북 소리꾼을 대표한다. 그 중에서도 박동실은 월북 소리꾼의 대부라고 할만한 사람이었다.
박동실은 해방 전후 전라남도를 대표하는 소리꾼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박동실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김소희, 임춘앵, 임유앵, 한승호, 박귀희, 김녹주, 한애순, 장월중선, 박송희 등이 바로 박동실의 대표적인 제자들이다. 그런데 박동실이 월북한 뒤에 이들은 자신들의 스승을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전쟁 후의 반공 분위기 때문이었다. 박동실의 소리가 쇠락한 데는 바로 이런 환경이 크게 작용했다.
박동실은 1897년 전남 담양군 담양읍 객사리 241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외할아버지 배희곤과 아버지 박장원으로부터 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니까 박동실의 집안은 대대로 예능에 종사해 온 예인집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박동실 집안에서는 예인이 다수 배출되었다. 박동실의 동생 박영실도 판소리 명창이었다. 아쟁의 명인 박종선은 박동실의 조카이며, 유행가 가수 김정호는 박동실의 외손자이다.
박동실은 판소리사에서는 광주소리를 대표하는 김채만의 제자로 알려져 있지만, 김기형(고려대 국문과 교수)이 소개하고 있는 한애순의 증언에 의하면 자기가 스스로 터득한 소리를 했다고 한다. 그래도 박동실의 활동 영역이 광주, 담양, 화순 등지이기 때문에 김채만의 소리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박동실은 1930년대 중반 박석기라는 사람을 만난 후에 제자들을 많이 양성했다. 박석기는 담양 출신의 지식인으로 대부호였는데, 담양군 창평면 지실에다가 집을 짓고 예인들을 불러 교육을 하였다. 이때 박동실이 소리꾼을 지도하는 선생으로 초빙되어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게 된 것이다. 김소희, 한승호, 임춘앵, 한애순, 장월중선 등이 모두 이 때 박석기의 초당에서 소리 공부를 했다. 박석기는 자신이 거문고 명인기도 했는데, 거문고의 명인 한갑득이 바로 박석기의 제자이다.
박동실의 소리가 어떠했는지 직접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의 음반은 <흥보 치부가> 한 장이 남아있을 뿐인데, 음반 상태가 너무 나쁜 데다가 목소리도 매우 거칠어서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을 지경이다. 박동실은 원래는 목소리가 매우 크고 좋았는데, 중간에 아편을 해서 목소리가 변해서 안 좋아졌다고도 한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박동실의 판소리는 <심청가>가 유일하다. 그의 제자들의 소리를 통해서 보면, 박동실 바디 <심청가>는 전형적인 서편제 소리 중에서도 보다 오래된 고형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동실은 박동실은 박석기와 함께 <화랑창극단>을 결성하여 창극 공연을 하였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박동실은 곡을 만드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러한 능력이 창극단을 이끄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박동실은 창작판소리 <열사가>를 만들었다. 또 그는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해방가>라는 노래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노래는 지금은 부르는 일이 거의 없다.
박동실은 6·25 때 월북을 했다. 김기형 교수는 박동실의 월북은 먼저 월북을 했던 가야금 연주자 안기옥의 역할에 의한 것이라고 한 바 있다. 박동실은 북한에 가서 '평양 조선고전악연구소', '국립고전예술극장'에서 활동하였다. 여기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보천보의 출전> <노량대전> 등의 창작판소리와 <춘향전> <심청전> <이순신장군> 등의 창극을 만들었다. 이런 공로로 박동실은 1955년에 공훈배우가 되었으며, 1961년에는 인민배우가 되어 최고의 예술가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1968년 12월 4일 평양에서 운명하였다.
박동실은 서편제 판소리의 대가였으나 월북을 했기 때문에 이름조차 말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의 행적이 몇몇 사람의 노력에 의해 겨우 밝혀지고 있다. 박동실을 빼면 해방을 전후한 시기의 판소리사와 북한의 판소리사를 말할 수 없다. 이제 마땅히 정당한 평가를 해야만 할 것이다.
최동현(군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제자의 증언 블로그
http://blog.naver.com/mania4768/20015618055
명창 박동실 학술대회 개최
박동실 명창은 박유전·이날치·김채만으로 부터 이어받은 소리를 김소희·임소향·공대일·조상선·장월중선·한애순·박송회 등 많은 제자들에게 전수하였으며, 서편제의 큰 줄기를 형성하도록 하였습니다.
명창 박동실에 대한 학술적 가치와 생애, 음악성을 재조명하기 위하여 아래와 같이 학술세미나를 개최코자 하오니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 드립니다.
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월북한 판소리 명창 고(故) 박동실(1897~1968)은 일제 강점기에 안중근, 유관순 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다룬 창작 판소리 '열사가(烈士歌)'를 만들었다.
중앙대 창작음악학과 노동은 교수는 박동실이 만든 안중근ㆍ유관순ㆍ윤봉길ㆍ이준 등 4명의 '열사가' 판소리 필사본을 1일 공개했다.
이 필사본은 소리꾼인 고(故) 서동순(1910-1982)이 광복 무렵에 박동실로부터 열사가를 배우면서 노트에 직접 가사를 적은 것으로 '박동실 작곡, 서동순 씀'이라고 적혀 있다. 군데군데 가사를 일부 고친 흔적도 남아 있다.
필사본은 A4용지 절반 크기의 노트에 잉크로 적었으며 모두 40쪽 분량이다.
이 가운데 '안중근 열사가'는 의거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안 의사가 순국하기 전 감옥에서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만나는 모습을 비통하게 그려냈다.
"뜻밖에 어떤 사람이 권총을 손에 들고 번개같이 달려들어, 기세는 추상같고 심산맹호 성낸 듯 이등 앞으로 우루루루. 이등을 겨눠 쾅, 쾅, 또다시 쾅, 쾅. (중략) 감추었던 태극기를 번듯 내여 휘두르며 '나는 원수를 갚었다. 이천만 동포들 쇠사슬에 얼궈놓은 우리 원수 이등박문, 내 손으로 죽였오. 대한독립 만세' 우렁찬 소리로 외치니 할빈역이 진동"
노 교수는 "민족주의자였던 박동실은 1930년대말 고향인 전남 담양에 초당을 짓고 박석기라는 거문고 명인과 함께 김소희, 박규희, 한승호 등 제자들을 가르쳤다"며 "이때 판소리 다섯 마당을 가르치는 것 외에도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민족영웅을 소재로 한 판소리를 만들어 비밀리에 전수했다"고 말했다.
당시는 판소리 공연도 일본어로 해야 했던 상황이라 '안중근 열사가' 등은 실제로 공연되지는 않고 전승만 됐을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광복을 맞았지만 박동실이 한국전쟁 때 월북했기 때문에 '열사가'는 널리 퍼질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묻혀버렸다. 이후 월북 예술가들의 작품이 해금되자 1990년대에 음반이 녹음되기도 했지만, 일반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노동은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음악인들이 애국지사들을 그려 민족정기를 확립하려 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면서도 "박동실 선생이 월북하고 나서 '열사가'가 묻혀버린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노래들이 조명받지 못한 것이 많은데 이런 노래가 많이 알려져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동실(朴東實)
출생 1896-1969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객사리
학력(계보)
.12세때 이날치의 제자인 김채만의 문하에 들어갔다.
.박유전-이날치-김채만-박동실로 이어지는 계보
생애
.박동실(朴東實, 1896-1969)은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객사리에서 출생
.열두 살 때 이날치의 제자인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출신 김채만의 문하에 들어감
.1921년 광주 협률사 재조직시 조몽실, 성원목(성창순의 아버지), 임옥돌, 여류명창 유색, 유선, 이월향 등과 4년동안 협률사 활동
.1925년 단체가 해산되면서 박동실은 광주에서 활동, 이때부터 박동실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
.1935년부터 광주에서 소리를 가르침, 당시 지식인 박석기가 담양군 남면 지실에 박동실을 초빙, 국악의 후원자가 되어 김소희, 한애순, 김녹주, 한갑득, 한승호 등을 불러 모아 그곳에서 판소리 학습
.1939년에는 박석기가 화랑창극단을 꾸며 박동실, 조상선, 한주환, 한일섭, 임소춘, 박녹주, 공기남, 주광득, 최명숙 등의 단원으로 [봉덕사의 종소리]라는 창극을 공연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광주 성악연구회를 발족
.6.25가 터지면서 북으로 납치
특징
.박동실은 성대가 나빠 공연은 별로 하지 않았으나,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대가로서 주로 작곡과 교육에 많은 업적을 남겼음.
명창해설
박동실(朴東實, 1896-1969)은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객사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열두 살 때 이날치의 제자인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출신 김채만의 문하에 들어갔다. 당시 지금의 광주시 서구 구암동에 있던 김채만 문하에서 박후성의 셋째 작은 아버지 박화섭, 공창식(박종선의 외할아버지), 김정문 등이 있었다. 김정문의 제자로는 박초월, 강도근, 한성태(한승호의 아버지), 작종원, 신용주 등을 들 수 있다.
박동실은 그후 1921년 광주 협률사 재조직시 조몽실, 성원목(성창순의 아버지), 임옥돌, 여류명창 유색, 유선, 이월향 등과 4년동안 협률사 활동을 했다. 1925년 단체가 해산되면서 박동실은 광주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박동실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 무렵에 구례 박봉래 명창을 비롯, 정창석 명창 등과 교유하면서 소리를 닦았다. 그리고 그는 1935년부터 광주에서 소리를 가르쳤다.
그때(1938) 박석기(1898-1953)년 전남 담양군 창평면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동경제국대학은 나온 지식인으로 국악을 사랑하며 풍류를 좋아해 그가 박동실을 담양군 남면 지실에 있는 자기 별장에 초빙하고 국악의 후원자가 되어 김소희, 한애순, 김녹주, 한갑득, 한승호 등을 불러모아 그곳에서 판소리 학습을 시켰다. 1939년에는 박석기가 화랑창극단을 꾸며 박동실, 조상선, 한주환, 한일섭, 임소춘, 박녹주, 공기남, 주광득, 최명숙 등의 단원으로 [봉덕사의 종소리]라는 창극을 공연했고, 그후 단체가 해산되면서 박동실이 다시 광주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중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그는 광주 성악연구회를 발족시킨다.
당시 구성원은 박동실, 오태석, 조상선, 성원목, 조몽실, 조동선, 공기남, 공대일, 박후성, 주광득, 한갑득, 한일섭, 한영호, 한승호, 안채봉, 한애순, 박녹주, 김경애, 공옥진이었는데 박황 각색의 '홍보전'을 꾸며 1945년 10월에 광주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다.
박동실은 그후 국극협회를 만들어 단장에 박동실, 단원으로 성원목, 공기남, 김득수, 박후성, 신봉학, 서정길, 한일섭, 김소희, 박초향, 김경애, 박숙자, 김덕희, 박화진, 공옥진 등이 활약했는데 이때엔 [고구려 혼]을 공연했다. 또 [열사가]를 만들었는데 안중근, 이준, 유관순 등 열사를 찬양하는 노래와 해방가, 건국가를 작사 작곡해 여러 명창에 의해 많이 애창되기도 했다. 그때의 열사가를 철저하게 공부한 장월중선이 이어받았고, 그의 딸인 정순임이 계속 부르고 있다.
당시 박동실은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제자를 가르치다 6.26가 터지면서 북으로 납치되어 갔다고 한다. 그의 친동생 영실의 아들 박종선이 국립국악원 민속연주단 아쟁 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33세로 요절한 가수 김정호는 광주 북동천주교회 옆에서 태어나 수창초등학교 2학년을 다니다 서울로 전학갈 때까지 대인동에서 살았다. 김정호의 외가는 담양으로 ‘가장 한국적 목소리’라는 평가를 받는 그의 음악도 외가쪽의 영향을 받았다.
외조부는 서편제의 한 부류인 ‘담양소리’의 대부이자 창작 판소리의 대가인 명창 박동실이다. 박동실은 일제강점기 춘향가·심청가 등 오가전집(五哥全集)에 능통했으며 최초로 창극단을 만들어 열사가·해방가 등 창작 판소리를 공연했다.
어머니 박숙자 명창은 아버지로부터 담양소리를 전수받아 대중화에 기여했고, 외삼촌 박종선은 민속악기에 불과하던 아쟁을 산조음악으로 정립해 ‘아쟁 명인’으로 불리고 있다.
김정호의 음악에 짙게 배어있는 정한의 정서는 국악에서 나왔다. 그가 작곡한 50여편의 곡에는 그리움, 고독, 슬픔, 이별의 정서가 녹아있다. 아쟁의 슬픈 음색을 좋아했고, 외삼촌의 국악에, 자신의 음악을 접목하려 폐결핵으로 투병중에도 아쟁과 가야금, 꽹과리를 두들기며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에 혼을 담아내려 했다.
“간다, 간다, 정든 님 떠나간다”로 시작되는 ‘님’은 그의 마지막 음반인 4집에 실린 곡으로, 죽음을 예견한 상여소리를 연상시키는 선율이다. 국악적 감성이 배어있는 대표적인 작품이지만 다른 곡들도 담양소리에 음악적 뿌리를 두고 있다.
임희숙의 ‘나 하나의 사랑은 가고’의 작곡가로 유명한 백창우씨는 김정호의 노래는 담양소리를 기반으로 한 국악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진단한다. 대다수 그의 노래가 단조이고 ‘하얀 나비’의 경우 ‘도·레·미·솔·라’ 다섯 음으로만 구성돼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담양군이 김정호의 음악적 재능과 열정을 재조명하는 추모 세미나와 음악회를 마련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그의 묘비명에는 하얀 나비의 가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꽃들은 시들어요 슬퍼하진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 음-” 팬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을 것을 알았던 듯 하다.
김정호와의 마지막 인터뷰
그는 52년 3월 27일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85년 11월 29일, 그는 떠났습니다. 33년 8개월간의 짧은 생애- 마치 '33과 3/1' 속도로 도는 레코드판처럼 그의 삶의 수치는 그 시점에서 멈췄지요.
제가 가졌던 그와의 인터뷰, 그 기억이 지금 새삼스럽습니다. 이미 15년 전 일을 떠올리기 위해 지금 이렇게 '꼼삐따(!)' 앞에 앉아 있으니-. 이제는 그만 묻어둬도 좋을 얘기를 새삼 떠올리느라 며칠이 우울하게 갔습니다. '김정호의 노래에 대한 추억'을 '윈버드'에서 보는 순간 그에게서 느껴왔던 애잔한 슬픔과 더불어 마치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이 한꺼번에 다가왔습니다. 필경 요 며칠 동안은 집에서건 사무실에서건 무슨 고민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겠지요.
지금 대충 헤아려보니 그의 잠적은, 75년 대마초 사건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79년, 대마초 가수들이 모두 해금되어 하나, 둘씩 활동을 재개할 때도 그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방불명설' '잠적설'이 나돌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로 온갖 추측 보도도 많았지요.
그러던 그가 84년, 홀연히 나타났습니다. 83년 6월부터 11월까지, 5개월이라는 최장 녹음시간을 기록한 4집 앨범으로. 호흡조차 힘들어져 한 곡 녹음하는 데도 수십 번씩 끊어, 편집해야 했던 이 앨범, 그리곤 결국 '유작'이 되어버린 앨범을 들고-. 이 앨범이 나온 뒤에도 그는 공개석상을 기피했습니다.
라디오에서는 이 앨범 중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가 제법 방송을 타고 있었지만 그는 어느 새 '얼굴 없는 가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폐결핵가수'라는 낙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찍혀져 있었기 때문에 그 동안 요양소에서의 격리 생활은 공개적으로 얘기되었고, 이 노래가 같은 요양소에서 보게 된 어느 환자를 모티브로 만들었다는 애틋한 얘기만이 화제가 된 채. 그러면서 또 몇 달이 지나갔습니다.
제가 그를 찾아내야겠다, 그리고 그 동안의 얘기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 무렵이었습니다. 그와의 인터뷰를 위해 석 달을 집요하게 매달렸습니다. 부끄럽지만, 당시 주위에서의 제 별명은 '진돗개'였습니다.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다고-.
온갖 안테나를 동원해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정말 어렵게 그와 통화를 시도했는데, 그는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들을 얘기도, 하고 싶은 얘기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매스컴-, 즉 TV- 라디오는 물론, 여타 신문사나 잡지사의 제의까지 모두 거절했다면서, 되려 저를 설득시키려 했습니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만나지 못하는 입장을 이해해달라고도 했고, 또 통과의례처럼 자신이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을 때 가장 먼저 연락하겠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저도 이 즈음에서 그와 인터뷰한다는 것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작 이러한 내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건강 여부를 묻는, 저와의 네 번째 통화에서였습니다. 이전처럼 전화를 먼저 끊지 않는다는 것과 기침소리 사이에 더듬더듬 말하길 '지금 힘들다, 그럼에도 더 고통스러운 것은 무료함(?)'이라고도 했고, 또한 이미 '소외'된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한편 고맙다'-라는, 그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 즈음에서 저와 매우 가까웠던(-그와도 가까웠던) '몇몇'의 도움으로 그와의 인터뷰 시간과 장소가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 번씩이나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실바람, 바람, 바람-', 당시의 이 노래 구절처럼, 그 때 제 심정이 꼭 그랬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그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느 샌가 그도 마음의 반쯤은 열어놓고 있었던 게지요. 다만 조건은 그냥 만나는 것, 그리고 자기와 나누는 얘기는 절대로 기사화하지 말아달라는 것-.
그의 아파트에서였습니다. 그 핏기 없는 얼굴, 그리고 기침소리 속에 겨우 나누던 얘기들-. 정말이지, 이러한 식의 기사는 저도 결코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송창식의 고집에 관해 얘길 했으며 김수철의 '별리'를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에 관해 서로 격의 없이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제 얘기에 따라 빙그레 웃기도 하고, 간호원이 주사를 놓으러 왔을 때는 저에게 '잠깐이면 되니 기다리라'고도 했습니다. 그가 주사를 다 맞길 기다리는 동안에서야 비로소 저도 마감 때라 빨리 집에 가 밀린 원고들을 써야 한다는 게 생각났습니다. 어느 새 세시간이 지났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 때부터 몇 번이나 일어서려 했지만 그가 자꾸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자신의 노래 '님'을 들어보았느냐 물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 때까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매우 섭섭한 듯 해하더니 그 음반을 테이블에 올려놓았습니다.
'님-'.
그 때, 그 느낌이란-, 그 노래를 듣는 내내 저는 매우 놀랐고 마침내 엄습해오는 불길함까지도 어쩌지 못했습니다.
그리곤 이상스럽게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나를, 아니 사람들을 무척이나 그리워했음을. 그는 마침내 자기가 내게 해줄 수 있는 게 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지금, 이 앨범을 오늘 집에 가서 밤새 듣고 싶다, 그리고 가까운 날짜에(제 마감이 끝난 뒤-) 시간을 내실 수 있다면 공기 좋은 야외로 함께 나가보고 싶다고. 그가 쾌히 승낙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기왕이면 사진 잘 받는 곳으로 가지, 그리고 오늘 내가 했던 얘기 중 노래에 관한 얘기라면 기사로써도 좋겠는걸-!?" 한번도 웃지 않고 옆에 있던 부인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습니다.
다음 다음날 아침, 우리는 사진기자 김용범과 '뚝섬'엘 갔습니다. 우리가 서로 약속한 시간은 한시간 정도였고 저희도 사실상 두 시간밖에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날이 마감 최종일이었으니-. 그러나 정작 촬영은 오후 다섯 시 무렵에나 끝났습니다. 띄엄띄엄 노래 불러 이은 그의 마지막 노래처럼 촬영도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오히려 이 정도의 사진이면 충분하다고 말렸으나 되려 그가 사진 찍는 일에 더 열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진 촬영에 임하던 그의 표정이 매우 긴장되어 있었으며, 또 비장했음을 이제야 알아채고는, 또다시 가슴이 뭉클해옵니다.
그가 무리를 하면 안되기에 사진 찍는 중간 중간 쉬어야 했고 그런 중에도 그는, 그 때까지 밝히지 못했다던 얘기들을 서슴없이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얘기, 탈영병으로써 군 영창에 갇혔던 얘기까지-.
이따금씩, 그는 함께 동행했던 그의 후배(세션을 도와줬다던-.)에게 담배를 빼앗다시피 해서 때론 냄새만 맡기도 하고, 때때론 직접 불을 붙여 입에 물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의사는 내게 더 이상 노래를 부르면 죽는다고 경고했지, 허나 난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되려 죽을 것 같아-" 이 말을 듣고 난 뒤부터, 그가 사진을 계속 찍고 싶어하던 것을, 담배를 계속 피우고 싶어함을, 더 이상 말리지 못했습니다.
지금, 담배에 불을 붙여 그 '님'에게 올리는 심정으로-,
<박성서>
33세로 요절한 가수 김정호는 광주 북동천주교회 옆에서 태어나 수창초등학교 2학년을 다니다 서울로 전학갈 때까지 대인동에서 살았다. 김정호의 외가는 담양으로 ‘가장 한국적 목소리’라는 평가를 받는 그의 음악도 외가쪽의 영향을 받았다.
외조부는 서편제의 한 부류인 ‘담양소리’의 대부이자 창작 판소리의 대가인 명창 박동실이다. 박동실은 일제강점기 춘향가·심청가 등 오가전집(五哥全集)에 능통했으며 최초로 창극단을 만들어 열사가·해방가 등 창작 판소리를 공연했다.
어머니 박숙자 명창은 아버지로부터 담양소리를 전수받아 대중화에 기여했고, 외삼촌 박종선은 민속악기에 불과하던 아쟁을 산조음악으로 정립해 ‘아쟁 명인’으로 불리고 있다.
김정호의 음악에 짙게 배어있는 정한의 정서는 국악에서 나왔다. 그가 작곡한 50여편의 곡에는 그리움, 고독, 슬픔, 이별의 정서가 녹아있다. 아쟁의 슬픈 음색을 좋아했고, 외삼촌의 국악에, 자신의 음악을 접목하려 폐결핵으로 투병중에도 아쟁과 가야금, 꽹과리를 두들기며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에 혼을 담아내려 했다.
“간다, 간다, 정든 님 떠나간다”로 시작되는 ‘님’은 그의 마지막 음반인 4집에 실린 곡으로, 죽음을 예견한 상여소리를 연상시키는 선율이다. 국악적 감성이 배어있는 대표적인 작품이지만 다른 곡들도 담양소리에 음악적 뿌리를 두고 있다.
임희숙의 ‘나 하나의 사랑은 가고’의 작곡가로 유명한 백창우씨는 김정호의 노래는 담양소리를 기반으로 한 국악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진단한다. 대다수 그의 노래가 단조이고 ‘하얀 나비’의 경우 ‘도·레·미·솔·라’ 다섯 음으로만 구성돼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담양군이 김정호의 음악적 재능과 열정을 재조명하는 추모 세미나와 음악회를 마련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그의 묘비명에는 하얀 나비의 가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꽃들은 시들어요 슬퍼하진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 음-” 팬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을 것을 알았던 듯 하다.
애절한 가사로 70~80년대 통기타 시절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가수 김정호의 노래가 그를 추억하는 동료 후배들에 의해 담양에서 울려퍼진다.
담양군은 ‘하얀나비’, ‘이름 모를 소녀’ 등으로 사랑받았던 가수 김정호를 추모하는 세미나와 음악회를 오는 21일부터 22일까지 담양문화원과 메타쉐쿼이아 길에서 개최한다고 17일 밝혔다.
21일 오후 2시 담양문화원에서 열리는 김정호 추모 세미나는 ‘담양 소리, 김정호의 노래를 빚다’를 주제로 목포대 이경엽 교수와 작곡가 백창우가 각각 ‘김정호 음악의 모태인 담양소리에 관하여’와 ‘김정호의 노래에 깃든 담양소리의 흔적’에 대해 발표한다.
또한 짧은 인생을 살다간 고인의 음악적 열정과 인생에 대한 가수 하남석의 회고와 함께 과객들과의 질의응답 시간을 갖고 고 김정호를 추모할 계획이다.
22일 오후 7시부터 메타세쿼이아 길에서는 임창재, 소리새, 김원중, 박강수 등 가수와 국악인 권하경 등이 함께하는 ‘김정호 추모 음악회’가 열린다.
'바위섬'으로 유명한 담양 출신 가수 김원중은 “일제시대 때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등 오가전집에 능통했으며 국내 최초로 오늘날 오페라단과 같은 ‘창극단’을 만들었던 천재성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명창 박동실에서 시작된 ‘담양 소리’가 있었다. ‘김정호’는 박동실의 외손자이자 ‘담양소리’의 맥을 잇는 창의 명인 어머니 박숙자와 아쟁의 명인인 외삼촌의 영향을 받았으며 70~80년대 가장 한국적인 목소리라 평가받았다”고 회상했다.
군 관계자는 “이번 김정호 세미나와 추모음악회는 ‘담양소리’가 빚어낸 김정호의 노래를 조명하고 추모하기 위한 자리로 우리의 ‘한의 정서’가 깊이 배어 있던, 우리의 소리를 사랑했던 김정호 기리는 뜻 깊은 행사가 될 것”이라며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했다.
슬픈 천재가수 김정호가 평생 외할아버지를 그리다 폐암으로 간 의 노래들....
저물어가는 가을과
다가오는 겨울을 아름답게 맞이하시길 빕니다!
담양 고향인 너나우리 친구들에게 드림!
첫댓글 역대회장님소개!
구분 회 장 부회장 총 무 감 사 감 독
1대(2003) 이성진 이일남 이채형 김일규 정상구
2대(2004) 이일남 이채형 박상성 박인종 김장수
3대(2005) 이삼채 박인종 한 신 최용면 정현길
4대(2006) 이성진 이일남 이채형 김일규 정상구
5대(2007) 이일남 박상성 이채형 최용면 김장수
6대(2008) 박상성 김진석 변동현 최용면 최광현 김학봉
7대(2009) 최광현 이삼채 박인종 변동현 정상구 김형수
8대(2010) 조인철 최용면 박인종 한 신 배득현 이영승
9대(2011) 김일규 정상구 김영재 한상혁 박인종 정상구
현10대(2012) 최용면 김학봉 박성훈 김영재 김장수 김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