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강원도 영월의 광산촌이었고, 고향에 있던 광산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대한 석탄 공사 영월광업소였습니다. 그리고 저희 고향에서 생산되었던 석탄은 대략 14 킬로 떨어진 지역에 있었던 영월 화력발전소에 케이블(Cable)을 통해 배달되어 전기를 생산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석탄이 케이블을 통해 운반되는 도중에 한 번씩 삭도 바가지(Cable Car)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케이블을 연결해주는 타워를 지나는 부분에서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 곳에서 삭도 바가지가 떨어지다보니 항상 그 타워 근처에 떨어진 석탄들이 있었습니다.
현재 마차 본 동네 전경
영월 화력 발전소 - 예전에는 석탄을 이용해 물을 끓여 발전을 했습니다.
저희 고향에 국영광산이 있는 관계로 내가 다니던 학교는 본교였고 저희 지역의 조금 떨어진 지역의 골짜기 마다 분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니던 학교는 한반에 60명이 넘는 학생들로 가득차 있었고 한 학년에 4 반이 있어서 한 학년의 총 숫자가 240명을 넘었고 ..1학년에서 6학년까지 거의 1,500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초등학교 가까운 곳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있어서 .. 시골지역치고는 제법 큰 지역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건물로 리모델링 되기 전의 마차 국민(초등)학교
그런데 저희 지역의 광산에 석탄이 거의 대부분 채탄이 되어 더 이상 석탄을 많이 생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생산하는 탄의 양으로는 대한 석탄 공사가 적자가 나는 상황이었으므로 폐광을 하게 되었습니다. 폐광하니 먹고 살려고 많은 광부의 가족들이 저희 고향을 떠나 장성, 함백, 도계 등 광산이 활발히 운영되는 곳으로 생계를 위해 떠나거나 아니면 퇴직금을 받아 도시로 이사했습니다.
저희 집은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보니 고향에 그냥 남았고 .. 아버지는 연탄을 수동으로 찍는 제조기를 구입하셔서 연탄을 찍어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연탄을 찍어서 팔던 시기는 저의 형이 한참 반항과 말썽을 부리며 사춘기를 겪고 있는 중학생 시절이었고 저는 초등학교 5~6학년 시절이었습니다. 울 형님은 사춘기를 지나면서 사춘기의 홍역을 혹독히 치르는 과정이었고 .. 그 과정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대단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매우 힘든 시기였고 또 형의 사춘기 홍역으로도 매우 힘든 시기였습니다. 저 같은 경우 .. 형이 하도 사춘기를 혹독하게 지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막상 사춘기 시절에 들어섰어도 형 때문에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부모님을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마음에 결심해서 그랬는지 .. 아니면 원래 성격 자체가 그런 말썽을 부리며 지내는 성격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어머니 옆에서 지내며 어머니를 도와주고 또 아버지께서 시키시는 일을 고분고분 순종했습니다.
형이 중학교를 다니면서 사춘기를 겪고 있는 시기에 나는 초등학교 5~6학년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아버님은 수동 연탄 제조기로 연탄을 찍어 파셨는데 .. 연탄을 찍어 팔기 위해서는 원재료가 되는 석탄을 구입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은 석탄 운반하는 케이블 카가 지나가는 타워 부근으로 가셔서 떨어진 석탄을 긁어모아서 집에 운반하여 오신 다음 그 석탄으로 연탄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리어카를 이용하여 연탄을 주문한 집에 배달을 했습니다. 나는 연탄 만드시는 아버지를 도왔고 그리고 아버지께서 배달하는 리어카가 잘 가도록 리어카 뒤에서 밀어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아버지께서 주문받은 연탄을 찍으신 다음 리어카로 연탄을 날랐습니다. 아버지께서 리어카를 끌어가고 있었고 나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리어카를 뒤에서 밀며 따라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가다가 아버지는 길에서 형을 발견하시고 형에게 와서 리어카를 밀며 따라와서 석탄을 배달하자고 하였습니다. 형은 한참 사춘기여서 여학생들과 사람들의 이목에 많은 신경을 쓰는 시기여서 조금 밀다가 다른 여학생들이 오는 것을 보고 미는 것을 멈추고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나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을 연탄 리어카를 밀며 가고 있었는데 .. 마찬가지로 나와 나이가 같은 동급생 여자 아이들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때 형이 여학생들을 의식하여 떠나고 나서 .. 동급생 여자 아이들을 보니 형처럼 리어카 밀어드리는 것을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나도 도망치면 아버지는 누가 도와 드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감히 도망하지 못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리어카를 밀며 사람들이 많은 곳을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연탄을 나르며 도와 드렸습니다.
안도현이란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란 시로 글을 마칩니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반쯤 깨진 연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을 것이다
나를 끝 닿는데 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위에
지금은 인정머리없는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랫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 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 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하니 손을 뻗어 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은 것이다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全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