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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尊賢養士 스크랩 율곡선생 유적지 자운서원(紫雲書院) 탐방-(2/2)
이장희 추천 0 조회 70 14.05.09 18: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율곡선생 유적지 자운서원(紫雲書院) 탐방-(2/2)

(2013/10/16 현재)


경기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있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를 배향(配享)한
자운서원(紫雲書院),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묘소를 포함한 가족묘역,그리고 율곡 기념관
전경 입니다.‘파주 이이 유적’인 자운서원의 후면에는 묘정비(廟庭碑, 서원의 내력을
기록한 비/숙종 9년)가 있으며, 묘소 입구에 신도비(神道碑, 죽은 이의 사적을 기록한
비/인조 9년)가 세워져 있습니다. 율곡 이이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경세가(經世家)로
중국의 성리학과 구별되는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닦은 인물 입니다. 건설적이고 실천적인
사상가로 후에 실학사상(實學思想)에 영향을 주는 등 우리나라 철학사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광해군 7년(1615)에 세운 이 서원은 효종 1년(1650)에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사액서원으로 ‘자운’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숙종 39년(1713)에 율곡의 뒤를 이은
학자인 김장생(1548∼1631)과 박세채(1632∼1695)를 추가로 모셨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되었습니다. 그 뒤 서원 터에서 제단을 세워 제사를
지내왔으나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새로 지은 것입니다.
대문 격인 자운문을 들어서면 위패를 모신 사당이 모습을 드러 냅니다.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의 아담한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이며, 앞면에는 각 칸마다 2짝 여닫이 문을 달았는데 문 앞은 개방된 구조로 널찍하여
제사지내기에 적합 합니다. 사당 안쪽에는 이이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이곳에서는 해마다 8월에 제사 의식을 거행 합니다.  


 

 

 

 

 

 

 

 

  유적지 경내에 있는 율곡 기념관에는 율곡 선생의 유품과 서한을 비롯하여
어머니인 신사임당과 형제들의 글씨와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자운서원(紫雲書院)

 

-시도기념물 45
-경기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


-요약설명

조선시대 서원으로 광해군 7년(1615)에 율곡 이이(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효종 1년(1650)에 ‘자운’이라는 이름과 토지, 노비 등을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5년(186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된 후 한국전쟁으로 파괴되어 없어진 것을 1969년에 복원하였다.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로 옆에서 보면 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율곡 이이와 김장생, 박세채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해마다 8월에 제사를 지낸다.

 

-상세설명

 

율곡 이이(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율곡은 조선 중기 대학자이며 정치가로 성리학의 큰 줄기를 이루던 분으로 『격몽요결』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광해군 7년(1615)에 세운 이 서원은 효종 1년(1650)에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사액서원으로 ‘자운’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숙종 39년(1713)에 율곡의 뒤를 이은 학자인 김장생(1548∼1631)과 박세채(1632∼1695)를 추가로 모셨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되었다.

 

그 뒤 서원 터에서 제단을 세워 제사를 지내왔으나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새로 지은 것이다. 대문 격인 자운문을 들어서면 위패를 모신 사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아담한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앞면에는 각 칸마다 2짝 여닫이 문을 달았는데 문 앞은 개방된 구조로 널찍하여 제사지내기에 적합하다. 사당 안쪽에는 이이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8월에 제사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자운서원 연혁(紫雲書院 沿革)

 
자운서원은 율곡 缺?(1536~1584)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생 노희립(盧希立) 외 700여명의 상소로 1615년(광해군 7) 파주 호명산 아래 천점에 창건되었고, 휴암 증손 백홍우(白弘佑)의 상소에 의해 1650년(효종 1)에 사액(賜額)되었으며 1686년(숙종 12) 묘소가 있는 자운산 아래로 이전하였다. 1695년(숙종 21)에는 유학(幼學) 정수하(鄭綏夏) 등이 상소하여 현석 박세체(1632~1695)가 합향되었고, 이어서 1713년(숙종 39)에 유생 조익주(曺翊周) 등의 상소로 사계 김장생(1548~1631)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이후 영조, 정조, 순조 등 역대 임금이 자운서원에 치제하게 할 정도로 보살핌을 받았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되었고, 1907년(고종 44)에는 정와 노진섭(靜窩 盧震燮) 등 유림이 서원터에 제단을 세워 제사를 지냈으나, 한국전쟁 때 완전히 파괴되었고, 1683년(숙종 9)에 세운 묘정비(廟庭碑)만 남게 되었다.

 

그 뒤 1970년에 국가의 지원과 유림의 모금으로 사당을 복원한 데 이어 1973년에는 경내 주변을 대대적으로 정화하였다. 서원에서는 음력 2·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향을 올렸으나, 최근에는 매년 가을에 열리는 파주시 향토문화예술축제인 율곡문화제 행사 때에 추향제(秋享祭)를 양력 10월 초순에 지내왔으며,  2012년 부터는 39년만에 부활하여 음력 3월 상정일에 춘향제(春享祭)를 지내고 있다.

 

이곳의 건물들은 모두 최근의 것이고, 사당인 문성사(文成祠)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높은 대지 위에 세워져 있으며, 내부에는 율곡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가운데에 모시고 좌우에 사계와 현석 두분의 위패를 모셨다. 문성사 아래로는 1997년에 신축한 강당 건물인 강인당(講仁堂)과 그 아래로 동재인 입지재(立志齋), 서재인 수양재(修養齋)가 위치하고 있다.

강인당 앞 양쪽에 동·서재 안쪽 옆으로 서 있는 두 그루 느티나무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1982년에 둘 다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당시 수령은 360년이 되었다고 한다.

 

자운서원은 경기도기념물 제45호 지정되었고, 자운서원묘정비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되었다.

 

●자운서원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7호


[정의]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서원 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
[내용]
총높이 387㎝, 비신 240×110×32㎝.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7호. 이이(李珥)의 학덕을 기리는 한편, 자운서원 건립 내력을 상세히 기록한 비이다.자운서원은 1615년(광해군 7) 건립하였고, 1650년(효종 1) 왕이 ‘자운(紫雲)’의 현액(懸額)을 하사하였다. 이곳은 이이를 비롯한 그의 제자인 김장생(金長生)·박세체(朴世采) 등을 배향(配享)하고 있다.


비는 자운서원의 외삼문(外三門) 밖 우측에 있다. 옥개(屋蓋)는 높이 70㎝ 가량의 팔작(八作)지붕으로 평범한 형식이며, 장방형인 비좌(碑座)는 2단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단에는 4개의 두꺼운 판석(板石)으로 지대석(地臺石)을 만들고 그 위에 비좌를 놓았다.
높이 77㎝의 비좌에는 상면에 복련문(覆蓮文)이 새겨져 있으며, 측면은 연주문(蓮珠文)과 괴운문(怪雲文)으로 조식하였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김수증(金壽增)이 썼는데, 서체는 예서체(隷書體)이다.


비의 상단에는 김수항(金壽恒)이 쓴 ‘紫雲書院廟庭之碑(자운서원묘정지비)’라는 전액(篆額)이 있다. 비문 끝의 숭정오십육년계해(崇禎五十六年癸亥)라는 연기로 보아, 비의 건립연대는 1683년(숙종 9)임을 알 수 있다.자운서원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와 한국전쟁으로 크게 손상된 것을 1970년 비각(碑閣)을 현재의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거의 원형대로 복원하였는데, 대지는 2,211평에 본전(本殿) 약 12평과 삼문(三門) 6평 정도의 규모이다.

 


●파주 이이 유적 (坡州 李珥 遺蹟)  -문화재청 자료


-종 목 사적  제525호 

-지정(등록)일 2013.02.21
-소 재 지 경기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 5-1번지 등 
-소유자(소유단체) 국·공·사유
-관리자(관리단체) 파주시

 

조선 중기 유학자이자 경세가인 이이는 퇴계 이황의 학문을 더욱 발전시켜 중국의 성리학과 차별되는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닦은 인물로서 우리나라 정신사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율곡 이이를 배향한 자운서원,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묘소를 포함한 가족묘역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파주 이이 유적’은 율곡 이이 관련 유적을 대표하는 곳으로, 한 인물에서 근원한 문화유산이 모여 있는 장소성의 가치가 큰 곳이다.

 

‘파주 이이 유적’에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를 배향(配享)한 자운서원(紫雲書院),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묘소를 포함한 가족묘역이 모여 있다. 또 자운서원의 후면에는 묘정비(廟庭碑, 서원의 내력을 기록한 비/숙종 9년)가 있으며, 묘소 입구에 신도비(神道碑, 죽은 이의 사적을 기록한 비/인조 9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율곡 이이 관련 유적을 대표하는 곳으로, 역사적 인물에 근원한 문화유산이 모여 있는 장소성의 가치가 큰 곳이다.

 

  율곡 이이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경세가(經世家)로 중국의 성리학과 구별되는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닦은 인물이다. 건설적이고 실천적인 사상가로 후에 실학사상(實學思想)에 영향을 주는 등 우리나라 철학사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파주 이이유적' 사적 지정 고유제 및 기념식 개최

 

연합뉴스 보도자료 | 입력 2013.05.15 16:05

율곡의 본향(本鄕) 이미지 부각 계기, 다양한 선양사업 발굴 추진

 

파주에 위치하고 있는 율곡선생 관련 유적의 국가사적 지정을 축하하는 기념식 및 고유제가 오는 5월25일 파주시 율곡선생유적지에서 개최된다.시에 따르면 율곡선생 관련 유적들이 지난 2월21일 사적 제525호 '파주이이유적'으로 지정을 받은 것과 관련해 문화재 관계자들과 유림, 그리고 시민들을 모시고 기념식 및 고유제를 통해 축하의 잔치를 마련한다는 것.

 

「율곡향연」이라는 테마로 치러지는 이날 행사에서는 사적 지정에 큰 노력을 기울인 지역 유림대표들과 각 계의 인사들에게 공로표창이 수여되며, 「율곡 이이 평전」의 저자인 한영우 교수의 현장강연도 진행된다.또 시민들과 관람객들을 위해서 전통차 시연 및 시음 행사가 준비되며,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문화체험의 장도 마련될 예정이다.

 

기념식에 이어질 고유제에는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초헌관으로 참례해 사적 지정의 경과와 내용을 고(告)하며, 이인재 파주시장과 우관제 문화원장이 각각 아헌관과 종헌관으로 제례를 봉행한다.

 

이인재 파주시장은 "우리시의 대표적인 선현이신 율곡선생 관련 유적의 사적 지정을 시민들과 함께 축하하고, 선생이 남겨주신 소중한 가르침을 온전히 이어받자는 뜻을 나누는 의미있는 자리"가 될 것이라며, "이를 계기로 선생의 얼을 현양하는 다양한 사업을 발굴,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시(市)는 율곡선생과 관련한 중요하면서도 다양한 발자취가 파주에 남아 있음을 널리 알리고, '율곡의 고장'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한다는 방침이다. 아울러 화석정, 율곡리 마을, 나아가 학문적 지기였던 우계 성혼선생 관련 유적 등의 유기적 정비와 보완을 통해 파주의 특색있는 역사문화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이다.

 

한편 문화재청은 '조선 중기 유학자이자 경세가인 율곡 이이 선생은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을 더욱 발전시켜 중국의 성리학과 차별되는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닦은 인물로서 우리나라 정신사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며, '율곡선생을 배향한 자운서원, 율곡선생과 신사임당의 묘소를 포함한 가족묘역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파주 이이 유적」은 율곡 이이 관련 유적을 대표하는 곳으로, 한 인물에서 근원한 문화유산이 모여 있는 장소성의 가치가 큰 곳' 이라고 사적 지정의 이유를 밝힌 바 있다.

(끝)

출처 : 파주시청 보도자료

 


■신사임당

 

1504(연산군 10)∼1551(명종 6). 조선 중기의 여류예술가.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명화(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 이씨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남편이 증좌한성 이원수(李元秀)이고,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시·그림·글씨에 능했던 여류 예술가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 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齋)라고도 하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 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 외할아버지 사온이 어머니를 아들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다.

 

이에 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19세에 덕수 이씨(德水李氏) 원수(元秀)와 결혼하였다. 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얼마 뒤 선조 때부터 시집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했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1541년(중종 36) 38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 : 지금의 종로구 壽松洞과 淸進洞)에서 살다가 1551년(명종 6) 봄에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 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최고의 여성상인 태임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당호를 지었는데, 사임당을 평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온아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때문이다.

 

그러나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이미 그의 재능은 7세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했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 등은 그녀의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의 성격만큼이나 그림·글씨·시도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포도·화조·어죽(魚竹)·매화·난초·산수 등이 주된 화제(?題)이다.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산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녀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다.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여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 ”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 머리[馬蹄蠶頭]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였다.

 

그러므로 그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대여 명종 때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 다음에 간다. ’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여섯 폭짜리 초서가 오늘까지 전해진 경과를 보면,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이 이 여섯폭 초서를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崔大海)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 가 최씨 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하였다.

그런데 영조 때에 이웃 고을 사람의 꾐에 빠져 이를 빼앗겼다가 어렵게 되찾아 그 뒤 최씨 집안에서 계속 보관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강릉시 두산동 최씨가에 보관되어 있으며, 윤종의에 의하여 판각된 것만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

사임당이 절묘한 경지의 예술 세계에 머문 중요한 동기는 환경이었다. 즉 첫째 현철한 어머니의 훈조를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는 완폭하고 자기주장적인 유교 사회의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러한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남편은 자질을 인정해 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사나이였다. 먼저 혼인 전 환경을 보면 그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철한 어머니를 통해 사임당에게 전수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웠고, 출가 뒤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이 겪는 시가에서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다.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일상 생활과 자녀 교육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에게 훈도를 받은 그녀는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가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 踰大關嶺望親庭>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 思親> 등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절절한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머니의 세계가 사임당에게 그만큼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한다.

여자가 출가한 뒤에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한 유교적 규범 속에서도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의 규범보다 순수한 인간 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예술 속에서 나타나듯이 거짓없는 본연성을 정직하면서 순수하게 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술성을 보다 북돋아준 것은 남편이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은 사임당의 그림을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임당의 시당숙 이기(李?)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남편이 그 문하에 가서 노닐었다. 이기는 1545년(인조 1)에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크게 화를 입혔던 사람이다.

 

사임당은 남편에게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당숙의 영광이 오래 갈 수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권하였다. 이원수는 이러한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뒷날 화를 당하지 않았다.

사임당의 자녀들 중 그의 훈도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것은 셋째 아들 이이(李珥)이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했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다.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태임을 본받은 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다. 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매창(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작품으로는 <자리도 紫鯉圖>·<산수도 山水圖>·<초충도 草蟲圖>·<노안도 蘆雁圖>·<연로도 蓮鷺圖>·<요안조압도 蓼岸鳥鴨圖>와 6폭초서병풍 등이 있다.

 


■이이(李珥)-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이(李珥, 1537년 1월 7일(1536년 음력 12월 26일) ~ 1584년 2월 27일(음력 1월 16일))는 조선시대의 문신, 성리학자이며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 작가, 시인이다. 관직은 숭정대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성혼, 송익필, 김장생 등과 함께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西人)의 종주로 추앙된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를 들인 뒤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 깎고 중이 되려다가 환속한 자 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준경이 죽기 직전 붕당의 폐에 관한 유차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악하다'고 공격하였으며 이후 이준경의 처벌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후일 당쟁이 현실화하자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동인, 서인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생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공납(貢納)의 폐단 시정책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실시를 주장하고,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분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며,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 뒤 그를 문묘에 제향하는 문제를 놓고 인조 반정 이후 50년간 논쟁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에 종사되었다.

 

본관은 덕수,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아명은 현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의 5대손이며, 중종 때의 재상 이기, 이행 형제의 재종손[2]이자 통덕랑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사후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이원수(李元秀)와 정경부인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었다. 휴암 백인걸의 문인이다.

 

<생애>

●출생과 가계

 

율곡 이이는 1536년 강원도 강릉부 죽헌동에 있는 외가인 오죽헌에서, 덕수 이씨 통덕랑 사헌부감찰 이원수와 평산 신씨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죽헌 별채에서 태어났는데, 이이가 태어나기 전 신사임당의 꿈에 흑룡이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고 임신하고 출생하였기 때문에 그가 태어난 방은 몽룡실이라 일렀고, 아이 때의 이름은‘현룡(見龍)’이라 지었다가 뒤에 이(珥)로 바꾸었다. 이후 경기도 파주 본가로 와서 생활하였다.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사헌부 감찰, 수운 판관과 통덕랑을 지냈으며, 중종 때의 형제 정승 경재 이기, 용재 이행의 5촌 조카였는데, 이기는 의정부영의정을, 이행은 의정부좌의정을 각각 지냈다. 또한 종조부 이기와 이행은 당대의 실권자들이었고, 그들은 외가쪽으로는 생육신 성담수, 성담년의 조카이고, 사육신 성삼문의 외종조카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이원수는 통덕랑 사헌부감찰에 이르렀다.

 

벼슬이 낮았던 아버지 이원수는 승진하고자 일부러 당숙이자 김종직의 문인이며 글을 잘 썼던 이기의 문하에 출입했으나 부인인 신사임당의 권고로 그만두었다. 야사에 의하면 신사임당이 남편 이원수에게 이기의 집에 출입하다가 화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과연 이기는 청렴했고 글도 잘 지었으며 벼슬이 의정부영의정까지 이르렀지만, 을사사화에 가담한데다 권력을 남용한 탓에 명종 말엽 관작을 삭탈 당했다.

 

어머니 신사임당은 학문적 소양이 깊었고, 시도 잘 짓고, 글도 잘 지었고 그림도 그렸다. 또한 어머니 신사임당은 덕이 매우 높은 인격자였을 뿐만 아니라, 절개가 굳고 시부모를 잘 섬긴다고 칭송을 받던 인물이었다. 더욱이 학문이 깊고 시와 글에도 능할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는 여인으로 이이는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이런 교육환경 덕에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다. 그의 외할아버지 진사 신명화(申命和)는 조광조 등과 가까이 지냈으며 기묘사화 때의 의리를 지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외할아버지 신명화는 아들이 없이 딸만 여럿 두었는데, 딸들에게도 유교, 성리학을 가르치고, 공자, 맹자, 주자의 도리를 가르쳤다.

 

어머니 신사임당 외에 이원수는 권씨라는 첩을 한명 더 두었다. 서모 권씨는 주모 출신으로 술주정이 심하였는데, 생전의 신사임당에게 근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사임당 사후 이이를 괴롭혔으나 그는 원한을 품지 않고 서모를 극진히 모셨다.


●유년기와 소년기


이이는 어려서 신동이라 불렸다. 그는 생후 1년도 안돼 말과 글을 깨우쳐서 주변을 놀라게 하였는데, 3세 때에 이미 글을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신사임당의 글과 그림을 흉내낼 정도로 놀라운 천재였다. 이이는 4세 때 중국의 역사책인 《사략》의 첫 권을 배웠는데 가르치는 스승보다도 더 토를 잘 달았다고 한다.

 

이이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5세 때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외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1시간 동안 기도를 올릴 정도로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 행방불명이 된 이이를 찾던 가족들은 외조부 신명화의 사당에 엎드려 어머니를 낫게 해달라는 어린 아이의 정성어린 기도에 탄복하였다 한다. 또 11세 때에는 아버지 이원수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이이는 칼끝으로 자기의 팔을 찔러 흘러내리는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8세 때는 화석정(花石亭)에서 팔세부시(八歲賦詩)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숲에는 가을이 저물어 가매 / 시인의 시정은 그지없어라.

遠水連天碧 / 霜楓向日紅
물빛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 단풍은 햇빛 따라 불타올라라.

山吐孤輪月 / 江含萬里風
산에는 둥근 달이 솟아오르고 / 강에는 끝없는 바람 어려라.

塞鴻何處去 / 聲斷暮雲中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 저무는 구름 새로 소리 끊겨라.[3]


※5만원권 화폐에 도안된 어머니 신사임당林亭秋已晩 / 騷客意無窮


어머니 신사임당이 자주 병환에 눕자, 이이와 형제들은 지극정성으로 어머니 신사임당의 병구완을 하였으나 1551년(명종 6년) 어머니 신사임당은 끝내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후 이이는 정신적으로 방황하였는데, 서모 권씨의 술주정과 괴롭힘은 그의 방황을 부추겼다. 그는 외할머니 이씨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어머니의 빈자리를 외할머니에게 의존하였으나 그마저도 곧 세상을 떠난다.

 

그는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 곡산노씨와 결혼하였고, 첩 권씨와 용인 이씨(龍仁李氏) 등 몇명의 첩을 더 두었다. 그중 용인이씨의 서녀에게서 얻은 딸 이씨는 그가 만년에 본 서녀로, 이이가 죽은 뒤 그의 제자였던 김장생의 아들 김집의 첩으로 출가하였다.

 


●청소년기


▶학문 수학과 친구


1548년, 이이는 13세 때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여 시험관은 물론 부모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이의 학문은 날로 깊어가서 15세 때에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서 더는 배울 것이 없을 정도였으며, 유교 서적뿐만 아니라, 그밖에 다른 여러 책까지도 통달하고 성리학까지 깊이 연구하였다.

 

스승 없이 조광조를 사숙하다가 그는 조광조의 문하생인 휴암 백인걸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백인걸의 문하에서 우계 성혼을 만나는데, 성혼은 그의 오랜 친구가 된다. 성혼은 조광조의 다른 문하생인 성수침의 아들이자 성수침의 문하생이기도 했다. 또한 고향 파주는 친구 성혼의 아버지 성수침의 연고지이기도 했다.

 

청년기의 이이와 성혼은 시류의 타락을 논하며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맹세하였다. 그런데 1567년 선조가 인재를 추천받을 때 사림에서는 이 난세를 치유할 수 있는 인물로 우계를 천거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떤가?" 라고 우계의 사람됨을 물었다. 선조의 물음에 율곡은 한마디로 "우계는 그러한 위인은 못 되고 학문에 힘쓰는 착실한 선비다" 라고 답변했다.

 

나라의 어려움을 건질 만한 인물이라고 사림에 떠받드는 인물이기 이전에, 자신의 오랜 절친한 친구를 착실한 선비에 불과하다고 한 것은 비교적 냉혹한 평가였다. 그런데 선조가 이어서 "경과 우계를 비교하면 어떤가?"라고 묻자 이이는 "재주는 소신이 우계보다 자신이 낫긴 하나 수신하고 학문적은 노력에 있어서는 우계에 미치지 못한다." 라고 솔직하게 답변했다. 성혼역시 이이의 그러한 답변에 유감을 갖지 않고 겸허히 받아들였다.


※스승 휴암 백인걸(그는 조광조, 김식, 김안국의 학통을 다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에게 전수하였다.)


▶모친상과 방황


1551년(명종 6년) 16살이 되던 해 이이는 수운판관인 아버지 이원수가 평양으로 출장을 갈 때 따라가게 되었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묘소가 있는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서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했다.[4]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였던 이이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3년 동안 어머니의 무덤 옆에 묘막을 짓고 생활하며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또 아버지가 병으로 누웠을 때는,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또한 어머니 신사임당의 사후 자녀들은 서모인 권씨 부인에게서 수난을 겪어야 했다.[5] 온후하고 자상한 어머니였던 신사임당과는 달리 권씨 부인은 술을 무척 좋아해서 새벽부터 술을 몇 잔 마셔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는 성격이었고,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도 빈 독에 머리를 박고 엉엉 울어댄다든가 노끈으로 자살 소등을 벌이는 등 행패가 심하였다.[5]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5] 참다못한 이이는 가출을 감행할 정도였다.[5]

 

어머니의 오랜 병환과 죽음은 그에게 심적,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그는 사람이 왜 태어나고 죽는가에 대해 계속 고민하면서 한동안 방황하게 된다. 결국 금강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고, 그가 뒤에 불교에 입문했다가 환속한 뒤에도 문제 삼지 않고 받아준 것은 스승 백인걸과 오랜 친구 성혼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입산경력은 그의 생전에도 송응개 등의 동인(東人)들과 허목, 윤휴, 윤선도 등의 남인(南人) 당원들에게 이단 학문에 빠졌다는 이유로 사상공세를 당하는 원인이 된다. 이이가 승려이며 불교도라는 동인, 남인, 북인계열 유학자(儒學者)들의 사상공세는 1910년(융희 4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도 지속된다.

 

조광조의 직계 제자였던 그의 스승 백인걸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유생들과 청년들을 가르쳤고, 이이는 스승인 백인걸의 스승이자 자신의 사조(師祖)가 되는 정암 조광조 조차 급진적이라며 거침없이 비난을 가하기도 했다.


▶승려 생활과 환속


금강산 구룡연묘막에서 독서에 열중하던 이이는 불교 서적을 읽고 유교와 색다른 학문에 흥미를 느껴 3년상이 끝난 1554년(명종 9) 금강산 마가연(摩訶衍)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불교를 연구하였다.

 

불도를 닦았는데, 그가 수행하는 중 승려들 간에 생불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6] 그러나 승려생활 내내 인간이 왜 태어나고 왜 죽는가에 대한 그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결국 불교가 유교에 미치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1년 만에 마가연을 떠나 금강산에서 내려와 환속한다.[7] 산에서 하산하며 그는 승려에게 이와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연비어약 (鳶飛魚躍)

연비어약상하동(鳶飛魚躍上下同) / 솔개 날고 물고기 뛰는 이치 위나 아래나 매 한가지
저반비색역비공(這般非色亦非空) / 이는 색도 아니요 또한 공도 아니라네
등한일소간신세(等閑一笑看身世) / 실없이 한번 웃고 내 신세 살피니
독립사양만목중(獨立斜陽萬木中) / 석양에 나무 빽빽한 수풀 속에 홀로 서 있었네

 

불교의 무념 무욕이 그의 기질과는 맞지 않다고 판단, 20세에 금강산에서 내려와 다시 성리학에 탐독하며 유교의 진리를 통해 현실 문제를 타개하겠다는 다짐을 설파하며 《자경문》(自警文)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그가 한때 승려로 있었다는 점은 후일 동인과 남인에 의해 인신공격의 대상이 된다.

 

▶학자 생활과 과거에 급제


백인걸의 문인이기도 한 이이는 이황을 선학으로 모시고 존경하기도 하였다. 1558년(명종 13) 23살의 이이는 당시 대학자인 58세의 퇴계 이황을 찾아가서 만났다. 이이는 그곳에서 이틀간 머물며 이황과 학문의 여러 가지 문제와 사상을 논하고 시를 짓고 토론하였고?, 이황은 그의 재능에 크게 감탄하였다. 비록 견해를 일치시키지 못했지만 그 후 이들은 가끔 편지를 서로 주고받으며 학문에 관한 질의 응답을 나누곤 하였다. 그의 학식과 달변을 높이 산 이황은 자신의 문인은 아니지만 후생가외라 하기도 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하여 경공부(敬工夫)나 격물(格物)·궁리(窮理)의 문제를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류하였다. 그러나 이황을 방문하여 담론하던 중 이와 기의 문제를 놓고 이황을 논파하려 드는 것을 목격한 이황의 문도들은 그를 이인(異人)으로 의아하게 보면서도 적개심을 품게 되었는데, 후일 조정에 출사한 이황의 문도들 중 그를 알아보는 이가 있어 그를 스승 이황을 모욕하려 든 논적으로 규정한다.

 

이이가 질문을 하면 이황은 친절한 답변을 보냈고, 불교에서 과감히 벗어나 유교로 되돌아온 용기를 높이 평가하며 칭찬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해 겨울 별시(別試)에 장원하였는데, 이이는 13세 이후로 29세까지 생원시와 식년문과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로써 그는 과거에 총 9번 장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거리를 지나갈 때면 아이들까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 지나간다고 우러러 보았다.

 

또한 친구 성혼과의 인연으로 대곡 성운, 남명 조식 등도 찾아가 그들과도 사물과 이기론, 주자와 육구연 등을 담론하기도 했다.


●관료 생활과 개혁 활동

 

▶관료 생활 초기

 

1564년(명종 19) 이이는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곧 호조좌랑이 되었다가 예조좌랑으로 전임하여 국가를 위해 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이는 왕실의 외척 윤원형이 승려 보우를 궁중에 끌어들여 비행을 서슴지 않자 상소를 올려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고 윤원형을 관직에서 몰아냈다.

 

1567년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였으나, 명종대의 외척인 좌의정 심통원[8]은 대왕대비의 친족이라는 이름으로 축출되지 않고 재상직에 있으면서 횡포를 일삼았다. 이때 이이는 다시 상소를 올려 심통원을 탄핵하였다. 인순왕후는 곧 수렴청정을 거두었고, 심통원은 삭탈 관직되어 쫓겨났다.

 

그는 관료생활 중에도 꾸준히 이황, 조식, 성혼, 정철 등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을 연구하였다. 1568년(선조 1년) 천추사(千秋使)가 명나라로 갈 때 서장관으로 동행한 뒤, 1569년 귀국 후, 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 곧 홍문관부교리로 춘추관기사관에 겸임되었으며,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홍문관교리를 지냈으며, 그해 음력 9월에는 송강 정철과 함께 《동호문답》(東湖問答)이라고 하는 책을 써서 선조에게 올렸다. 그 무렵에 가장 관심 갖고 추진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시무’(時務)와 ‘무실’(務實)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급선무로 해결해야 하는 정치가 어떤 것인가를 명확히 밝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이는 계속 ‘시무’가 어떤 것인가를 계속하여 상소로도 올리기도 하였다.

 

심의겸은 율곡 이이가 자신의 종조부 심통원 등을 공격하여 탄핵, 몰락시켰음에도 이이에게 사사로운 감정이나 원한을 갖지 않고 계속해서 친하게 지냈다. 심의겸은 이이를 인격적으로 신뢰하였다. 이이는 그런 심의겸의 인품에 탄복하여 을해당론 이후에도 심의겸을 구원해주려 노력했고, 심의겸은 이이를 서인의 정신적 지주로 추대하였다.


▶동료들과의 갈등

 

그는 허례와 허식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도덕과 윤리와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위선과 형식, 겉치례가 팽배한 사회에서 율곡의 이러한 사물의 본질에 입각한 정직한 자세는 통용되기 어려웠다.[9]

율곡의 이러한 사물이나 인간에 대한 정직한 자세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켜 당시 동료는 물론 선배와 원로대신들로부터도 미움을 사 오국소인(誤國小人)이라고까지 지탄을 받았다.[9] 특히 원로대신들 중 허엽과 이준경 등은 율곡을 예절과 근본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분을 터뜨렸다.[9]

 

이이의 솔직함과 냉정함에 화가 난 이준경은 이이의 스승 백인걸을 찾아가 항의를 한 일도 있다. 한번은 이준경이 백인걸을 찾아가 "자네가 추천한 이 아무개라는 인간이 왜 그 모양인가? [9]" 하고 드러내놓고 역정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발언이 이이의 귀에 들어가면서 이이는 이준경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생각했고, 이준경 역시 이이의 인격을 의심하였다. 그런데 이이의 재종조부 이기는 그가 공격했던 동고 이준경과 정적관계이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사사로운 원한관계로 그가 이준경을 싫어한다, 미워한다는 인신공격성 낭설이 돌기도 했다.

 

이이는 서경덕이 성리학자 답지 않게 도에 치우쳤음을 공박했고,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비판하여 이와 기는 한 몸체에서 나온다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했다. 이는 서경덕과 이황의 문하생, 추종자들의 분노를 자아냈고, 허엽과 김효원, 송응개, 윤승훈, 허봉, 송응형 등은 이이를 줄기차게 비난하고, 공격하게 된다.

 

※정적의 한사람인 허엽

 

▶인재 천거


그러나 사심 없이 사물을 판단하려는 그의 자세는 선조를 매료시켰고, 선조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불러 자문하곤 했다. 젊은 나이에 왕의 자문역을 맡게 된 것을 부담스러워하여 스스로 사양하였으나, 왕은 계속 그를 불러들였다.

 

사림의 천거로 친구 성혼이 중망에 오르자 선조는 율곡을 불러 "사림에서는 이 난세를 치유할 수 있는 인물로 우계를 천거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떤가?" 라고 그에게 성혼의 사람됨을 물었다.[9] 율곡과 우계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는 동심일체의 교우관계를 지닌 사이였다. 하지만 선조의 물음에 율곡은 한마디로 "우계는 그러한 위인은 못 되고 학문에 힘쓰는 착실한 선비입니다" 라고 답변했다.[9] 나라의 어려움을 건질 만한 인물이라고 사림에서까지 떠받드는 절친한 친구를 착실한 선비에 불과하다고 한 이 답변 역시 일상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냉혹한 평가다. 선조가 이어서 경과 우계를 비교하면 어떤가라고 묻자, 율곡은 "재주는 소신이 우계보다 좀 나으나 수신과 학문의 힘씀에 있어서는 우계에 미치지 못합니다" 라고 답변했다. 율곡다운 정직한 답변이었다.[9]

 

어느 땐가 선조가 "경은 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묻자, 율곡은 "전하께서는 선한 의지를 가지고 계시니 학문에 힘쓰고 노력하면 현주賢主가 될 수 있습니다" 라고 답변했다.[9] 이러한 질문에서 기대되는 답변은 임금을 즐겁게 하는 과장된 평가일 것이다. 하지만 율곡은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진실되게 대답했다. 또 선조가 율곡에게 어떠한 사람을 등용해야 하는가를 묻자, 율곡은 "전하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되도록 피하고 자기 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십시오. 전하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전하를 배신할 가능성이 있지만, 자기 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전하를 결코 배신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답변했다.[9]

 

선조임금은 우계와 더불어 당시 정승감으로 물망에 오르고 있던 사암 박순, 퇴계 이황, 그리고 스승 백인걸에 대해 인물평을 했다.[9] 백인걸에 대한 인물평을 요구받은 율곡은 한마디로 "기고학황氣高學荒" 이라고 답변했다. 쉽게 말해서 "기가 높고 글이 거칠다"는 것이다.[9] 조광조의 문하생 중 수제자요, 자신의 스승이자 노상 자신이 가까이 모신 어버이 같은 인물에 대해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냉혹한 평가였다.[9] 그러나 이는 동인에 의해 이이의 인격을 걸고넘어지는 꼬투리로 작용하게 된다.

 


●붕당 조절 노력


▶동서 분당 직전

 

1570년(선조 3년) 관직을 사퇴하고 황해남도 해주 야두촌(海州野頭村)에 돌아가 학문의 터를 닦았다. 이듬해인 1571년 조정의 부름을 받고 청주목사로 임명되어 내려간 그는 서후향약을 정하고 백성들의 자치 생활을 권장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다음해 그는 학문 연구를 위하여 신변을 핑계로 사직하고 해주로 낙향했다가 파주의 율곡촌으로 돌아와 학문에 힘썼다.

 

1572년 이준경이 병으로 임종하기 직전에 사림들이 당을 나누어서 싸울 것을 예견하였다. 그리고 당쟁의 중심인물로 이이를 지목하였다. 화가 난 이이는 이준경이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이준경이 당쟁을 예견하는 글을 쓰자 그는 죽음에 이르러 그 말이 악하다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러나 일부 사림 인사들은 그의 종조부 이기가 이준경과 원수였던 것과, 관료생활 초반 그의 솔직함을 비판하고 예의 없는 인간으로 몰은 것에 대한 한풀이로 해석하였다. 뒤늦게 을해당론으로 동인, 서인 분당이 확실해지자 그때 당론을 인정하고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였다.

 

한편 윤근수, 윤두수, 정철, 송익필 등이 그와 친해졌고 그는 자연스럽게 서인으로 기울게 된다.

 

 

▶정치 활동과 학문 연구

 


그러나 1573년(선조 6년)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아 승정원의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우부승지로 옮겨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길고 긴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이이는 조선의 정치와 사회 풍습 중에서 잘못된 것 7가지를 국가적 근심거리라고 지적하였고 세세하게 설명하여 개선책을 강구하라는 요구 사항을 열거하였다. 선조는 이이가 올린 상소문을 보고 감동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곧 병조참지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음력 3월 이이는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병으로 사퇴하고 다시 고향인 경기도 파주 율곡촌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에 전심하였다.

 

1574년(선조 7년)에는 또 조정의 요구로 황해도 감사로 약 반 년 간 재직하였다. 그 후에도 자주 조정과 고향을 왕복하면서 대사간·대사헌·호조판서·대제학·이조판서·우찬성·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42세 때인 1577년 황해도 해주의 석담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글을 배우는 사람을 위해서 기초 서적인 격몽요결을 저술했다.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힘을 쓰다가 1580년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아 하는 수 없이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듬해 음력 9월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성학집요》를 저술하였다. 5편으로 구성된 이이의 책을 받아본 선조는 “이 책은 참으로 필요한 책이다. 이건 부제학(율곡)의 말이 아니라 바로 성현의 말씀이다. 바른 정치에 절실하게 도움이 되겠지만, 나같이 불민한 임금으로 행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이는 평생 동안 대사간에 1만 9번이나 임명되었고, 선조의 신임은 계속되었다. 1581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가 곧 예문관제학에 임명되어 대사헌으로 예문관제학을 겸임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예문관대제학과 홍문관대제학을 겸임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정치적 동지 송강 정철

 


▶정쟁 조정 노력과 실패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격화되자 그는 동인의 김효원, 서인의 심의겸과 정철을 동시에 탄핵하여 양당의 강경파들을 일선에서 후퇴시킴으로써 당쟁을 조절하려 하였다. 그러나 동인들은 그가 일찍이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된 것과, 그 승려가 되는 과정에서 서모(庶母) 권씨와 싸웠던 점을 집중 부각시켜 그를 공격하였다. 또한 당시 사대부가에서는 첩을 거느리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그가 첩을 여러 명 거느린 점[10] 역시 동인(東人)당의 인신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동인들은 그의 재종조부 이기[11]가 장리(탐관오리)의 사위라서 관직에 제한을 받아야 했으나 이언적의 구제를 받고 출사했는데도 명종 때 을사사화에 가담하였고, 말년에 권력을 농단하다가 삭탈관직 당한 것까지 그에게 연결시켜서 공격하였다.[12]

 

그는 당쟁의 조절과 정쟁 중단을 촉구하였지만, 붕당은 군자의 붕당과 소인의 붕당이 존재한다고 봤고 서인을 군자의 붕당, 동인은 소인의 붕당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당쟁을 조절하는데 노력하였지만, 비교적 서인의 입장에 서서 당쟁을 조절하려 하였고, 이는 동인에게 늘 불평불만과 적개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당쟁 조절을 중립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한 정여립은 서인에서 탈당하여 동인으로 건너간다.

 

※율곡 이이 서한


●개혁 방안

 

▶군제와 공직 개혁

 

또 1583년(선조 16)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병조판서로 시작된 그해 음력 2월에는 국방 강화를 위해 《시무육조》를 계진하였는데 내용은 첫째 어진이를 등용하시오, 둘째 군대와 백성을 제대로 키우시오. 셋째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마련하시오, 넷째 국경을 견고하게 지키시오, 다섯째 전쟁에 나갈 군마(軍馬)를 충분하게 길러야 합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교화(敎化)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같은 해 음력 4월 다시 ‘봉사’(封事)를 선조에게 올려 그동안 주장했던 폐정에 대한 개혁을 실시할 것을 다시 반복해서 요구하였다.

 

봉사에는 공안(貢案)의 개혁, 군적을 고치고 지방의 군현을 합병하여 불필요한 공직자 수를 줄이고, 관찰사(도지사)의 임기를 보장하여, 관찰사로 하여금 지방을 제대로 다스릴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하는 요구였고, 서얼 제도를 폐지하며 신분에 관계없이 천민이나 노비 중에서도 능력 있는 사람은 평등하게 공직에 발탁하여 나랏일을 맡겨야 한다 등이었다. 그리고 ‘찬집청’(纂輯廳)이라는 관청을 신설하여 국가에서 각종 서적들의 편찬 사업을 주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경제사(經濟司)’를 신설하여 국가의 경제 문제의 해결을 담당하는 전담 부서로 활용해야 한다고 방안을 내놓았다.

 

그는 양반에게도 군역을 부과하고 병력을 증강할 것을 주청하였다. 군사비용 발생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불필요한 관직자의 수효를 줄이고, 실직에 있지 아니한 자에게는 품계 역시 회수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양반들의 집단 반발에 부딛쳐 공세의 대상이 되었다.

 

▶서얼 허통론

 

1583년(선조 16년) 변방에서 이탕개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병조판서 율곡 이이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제안으로, 전쟁에서 공훈을 세우거나 군량미를 내면 서얼에게도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태종의 유언을 빌미삼아 서얼차대에 집착했던 양반들의 반대에 부딛혀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이의 납속 허통 주장은 서얼허통의 물꼬가 됐다. 바로 이 때 이언적의 서손자이자 이전인의 아들인 이준도 납속허통을 받아 자신과 후손들의 과거 응시 길을 열었다. 이언적의 서자 이전인은 뛰어난 학행과 효심이 남달랐으나 서자라는 이유로 이언적의 대를 잇지 못했다.

 

서얼 허교 주장 역시 유학자들에 의해 태종 이방원의 유지를 거스르는 행위라는 비난을 계속하였고, 동인에서는 그가 사사로운 원한으로 불교에 입문했던 점을 계속 들먹이며 그가 사회를 어지럽힐 생각으로 서얼의 허통을 주장한다며 공세를 계속하였다.

그의 서얼 허통은 신분제를 문란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는 동인들의 공격을 받았고, 심지어는 같은 당인 서인들로부터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동인인 류성룡과 정구가 그의 서얼 허통 주장에 '인재를 가려 쓰는 데는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며 당색을 초월하여 동의하였다.


▶십만 양병설

 

또한 이이는 선조에게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동인의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14] 그는 일본의 춘추전국시대는 종결될 것이며, 일본을 통일할 무사는 일본 내 세력 내 갈등 완화와 국내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 미구에 명나라나 조선을 침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의 도발에 대한 대응으로 그는 10만 명의 정병을 양성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견해는 동인에 의해 왕을 현혹하기 위한 발언으로 치부되었고, 서인조차 그의 생각이 지나친 상상력과 허언이라며 호응해주지 않았다.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던 당시, 조선의 총 병력수는 장부상으로는 30만 명이 넘었으나, 실제 전투 가능한 병력 숫자는 1,000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15] 1581년 대제학 재직 중 오랫동안 저술하던 《경연일기》의 완성을 보았다.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이이는 1582년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여진족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대제학을 역임하고 우찬성에 올랐다. 이듬해 당쟁의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탄핵을 받아 일시 퇴직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가 되는 등 반대파의 탄핵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경륜와 소신을 펼칠 만한 기회는 부족하였다.


▶십만양병설에 관한 의혹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학자도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십만양병설은 당시 조선의 사회적, 경제적 능력으로 보았을 때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사안이었으며, 그러한 한계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던 실무적 유학자인 이이로서는 오히려 십만양병설을 주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한다.

 

실제로 이이가 올렸던 상소문과 각종 글을 모은 문집을 살펴보면 당대 다른 중신들도 즐겨 쓰던 '양병'이란 글자는 나올지언정 '십만양병'에 관련된 내용은 일체 나오지 않는다고 하며, 오히려 군축을 해야 한다는 상소문이 십만양병설 대신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어 덧붙이기를, 십만양병설에 관련된 내용은 후대에 세워진, 율곡 이이를 기리는 비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고 하며 이는 율곡 이이를 숭배하던 후대 조선 유학자들이 일종의 신성화를 노려 임의로 추가하였다고 한다.

 

▶후학 양성

 

정여립은 일찍이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이의 다른 제자들은 정여립을 "넓게 배우고 많이 기억하여 경전을 통달하였으며, 의논이 과격하고 드높아 바람처럼 발하였다"고 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16] 이이 역시 정여립의 재주를 총애하였다. 그러나 이이는 그의 과격성을 눈여겨보았고 때로는 그를 경계하게 된다.

 

훗날 정여립이 과거에 급제하고 이이의 문하를 다시 찾아갔을 때 그가 서인당을 왜 찾아왔는지 까닭을 묻자, 정여립은 "저는 서인당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율곡 선생님을 찾아온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17]

 

한때 정여립의 재주를 아껴 총애했다던 이이는 죽기 석 달 전에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관직(이조판서직)의 사퇴의 상소를 선조에게 올리면서, "정여립은 박학하고 재주는 있으나 의논이 과격하여 다듬어지지 못한 병폐가 있다"고 지적하였을 정도였다.[16] 이에 선조 임금도 "그런 사람을 어찌 쓸 수 있겠는가? 사람을 쓸 때는 그 이름만 취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시험을 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16]"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이이와 선조가 정여립을 이처럼 평하고 배척하였던 데는 다른 사적인 문제도 있었을 터이지만, 이이는 당시의 상황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감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즉 그 때는 동인과 서인간의 대립이 점차 양극화되기 시작한 때였고, 선조는 이를 제대로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이런 때에 재주와 출세 의식, 과격한 성격을 가진 정여립은 자칫 분란의 소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이이와 선조는 경계했던 것이다.[16] 정여립이 뛰어난 재질과 대담한 용기를 가진 인물임을 한편으로 인정하면서도, 선조와 그 측신들은 정여립이 이이를 배척했다는 이유로 그를 향리로 추방하고, 결국 반역의 굴레를 씌워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16]

 

●생애 후반

 

▶정여립과의 갈등

 

정여립은 총명하고 논변을 잘하여 널리 이치를 탐구하는 데에만 힘썼으며, 특히 시경과 훈고, 물명(物名)에 정통한 것으로 자부하였다.[17] 그는 이이의 문하만이 아니라 성혼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이이와 성혼도 정여립의 박식, 총명함을 좋아하여 그를 조정에 적극 천거하기도 하였다.[17] 1570년(선조 2년) 식년 문과 을과에 급제한 정여립은 다시 스승인 이이의 문하에 출입하며 수학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이 문하에 드나드는 선비들이 오직 서인뿐이고 동인들은 전혀 보이지 않자, 이이에게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17]

 

정여립 : 서인만이 이 나라 사대부입니까?
이이 : 동인들은 늘 반대만 하거든.
정여립 : 그래도 그렇지, 동인에도 반드시 인물이 있을 텐데 무조건 백안시하는 건 좋지 않은데요.
이이 : 뭐야?
정여립 :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지 동인 서인 나뉘었다고 일부 선비들이 그들을 짐승으로 취급할 것 까지는 없잖습니까?
이이 :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나


이이는 동인들의 공격으로 동인들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한편 다시 찾은 스승 이이가 아직도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바라보리라 생각했던 정여립은 실망하게 된다. 이미 이이와 정여립 사이에는 이미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였고, 서인이 대부분인 이이의 다른 제자들과도 마찰을 빚었다. 정여립에 대한 이이의 불신이 깊었던 것으로 짐작된다.[17] 이런 이유로 정여립은 스승을 배반했다는 공격을 받게 되었고, 끝내 그 보복을 받았던 것이다.[17]

 

이이와 정여립 사이에 서인과 동인에 대한 인식 차이로 약간의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 다 붕당에 얽매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인물들이다.[18] 이이는 평소 선조에게 붕당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할 것을 건의한 바 있었고, 정여립은 이이 문하에 의외로 서인당이 많고 그들이 편견이 심하다는 사실에 반발하였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정여립은 이미 이이가 죽기 전에 서인당을 떠났던 것이다.[18] 그런가 하면 정여립이 이이를 배반했다는 당시 서인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여립은 이이를 참다운 성인으로 숭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8] 오히려 이이는 정여립의 과격한 성격을 상기시켜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반대하였다.[18]

 

▶과로와 병세

 

병조판서로 있을 때부터 갑자기 과로로 쓰러진 그는 관작을 사퇴하고 요양하게 된다. 그러나 동인은 계속 그를 탄핵하고 공격하였다. 그는 서인의 영수인 심의겸을 비판하였고, 정인홍의 심의겸 탄핵 상소에도 동조하였음에도 1583년(선조 17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거듭된 탄핵으로 스스로 사직했다가 같은 해 다시 판돈녕부사에 임명되고,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결국 당쟁을 조절하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동인들에 대한 이이의 미움과 원망, 인간적인 감정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또한 당쟁 조절 노력에 협조하지 않는 같은 서인 당원들 일부에게도 인간적인 혐오감과 환멸감을 느끼게 된다.

 

1583년 정여립은 예조좌랑이 되었는데, 이어서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다.[19] 이이는 당시 이조판서직에 있었으며, 아마도 정여립의 과격한 성격을 간파하였던지 그의 임명을 반대하였다.[19] 이이는 자신의 문인이기도 했던 그의 과격성을 보고는 은근히 그를 경계했다. 그러나 이이는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관직 생활을 오래 계속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이이가 죽은 두달 후 정여립은 홍문관수찬에 올랐다. 정여립은 수찬에 오른 뒤 이이를 비난하고[20], 동인계 인사들과 가깝게 지내게 된다. 결국 정여립은 이이가 싫어했던 동인들과 가까이 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선조의 미움을 사서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20]

 

▶죽음

 

당색으로는 서인에 속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동인과 서인의 당쟁을 조절하려고 노력하였음에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동인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는 성혼, 류성룡, 정구, 우성전, 송익필, 조헌 등의 지기들에게 당쟁을 조절하려다가 동인의 미움을 산 일을 한탄하며 통곡하였다. 동인의 집중 탄핵을 받아 지친 이이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경장(更張)하고 싶어하던 구국의 뜻을 풀지 못한 채 병을 얻어 사퇴하고 와병하였다.

 

병석에 누운 동안에도 동인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그는 1584년(선조 19년) 음력 1월 16일 새벽에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율곡촌에서 향년 4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가 남긴 재산은 서재에 가득한 책들과 부싯돌 몇 개였다.

 

문인으로는 조헌, 김장생 등이 있다. 이 중 김장생은 그의 친구인 송익필의 문하와 성혼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는데, 송익필이 노비로 환천 되면서 학문적 연원을 이이와 성혼에게서만 찾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한탄하며 피난길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사후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춘추관 관상감사에 추증(追贈)되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도 동인과 동인의 분파인 북인, 남인은 이이가 1년간의 입산 경력이 있음을 놓고, 불교와 관계했다 하여 온갖 트집을 잡아 비방을 하였다.

 

▶사후

 

장지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장사되었다. 증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임진왜란 당시 그의 부인 교하 노씨와 하녀 1인이 그의 묘소 주변에서 시묘살이를 하며 묘소를 지켰다. 왜군이 노씨와 하녀를 겁탈하려 하자 이들은 자결로서 항거하였는데, 임진왜란이 종결된 뒤 후대에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누가 부인 교하 노씨이고 누가 하녀인지 분간할 수 없었으므로 이들의 시신은 율곡 이이의 묘소 앞에 합장하였다. 부인과 하녀의 묘소가 이이의 묘소 앞에 소재한 것은 그 때문이다.

 

1615년(광해군 7년)에 율곡의 애제자 김장생 등의 공의로 고향 파주에 그를 모신 사당 문성사(文成祠)가 설립되었다. 문성사는 1649년(효종 즉위년) 효종왕이 사액을 내려 자운서원(慈雲書院)이라 하였다.

1631년(인조 8년)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이이의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이항복(李恒福)이 글을 짓고 신익성(申翊聖)이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새겨 넣었다.

 

우계 성혼과 구봉 송익필과는 이웃에 사는 절친한 친구였는데, 1682년(숙종 8)에는 우계 성혼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다시 기사환국으로 출향되었다가 갑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다시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가 죽은 후 황해도 백천(白川)에 문회서원(文會書院)이 건립되어 그를 제사하였으며, 강원도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제향 되었다.

 
1982년부터 2006년 1월 1일까지 사용되던 대한민국의 5천원권 조폐1972년 7월부터 대한민국에서 발행중인 5천원권 지폐 도안의 주인공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몇번에 걸쳐 화폐 도안이 변경되었으나 5천원권의 주인공으로는 계속 채택되고 있다.

박정희는 그의 개혁안을 높이 평가하여 이순신, 세종대왕, 광개토대왕, 이황 등과 함께 역사적인 국민 영웅으로 강조하였는데, 이는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제자이자 학문적 계승자인 사계 김장생 서인 예학의 종조였다.


●이이의 사상

 

▶학문관

 

그는 보기 드문 천재로서 성격과 태도가 이황과는 달리 기상이 호탕하고 도량이 넓어 학문에서도 분석적인 해석보다는 근본 원리를 자유롭게 종합적으로 통찰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는 학문에 대하여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학문을 참된 학문이라고 규정하였다. 아무리 훌륭하고 고결한 이론이라고 해도 현실에 적용이 불가능하다면 이는 헛된 공리공담이라는 것이 그의 사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후배인 서인은 그의 실용사상을 사장시키고 관념적이고 교조적으로 나아가 당쟁을 격화시키게 된다.


▶이기 일원론

 

그는 이와 기는 하나라고 판단했다. 그의 사상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로 대표되며, 그가 23세 때 지은 《천도책(天道策)》에 이미 그 바탕이 드러나 있다. 즉 율곡은 이황이 기(氣)와 이(理)는 서로 독립되어 있다는 데 이설(異說)을 제기하여 우주의 본체는 이기이원(理氣二元)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인정하나 이와 기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분리되거나 선후(先後)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와 기는 최초부터 동시에 존재하며 영원무궁하게 떨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이는 조리(條理), 즉 당연의 법칙으로 우주의 체(體)요 기는 그 조리를 구체화하는 활동이니 우주의 용(用)이라 주장하였다.

 

그리고 도덕적 가치에서도 인간심리의 근본이 이와 기의 두 가지 근원이 있지 않고 일원적이라 하여 퇴계의 사단칠정(四端七情)설을 배격하였다. 이러한 학설은 서경덕과 이황의 설을 절충하여 집대성한 것으로 그는 자기의 주장을 발전시키면서 이 주장이 주자의 뜻과 어긋나면 주자가 잘못 된 것이라고까지 하는 자신을 얻게 된 것이다. 이같이 그는 학문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경세가(經世家)로서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저작인 《동호문답(東湖問答)》, 《성학집요(聖學輯要)》,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시무육조소(時務六條疏)》 등은 모두 임금의 도리와 시무를 논한 명저로 그의 정치에 대한 태도는 유학자의 이상인 요순시대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향약과 규례


이 밖에 정치적 부패의 타개와 백성의 구제에 대한 방책에 관해서는 한층 구체적인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율곡은 부패의 시정책 7개항을 제시하였는데 특히 그 중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여 임진왜란을 예언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 밖에도 대동법의 실시와 사창의 설치 등을 제의한 일은 조선 사회 정책에 획기적인 혁신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일반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藥)》,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동거계사(同居戒辭)》, 《학교모범(學敎模範)》, 《해주은병정사학규(海州隱屛精舍學規)》, 《약속(約束)》, 《문헌서원학규(文獻書院學規)》 등의 규례를 많이 만들었다.


▶정당관


그는 정당을 군자의 정당과 소인의 정당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이의 붕당관은 기존의 성리학적 붕당관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나, 소인의 정당을 완전히 배척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다만 군자의 정당을 상대적으로 많이 등용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고 판단하였다.


▶여성 교육관


그는 기존의 유교나 성리학의 남녀 차별에 반대하였다. 여성 역시 하나의 인간이자 인격체로 간주하였고, 여성에게도 유교와 성리학을 가르쳐 인의예지와 도덕적 소양을 가르쳐야 된다고 확신했다. 그의 이런 사상은 집안의 여성들에게 사서삼경을 직접 가르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또한 그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딸들에게도 유교와 성리학을 가르쳤던 외할아버지 신명화의 영향력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 명의 첩을 거느리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독서관

 

이이는 그의 저작 자경문(自警文)에서 독서에 대한 생각을 규정하였다.


새벽에 일어나면 아침나절 할 일을 생각하고, 아침밥을 먹고 나면 낮 동안 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 때면 내일 할 일을 생각한다. 아무 일이 없으면 마음을 내려놓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을 하여 일 처리에 마땅한 방도를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 독서를 한다. 독서란 옳고 그름을 분변(分辨)하여 일을 행하는 데 실천하는 것이다. 만약 일을 살피지 않고 오뚝 앉아 독서만 한다면, 무용한 학문이 된다.[21]


또한 격몽요결의 4장에서 율곡은 독서에 대해 상세히 논하고 있다. '배우는 사람은 늘 이 마음을 보존하여 사물의 유혹에 져서는 안 된다. 반드시 이치를 따져보고(窮理), 선(善)을 밝힌 뒤에야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가 눈앞에 드러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道)로 드러내는 데는 이치를 따지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이치를 따지는 데는 독서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성현(聖賢)들이 마음을 쓴 자취와 본받거나 경계해야 할 선과 악이 모두 책에 있기 때문이다.[21]'라고 하여 독서를 세상, 사물의 이치와 진리를 깨우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로 해석하였다.


▶학맥


이이는 학문적으로는 김종직 학파의 직계로서, 친구인 성혼과 함께 백인걸의 문하생이었다. 성혼은 백인걸 외에도 성수침에게도 사사했는데, 백인걸과 성수침은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이들의 친구였던 노수신 역시 이연경의 문인으로, 이연경 역시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그는 관료생활 중에도 스승인 백인걸을 자주 찾았는데, 이이가 백인걸과 함께 정암 조광조와 퇴계 이황의 인물평을 논하면서 정암과 퇴계의 우열을 놓고 평을 했는데, 이때 이이는 스승인 백인걸에게 조광조에 대해 타고난 성품은 훌륭하였지만 학문이 성숙하지 못한 채 관직에 나가서 일을 그르쳤다고 소신을 피력했다. 백인걸은 조광조의 문하생이었다.

 

조광조는 다시 김종직의 문하생의 한사람인 김굉필의 문하생이기도 하다. 이이와 성혼의 문하생들 중의 한명인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송시열과 송준길 등이 배출되었고, 이이와 성혼은 후일 서인의 종주로서 추앙되었다.

 


●평가

 


긍정적 평가이항복은 이이의 신도비를 썼다.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은 이이의 가장 큰 제자로 이이의 일대기인 ‘행장’을 지어 이이의 업적을 찬양하였다. 김장생은 이이를 추모한 율곡행장에서 “고려 말엽에 문충공 정몽주 선생이 처음으로 도학(道學)을 열어 명유들이 이어져 조선에 와서 번창한다. 그러나 학문이 높고 밝은 데에 이르고 재주가 경국제세의 역량을 감당할 만하고 의리로써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났던 사람에는 조광조와 율곡 두 분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율곡이야말로 만세토록 태평성대의 나라를 세우려 했으니 그 공로가 원대하다 말하겠다며 극찬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동방지성인(東方之聖人)이라는 칭호를 받고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후세의 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제자로는 사계 김장생, 중봉 조헌, 수몽 정엽, 묵재 이귀 등의 학자들이 율곡의 문하였다.

 

율곡이 대학자이면서 뛰어난 정치가로 평가 받을 수 있었던 점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신사임당을 어머니로 두었다는 점이다. 율곡은 어렸을 때 문학, 예술에 조예가 깊은 신사임당으로부터 수학했다. 조선 시대에는 여성은 한문 서적을 읽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어머니에게서 글을 배우고 학문을 익히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고, 또 그것이 남들과는 독자적인 길을 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둘째, 퇴계 이황이라는 선배가 있었다는 점이다. 율곡은 23세 때 도산서원으로 직접 퇴계를 방문했고, 그 뒤로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과 개인적 신상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퇴계를 극구 만류했고, 퇴계가 죽고 나서는 만시(輓詩)를 지어 애도했다. 퇴계와 함께 조선 성리학의 두 줄기를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후대 학자들이 학파와 붕당의 형성에 따라 퇴계와 율곡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것처럼 만들고, 그에 따라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적대적인 관계처럼 되어버렸지만, 당대에는 서로를 인정한 좋은 선후배였다. 율곡은 그런 선배와의 편지 교류 등을 통해 학문적 연마를 할 수 있었고, 선배가 이루어놓은 성과를 디딤돌로 해서 자신의 학문적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셋째, 선조 시대에 활동했다는 점이다. 율곡이 관직에 진출하자마자 문정왕후가 사망하고 외척인 윤원형이 탄핵을 받았다. 사화로 얼룩졌던 시대는 지나가고 사림이 중앙의 무대에 오르는 때가 된 것이다. 개혁 의지가 강하고 학문적 역량이 있었던 율곡이 사림파가 정계의 중심이 된 때에 관직에 들어갔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율곡보다 서른다섯 살 위였던 퇴계의 경우 사림이 위축되었던 때에 관계에 있었으므로 조정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으로 물러나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던 것과는 대비된다. 물론 선조의 한계, 사림의 분열 등 이후 전개되는 상황이 율곡을 괴롭혔다는 점을 간과할 순 없다. '십만 양병설' 등의 건의에 대해 선조가 미온적으로 받아들였고, 또 붕당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조율하려고 했으나 동인과 서인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결과를 낳아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렇더라도 율곡은 항상 중앙 정계의 한 중심에 서 있었다.

 

넷째, 학문적 지식이 있었던 친구들과 교류했다는 점이다. 평생의 친구인 성혼, 송익필, 정철 등 당대의 인사들이 주위에 있어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격려해 주어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었다. 율곡은 몸이 좋지 않거나 뜻이 좌절될 때면 선대의 고향인 파주로 물러나 학문과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학문과 교육 분야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고 제자도 많이 양성했다.

 

※율곡 이이의 초상이 쓰인 5,000원권

 

▶부정적 평가


이준경이 당쟁의 화를 예언했을 때, 그는 뒤에 후회하고 신념을 바꾸기는 했으나 이준경을 강한 어조로 비난하여 그에 대한 처벌 여론을 형성하게끔 유도하기도 했다. 유성룡 등이 이준경을 옹호했는데 이는 후일 이인좌의 난 당시 경상북도 지역이 집중적으로 호응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당쟁의 조절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서인의 입장에서 조절하려 노력한 한계점이 있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그가 동인 인사들이 유배되도록 사주했다며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율곡은 유학자로서 이름이 높았고 또 서인으로 자처하지 않았으나, 세 차례에 걸쳐 귀양 보낸 일에 손을 쓴 것은 경솔했다.[22]'며, '이 일로 조정이 혼란에 빠져 수습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22]'고 비판했다.

 

지나치게 왕에게 의존적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이이는 지나치게 왕에게 의존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그것 역시 잘못이다. 그는 선조를 착한 개혁군주로 만들어 조선을 재건하려는 정치노선을 신봉했다.[23] 그러나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인물에게 성인(聖人)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다. 물론 의지박약으로 큰 뜻을 세우지 못하는 왕에게 큰 뜻을 품으라고 설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23]

 

정조처럼 좋은 아버지를 두지 못했기에 이이는 착하지만 세상일에 뜻이 없는 아버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결과 지나치게 왕에게 집착했다.[23]

 

● 저서 및 작품

 

▶저서

 

《성학집요》(聖學輯要)
《격몽요결》(擊蒙要訣)
《동호문답》(東湖問答)
《소학집주》
《만언봉사》
《기자실기》
《경연일기》(經筵日記)
《순언》(醇言)
〈인심도심설〉
〈김시습전〉

 

▶작품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藥)》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동거계사(同居戒辭)》
《학교모범(學敎模範)》
《해주은병정사학규(海州隱屛精舍學規)》
《약속(約束)》
《문헌서원학규(文獻書院學規)》
《자경문》


● 가족 관계

 

할아버지 : 이천
아버지 : 이원수(1501-1561) - 통덕랑 사헌부감찰 수운판관 역임, 좌찬성에 추증
어머니 :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년~1551년)
서모 : 권씨(權氏)
누이 : 이매창
형  : 이번, 이선
동생 : 이우
부인 : 곡산 노씨(谷山盧氏[24], ? - 1592년),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
첩 : 용인 이씨(龍仁李氏)
서녀 : 김집의 첩이 되었다.[25][26][27]
서녀사위 : 김집
첩 : 권씨(權氏)
장인 : 노경린, 본관은 곡산
외할아버지 : 신명화
이모 : 신씨
이종사촌 : 권처균(權處均)
재종조부 : 이기, 이행[28]
친척 : 이순신
사돈 : 김익훈


● 논란과 의혹


1579년의 곽사원의 제방 송사가가 정언지 등에 의해 1589년 터지게 된다. 이 10년 된 사건은 결국 주관 부처인 공조의 참판 정언지의 상소로 선조의 결심을 얻어 조사하게 되었다. [29] 그 과정에서 의혹이 있는 송익필 일가의 뒤를 이이가 봐주었다는 것이다.

토목 공사를 둘러싼 부정 사건에 송익필의 조카 사위(송익필의 형 송한필의 사위)가 관련되었고, 그 동안 이이가 이 사건을 극력으로 돌보아주었다[29]는 의혹이 있다.

 

▶동인의 남북 분당시 의심


이발, 정인홍 등이 우성전의 축첩을 문제삼은 것 역시 동인 강경파들의 온건파에 대한 불신, 의혹의 한 원인이 되었다. 우성전은 여러 명의 첩을 두었는데 이 점이 일부 동인 소장파들에 의해 의혹으로 제기되었다.

그런데 우성전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동인들은 이이를 (배후로) 의심했다. 우성전은 당시 동인들이 떠받들던 인물이었다.[30] 우성전은 학문적 소양도 폭넓었고 지략이 남달랐으며, 경세에 대한 관점이 뚜렷하였다.

 

동인들이 "우성전이 대신이 된다면 만백성이 잘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동인들이 떠받드는 새로운 지도자였다. 이런 우성전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는데, 기생 한 명을 지나치게 좋아한 것이었다.[30] 심지어 우성전의 부모상 때에도 이 기생이 상례에 어긋나게 머리를 풀고 우성전의 집에 출입할 정도였다.[30]

상중에 기생이 우성전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보고 해괴하게 여긴 인물은 동인 이발이었다.[30] 이발은 사헌부장령으로 있던 정인홍에게 우성전의 부모상에 기생이 출입하더라고는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훗날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는 정인홍은 재야에 오래 있던 사람으로서 자신의 깨끗한 처신을 자랑삼아 온 인물이었다.[30] 그는 예에 어긋난 이러한 일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앞장서서 우성전을 공격했다.[30]

 

정인홍이 우성전을 탄핵한 것은 이처럼 동인인 이발의 토로에 의한 것이었는데, 동인들은 이 것 역시 이이가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이이를 의심하였다.[30]

 

▶유배 사주 의혹


훗날의 남인 학자 이중환은 자신의 저서 택리지에서 그가 (동인계) 사람들의 탄핵, 귀양을 배후에서 사주했다.[22]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불교 승려 의혹


19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는 금강산에 들어가 1년간 승려로 생활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의 정적들은 이를 두고 그가 학자의 탈을 쓴 중(불교 승려)이라고 비난하였다. 율우의 문묘종사 논쟁이 벌어지자 허목은 이이를 유학자의 옷을 입은 불교 승려라고 비판했다. 윤휴도 허목과 같은 시각에서 이이를 비판했다.

 

인조 즉위 초부터 시종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 종사를 놓고 논란이 발생했다. 남인 중에서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핵심 인물들은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 등이었다.[31]

율우의 문묘종사 논쟁이 벌어지자 허목은 이이를 유학자의 옷을 입은 불교 승려라고 비판했다. 허목이 율곡 이이의 문묘 종사를 바?한 명목은 그의 학문이 유교가 아닌 불교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이었다.[31]

 

학문에는 차례가 있고 공(功)에는 순서가 있다. 율곡은 한갓 큰 것을 이기려는 굉장한 논의를 갖고서 자신이 (싸움에서) 이기기만을 힘썼다. 그는 '먼저 중요한 길을 찾아 문정(門庭)을 훤히 연 뒤에라야 정해진 방향이 없이 널리 배울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는 도(道)를 보는 것을 먼저 하고 학문을 뒤로 돌린 것으로 학문 방법을 거꾸로 한 것이다. 이는 불교의 돈오법(頓悟法)이지 공자의 가르침이 아니다.[31]

 

허목은 이이가 당쟁을 조절하는 것처럼 행세했지만 '율곡은 한갓 큰 것을 이기려는 굉장한 논의를 갖고서 자신이 (싸움에서) 이기기만을 힘썼다.[31]'며 이를 부인하였다.

 

백호 윤휴도 허목과 같은 시각에서 이이를 비판했다.


울곡 이이가 성학집요(聖學輯要) 서문에서 말하기를 '먼저 요로(要路)를 찾아서 문정(門庭)을 확실히 연 후에 정해진 방향 없이 널리 배우라'고 했는데, 이 말은 크게 잘못되었다. ...(이하 중략)... 율곡의 말처럼 한다면 근본을 세움이 확실하지 못하고 방햐잉 정해지기도 전에 요로와 문정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이 무슨 말인가? ...(이하 중략)... 이는 불가(佛家)의 거꾸로 배우는 방법이지 공자의 가르침이 절대 아니다.[31]

 

허목과 윤휴에 의하면 율곡은 유학자가 아니라 유학자의 옷을 입은 불교 승려에 불과한데 승려를 어떻게 문묘에 종사하느냐는 비난인 셈이었다. 허목의 비판은 결국 율곡 이이의 출가 경력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그의 문묘종사를 막으려는 당파적 비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31] 남인 중에서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핵심 인물들은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 등이었다.[31] 어린 시절 한때의 방황을 이들은 이해하지 않았다.[31] 허목, 윤휴 등이 이율곡을 학자가 아니라 불교 승려라고 몰고가자 분노한 송시열은 허목과 윤휴를 이단 사이비라고 규탄하였고, 이들에 대한 감정적인 분노를 품게 된다.

 

●성격


성격은 솔직하였으며, 그는 위선과 가식을 극도로 혐오하여 꾸며서 말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도덕과 윤리와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위선과 형식, 겉치례가 팽배한 사회에서 율곡의 이러한 사물의 본질에 입각한 정직한 자세는 통용되기 어려웠다.[9] 율곡의 이러한 사물이나 인간에 대한 정직한 자세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켜 당시 동료는 물론 선배와 원로대신들로부터도 미움을 사 오국소인誤國小人이라고까지 지탄을 받았다.[9]

 

주로 이황과 서경덕의 문인이었던 동인과 남인, 북인은 그가 18세에 불교에 입문했다가 환속한 점과, 그의 할아버지가 윤원형의 동료인 이기의 재종손이라는 점을 걸고 넘어지며 그를 계속 중상, 인신비방하였다.

성삼문의 백이 숙제 비판 역시 그르다며 백이 숙제도 옳고 주 무왕 역시 옳다는 양시론 역시, 대중을 현혹하고 혹세무민하려 한다는 이유로 동인과 남인 계열의 꾸준한 인신공격 대상이 되었다.


●기타

 

1972년 이후 대한민국의 5천원권 지폐에 그의 얼굴이 선정되어 있다.
첩 용인 이씨에게서 얻은 서녀 중 1명은 그의 제자인 사계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 김집의 첩이 되었다.


이이와 친분이 있던 송익필과 송한필에게서 예학을 배운 제자들 중 상당수는 송익필의 집안이 안당 가문을 역모로 몰았던 일로 몰락하자, 송익필의 제자, 송한필의 제자임을 숨기고 이이의 학맥을 계승한 것처럼 자처하기도 했다. 이는 송익필, 송한필에게서도 배웠으며 이이, 성혼 등에게서도 두루 수학한 김장생과 그의 일가를 통해 학맥 세탁을 했다.
승려에서 환속한 후 지은 《자경문》(自警文)은 일종의 전향서로도 해석된다.


●유적지


문묘에 배향되어 있으며, 갑술환국 이후 문묘 종사는 확정되었다. 또한 경기도 파주시에는 그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돼 있는 서원인 자운서원과 여생을 보낸 누각 화석정이 있다. 황해도 백천(白川)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배향되었다. 파주 이이 유적(坡州 李珥 遺跡)이 2013년 2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25호로 지정되었다.

 

●율곡 이이가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예언서

 

율곡 이이가 썼다고 예언서로 전해지는 '칠언고결','옥룡자청학동비결','오백론사비기' 등이 있다.[32]


●주석

 

1.이동 ↑ 그의 수제자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2.이동 ↑ 할아버지 이천의 사촌 형제들이며 아버지 이원수의 5촌 당숙들이었다.
3.이동 ↑ 과거시험 9번 장원급제, 천재 이이의 교만이었을까? - 오마이뉴스 2006년 9월 28일자 기사
4.이동 ↑ 이때까지만 해도 3년상은 선택사항이었고 예송 논쟁기 이후 3년상이 법으로 규정화되었다.
5.↑ 이동: 가 나 다 라 김재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71페이지
6.이동 ↑ "금강산이야말로 진짜 부처의 경지" - 오마이뉴스 2005년 03월 11일자
7.이동 ↑ 그러나 동인과 남인은 그가 한때 승려였다는 점을 300년 넘게 비난의 소재로 악용하였다.
8.이동 ↑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의 종조부이자, 할아버지 심연원의 친동생이었다.
9.↑ 이동: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백완기, <한국사학에 바란다 - 열린 마음으로 6 율곡으로부터 교훈을> 《한국사시민강좌 제37집》 (일조각, 2005)
10.이동 ↑ 첩 권씨와 첩 용인 이씨 등 여러명의 소실을 두었다.
11.이동 ↑ 할아버지 이천의 사촌 형제였다.
12.이동 ↑ 재종조부 이기는 그가 공격했던 동고 이준경과 정적관계이기도 했다.
13.이동 ↑ 정여립은 한때 그의 제자라 스승을 배신한다 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4.이동 ↑ 사이버유교, 이이.
15.이동 ↑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16.↑ 이동: 가 나 다 라 마 김재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102페이지
17.↑ 이동: 가 나 다 라 마 바 사 김재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103페이지
18.↑ 이동: 가 나 다 라 김재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105페이지
19.↑ 이동: 가 나 김재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98페이지
20.↑ 이동: 가 나 김재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99페이지
21.↑ 이동: 가 나 [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율곡 이이의 독서 예찬] 책 읽기는 인간이라면 당연한 일과 신동아 2006년 제 541 호 (p 90 ~ 92)
22.↑ 이동: 가 나 다 이중환, 《택리지》 (김흥식 역, 서해문집, 2006) 175페이지
23.↑ 이동: 가 나 다 김태형,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 (역사의아침, 2009) 195페이지
24.이동 ↑ 임진왜란 때 하녀들과 함께 그의 묘소를 지키다가 살해되었다.
25.이동 ↑ 조선의 문화공간 2(이종묵 지음, 휴머니스트, 2007) 460 페이지
26.이동 ↑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1(정연식 지음, 청년사, 2008) 171 페이지
27.이동 ↑ 청백리 열전(하)(이용선 지음, 매일경제신문사, 2007) 193 페이지
28.이동 ↑ 이이의 조부인 이천과 이기·이행은 4촌간이다. 덕수이씨 문정공종회
29.↑ 이동: 가 나 김재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111페이지
30.↑ 이동: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이덕일,《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68페이지
31.↑ 이동: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211 페이지
32.이동 ↑ '정감록' 이민수 역주, '송하비결' 황남송 역주 큰숲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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