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락(1845-1914년)호는 백하 안동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 권문세가인 의성김씨 가문의 장자로 태어났다.
부친은 금부도사를 지냈고 사람천석, 글천석, 살림천석이라 해서 삼천석댁 으로 학문과 경제력을 두루 갖춘 명문 집안이다.
백하는 퇴계학맥을 계승한 정재 류치명의 문하에서 수학한 조부 김현수와 숙부 김진기, 족숙 서산 김흥락등에게 수학했다
이들은 모두 안동의 대유들과 교유하던 내앞마을의 대학자들이다. 특히 숙부는 개항기 안동의 대표적인 위정척사운동가였고
족숙인 서산 김흥락은 위정척사 사상에 바탕을 두고 의병항쟁을 지휘하던 인물이다. 백하는 이처럼 명문집안 양반가의 후손으로
구학문으로 일가를 이루며 60평생을 수구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인생 후반기에 나라가 기울면서 그의 주변에도 큰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1907년 마을에 근대식학교인 협동학교가 들어서고 상투를 자른 젊은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 신학문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강하게 비판하던 백하가 매부인 석주 이상룡이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추진 이 무렵 백하는 대한협회보를 읽은 백하는 평생 전통 유림으로 살아온 노 선비로서는 실로 혁명적인 사상의 일대
전환을 이루었다. 협동학교의 신 교육이야 말로 시조지의(時措之宜:때에 따른 올바른 조치) 시중지도(時中之道:때에 맞는 도리)
라고 인식 자신의 집을 협동학교 교실로 제공하고 학교의 확장에 노력, 당시 황성신문은 그의 사상적 변화를 <교남 교육계의
새로운 붉은 깃발> 이라 칭송하였다. 백하의 변화는 안동 향중은 물론 영남 유림사회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백하의 변모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 잘 드러난다. <늙은이 두눈 어두어 죽는 듯 누었다가 창문에 기대어 대한서를 읽는다.
폐부를 찌르는 말 한마디 간절하니 두 눈에 흐르는 눈물 옷깃을 적시네>
한편에서는 척사유림들의 자진과 장례가 이어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개화 인사들의 해외 독립군기지 건설론이 가시화되고 있을
때였다. 특히 향중의 원로인 향산 이만도의 자정순국은 충격적이었다. 이만도는 셋째 매부인 이중업의 아버지이다.
또 이중업은 조카인 만식의 장인이 아닌가? 고민 끝에, 백하는 만주로 망명길을 택했다. 66세의 노구를 이끌고 겨울 칼 바람속에
고향을 떠났다. 국민대학 조동걸 명예교수는 <백하의 만주 망명은 유가적 색체가 짙다>.며 일본이 지배하는 조선 즉 도가 무너진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 자정의 삶을 지향하겠다는 의리론적 대응이라고 평가 했다. 식민지에서는 살기도 죽기도 묻히기도 싫었던 것이다. 이같은 의지는 망명길에 만삭의 손부와 손녀까지 대동했던 것에서 잘 드러난다. 울진으로 출가한 손녀는 평해 황씨해월공파종부였다. 백하가 주도한 망명길에는 내앞 문중의 많은 인사들이 함께했다. 백하는 1910년 12월24일 고향 내앞마을을 떠나 서울을 거쳐 이듬해인 4월 19일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사동의 황씨 문중과 안동의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의 가문과 합류했다. 석주는 백하의 매부이고 석주의 조카 이문형은 종손서이다. 튼실한 한인사회는 곧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인력과 물자의 공급 기지였기 때문이다. 이후 이동영, 이회영 등 서울 출신 독립운동가들과 서간도 최초의 한인 자치단체인 경학사을 조직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인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백하는 몇 차례나 교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학생들에게 면학을 독려하는 권유문을 지었다. 여기서 백하는 또 한번의 사상적 진화를 보여준다.
사생취의(捨生取義목숨을 버릴지언정 옳은 일을 함) 의 도리로 국혼을 지켜야 한다는 선비정신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자로
변화한다.1912년 2월 초 통화현 합니하로 이주한 백하는 한인 지도자들과 함께 6월에 신흥무관학교를 열어 후일 청산리대첩에
참여하는 많은 군인들을 길려냈으며 간도참변으로 한인사회가 무너진 1920년까지 독립군을 양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백하는 1911년1월 6일부터 1913년 12월30일 까지의 파란 많은 망명 여정을 그린 <백하일기>에 이같은 내용을 소상하게 남기고
있다. 백하란 호는 백두산 아래에 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913년 다시 삼원포로 돌아온 백하는 왕삼덕, 김동삼, 등과 새로운
자치조직인 공리회를 결성하고 취지서를 작성 경학사가 무너지고 온갖 생활고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동포사회를 재건하기
위해서다. 백하가 지향했던 자치단체는 도(道)와 덕(德)이 중심이 된 유고적 이상사회이면서 새로운 자유와 평등의 시대관이
담긴 대동사회였다.
추가: 내앞 마을 깊숙한 곳에 자리한 백하구려(경북기념물 137호)와 김동삼의 생가도 있다. 이 고택에는 김대락과 함께 막내 여동생 김락, 조카 만식,정식,규식, 규식의 아들 성로 등 독립지사 여섯명의 구국혼이 서려 있다. 그들의 나라 잃은 슬픔과 분노, 나라를 되찾기 위한 구국항쟁의 정신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내앞 마을은 백하을 비롯한 독립운동 유공자를 25명이나 배출한 마을이다.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김동삼, 백하의 아들로 해방직후 김구와 김일성이 만난 남북연석회의 임시의장을 맡았던 김형식도 이 마을 출신이다. 지난 11월 내앞 마을 못 미쳐 왼쪽 산기슭 사빈서원 복설고유 및 중건 복원식이 열렸다. 사빈 서원은 청계 김진선생과
그의 다섯아들(극일, 수일, 명일, 성일, 복일)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으로 고종 5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돼 터만
남은 것을 영남 유림의 뜻을 모아 중건되었다.
매일신문에서 요약정리 2011년8월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