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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리지(擇里志)
이중환(李重煥)은 평시나 난시에 살만한 곳을 복지(福地)라 하였는데 은둔지(隱遁地)도 살만한 곳에 넣었다.
또 난시에 살만한 곳은 피병지(避兵地)로 분류했다.
이를 다시 말하면 살만한 곳을 1.가거지류(可居地類) 2.피병지(避兵地) 3.복지(福地) 4.은둔지(隱遁地)
5.일시유람지(一時遊覽地)등 다섯이 된다.
1.가거지류(可居地類)
1)영원한 가거지가 될 만한 곳
공주(公州) 갑천(甲川)의 들
2)가장 살 만한 곳
관대.보은(舘垈.報恩),구만.전주(九灣.全州),구례(求禮),금산(錦山),보련강변.연안 (寶輦江邊.延安), 배천(白川).
3)진실로 살만한 곳
금천(金遷),가흥(嘉興.忠州),죽계(竹溪.順興),승천(昇天.海州),수회촌(水回村.松禾).
4)살만한 곳
전주부 금구(金溝),만경(萬頃),부안의 변산(扶安之邊山),이천(伊川),금산봉계(金山 鳳溪),대구금호(琴湖),성주가천
(星州伽川),전주 율담(栗潭),청주곡천(鵠川),선산감천(甘川),유성(儒城),경천(敬天),이인(利仁),유구(維鳩),마곡(麻谷),
회인(懷仁),괴산 (槐山),해미 가야산(伽倻山),남포(藍浦),성주산(聖住山),용인 어비천(魚肥川.송전), 음죽(陰竹),청영천
(淸英川),화령(火嶺),추풍령(秋風嶺),황해도 황주(黃州),재령(載寜),봉산(鳳山)등 8邑.
2.피병지(避兵地)
용담(龍潭),의림지(義林地),삼도(三島),속리산(俗離山),달천상류(達川上流),안동사촌 (奈城.春陽.召川.才山),회양(淮陽),
정선(旌善)의 중간등.
3.복지(福地)
문경(聞慶)의 병천(甁川),무풍(舞豊),청도(淸道)의 문문산(雲門山),울산원적산(蔚山 圓寂山),흥양팔영산(興陽八靈山),
가야산동북만수동(伽倻山東北萬水洞),지리산(智異 山),청화산(淸華山),보령청라동(保嶺淸蘿洞),광천(廣川)의 해미
(海美),화계(花溪)등.
4.은둔지(隱遁地)
사자산(獅子山)남두릉동(南杜陵洞.原州),주천(酒泉),덕은촌(德恩村.橫城),율치(栗峙) 이북 등.
5.임시유람지(臨時遊覽地)
청하내근산(淸河內近山),청송주방산(淸松周房山),영동(嶺東) 산지 등.
기타살만한 곳이 못되는곳(不可居地)으로서 여산(礪山),은진(恩津) 남사천(南沙川) 금천(金川.江陰.片峰)등은 장기
(瘴氣)가 있어서,동래(東萊),남한산성(南漢山城),영암(靈岩)동남의 해상8읍 등은 교통의 요지 또는 바다에 임하고
일본에 가깝고 직산(稷山)이북 청안(淸安),양근(楊根)등은 토지가 메말라서 모두 살 곳이 못된다고 하였다.
이제 부터 택리지중 필요한 부분만(관심분야) 빼내어 싣지만 그 자세한 사항은 한국사상대전집 『擇里志』 1994년 良友堂
출판에 실린 원문과 국역 " 註 " 를 토대로 쓰는바 모르는걸 아는척 미루어짐작하고 쓰지는 않겠다.
<京畿道>
-이상 생략 -
驪州西爲廣州石城山 一枝北走漢江之南 州治在萬仞山巓 卽古百濟始祖溫祚王故都也.
內夷淺而外峻絶 淸人初至兵不留刃. 丙子終不能陷 仁祖下城只以粮少而江華被陷故也.
及事定視爲保障重地 建九寺 實以僧徒設總攝一人 爲僧大將 每歲選各道諸寺丁壯僧 使屯守於九寺 月課以習射優者賞以厚祿 故僧徒專以弓矢爲業.
蓋朝家以國多僧徒 故借以爲守城之資 城內則不險而城外山脚帶殺 且重鎭 若有事 爲必爭之地 故廣州一境不可居.
여주 서쪽은 광주(廣州)이다. 석성산(石星山)의 한 지맥은 한강 남쪽까지 뻗친다. 광주의 주치(州治)는 만길이나 되는 높은산꼭대기에 있는데 이곳은 곧 옛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고도(故都)다.
성 안은 평평하고 그리 높지 않으나 밖은 대단히 험하고 높다. 청인(淸人)이 처음 와서 이곳을 공격하였으나 칼도 쓰지 못했고 병자호란(丙子胡亂)에도 마침내 함락(陷落)되지 않았다. 인조(仁祖)가 항복한 것은 단지 양곡이 적고 강화도(江華島)가 함락되었기 때문이다.
사태가 안정되자 보장(保障)할 요지로 여겨 구사(九寺)를 세우고 승도(僧徒)로써 충실케하고 총섭(總攝) 한사람을 두어 승대장(僧大將)을 삼았다. 매년 각 읍의 여러 사원에서 장정 중(僧)을 뽑아 구사(九寺)에 머물러 지키게 하고 활쏘는 연습을 일과로 삼았다. 우수한 자에겐 후한 녹으로 상을 주었으므로 승도가 오로지 궁시(弓矢)로 업(業)을 삼았다.
대개 국가에서는 국내에 승도가 많으므로 그들의 힘을 빌어서 성을 지키는 도움으로 삼았다. 성안은 그리 험하지 않지만 성밖의 산기슭은 살기(殺氣)를 띠고 또 중요한 방위선이 되어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전쟁터가 되므로 광주 일대는 살만한 곳이 못된다.
<필자의 요약>
이상의 내용은 남한산성에 대한 설명으로 백제시조 온조왕이 도읍했고 험준한 산꼭대기에 성을 쌓아 지키기에 견고하다.병자호란에 인조가 항복한것은 강화도가 떨어진 결과라 만부득한 일이고 후에 승병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으며 병력충원과 군사훈련등 스님들의 노고가 엄청나게 투입된 국가방위 역사의 현장이라 할것이다.
-중략-
水原東爲陽城安城居畿湖海峽之間 貨物委輸 工賈走集 爲漢南都會 然邑治外雖平善 地有殺氣不可居.
水原北則果川 自果川北行十五里 則爲銅雀津 渡江而北十五里 則爲京城南門.
수원 동쪽은 양성(陽城).안성(安城)인데 안성은 기호지방과 해안 사이에 있어서 화물이 수송되고 공인(工人).상인(商人)들이 모여 들어서 한남(漢南)의 도회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읍치 밖에는 비록 평탄하나 땅이 살기(殺氣)가 있어서 살수가 없다.
수원 북쪽은 과천(果川)이요 과천에서 북으로 15리를 가면 ★비봉(碑峯동작진(銅雀津)이 있고 그 강을 건너서 북으로 또 15리를 가면 서울 남문(南門)이 된다. < 註 /★ 동작진(銅雀津:동작동 동작나루 또는 동객이라 하였다.>
咸鏡道安邊府鐵嶺一脉 南行五六百里 到楊州盞山 自艮防斜逗以入 忽起爲道峯山萬丈石峯 自此向坤方行 小斷而又特起爲三角山白雲臺 自此南下爲萬景臺 一枝西南去 一枝南爲白岳 形家言 衝天木星爲宮城之主.
東南北皆大江也 西通海潮 盤結於衆水都會之間 秤爲一國山水聚會精神之處 昔羅僧道詵留記 『以爲繼王者李而都於漢陽.』
함경도 안변부(安邊府) 철영(鐵嶺)의 한 맥이 남으로 오육백리를 달려 양주의 여러 작은 산이되고 북동에서 비스듬히 돌아들면서 갑자기 솟아나 동봉산(道峯山)의 만장봉(萬丈峯)이 된다. 여기에서 또 남서쪽으로 향하여 달려가다가 좀 끊어지고는 또 우뚝하게 일어나 삼각산의 백운대(白雲臺)가 된다. 여기서 다시 남하하여 만경대(萬景臺)가 되고 한가지는 서남으로 달리고 한가지는 남으로 백악(白岳)이 되는데 형가(形家:風水家)의 말에 충천(衝天)하는 ★목성(木星)이 궁성의 주산(主山)이 된다고 한다.
동남북 삼방이 모두 큰 강이고 서쪽은 바다의 조류를 통한다. 백악은 여러 강이 모이어 서로 얽힌 사이에 위치하여 전국 산수의 정기가 모인곳이라고 칭한다. 옛날 신라때 중 도선(道詵)의 유기(留記)에 일렀다. 『왕을 이을자는 이씨고 한양에 도읍할 것이다.』 했다. ★목성(木星) /산꼭대기가 둥그스름 하면서 우뚝 솟은 산(宅全書龍成五星條 頭圓身聳曰木).
高麗中葉 使尹瓘相地於白岳之南 仍種李及繁茂 輒芟伐之以壓勝 及我朝受禪 使僧無學 定都邑之地 無學自白雲臺 尋脉到萬景 西南行至碑峯 見一石碑大刻有 『無學誤尋到此 』 六字 即도詵所立也. 無學遂改路 從萬景正南脉 直到白岳下 見三脉合爲一坪 遂定宮城之兆 即麗時種李處也.
그래서 고려 중엽에 윤관(尹瓘)으로 하여금 백악산(白岳山) 남쪽에 터를 정하여 오얏나무를 심어놓고 무성하게 되면 곧 베어 버려서 오얏의 성한 기운을 눌렀다. 이조가 왕조를 이어받을 무렵에 중 무학(無學)으로 하여금 도읍할 곳을 정하도록 하였다. 그는 백운대에서 산맥을 따라 만경대에 이르렀다가 서남으로 ★비봉(碑峯)에 이르렀다가 『 무학이 잘못 찾아 이곳까지 온다.無學誤尋到此』라는 여섯자가 크게 새겨 있는 석비(石碑)를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곧 도선이 세운 것이었다. 무학이 드디어 길을 바꾸어 만경대에서 정남맥을 따라 곧장 백악산(白岳山) 아래에 이르러 세 곳 산맥이 한 들에 모임을 발견하고 드디어 궁성의 터를 정했는데 이곳이 바로 고려 때 오얏나무를 심었던 곳이다. ★비봉(碑峯) /북한산에 있는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순수비(巡狩碑)임.
欲築外城未定周圍遠近 一夜天下大雪 外積內消太祖異之 命從雪立城址 即今城形也. 雖因山爲城震坤低虛 且不設雉不浚濠 壬辰 丙子二亂 皆不能守 昔在肅朝乙酉朝家議改築都城 或以爲東方泰低 若壅江灌城 則盡爲魚鼈. 議遂寖 然玆爲三百年聲名文勿之區 儒風大振學士輩出 儼然一小中華矣. 楊州抱川加平永平爲東郊 高陽積城坡州交河爲西郊 二郊俱土薄民貧 少可居處士大夫家彬失勢 下三南者能保有家世 出郊者寒儉凋殘 一二傳之後多夷爲品官平民矣.
서울의 외성을 쌓고자 하매 성지 주위의 원근을 결정짓지 못하였다. 하룻밤 온 천하에 큰 눈이 내려 바깥은 쌓이고 안쪽은 녹아바렸다. 태조는 이를 괴이하게 여기고 눈 있는 곳을 따라 성지를 세우도록 명하였는데 이것이 곧 지금의 성형(城形)이다. 비록 산에 의하여 성벽을 만들었으나 동남서쪽이 낮고 허하다. 또 치성(雉城)을 만들지도 않고 호(濠)도 파지 않아 임진(壬辰) 병자(丙子)의 양난에 모두가 지키지 못하였다. 옛적 숙종(肅宗) 을유에 조정에서 도성의 개축을 의론했으나 어떤 사람이 「동방이 너무 낮으니 만일 강을 막아서 성 안으로 물을 댈것 같으면 성 안 사람이 모두 물고기가 될 것이다.」하자 의론이 드디어 폐지 되었다. 그러나 이곳은 300년간 명예와 문물을 떨친 지역이 되고 유풍(儒風)이 크게 일어 학자가 많이 나와 엄연히 하나의 작은 중화(小中華)를 이루었다. 양주(楊州).포천(抱川).가평(加平).영평(永平)은 동교(東郊)가 되고 고양(高陽).적성(積聖).파주(坡州).교화(交河)는 서교(西郊)가 되는데 두 지방은 모두 토지가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해서 살 만한 곳이 적다. 사대부들이 집이 어려워지고 세력을 잃게 되매 , 삼남으로 내려간 자는 가세(家世)를 잘 보유했으나 근교로 나간 자는 가난하고 검소(儉素)하고 집안이 망해 쓸쓸하여 한두해를 전한 뒤에는 흔히 쇠하여 품관(品館)이나 평민이 되었다.
漢陽前面旣阻大江 獨西一路通黃海平安 而自都城西去五里 爲沙懸踰峴有綠礬峴 唐將過此時 謂「一夫當關萬夫莫開云」. 又西行四十里爲碧蹄嶺即壬辰李如松敗兵處也. 倭自平壤敗歸漢陽以羸兵弱卒 出沒於高陽縣 如松在開城聞之 貪虜獲立功 住大隊以輕兵掩之 纔踰嶺倭四面大至如松麾下家丁 多被銃死 大將駱尙志素多力號駱千斤 被重鎧挾如松於腋下 且戰且退僅以身免. 如松自此沮喪 仍退師 及聞倭離漢陽居 始整兵南追至慶尙而還 二峴及嶺皆可設關門 而一國無截路作關之處 故委棄天險良可惜也.
纔:겨우재 , 鎧:갑옷 개 腋 :겨드랑이 액 截 : 끊을 절
한양 전면이 이미 큰 강으로 막히고 오직 서쪽 한 길만이 황해와 평안도로 통한다.도성에서 서쪽으로 5리를 가면 ①사현(沙懸)이 되고 사현고개를 넘으면 또 녹번현(綠礬峴)이 있다. 당장(唐將)이 여기를지날때 「한 사람이 관문을 맡으면 만 사람도 열지 못할 것이다.」 고 하였다. 여기에서 또 서쪽으로 40리 지점에 있는 ②벽제령(璧蹄嶺)은 임진란에 이영송(李如松)이 패전한 곳이다.
왜병이 평양에서 패하여 한양으로 돌아와서 약한 병졸을 가지고 고양현(高陽縣)에 출몰하였다. 이여송이 개성에서 이 소식을 듣고 왜병을 사로잡아 공을 세울것을 탐내어 대대는 개성에 머물게 하고 경병(輕兵)으로써 이를 습격하였다. 겨우 벽제령을 넘자 왜병이 사면에서 크게 몰려들어 여송의 휘하 병정들이 많이 총에 맞아죽었다.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는 원래 힘이 세어서 낙천근(駱千懃)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겹갑옷을 입고 이여송을 겨드랑이에 끼고 싸우며 물러서서 겨우 죽음을 면했다.
여송이 이로부터 의기를 잃었고 이에 군사를 철수시켰다가 왜병이 한양을 떠나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군사를 정돈하여 남으로 경상도까지 쫒아갔다가 돌아왔다.
사현(沙峴) 녹번현(綠礬峴)의 두 고개와 벽제령에는 모두 관문을 설치할 만한 곳이다. 그리고 전국에 길을 끊어 관문을 만든곳이 없는 데도 일부러 자연적인 험로를 버려두었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하다. 벽제령에서 서쪽으로 40여리를 가면 ➂임진도(臨津渡)가 있은즉 한양 북쪽 강의 하류다. 강기슭 남쪽은 마치 천연으로 된 성 모양 같다. 또 서쪽 길의 요새가 되고 강에 임하여 험하고 절벽이 되어서 참으로 가히 지킬만한 땅이며 성을 두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성을 쌓지 않았으니 그 얼마나 한스러운 일인가.
(註)
①사현(沙懸) :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근처 「東覽」 漢城山川 「在慕華館西北」
②벽제령(璧蹄嶺) : 고양 벽제에 있는 고개
➂임진도(臨津渡) : 임진강 나루 「東覽」 長湍山川 「在府南三十七里 其源出咸鏡道安邊屬縣永豊防墻東經伊川 安狹 朔寧至漣川 縣西爲澄波渡」
渡津由長湍西行四十里 爲開城府即高麗國都也. 松岳爲鎭而下爲滿月臺 宋史所謂依大山立宮殿者即此之也. 金寬毅通編 以此爲金豚臥處 道詵所謂種穄之田也 謹按唐宣宗少時 離十六院久老於外 隨商船渡海至開城後西江北見浦岸泥濘 以舟中所載錢 鋪地上登陸 故至今號曰錢浦 自此至五冠山下寶育家 寶育知唐貴人 以少女辰義薦枕 臨別知有娠 遺一彤弓曰 「若生男則可持此尋中國來子名作帝建」 / 穄 : 검은 기장제 , 濘 : 진흙 영
나루를 건너 장단(長湍)을 지나서 서쪽으로 40리를 가면 즉 고려의 서울 개성(開城)이 있다. 송악(松岳)이 진산(鎭山)이 되고 그 아래는 만월대(滿月臺)이다. 송사(宋史)에 이른바 큰 산을 의지해서 궁전을 세웠다는 것이 곧 이곳이다. 김관의(金寬毅)의 통편(通編)에는 이곳을 「금돼지(金豚)가 누운 곳이라」 하였으며 도선(道詵)은 메기장을 심은 밭이라고 하였다.
삼가 생각하면 당나라 선종(宣宗)이 젊었을때 일육원(一六院)을 떠나서 오래도록 외방에서 수고하다가 상선을 따라 바다를 건너 개성 후서강(後西江) 북쪽에 이르렀다. 그때 갯가가 진흙임을 보고 배에 실은 돈을 땅위에 깔고 육지에 올랐으므로 지금까지 ①전포(錢浦)라고 부른다. 선종(宣宗)이 여기서 오관산(五冠山) 아래 보육(寶育)의 집에 이르렀다. 보육은 그 사람이 당나라의 귀인(貴人)임을 알고 소녀 진의(辰義)로써 잠자리에 모시게 하였다. 선종이 이별할 때 임신한 줄을 알고 ②동궁(彤弓) 하나를 주면서 말했다.「만일 남아를 낳거든 이 활을 가지고 중국으로 찾아오게 하고 아들 이름을 ➂제건(帝建)이라고 하라.」
(註)
①전포(錢浦) : 예성강 하류 벽란도(碧瀾渡) 북쪽에 있는 나루
②동궁(彤弓) : 붉은 칠을 한 활(弓) 공로가 있는 제후(諸侯)에게 임금이 내린 활
➂제건(帝建) : 용녀(龍女) 작제건(作帝建) 온성왕후(溫成王后). 작제건은 의조(懿祖)로 추존되었는바 즉 왕태조(王太祖)의 조부가 되는 셈이다.
及壯 持父所遺㣋弓 習射精妙 從商船泛海入唐至海中 舟邅佪不去 舟中人大懼 約投笠卜吉凶 惟作帝建笠沉水中 遂具粮下帝建於小島使待舟回 建獨在島中一童子自水中湧出 謂曰 龍王見請但暝目自至 建從之至水府 見一老翁謂之曰 老夫居此已久而近有一白龍爭窟宅 約來日會戰 知君善射 可助吾射彼 建曰何以知之.
翁曰明日午風雨波浪是戰時也 戰酣各出背曲背靑者我也 背白者彼也 建諾出島伺之 翌日果如其言 建在島上射中白者 少頃 天晴波平 童子出而復邀 建至水府出少女妻之曰 君歸種也還鄕自有大福 久留而幷妻松之 出島上則商船至矣. 遂與龍女歸泊昌陵 鹽白太守聞作帝建娶龍女至 幷捐貲出力 築室以居之 自昌陵移居於松岳下 生一子名隆 後龍女以失信責帝建 率少女入井化龍歸西海 隆又生子別制曰王建實李氏也.
王太祖卽位即父所居爲正殿 追尊龍女爲溫成王后 作帝建爲懿姓名祖 其立國適丁五代之初 昭宣帝亡於中國 而王太祖與於海外 通合三韓 子孫享國垂五百年 此唐太宗之餘烈 如陳亡而田氏大於齊.
邅 :머뭇거릴전 酣:즐길 감 伺:엿볼 사 捐:버릴 연 貲:재물 자
아이가 자라 아버지가 준 활을 가지고 활쏘기를 익혀 기술이 절묘해졌다. 상선을 따라 바다를 통해 당나라로 들어갈 참인데 바다 가운데 이르러서 배가 머뭇거리며 가지 않는 것이었다. 배 안의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약속하기를 갓(笠子)을 던져서 길흉을 점쳐 보기로 하였더니 오직 제건의 갓만이 물 속으로 가라앉아 사람들이 드디어 양식을 마련해서 제건을 작은 섬에 내려 놓고서 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이에 제건이 섬 안에 홀로 있으려니까 한 동자가 물 속에서 솟아 올라와 이르는 말이 「용왕이 뵙고자 합니다 청컨대 다만 눈을 감고 계시면 스스로 가게 될 것입니다.」 하기에 제건이 그대로 따랐다. 수부(水府)에 이르러 한 늙은이를 만나니 그가 청했다.
「노부(老夫)가 이곳에 있은지 이미 오랜데 근자 흰 용이 하나 나타나 나의 굴을 빼앗으려 합니다.그래서 내일 맞붙어 싸우기로 하였습니다.그대가 활을 잘 쏘는줄 알고 있으니 나를 도와서 저 흰 용을 쏘아 달라.」
「싸울 때 어느쪽이 당신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소?」
「명일 열두시에 비바람치고 물결이 일어나면 이것이 싸우는 때요 싸움이 한창일 때면 서로 등어리를 꾸부려 드러낼 것인데 그 등이 푸른 것이 나고 등이 흰 것은 그 놈이요.」
건은 응락하고 섬에 나아가서 살피었다. 이튿날 과연 그 말과 같으므로 건이 섬 위에서 흰 용을 쏘아 맞히니 조금 있다가 하늘이 개고 파도가 가라앉았다. 동자가 나와 다시 건을 맞아 수부에 이르니 소녀를 나오게 하여 아내로 살게 하면서 말하였다.
「당신은 귀한 종족이요. 고향으로 돌아가면 스스로 큰 복이 있을 거요.」
오래 머물다가 아내와 함께 보내므로 섬 위에 나오니 상선이 도착 되었다. 드디어 용녀와 같이 창릉(昌陵)에 돌아와 배를 대었다. 염백(鹽白)태수는 작제건이 용녀에게 장가들고 왔다는 말을 듣고 돈을 모으고 인부를 내어 집을 지어 살게 하였다. 창릉에서 다시 송악산 밑으로 옮겨 살며 아들 하나를 낳아 이름을 융(隆)이라 하였다.후에 용녀는 제건이 신용이 없다 책망하고 소녀를 데리고 우물에 들어가서 용으로 화해 서해로 돌아갔다. 융이 또 아들을 낳아서 따로 성명을 왕건(王建)이라고 지었는데 실은 이씨(李氏)다. 왕태조가 즉위한 후 아버지가 살던 곳을 정전(正殿)으로 삼았고 용녀를 추존(追尊)하여 온성왕후(溫成王后)라 하고 제건은 의조(懿祖)라 하였다. 그 나라 세움이 마침 오대(五代) 초에 해당 하는데 소선제(昭宣帝)가 중국에서 망하자 왕태조는 해외에서 일어나 삼한을 통합하고 자손이 나라를 누려 5백년을 계속하였다.이는 당태종의 남긴 공덕으로서 마치 진(陳)이 망하자 전씨(田氏)가 제(齊)나라에서 커진것과도 같다.
諺:상말 언 腋:겨드랑이 액 瀆:더럽힐 독 耻:부끄러울 치 譏:나무랄 기
天之報施可謂不薄矣 龍女事人或不信 而諺傳太祖所生子女 兩腋或有龍鱗 太祖異外家旣龍 而龍女歸海時 又率少女化龍 故恐女子下降輒生王者 女子無鱗者下嫁 有鱗者皆令繼序之君 留委後宮 不庫瀆倫之耻 及中葉有以妹爲妃者 送史譏之 而殊不知獨王家爲然 而民俗不然也.
하늘이 선행에 대하여 후한 행복을 준다고 이를 만하다. 용녀의 일은 사람들이 혹 믿지 않는데 속전에 태조가 낳은 자녀들의 두 겨드랑이에 혹 용의 비늘이 있었다고 한다. 태조는 외가가 용이며 그리고 용녀가 바다로 돌아갈 때 또 소녀를 데리고 용으로 화한것은 여자가 시집가서 왕자를 낳을까 두려워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로서 비늘이 없으면 신하에게 시집보내고 비늘이 있는 여자는 모두 차례를 잇는 임금으로 하여금 후궁으로 머물게 하여 윤리를 더럽히는 부끄러움을 생각하지 않았다. 중엽에 이르러 매씨(妹氏)로 비를 삼은 자가 있어 송사(宋史)가 이를 비방하였는데 실은 오직 왕가(王價)에만 그러하였고 민속은 그렇지 않은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我太祖威化回軍候 以王禑爲辛旽子 廢之而立恭讓王瑤爲君 又使恭讓 誅禑於江陵 禑臨刑擧腋以示觀者曰 以我爲辛氏 而王氏龍種也 腋下有鱗爾等視之 觀者逼視如其言此最殊異. 洪武壬申 我太祖受恭讓王禪移都漢陽 王氏之臣世家大族不欲臣服者皆留不從 士人號其洞曰杜門 太祖惡之命恨百年停士者科擧 留居者 傳子至孫 遂爲平民 以商賈爲生 不治士業三伯年來 遂無士大夫之名 京城士大夫亦無住居者 余嘗見大井里故祠溫成后塑像 與昌陵土城 每詫異曰 以爲虛而非眞 則遺跡尙班班也 以爲實而非僞 則殆近齊東之語 其孰信之.
이태조가 위화회군(威化回軍) 후에 왕우(王禑)가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하여 폐하고 공양왕(恭讓王) 왕요(王瑤)를 세워 임금을 삼았다. 또 공양왕으로 하여금 우왕(禑王)을 강릉에서 죽이게 하였다. 우왕이 형(刑)에 임하여 겨드랑을 들어 관중(觀衆)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나더러 신씨라고 하지만 왕씨는 용의 종자다. 겨드랑 밑에 비늘이 있으니 너희들은 보거라.」고 하여 관중이 가까이 가 보니 그 말과 같았다 한다 이것은 가장 괴이한 노릇이다.
홍무(洪武) 임신(壬申)에 이태조가 공양왕의 선양(禪讓)을 받아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자 왕씨의 신하인 세가(世家)와 대족들은 이조를 따르는 신하가 되고자 하지 않아 모두 따르지 않았는데 주민들이 그 동네를 두문동(杜門洞)이라 하였다. 태조가 이를 미워하여 백 년을 한하여 개성 선비들의 과거(科擧) 보는 것을 정지시키도록 명하였다. 머물러 사는 자들은 아들과 손자대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평민이 되어 장사로써 생업을 삼고 선비로서의 학업을 닦지 아니하였다. 300년래에 드디어 개성에는 사대부라는 이름까지 없어졌고 경성의 사대부들도 또한 가서 사는 사람이 없었다.
내 일찌기 대정리(大井里) 옛 사당의 온성왕후(溫成王后)의 소상(塑像)과 창릉의 토성을 보고 매양 이상하게 여겨 말하였다.
「용녀에 관한 이야기가 거짓이고 진실하지 않다고 하면 유적이 너무나도 선명하고 진실하고 거짓이 아니라면 거의 제(齊)나라 동쪽 야인의 말에 가까우니 그 어느것을 믿으리요.」 하였다.
最可痛者 鄭道傳以牧隱李穡之文人 麗末官至宰列 而甘爲王儉褚淵之事 賣國爲利 害師戕友 而旣麗亡又獸策除王氏宗室 托以謫置紫燕島中 滿載諸王氏於一大舶浮之海 而密令泅水者 鑿船底沉之 時有一山僧 與王氏相親者 臨岸見之 王氏遂吟一句曰 一聲柔櫓滄波外 從有山僧奈爾何
今其所沉處 沙淤泥生爲一海中大島 所謂貞州海也 在步輦江下 太祖卽位移恭讓王於官東 毁王氏太廟 以木主 置大船浮之臨津江 船自逆水上 至麻田縣江上佛寺前止 縣人以聞 太祖命移佛像於他寺 以木主安於寺 號曰崇義殿 欲求王氏爲監 而王氏有名爵者 前已剪除 餘者皆逃匿 變姓名或爲馬氏或爲全氏或爲玉氏 皆藏王字於字畵中而然 不自認爲王氏 故至莊憲朝 始得王循禮一人 依箕子殿 單于氏爲監例 錫以田土奴婢 使世襲殿參奉而以奉其祀 此聖祖之盛德也 聖祖亦甞曰 除王氏者 非太祖之意 出於功臣之謨云.
戕:죽일 장 禇:솜옷 저 謫:귀양갈 적 泅:헤엄칠 수 鑿:뚫을 착 淤:진흙 어 匿:숨을 익
가장 통절한 것은 정도전(鄭道傳)이 목은 이색(牧隱李穡)의 문인으로서 여말에 벼슬이 재상의 열에 이르고서도 왕검(王儉)과 저연(禇淵)의 옛 일을 본받은 일이다. 나라를 팔아 이익을 삼고 스승을 해치고 친구를 해치었다. 고려가 이미 망하였는데 또 왕씨 종실을 제거하자는 책문(策文)을 올리었고 자연도(紫燕島)에 귀양보내 둔다고 빙탁(憑托)하여 모든 왕씨들을 큰 배에 가득 태워 바다에 뛰우고 몰래 헤엄치는 자를 시켜서 배 밑을 뚫어 가라앉게 하였다. 그때 한 산승(山僧)이 왕씨와 서로 친한 자가 있어 해안에 임하여 왕씨를 보고서 이에 시 한구절을 읊었다.
一聲柔櫓滄波外 푸른 물결 위에 고요히 들리는 노젖는 가냘픈 소리
從有山僧奈爾何 내 있은들 어이하리.
이제 그 가라앉은 곳에 모래와 진흙이 생겨서 바다 속에 큰 섬 하나가 되었다. 이른바 정주해(貞州海:승천포 남쪽)인데 보련강(步輦江) 아래에 있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공양왕을 관동으로 옮기고 왕씨의 태묘(太廟)를 헐고 나무 신주(神主)를 큰 배에 실어 임진강에 뛰웠더니 배가 저절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 마전현(麻田縣) 강 위 절(寺)앞에 이르러 그치었다. 고을 사람들이 왕께 여쭈니 태조가 명하여 불상을 다른 절에 옮기도록 하고 나무 신주를 절에 안치시키고 숭의전(崇義殿)이라 이름지었다.
왕씨를 구하여 전감(殿監)을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씨로 이름난 벼슬을 하는 자는 전에 이미 제거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하고 숨어서 성명을 고쳐서 혹은 마(馬)씨가 되고 혹은 전(全)씨가 되고 혹은 옥(玉)씨가 되어 모두 왕(版)자를 자획 속에 감추어 썼으나 왕씨라는 것을 자인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장헌조(莊憲朝:世宗)에 이르러 비로소 왕순례(王循禮) 한 사람을 구해서 기자전(箕子殿)에 선우(鮮于)씨로 지키게 한 예에 의하여 전토와 노비를 주어 전참봉(殿參奉)을 세습시키며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이는 성조(聖祖)의 성덕(盛德)이라 하겠다. 성조(聖祖)께서도 또한 일찌기 말씀하셨다.
「왕씨를 제거한 것은 태조의 뜻이 아니요 공신들의 모의에서 나온 것이다.」
城中有善竹橋即圃隱鄭夢周害處也 恭讓時鄭公以相臣 獨不附於太祖 太祖門下諸將使趙英珪以鐵椎 椎殺於僑上 而麗祚遂移矣 後本朝追贈以本朝職銜議政府領議政 立碑龍仁墓前 即雷擊碑之 鄭氏子孫請改書高麗門下侍中職名 而至今無事 可見忠魂毅魄之死候不泯也 其亦可畏也已.
城東南十餘里有德積山 山上有崔瑩祠 祠有塑像 土民祈禱有驗 而祠傍置寢室 土人以民間處女侍祠 老丙則更以少艾換 至今三百年如一 侍女自言 夜輒降靈交婚云 余曰 瑩以無謀之勇夫 女委王禑妃而謨國不藏 斷送社稷於他人之手 不升天不入地 委神於國郊之外 獨不忘男女之道 可見其不服其死 而亦可謂昏淫不明矣 然自數十年來 其祠絶無靈應亦可訝也.
滿月臺即一仰面長城 道詵留記以爲不毁土 裵以土石而爲宮殿 故麗太祖鍊石爲層階 護麓身而上立宮殿 及麗亡宮殿毁喆而只階礎宛然 久而宮不守護 開城富商大賈 輒盜舁而爲墓石 近漸罕存矣. / 舁:마주들 여 罕:드물 한
성 중에 선죽교(善竹橋)가 있는데 곧 포은 정몽주(圃隱鄭夢周)선생이 해를 당한곳이다.공민왕때 그는 재상된 신하로써 홀로 태조께 붙지 않았으므로 태조의 문하 제장들이 조영규(趙英珪)를 시켜서 다리 위에서 쇠뭉치로 때려 죽여 고려가 드디어 망해 버렸다.후에 본조에서 본조의 직함(職銜)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을 추증(追贈)하고 용인(龍仁) 묘전에 비석을 세웠더니 곧 우뢰가 내려 비를 깨뜨려 버렸다.정씨 자손들이 고려문하시중(高麗門下侍中)의 직명으로 고쳐 쓰기를 청하여 비석을 세웠더니 지금껏 무사하다. 충혼(忠魂) 의백(毅魄)이 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았음을 볼 수 있으니 그 또한 두려운 일이다.
성(城) 동남 십여리에 있는 덕적산(德積山:개성동남쪽) 위에 최영사(崔瑩祠)가 있다. 사당에는 소상(塑像)이 있는데 원주민들이 기도를 하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원주민들은 사당 곁에 침실을 만들고 민간 처녀로써 사당을 모시도록 하고 그가 늙고 병들면 다시 소녀로 바꾸게 하여 지금 300년을 하루같이 그리했다. 시녀가 스스로 말하기를 「밤이면 문득 영(靈)이 내려와서 교혼(交婚)한다.」 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를 「최영이 무모하고 평범한 사내로서 딸을 우왕(禑王)의 비(妃)로 삼게 하였고 나라를 잘못 도모하여 국가를 남의 손에 넘겨 보내게 하였다. 죽어서는 하늘에 오르지도 못하고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교외(郊外)의 신이 되어 오직 남녀 음양의 도만을 잊지 않고있다.그가 죽음에 심복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으니 또한 가히 어둡고 음하며 밝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수십년래로 그 사당이 전혀 영감이 없다 하니 또한 의아스럽다.
만월대(滿月臺)는 하나의 쳐다보이는 긴 언덕이다. 도선(道詵)이 유기(留記)에서 「흙을 헤치지 않고 흙과 돌로 돋구어서 궁전(宮殿)을 만든다.」 하였다. 그런데 고려 태조가 연석(鍊石)으로 층계를 만들어 산 기슭을 보호하고 그 위에 궁전을 세웠는데 고려가 망한 뒤 궁전은 부수어져 없어지고 다만 계단과 주추만 완연하였다. 오랜 세월이 흐르자 관에서 수호하지 아니하여서 개성의 부자 상인들이 훔쳐다가 묘석(墓石)을 만들어 근래에는 남아 있는 것이 점점 드물게 되었다.
「」➃ ① ②➂ 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