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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15 - 튜더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대영제국의 기초를 세운 엘리자베드 여왕!
튜더 왕조를 세운 헨리 7세와 요크가문 엘리자베스의 아들인 헨리 8세가 죽은후 에드워드
6세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병약하니 일찍 죽고 제인 시모어가 왕위를 참칭하자 지방군을
모아 왕위에 오른 메리 1세는 다음해 38세에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하지만 남편
얼굴 보기도 힘드니 자식을 낳지 못하고 1558년에 죽으니 엘리자베드 가 왕위에 오릅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58년 부터 1603년 까지 44년간 잉글랜드왕국 및 아일랜드
왕국을 다스린 여왕이니 열강들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전쟁으로
혼란스럽기 그지 없던 16세기 초반에 당시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잉글랜드를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해서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아버지 헨리 8세가 어머니 앤 불린과 결혼하면서 세운 수장령에 의해 잉글랜드는 국교회
(성공회)로 독립했으나, 언니 메리 1세가 즉위하면서 다시 로마 교회로 복귀하여
가톨릭 국가가 되는데 스페인은 가톨릭 국가이고 프랑스는 종교적으로 분열되긴 했으나
파리는 골수 가톨릭 신앙으로 개신교 위그노를 탄압했기에 종교적으로 긴장관계였습니다.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어왔으니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는 프랑스왕세자 프랑수아 2세
와 결혼해 잉글랜드를 적대했는데.... 메리 스튜어트 외가는 프랑스 왕가에서도 골수 가톨릭
인 기즈 가문으로 가톨릭계는 헨리 8세의 이혼은 무효이고, 앤 불린은 첩이며 그사이에
낳은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라며 메리 스튜어트야 말로 진정한 잉글랜드의 여왕이라 주장합니다.
이러한 열강의 틈새에서 정치적 격변에 시달리는 잉글랜드의 지위는 여러 모로 불안정 했으며
잉글랜드 국내에서는 종교적으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으니, 복음주의자들은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에서 독립시키고 개혁신앙이 뿌리내리길 바랐고 가톨릭 교도는
엘리자베스를 가톨릭 가문과 결혼시켜 잉글랜드의 가톨릭의 입장을 높이려고 필사적이었습니다.
맨 처음 혼담은 펠리페 2세인데 그가 죽은 메리 1세의 남편이었던 것과 잉글랜드에서는 평판이
나쁘다는 이유로 인해 깨졌지만 그후 들어온 혼담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막내아들 카를 대공, 사보이아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스코틀랜드의 왕위 계승권
을 가진 신교도 귀족 로버트 더들리 경에 신교도 국가의 국왕인 스웨덴의 에리크 14세 입니다.
혼담 가운데는 같은 시대를 살던 러시아 뇌제 이반 4세도 있었으니 그의 악명을 잘 알던
그녀는 러시아 사신에게 한마디로 거부했으니 사신은 돌아가면 죽는거 아닌가
걱정했지만.... 하지만 이반 4세는 기분 나쁜 얼굴을 했어도 사신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았으니 꿩 대신 닭이라고 여왕의 시녀였던 레이디 메리 헤이스팅스에게 청혼을 합니다.
러시아가 잉글랜드와의 교류를 강화하기 위함이었지만 레이디 메리는 '미개한 야만인의 나라
러시아에는 가고 싶지 않다' 고 싫어했고 여왕도 이를 허락하지 않아서 혼인은 성사되지
않았으나.... 레이디 메리에게는 '러시아의 차리나(차르의 황후)' 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엘리자베스가 결혼하지 않은 이유는 남편과 권력을 나누기 싫어서이거나 성장하면서 안
좋은 결혼 관계를 많이 봐왔기 때문으로 여겨지는데 외국의 왕족은 대부분 가톨릭
교도였기에, 이들 중에서 남편을 택할 경우 잉글랜드 국교회가 흔들릴 것이며 외세의
간섭 또한 심해질 것이니 메리 1세가 잉글랜드인들에게 인기를 잃은 이유도 이것입니다.
영국내의 자국인 신하와 결혼하는 것도 문제가 있으니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가 명백한 예인
데.... 하지만 당시의 사회관념상 여성이 그것도 여왕이 결혼하지 않고 후사를 갖지 않는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결혼은 두고 두고 큰 문젯거리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와 에스파냐 등 외세로 둘러싸인 잉글랜드에서 미혼이라는 그녀 신분이 가장 큰 자산
이었기에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결혼 교섭중에는 침략을 받지 않을 것이니...
혼담이 들어올 때 마다 반가워하며,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진전이 좀 이뤄지면 상대가 받아들일수 없는 종교, 비용, 영토 등 조건을 내걸어 무산시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처녀 여왕(The Virgin Queen)’으로 불렸고 튜더 왕가는 단절되었는데 늘
“짐(朕)은 국가와 결혼하였다” 라는 말로 사람들을 매우 기쁘게 하였으니.... 독신주의는
어린시절에 어머니와 계모가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데서 받은 충격, 그녀에게 최초로
청혼한 시모어 제독이 정부의 허가 없이 청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어머니 앤 불린은 왕자를 낳지 못했고 엘리자베스가 태어난지 3년도 안되어 간통죄로 사형을
당했으니 그녀는 사생아가 되어 공주 칭호가 박탈되었고 왕위 계승에서도 제외되었으며
생존 자체가 위험했는데다가... 이복 언니 메리 공주와는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으나 성년이
된 후에는 감시하고 견제하였으며 헨리 8세 마저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로 홀대했습니다.
헨리 8세는 1547년 엘리자베스가 열세살 때 세상을 떠나고 그녀의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가
왕위를 계승했으며 헨리 8세의 마지막 부인 캐서린 파는 곧 3번째 왕비였던 제인 시모어
의 오빠 토마스 시모어와 결혼하고는 "엘리자베스를 가족의 일원" 으로 받아 들였으니
엘리자베스가 그곳에서 경험한 감정적인 위기가 나머지 생애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토마스 시모어는 38세였지만 "매력적인 남성" 이었고 당시 열네살이던 처녀 엘리자베스와 소란스레
희롱에 가까운 장난을 치기 시작했는데....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결국 캐서린 파는 "두 사람이
서로 진하게 포옹" 하고 있는걸 발견하게 되었고, 화가 난 캐서린은 토마스와 결혼생활을 끝냅니다.
그리고 1548년 5월에 캐서린 파는 자기가 키우며 보살피던 "엘리자베스" 를 그 집에서 쫓아내
버리는데..... 야심만만한 토마스 시모어는 왕위 계승권을 가진 엘리자베스에게 추근댄
것으로 보이지만 만약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게 되면 나중에 영국 왕위를 차지할 수도 있었다는...
이복 언니 메리 1세의 재위기간 동안 성공회에 대한 탄압을 피해 로마 가톨릭교회 신도
로 위장하였으며, 때로는 죄수로 몰려 런던탑에 갇히기도 하였고 숱하게 고문과
감시를 당했으며 살해 위기를 겪은 적도 있었지만 천성적으로 밝고 활기찬 성격
인 엘리자베스는 좌절하지 않았으며 외국어에 밝고 운동을 잘하는 재주꾼 이었습니다.
1558년 메리 1세가 죽자 유일한 후계자 엘리자베스가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런던에 입성하여 25살 나이로 화려한 대관식을 치르며 여왕으로 즉위
하였는데.... 그녀는 추밀원과 균형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니 거리낌없이 그들을
모욕하면서도 정치적, 군사적 경험을 흡수했고 전제적이지만 신중한 군주였습니다.
메리 1세의 로마 가톨릭 복고정책과 성공회와 개신교에 대한 탄압으로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등의 성공회 주교들을 포함한 300명의 개신교 신자들이 화형으로
순교당한 공포 정치에 시달리던 국민들은 성공회 신자인 엘리자베스 1세의
즉위를 환호로 맞이하였지만 국민의 바람과 달리 독실한 성공회 신자는 아니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이었고 기독교인들 끼리 죽고 죽이는 종교분쟁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종교적 극단성을 혐오하였으니 그녀는 1559년 헨리 8세
의 반(反) 교황법령을 되살린 “왕위지상권(수장령)” 을 의회에서 통과시켜서 로마
가톨릭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였으며 영국 성공회를 다시금 영국 국교로 확립합니다.
엘리자베스는 성공회 수장이지만 개신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 간의 극단을 피하는
중용(Via Media) 노선을 걸음으로써, 종교 문제로 혼란스러웠던 사회를
바로잡았으니....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 중용정책은 성공회가 개혁하는 보편적
교회(Reforming Catholic Church) 로 설명되는 고유의 정체성을 갖게 하였습니다.
추밀원을 중심으로 정치가들을 등용하니 정치는 성실청을 통해, 종교는 특설고등법원
을 통해 통제했으며... 모직물 공업을 육성하고 장려했기 때문에 농촌을 중심으로
경제가 발전할수 있었지만 양을 키우기 위해 목초지를 확대한 인클로저가 광범위
하게 이루어지면서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떠돌아다녔으니 치안에 문제가 생깁니다.
당시 농지를 잃은 농민들의 방황은 심각해서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 에서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할 정도였는데.... 그러자 엘리자베스 1세는 구빈법 또는
튜더 구빈법으로 불리는 사회복지정책을 제정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근로의욕을 꺾을수 있는 구걸과 개인적인 자선행위를 금지한다. 구빈세를 제정하여 사회복지
비용을 마련하며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은 공공사업을 마련하여 일을 하게하고,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장애인, 노령자)은 구빈세로 마련한 사회복지비용으로 돌보고 교화소를 두어
노동의욕이 없는 자들을 강제노역으로 처벌하며 순시를 통해 민중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의 국력이 프랑스나 에스파냐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 표면적으로는 세력균형 정책을 펴면서도 뒤로는 프랜시스 드레이크등
해적들을 지원하여 에스파냐를 견제하였으며..... 네덜란드의 독립 전쟁에서는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를 지원하자 가톨릭인 에스파냐와 관계가 금이 가게 됩니다.
그 무렵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로마 가톨릭교도인 메리 스튜어트가 정부와 함께 남편을
죽인 일로 인해 장로교 귀족들의 반란으로 어린 아들인 제임스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1568년 잉글랜드로 망명했는데.... 메리는 그후 20년간 자신이 헨리 8세의 누나의
적손녀임을 내세워 엘리자베스 1세를 제거하고 영국 왕위를 차지할 온갖 음모를 꾸밉니다.
결국 덫에 걸린 엘리자베스 1세 암살 계획이 드러나 1587년 2월에 메리는 단두대에 처형되는데,
영국 해적선이 스페인 보물선을 공격한데다가 메리 스튜어트 참수는 에스파냐에게 잉글랜드
침공에 대한 명분이 되어 주었으니 1588년 5월 20일 선원 9천명에 병사 2만명을
태운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 130척이 리스본을 출발하여 7월 19일에 영국해협에 도착합니다.
해군에 문외한인 “메디나 시도니아” 가 총사령관인 무적함대는 180명의“가톨릭 수사와 사제”
가 동승하고 있었는데... 십자군 전쟁과 같은 성전(聖戰) 이니 원정에 참여하면 “죄사함”
을 얻을수 있다며 "면죄부" 를 발행했으니, 함대의 임무는 네델란드에 주둔중인 “파르마
공작 3만 대군의 영국상륙을 엄호“ 하여 합계 5만 병력으로 런던으로 진격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속도가 느린 배”도 함께 간 탓에 대열을 맞추려다 보니 시일이 너무“오래 걸려
많은 수병과 선원들이 질병과 굶주림“에 지친데다가... 폭풍이 몰아쳐 함대가 흩어져
버리는 바람에 ”함선들을 다시 모으는데만 1개월“ 이나 걸렸는데, 그때 “잉글랜드
함대는 영국 남단인 플리머스” 에 정박하고는 무적함대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잉글랜드 함대 수장도 전투 경험이 없는 노팅엄 백작 찰스 하워드 였으나 다행히도 휘하에는 “항해
와 해전” 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 가 있었으니.... 그는 먼저
공격하자고 주장해 잉글랜드 함대는 플리머스를 떠났지만....“남풍” 이 불어 회군하니 잉글랜드
함대는 34척 군선과 사략선 164척을 합해 197척 이었지만 “영국해협 곳곳에 흩어져” 버렸습니다.
북상힌 무적함대가 잉글랜드 서남단 실리제도에 도착한건 1588년 7월 19일로 메디나는 잉글랜드
남부해안을 따라 항해해 잉글랜드 동남단 마르게이트에서 파르마의 상륙정들과 만나 도와
주는 것으로 이해했지만, “네델란드의 스페인 총독인 파르마” 는 무적함대가 “네덜란드
해안까지 접근해 상륙정들을 됭케르크에서 잉글랜드 해안” 까지 엄호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독립전쟁 중인 “네덜란드 해군” 도 전력이 만만치 않았으니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해안
에는 “67척의 네덜란드 군선” 이 에스파냐군을 괴롭혔으며 영국과 연합하면 무적함대
라도 곤란을 겪을수 있었으니.... 파르마가 네덜란드를 떠날때 무적함대가 조금이라도
늦게되면 에스파냐 상륙군은 “네덜란드 군선들의 공격” 에 모두 물귀신이 될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무적함대가 네덜란드 해안에 접근해 항구에 입항하자니 “네덜란드 해안은 수심이 얕은”
데다가 크고 작은 “모래톱이 해안을 가로막고” 있어 스페인의 큰 함선들이 접근할수 없었으며
네덜란드 해안을 잘 아는 항해사 조차 없으니 “네덜란드 해안에의 접근” 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7월 19일 드레이크는 썰물이 되자 여섯척의 함선을 이끌고 플리스머스를 나섰으며 다음날
“30척 잉글랜드 군선” 이 뒤를 따랐으니 무적함대와 조우하였는데.... 잉글랜드 함대는
“구경이 크고 강력한 함포를 지닌 무적 함대” 와 정면 충돌하기 보다는 잉글랜드의
함포가 가볍고“사정거리가 긴” 점을 이용하여 “장거리에서 하나씩 사격” 하기로 합니다.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포의 사정거리" 이니 임진왜란 이순신 장군의 해전에서도 알수있는데,
한산도해전과 명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의 배는 전혀 손상이 없었으며, 전사자도 한산도 해전 3명에
명량 해전 2명에 불과하니...... 일본군 조총은 사정 거리가 100미터에 불과하지만, 조선 대포는 600
미터가 넘으니 300미터 거리를 두고 사격하면 조선군은 전혀 피해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 였습니다.
워낙 장거리인지라 잉글랜드 함대의 포격으로 입은 피해 보다는 진형을 유지하기에 급급
하던 무적함대 내 서로 “충돌사고에 의한 피해” 가 더 많았으며 “화약이 폭발하는
사고” 도 발생하는데..... 잉글랜드 함선들의 추격을 받으며 항해하던 무적 함대는
포틀랜드섬에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추격하던 “잉글랜드 함대에 역습” 을 가합니다.
하지만 잉글랜드 함선들은 “우수한 기동력” 을 이용하여 스페인 함선들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지라 이 전투는“무승부”로 끝났고 메디나는 네델란드로
향하는데... “모래 언덕에 배가 걸리는 위험” 을 감수할수는 없었기 때문에
네델란드(벨기에 북부 플랑드르) 대신에 7월 27일 프랑스 “칼레 항구” 로 들어갑니다.
무적함대는 잉글랜드 함선들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적벽대전이나 또 백제 부흥운동 시인 663년
백강에서 왜선 1천척이 풍랑과 당군에 대비했듯 “밀집 진형으로 정박” 하고 있었으니...
서풍이 불자 잉글랜드 함대는“8척의 화공선”을 내려보내니 칼레해전(아르마다해전)
인데, 스페인 배들은 화공선들을 피하여 황급히 "닻줄을 끊고 출항" 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화공선은 피했지만 일부 선박은 "충돌해 피해" 를 입었으며.... "닻줄을 끊으면서 브리튼섬
해안에서 배를 정박시킬수 없게" 되는데... 잉글랜드 함선들은 바다로 나온 무적함대
가 "재결집하기 전에 공격" 을 가하였으니 "그레이 브라인 전투" 라고 알려진 싸움
에서 근거리에서 포격전을 벌였고 잉글랜드 함대와 무적함대 양쪽에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잉글랜드 함선들은 단 1척도 침몰하지 않은데 비하여 무적 함대에서는 "두척이 격침
되고 세척이 나포" 당했으며 나머지 함선들도 크고 작은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거친 북해" 로 물러나올 수 밖에 없었는데.... 잉글랜드 함선들이 포탄을 맞고도
침몰하지 않은 이유는 에스파냐가 급하게 포탄을 만들면서 "너무 급하게 식힌" 지라....
철포탄의 경도가 높아 발사할 때나 적함의 단단한 부분에 부딪히면서 오히려 “스페인군의 포탄
이 부서졌던 것” 이라고 하는데, 잉글래드 함대를 피해 “북해로 밀려난 무적함대” 는
이제는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군선들을 뚫고 파르마의 육군과 랑데뷰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였으니 멀리 북쪽으로 항해해 “브리튼 섬을 돌아 에스파냐로” 돌아가는 것 뿐이었습니다.
닻이 없는 스페인 함대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돌아 에스파냐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엄청 많은
피해를 입었으니..... 거친 바다 에서 항해를 견디지 못하고 “침수되거나 해안에서 암초에 부딪혀
침몰” 했는데, 1588년 9월 11일 무적함대가 코루나항에 도착 하였을때 65척으로 줄어 있었으니
잉글랜드 상륙은 시도조차 못해보고 “67척이나 되는 배와 수병, 그리고 병사” 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다음해인 1589년 엘리자베스 1세는 드레이크를 제독으로 하고 존 노리스 장군과 함께 영국
함대를 스페인으로 보냈으니 잉글랜드 군인 23,375명을 태운 150척 전함이 스페인 해군
과 해전을 벌였으나..... 이번에는 잉글랜드 해군이 대패하였으니 잉글랜드는 1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40척의 선박이 침몰 또는 포획되었으니 스페인의 해군력은 부활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잉글랜드는 스페인등 외국과 대결 속에 국민들의 정신적 결속과 일체감이 생겨
났으며.... 이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를 국민 문학의 황금기로 만들었으니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학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험론 철학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성과였습니다.
세익스피어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문호로.... “ 아침해가 희미하게 장미 빛 망토를 걸치고
동쪽 높은 언덕의 이슬을 밟고 오는구나“ 그의 저서 햄릿에서 햄릿의 친구인 호레이쇼
가 근위 장교 마셀러스에게 한 말인데, 해가 뜨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니….
지난해 말 세상을 뜬 사회 생물학의 대가인 에드워드 윌슨 미국 하버드대 명예 교수는 저서
‘창의성의 기원’ 에서 이 대사를 언급하며 인류 진화의 탁월한 성취로 ‘은유’를 꼽는데....
생생한 이미지를 찾도록 상상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은유가 없었다면 우린 지금도 야만인
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하니 새삼 엘리자베스시대의 문호 세익스피어의 위대함을 봅니다?
영국 민중들은 악기를 갖추어 문화활동을 즐길 정도로 문화는 꽃을 피웠으며 아메리카 대륙에
독신인 엘리자베스 1세의 이름을 딴 버지니아 라는 식민지를 개척하였고, 아시아에는 후에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모방한 것으로 알려진 식민지 경영기관인 동인도회사를 창설해
그 세력을 세계로 뻗어나가 훗날 잉글랜드 왕국이 대영제국으로 발전하는 발판을 만들었습니다.
화려했던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 말년은 그리 좋지 않았는데 아무리 엘리자베스 1세가
‘훌륭한 여왕 베스(Good Queen Bess)’ 라고 불릴 정도로 절대적인 인기를 받았지만,
그녀 역시 절대군주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니 그녀는 권력이 돈으로 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손쉽고 빠른 수입을 올리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한 예로 신흥 사업에 대해서는, 독방에서 홀로 돈을 세는게 취미였을 정도로 돈에 집착했던
할아버지 헨리 7세처럼 멋대로 독점권을 설치하여 아첨하는 신하나 귀족 또는 상인에게
비싼 값에 팔았으니.... 이런 그녀의 행동에 그동안 순수하게 복종하면서 협력하던
의회도 반대 조짐을 보이더니 치세 말기에는 의회가 반(反)독점 논쟁의 도가니로 변합니다.
또 엘리자베스 1세가 원했던 의회 조종법도 언론 탄압이라는 이유로 의회가 반대하였으며....
설상가상으로 잉글랜드는 1596년~1597년의 흉년과 무역 쇠퇴로 인해 지속적인 물가 폭등
및 실업자 대량 발생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잉글랜드 국민들의 의욕도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여왕의 총신들은 대중의 증오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는데 여기에 아일랜드
를 정복하기 위한 일련의 군사적 시도는 엘리자베스 1세의 마지막 총신인 에식스의 백작
로버트 데버루의 반란에서 절정에 이르니.... 데버루는 아일랜드 총독의 자격으로 아일랜드
반란 진압을 시도하였으나 반란 진압에 실패하고 불리한 조약을 체결해야 되는 상황에 이릅니다.
데버루는 갑자기 총독 위치에서 이탈해 여왕에게 직접 해명하겠다며 영국으로 돌아왔으니
엘리자베스 1세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였고 반란 진압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의 관직을 박탈했는데.... 데버루는 이에 앙심을 품고 3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1601년에 런던에서 대중 봉기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반역죄로 처형됩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런던에서 겪은 반란의 후유증은 심각하였으니...... 우울증과 지병이던
노인성 질환들이 심각하게 발생되면서 기력을 잃어가던 그녀는 1603년 3월 24일
70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는데..... 신하들이 쉬어야 한다고 하자 엘리자베스는“무엇을
해야한다, 하는것이 좋다는 왕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라는 말을 했고 얼마후 죽었습니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튜더 왕가의 마지막 군주가 되었고, 그녀의 뒤를 이은 5촌 조카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이후로 스튜어트 왕조가 들어서게 되는데.... 펠리페 2세
의 스페인 제국 무적함대를 칼레 해전에서 완전히 격파하고는 동인도회사를 세우는등
수많은 치적을 남겨 약소국이었던 잉글랜드가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어려운 시대에 잉글랜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을뿐 아니라 국력을 크게 신장시켜 강대국
이 될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 군주로 엘리자베스 1세 치하의
잉글랜드와 빅토리아 여왕 치세에서 영국은 크게 부흥했고 그 때문에 영국은 여왕이
통치해야 강해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 2022년 현재도 여왕이 국가 원수로 군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