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리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화백의 탄생 110주년 회고전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를 관람했다.
미공개작을 포함해 회화, 사진, 드로잉 등 170여 점이 펼쳐진 전시장은 거장이 평생을 바쳐 캔버스 위에 일궈낸 거대한 대자연이자, 치열했던 인간적 고뇌의 기록이었다.
나에게 '유영국' 화백은 강렬한 원색과 기하학적인 선으로 산을 그린 앞서가는 현대 미술가 중 한명이었다.
전시장에서 마주한 그의 삶은 예상보다 훨씬 묵직하고 눈물겨웠다. 일본 유학 후 고향 울진으로 돌아온 그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양조장을 경영하고 고기잡이 배를 타며 10여 년의 세월을 보냈다. 작가 스스로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며 "이러다 영영 그림을 못 그릴 것 같다"고 자신을 책망했다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의 아방가르드 동료였던 한묵, 문신은 프랑스로, 김환기는 뉴욕으로 떠나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지만, 유영국은 끝내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춥고 더운 작은 작업실로 깊이 가라앉으며 묵묵히 캔버스를 마주했다.
46이 되던 1964년에야 비로소 첫 개인전을 열고, 59이 되어서야 첫 작품이 판매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무엇이든 '빠른 성과'만을 쫓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그의 예술은 화려한 천재성의 결과물이 아니라, 매일 같은 시간에 캔버스 앞으로 걸어 나가 붓을 들었던 '정직하고 단단한 노동'의 결실이었던 것이다.
한국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탄생110주년 회고전
한국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탄생110주년 회고전
한국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탄생110주년 회고전
조형적 본질로 탄생한 '산', 그리고 마음을 붙잡은 '푸른 바다'. 산의 웅장함만큼이나 내 눈길을 오랫동안 붙잡은 것은 푸른빛의 '바다'였다. 파란색 카펫으로 연출된 전시 공간 위 바다는 고요하면서도 끝없는 깊이감을 지니고 있었다. 평생 산을 품었으나, 그 산을 묵묵히 받쳐주고 감싸 안았던 고향의 바다 역시 그의 영혼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디지털과 AI의 시대, 거장이 던지는 질문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1977, 유영국)
디지털 기술과 AI가 순식간에 화려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창작'의 개념마저 흔드는 2026년 오늘, 유영국의 붓질은 우리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이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대면하며 흘리는 땀방울과 숭고한 정신의 리듬을 대체할 수 있을까.
거장이 남긴 단단한 생명력의 기록들이, 저마다 자신만의 거친 능선을 오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따뜻한 위로와 멈추지 않을 용기를 건네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시선에 거장의 삶은 '새로운 시각으로' 라는 화두로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