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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제도 개요
■ 고려의 과거제도
과거제도가 고려에 도입되어 처음 시행된 것은 958년(광종 9)이다. 918년 고려 건국 후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태조 왕건은 포용 정책과 혼인 정책을 통해 지방 호족들을 포섭하였다. 통일 후 정국이 안정되어감에 따라서 왕권 강화와 더불어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새롭게 정비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유교적인 교양을 갖추고 왕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는 문신 관료가 그들이었다.
958년 광종은 중국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를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광종은 호족 출신의 공신세력을 누르는 한편 자신에게 충성하는 문신 관료를 필요로 하였다. 과거제는 교육기관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해갔다. 성종 대에는 개경에 국자감을 설치하였으며, 지방에는 경학박사를 파견하여 교육하였다. 교육과 과거가 연결됨으로써 중앙은 물론 지방의 자제들까지 관료화 시킬 수 있었다.
고려의 과거는 제술업(製述業), 명경업(明經業), 잡업(雜業)으로 나뉘어 있었다. 제술업과 명경업은 조선시대 문과와 같은 것으로 양대업(兩大業)이라 하였다. 한나라와 당나라의 유학의 영향으로 경학보다 사장이 중시되었기 때문에 제술업이 중시되었다. 잡업은 그들보다 격이 낮은 기술관 등용을 위한 시험이었다.
■ 조선의 과거제도
조선왕조를 건국한 사대부들은 고려 말부터 추진해 온 과거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1392년(태조 1) 고려의 제술과와 명경과를 문과로 통합하였으며, 다음해 무과를 실시하였다. 문과와 무과가 균형적으로 운영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양반 관료 체제를 갖추었다. 양대업의 문과 통합과 함께 초장을 강경(講經), 중장을 표(表) · 장(章) · 고부(古賦), 종장을 책문(策問)으로 정하였다. 초장의 경학 시험은 경서의 대의를 묻는 구술시험인 강경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 약 반세기 동안 문과 초장의 시험 방법을 놓고 강경파와 제술파가 대립하였다. 때로는 강경, 때로는 제술이 실시되었지만 결국 강경파의 승리로 끝났다. 그래서 강경파의 주장이 『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1392년 진사시에 해당하는 국자감시가 혁파되었다. 국자감시가 귀족들의 붕당과 학벌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도구로 이용되는 등의 폐해를 자아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집권 사대부들은 사장보다 경학을 중시하여 사장시험인 진사시보다 경학시험인 생원시를 중시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혁파 다음해 1393년 감시가 실시되기도 하였다. 2년 후인 1395년 다시 혁파되었다. 그 뒤 진사시의 복구를 요청하는 의견이 많아져서 1438년(세종 20) 진사시가 부활되었다. 그러나 경학 위주의 정책을 수행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1444년(세종 26) 다시 혁파되었다. 진사시는 1453년(단종 1) 다시 복구되어 계속 실시되었다. 조선 초기 약 60년 동안 진사시는 실시되지 않았으며 그 기간 동안에는 생원시만 실시되었다.
집권 사대부들은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성균관 · 사부학당 · 향교 등의 관학을 진흥시키고, 이들 관학과 과거제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사부학당과 향교에서 양성한 인재를 선발하여 성균관에 입학시켜 실력을 더 연마하도록 한 것이다. 조선 초기의 과거 업무는 거의 성균관에서 담당하였으나 1413년 좌주 · 문생제를 제도적으로 철폐한 후에는 예조로 이관되었다. 그래서 문과와 생원시 · 진사시(진사시는 복설된 이후에 해당함)를 모두 예조가 주관하되, 생원 · 진사시는 성균관과 함께, 문과는 예문관 · 춘추관과 함께 시험을 실시하였다.
잡과의 경우 1392년(태조 1) 제정된 입관보리법(入官補吏法)에 의하면, 고려시대 잡과 중 남게 된 것은 의과 · 음양과뿐이며, 새롭게 역과(譯科) · 이과(吏科)가 설치되었다. 이과는 후에 상급 서리인 성중관(成衆官)을 뽑는 시험으로 바뀌고 대신 율과(律科)가 새로 설치되었다. 1402년(태종 2) 역과 · 의과 · 음양과 · 율과로 구성되는 잡과제도가 확립되었다. 역과는 대명외교의 중요성 때문에 한학(漢學)이 개국 초부터 설치되었으며, 1419년(세종 1) 몽학(蒙學), 1441년(세종 23) 왜학(倭學), 1451년(문종 1) 여진학(女眞學)이 설치되었다.
사대부들은 국가 운영에 기술학의 필요성을 인정해서 잡과를 두었으면서도 유교적인 직업 관념에 의거하여 기술학을 점차로 낮게 보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사대부들이 기술직에 종사하기를 꺼리게 되어 점차로 양반에서 도태되거나 양인에서 상승한 부류들이 종사하는 직종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결과 기술관 등용시험인 잡과의 격이 떨어지게 되고, 점차로 하급 지배신분층인 중인층의 과거로 격하되어 갔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문과, 무과, 잡과(역과 · 의과 · 음양과 · 율과)가 있었는데 통칭하여 제과(諸科)라 하였다. 문과는 다시 대과(大科)와 소과(小科)로 나누어지나 흔히 문과, 생원시 · 진사시로 일컫는다. 문과와 생원시 · 진사시, 잡과는 예조에서, 그리고 무과는 병조에서 주관하였다. 과거시험에는 3년마다 실시하는 식년시와 국가의 경사 등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실시하는 부정기 시험이 있었다. 식년시와 증광시에는 모든 과거 시험을 다 실시하지만, 별시(別試) · 알성시(謁聖試) · 정시(庭試) · 춘당대시(春塘臺試) 등 비정기 시험의 경우에는 문과와 무과만 실시하였다. 처음에는 식년 초시를 식년 1월에서 5월 사이에 실시하였으나 농사에 지장이 있다 하여 식년 전 가을에 실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초시에 합격한 후 복시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는 한 차례만 주어졌다. 명 · 청 제도와는 달리 초시에 합격한 후 복시에 응시하지 못하거나 낙방한 경우에는 다시 초시부터 응시해야 하였다. 다만 기복친(朞服親)의 상을 당하여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았거나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초시에 합격한 경우에는 사정을 신고하면 다음 번 시험으로 응시를 미룰 수 있었다.
1437년(세종 19) 이후 과거 시험장을 1소와 2소로 나누었다. 시관의 자제나 친척 등의 상피인을 다른 시험장으로 보내 과거의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 였다. 이와 같은 분소법(分所法)은 불편함도 적지 않았다. 시험장에 따라 시관이 다르고 시험 문제가 달라서 응시생의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중국처럼 과거 전용 건물이 없던 조선에서는 대청과 넣은 마당이 있는 곳을 골라 시험장으로 삼았다. 시험관은 복수 시관제로 상시관(上試官) · 참시관(參試官)과 감시관(監試官)이 임명되었고, 전시의 경우 대독관(對讀官)과 독권관(讀卷官)인이 임명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시험관은 고려시대의 지공거와 같은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니라 상당히 제한된 업무만 하였다.
[출처]: 한국학통합플랫폼(https://kdp.aks.ac.kr/) 한국의 과거급제자(https://kdp.aks.ac.kr/people)
식년시(式年試) 대비과(大比科)
조선시대,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된 과거.
대비과(大比科)라고도 하였다. ‘대비’라는 것은 『주례(周禮)』에 “3년은 ‘대비’로 이 해에 그 덕행과 도예(道藝)를 고찰하여 현명하고 유능한 자를 뽑아 관리로 등용한다.”는 문구에서 나왔다.
『속대전』 이전에 대비과라 하던 것을 『속대전』 이후부터 자(子) · 묘(卯) · 오(午) · 유(酉)가 드는 해를 식년으로 하여 과거 시험을 설행(設行)하게 됨에 따라 비로소 식년시가 되었다.
식년시에는 크게 소과(小科) · 문과(文科, 혹은 大科) · 무과(武科)가 있는데, 이를 부정기시(不定期試)인 증광시(增廣試) · 별시(別試) · 알성시(謁聖試) 등과 구별하였다. 소과의 경우 생원 · 진사의 복시, 문과는 복시 · 전시, 무과는 복시 · 전시, 잡과는 역과(譯科) · 의과(醫科) · 음양과(陰陽科) · 율과(律科)의 복시를 식년에 시행하였다.
이 제도의 시작은 1084년(고려 선종 1)의 일이지만 조선시대 이전에는 그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1393년(태조 2) 이후부터 비로소 제도적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도 국가적인 변고나 국상(國喪) 혹은 그 밖의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경우, 이를 연기하거나 시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식년시는 그 해 1월에서 5월 사이에 시행하는 것이 초기의 예였다. 그 뒤 시험 관리의 문제, 시험 기간의 촉박성, 농번기와 겹치는 피해 등의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한 개선책이 마련되었다. 이에 생원 · 진사의 초시는 식년 전해 8월 15일 이후에, 문과 · 무과의 초시는 같은 해 9월 초순에 각각 실시하되 생원 · 진사의 복시와 문과 · 무과의 복시는 식년의 2월과 3월에 각각 실시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과거제에서 무엇보다 중시된 문과의 경우 식년시의 급제 정원은 33인이었는데, 이것은 불교의 33신(身)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시행된 식년문과는 총 163회에 걸쳐 6,063인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이 통계에 따르면 1회 평균 36인이 되므로 1회 33인의 원칙이 반드시 지켜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무과의 경우 식년시의 급제 정원은 28인이었다. 잡과는 식년시에 역과 19인, 의과 1인, 율과 9인, 음양과 9인 등 모두 38인이 합격 정원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증광시(增廣試)
비정기 과거시험으로 식년시와 마찬가지로 소과(小科)·문과·무과·잡과 등이 시행되었다.
1401년(태종 1)에 처음으로 실시된 증광시는 본래 임금의 등극을 축하하는 의미로 즉위년 또는 그 이듬해에 실시하던 것이었으나, 선조 때부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마다 실시되었다. 증광시는 식년시와 똑같이 운영되었다.
예컨대, 증광문과의 경우에는 식년문과와 똑같이 초시·복시·전시 등 세 단계의 시험이 있었으며, 그 선발인원도 식년문과와 똑같이 초시에서 240인, 복시·전시에서 33인을 선발하였다.
고시관도 초시·복시·전시를 막론하고 식년문과와 똑같았다. 고시과목은 초시·전시는 식년문과와 같았으나 복시만은 달라 초장(初場)에 부(賦) 1편, 표(表)·전(箋) 가운데 1편, 종장(終場)에 대책(對策)을 시험하여 사서삼경의 강경(講經)이 없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시(庭試)
처음에는 세자 책봉 또는 세자·왕후·왕태후의 병환 쾌유와 같은 왕실의 경사가 있을 때나 중국 황제의 즉위 등을 계기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왜란과 호란 이후에는 그 성격이 바뀌어 강도정시(江都庭試)·전주정시(全州庭試)·호남정시(湖南庭試)·호서정시(湖西庭試) 등과 같이 특정 지역의 유생을 대상으로 하거나, 강도·남한산성 호종관료(扈從官僚)를 대상으로 실시되기도 하였다.
선발 인원은 정해진 바 없으며 문무과로 구분해 실시하였다. 문과는 현직 관리를 당상관(堂上官)·당하관(堂下官)으로 나누어 시험하거나 일반 유생, 성균관·4학(四學)의 출석부(到記)에 등재된 유생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으로 분류되었다.
한편, 무과는 현직 무관과 미입사자(未入仕者)를 대상으로 하였다. 임진왜란 전에는 현직 무관을, 후에는 미입사자를 주대상으로 하였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북벌을 위해 북방의 군사를 대상으로 하거나, 함경도에서 실시된 무과를 정시로 대신하는 등 변화가 있었다.
처음에는 정시 급제자 가운데 현직 관리로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자는 가계(加階), 승직(陞職)시켰다. 그 밖에는 서책·필묵·말 등을 상으로 하사하였다. 미입사자의 경우는 직부회시(直赴會試)·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주거나 상품을 하사해 학업을 권장하였다. 그러나 1527년(중종 22) 이후에는 문풍(文風)을 진흥시키기 위해 급제를 하사하였다.
정시는 특별 과거로 그 실시가 전국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응시자가 소수였다. 또, 오로지 표(表)와 전(箋)만으로 시험을 보았으므로 급제자는 대체로 양반 집안의 어린 학동들이었다. 때문에 학문을 깊이 연구한 선비가 급제하지 못하는 폐단이 있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알성시(謁聖試)
알성과(謁聖科)라고도 한다. 국왕이 문묘에 참배한 뒤 성균관 유생에게 제술 시험을 보여 성적이 우수한 몇 사람에게 급제를 주는 것으로, 1414년(태종 14)에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알성시에는 문과와 무과의 두 과만 있었다. 알성문과는 다른 시험과는 달리 단 한번의 시험으로 급락이 결정되었으며, 국왕의 친림 하에 거행되던 친림과(親臨科)의 하나였다. 알성문과는 시험 당일에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따라서 고시 시간이 극히 짧아 응시자들이 충분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시관은 과차(科次)에 정밀을 기할 수 없었다.
또, 즉일방방(卽日放榜)하여 시관의 수도 다른 전시(殿試)에 비해 훨씬 많았다. 『속대전( 續大典)』에는 그 시관의 수를 독권관(讀卷官) 10인, 대독관(對讀官) 20인으로 정하고 있다. 과목은 매우 간단해 책(策)·표(表)·전(箋)·잠(箴)·송(頌)·제(制)·조(詔) 중의 1편으로 하였다. 그러나 과차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책과 같은 것은 피하고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인 표를 많이 출제하였다.
국초에는 성균관 유생과 3품 이하의 조사(朝士)에게만 응시 자격을 주어 성균관 유생들에게 권학적(勸學的)인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뒤에는 성균관 유생을 시취한다는 특명이 없는 한 지방 유생에게도 응시 자격을 주었다.
알성문과는 친림과인 까닭에 상피제(相避制)가 없어 시관의 아들이나 친척도 응시할 수 있었다. 따라서, 후세에는 시관의 협잡이 심하였다. 알성무과는 초시(初試)와 전시(殿試)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초시는 두 곳의 시험 장소에서 각각 50인을 선발하고, 전시에서 국왕의 친림 하에 시취하였다. 합격 인원은 일정하지 않았다.
고시 과목에는 목전(木箭)·철전(鐵箭)·유엽전(柳葉箭)·편전(片箭)·기추(騎芻)·과녁[貫革]·격구(擊毬)·기창(騎槍)·조총(鳥銃)·편추(鞭芻)·강서(講書) 등이 있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중시(重試)
중시(重試)는 조선시대의 과거 시험으로 처음에 정년(丁年)에 행하던 것을 뒤에 병년(丙年)으로 바꾸어 실시하였다.
응시 자격도 처음에는 중앙과 지방의 종3품 중직대부(中直大夫) 이하 문무과 합격자로 아직 관직이 없는 자까지로 되어 있었으나, 『경국대전』에는 당하관 이하의 문무관에서 문무과에 합격하였으나 아직 관직이 없는 자에 이르기까지로 바뀌었다. 그리고 대간에게 고신을 빼앗긴 자들도 응시할 수 있었다.
시험 과목은 그때마다 국왕에게 아뢰어 정하였다. 문과의 경우는 대개 표(表) · 책(策) 중의 하나를 국왕의 친림하에 전정(殿庭)에서 시험을 실시하였다. 시관은 상시관(上試官)으로서 의정(議政) 1인, 종2품 이상을 독권관(讀卷官), 참시관(參試官)으로서 당하관 4인을 대독관(對讀官)으로 하였다.
처음에는 중시를 보는 문신을 전정의 동쪽에, 그 대거(對擧)로서 별시 문과를 개설하여 이에 응시하는 사람들을 전정의 서쪽에 앉게 하여 같은 문제로 시험을 보게 하였으나, 폐단이 많아 뒤에는 중시와 대거 문무과를 따로 실시하게 되었다.
중시의 액수는 그때그때 국왕에게 아뢰어 정하였다. 가장 적게 뽑은 때는 1516년(중종 11)의 3인이고, 가장 많이 뽑은 때는 1447년(세종 29)의 19명이었다.
무과의 경우는 초시와 전시 2단계로 이루어졌다. 초시는 시험 장소를 두 곳으로 나누어서 각각 50명을 선발하고, 전시는 국왕이 친림(親臨)하였다. 초시와 전시의 시험 과목은 무예와 강서 등 11가지 중에 국왕에게 아뢰어서 2~3가지를 낙점받았다. 초시의 시관으로 상시관은 2품 이상의 문관 1인, 무관 2인이고 참시관은 당하관인 문관 1인과 무관 2인으로 하였다. 전시의 시관은 의정 1인을 명관(命官)으로 하였다. 합격 인원은 적게는 5인에서 많게는 195명까지 다양하였다.
중시에 합격하면 식년 문과와 달리 을과 제1등 · 제2등 · 제3등으로 나누어 각각 몇 사람씩 뽑는데, 을과 제1등으로 장원 급제에 해당하는 1명은 4계급, 차상 · 차하에 해당하는 자는 3계급, 을과 제2등은 2계급, 을과 제3등은 1계급씩 특진시켜 당상관까지 올려 주었으며, 참외(參外)는 모두 6품으로 올려 주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춘당대시(春塘臺試)
식년시(式年試) 외에 비정규적으로 설행(設行)된 문·무과의 하나이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된 경과(慶科)의 하나로서, 과거시험을 국왕이 창경궁 내 춘당대에 친림하여 보였기 때문에 춘당대시라 일컬었다. 춘당대 문·무과가 처음으로 설행된 것은 1460년(세조 6)이며, 이 시험에서 문과 4인, 무과 51인을 뽑았다.
춘당대시는 알성시(謁聖試)와 마찬가지로 초시·복시·전시의 단계가 없이 단 한번의 시험에 의하여 급락을 결정하고 합격자도 시험당일에 발표하였다. 선발인원은 그때마다 품정하였는데 대체로 5인 내외였으며 3인을 뽑은 경우도 있었다.
1572년(선조 5)의 시험에서 15인을 뽑은 것은 춘당대문과로서는 예외적으로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같은 춘당대시라도 무과에서는 식년무과보다 훨씬 많은 수를 뽑은 예가 적지 않았다.
춘당대무과는 관무재라고 하여 각 군문(軍門)의 무사들을 대상으로 국왕이 춘당대에 친림하여 실시하였다. 초시와 복시 두 차례의 시험이 있었으며, 초시는 두 곳에서 나누어 실시하였고, 복시는 춘당대에서 거행하였다.
조선시대 전기간에 설행된 춘당대시의 횟수에 관하여는 『국조문과방목』·『국조방목』·『등과록』 등 각 자료에 따라서 같은 시험인데도 ‘춘당대시’라 하고 혹은 ‘정시’라 하여 정확한 것을 파악하기 어려우나, 모두 20회 정도로 생각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별시(別試)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또는 인재의 등용이 필요한 경우에 실시되었다. 1456년(세조 2)에 처음으로 실시되었으며 문과와 무과만 열고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와 잡과(雜科)는 열지 않았다.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두 단계의 시험에 의하여 급락(及落)을 정하였다. 초기에는 세자(世子)의 탄생·입학·관례(冠禮)·책봉(冊封)·명제(明帝)의 등극, 명태자(明太子)의 탄생·책봉, 친경(親耕)·부태묘(附太廟) 등의 경우에 행하였으나 뒤에는 그 범위가 점차로 확대되었다.
인재를 등용하기 위하여 일정한 지방에서 행한 예도 있었는데, 이를 외방별시(外方別試)라하며, 그 실례로 세조 때의 평양별시·강릉별시·온양별시 등을 들 수 있다. 또 특정지역의 양반들을 포상하거나 격려하기 위하여 시행하기도 하였다.
특히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행해진 외방별시를 북도과(北道科)·서도과(西道科)라 불렀는데, 10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한편 별시는 위의 뜻 이외에 넓은 의미로는, 식년시 이외에 비정규적으로 설행된 모든 임시 과거시험, 예컨대 증광시(增廣試)·알성시(謁聖試)·춘당대시(春塘臺試) 등을 총칭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과(道科)
조선 시대 각도(各道)에서 왕명에 의해 특별히 실시된 부정기적인 과거(科擧). 세조(世祖) 때에는 평양•온양•강릉•고성 등지에서 별시(別試)가 실시된 이래, 개성부•강도(江都)•공주•전주 등지에서 정시(庭試)가 많이 실시됨. 이는 국왕이 지방을 순시하며 민정을 살펴보는 가운데 실시되었음. 이를 계승한 도과(道科)는 인조(仁祖)대 이후 인 조선 후기에 실시됨. 시험방법은 증광전시(增廣殿試)의 예에 하여 대책•표(表)•전•잠(箴)•송(頌)•제(制)•조(詔) 중에서 1편을 짓게 하였고, 실시지역은 주로 함경도•평안도•강화•제주 등지였음. 그 실시 계기는 국왕의 순수(巡狩), 지방의 피폐•전쟁 등으로 인한 해당지역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실시방법은 중신을 파견하여 그 지방 인재를 모아 과거를 보고 그곳에서 방방(放榜)하는 경우와 어사를 보내어 시권(試券)을 거두어 와서 서울에서 대제학이 고열(考閱)하는 경우가 있었음.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기로과(耆老科)
기로 정시(耆老庭試), 기로 응제시(耆老應製試), 기로 응제(耆老應製)
기로과는 조선시대 노인을 우대하여 실시한 특별 과거로 '기로 정시(耆老庭試)', '기로 응제시(耆老應製試)'라고도 한다.
1756년(영조 32) 대비(숙종의 제2계비인 인원왕후)의 칠순을 기념하여 처음 시행되었으며, 조선시대 동안 영조 대 5회(1756‧1763‧1769‧1772‧1776년), 철종 대 1회(1854년), 고종 대 3회(1877‧1888‧1890년) 시행되었다. 나이 제한은 60세 이상을 기본으로 하되 과거 때마다 품정(品定)하였다. 1756년의 기로 정시는 응시자의 나이를 60세 이상으로 하였고, 1763년(영조 39) 영조의 칠순을 기념하는 기로 정시와 1769년(영조 45)의 기로 정시는 70세 이상으로, 1772년(영조 48)과 1776년(영조 52)의 기로 정시는 60세 이상으로 하였다. 1854년(철종 5)의 기로 정시는 대왕대비(순조의 왕비 순원왕후)의 탄신 월을 기념하여, 대왕대비의 나이인 66세를 기준으로 하여 그 이상인 자가 응시하도록 하였다.
고종 대의 기로과는 1877년(고종 14) 대왕대비(익종의 왕비 신정왕후)의 칠순을 기념하여 응시 나이를 70세 이상으로 하였다. 이후 두 번의 기로 응제 모두 대왕대비의 나이를 기준으로 하였다. 1888년(고종 25)의 기로 응제는 81세 이상 응시하도록 하였고, 1890년(고종 27)의 기로 응제는 83세 이상이 응시하도록 하였다.
기로과는 철종 대까지는 문‧무과를 병설하였으나, 고종 대는 문과만을 시행하였다. 문‧무과 모두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당락을 결정하고 당일에 급제자를 발표하였다. 급제자의 수는 실시할 때에 정하였는데, 문과는 2∼6인을 선발하였고, 무과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을 선발하였다. 급제자들의 경우 각 과 장원(壯元)이나 합격자 전원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주는 등 매우 우대하였다.
1756년의 기로 정시에서는 창경궁 춘당대(春塘臺)에 60세 이상의 노인을 모으고 왕이 몸소 나와 문 · 무과의 과거를 치렀다. 문과에 이가우(李嘉遇) 등 6인을 뽑고, 무과에 이명한(李鳴漢) 등 42인을을 뽑아 문 · 무과의 장원에게 통정대부를 제수하였다. 1763년은 영조가 70세가 되는 해이자 즉위한 지 40년이 되는 해이므로, 대증광시(大增廣試)를 실시한 뒤 기로 정시를 실시하였다. 문과에 이종령(李宗齡) 등 5인을, 무과에 이지홍(李枝弘) 등 86명을 뽑아 급제자 전원에게 통정대부를 주었다. 1769년에는 좌의정 김양택(金陽澤)이 명관(命官)이 되어 문과에 윤득성(尹得聖) 등 5인을 뽑고 무과에 김태상(金泰尙) 등 47인을 뽑았다. 1772년에는 문과에 신광수(申光洙) 등 6인을, 무과에 김세창(金世昌) 등 626명을 뽑았다. 또, 1776년에는 문과에 강세황(姜世滉) 등 2인을, 무과에 진순기(陳順起) 등 46명을을 뽑았다. 철종 대인 1854년에는 문과에 서응순(徐應順) 등 6인, 무과에 심휘태(沈徽泰) 등 844인을 뽑았다.
고종 때는 기로 응제(耆老應製)라는 명칭으로 유생을 대상으로만 실시하였다. 우수자에게는 직부전시 이하의 은사를 내리고, 당일이나 며칠 후 이내에 직부전시자는 '대과 급제자'로 알렸고, 감시, 회시 방말자는 '소과 입격자'로 알렸다. 1877년(고종 14) 9월 15일의 기로 응제에서는 서정훈(徐鼎勳) 등 3인을 직부전시, 그 이하의 7명에게 감시, 회시 방말, 즉 진사의 은사를 내리고, 그 이하 5명은 돈녕부도정의 벼슬을 내리고, 그 이하 5명은 오위장으로 제수한 후, 9월 20일에 대과와 소과의 방방(放榜)을 행했다. 1888년(고종 25)에 2월의 기로 응제와 1890년의 3월의 기로 응제 역시 응제 후 방방이 동일하게 진행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