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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동 목사 - 박희천 목사의 증언] 생활의 설교자
제가 볼 때 한 목사님께는 본받을 만한 10가지 정신이 있었습니다. 6가지는 한 목사님 개인적인 것이고, 3가지는 목회와 관련된 것이고, 나머지 한 가지는 교회지도자로서의 정신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책을 써서 후대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소개해 보면 첫째로 한 목사님은 정직한 분이셨습니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정직한 분이셨지요.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말씀 한 마디를 생명처럼 소중히 여겼어요. 김두석 선생은 일정 때 초등학교 교사가 아니었습니까? 신사참배를 거부하면 사표를 내야하는데 사표를 내면 생계를 이을 수가 없게 되는데, 이 일로 한상동 목사님을 찾아와 상담을 했습니다. 한 목사님으로서도 사표 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지요. 그 때 한 목사님은 마태복음 6장의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는 그 본문 말씀을 하시면서 "이 말씀을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김두식 선생이 "믿는다"고 대답하니까 "그럼 됐구먼" 이것이 답이었습니다. 짧은 말 속에 깊은 생각이 들어 있다고 봅니다. 한 가지 사례입니다만 말씀에 철저하게 사셨지요. 셋째는 인간의 무능력을 철저히 인식했습니다.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이 능력 주셔야 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넷째는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어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지 인간은 영광을 받을 대상이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다섯번 째는 겸손하셨습니다. 여섯 째는 철저히 '자신은 인간이다'라고 인식하고 사셨습니다. 잠시라도 주님 붙드심이 없으면 누구든지 미련해지고 약해진다고 믿었지요.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철저하게 인식한 것입니다.
목회자로서 가졌던 3가지 정신으로 첫째는 교회가 잘 된다면 나 개인은 고생을 하던 망신을 당하던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가지 사례를 말씀 드리지요. 1957년 7월 달에 있었던 일인데, 한 목사님의 사택과 제 집과는 6백미터 정도였어요. 그런데 주일날 아침 일찍이 제게 찾아오셨어요. "전도사님"하시더니 오늘 설교준비가 안됐다면서 "이대로 나서면 교인들이 손해를 보니 조사님이 설교해 주세요. 누가 설교한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라고 하시면서 저더러 설교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지요. 목사가 강단에서 죽을 쑤기보다는 조사가 은혜를 끼치면 교회에 유익하다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설교준비가 안됐다는 것은 정직한 말씀이고, 교회 유익을 생각한 것은 개인보다 교회가 우선이라는 생각을 보여준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하는 목사가 많지 않습니다. 누가 감히 담임목사가 서야 할 강단에 전도사를 세웁니까? 이런 것을 보면 교회가 우선이라는 생각을 하신 것이지요.
둘째는 수하의 부교역자를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맘에 들지 않아도 내보내려 하지 않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고 좋은 길이 열리기까지 기다려주셨습니다. 요즘의 당회장과 부교역자 관계를 생각해 보면 알지 않습니까? 저도 그래서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이런 정신을 배우고 실천해왔습니다. 셋째는 '바라고 의지하라'는 그런 정신으로 목회하셨습니다. 한 목사님은 여려운 일이 생겨도 사람 만나서 정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해결하실까 생각하시면서 끝까지 바라고 주님 의지하신 분이시지요.
마지막으로 교회지도자로서 한 목사님의 모습인데, 그는 회의할 때, 총회장으로 일하든 노회장으로 일하든 사회할 때 보면 절대로 화를 내지 않고 회의를 주제했습니다. 제가 내수동교회를 목회할 때도 이런 모습을 모델로 삼았지요.
한 목사님의 설교를 말씀드리면, 한 목사님은 입의 설교가 아니라 생활의 설교자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힘이 있고 감동을 주었어요. 고려신학교 경건회 설교는 거의 다 박윤선 목사님이 담당했고, 한 목사님은 일 년에 한두 번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1956년 2월경 졸업을 앞둔 때였는데, 한 목사님이 오셔서 경건회 설교한 일이 있어요. 그 때 디모데후서 2장을 본문으로 '참되게 살자'는 제목으로 설교했는데, 하나님은 참된 자와 손잡고 일하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 목사님의 생활이 지지해 주는 설교였으니 큰 은혜를 받고 120여 명의 신학생이 다 울었습니다. 그 때의 설교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쉬운 점은 우리의 신학교가 너무 냉랭하다는 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힘 있는 설교 하려면 우선 본문 읽기에 열중해야 합니다. 설교를 잘하는 방법은 성경 본문에 대해 박식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은 깊이가 어느 정도냐가 설교를 결정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본문을 깊이 있게 보게 된 사람을 당해낼 자가 없지요. 설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성경을 얼마나 보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전도서에 보면 "지혜로운 자의 조용한 말이 미련한 자의 호령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한국교회에는 "이렇게 하면 설교 잘할 수 있다"는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 그것은 일어서거나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에게 높이뛰기 잘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격입니다. 저는 '본문을 많이 읽는 것'이 신학도들에게 일차적으로 중요한 과제라고 봅니다.
(요약 편집처: 기독교보 2013.1.26. "역사기획" 원로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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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