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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고난 중에 깨닫는 은혜’입니다. 옆에 분에게 인사하겠습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읍시다.”
인생이 뜻한 대로만 다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계획한 대로 다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 계획대로 되었다면 저와 여러분은 여기서 만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약속한 것이나 계획한 것을 최대한 지켜주려고 하지만 그래도 잘 안 됩니다. 다 들어주자니 감당이 안 됩니다. 체력도 안 되고 시간도 안 되고 뭐니 뭐니해도 머니가 안 됩니다. 뜻한 대로, 계획한 대로 안 됩니다. 자기 뜻대로 다 하고 싶지만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재미나는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개학하면 기다리던 야영을 가니까. 그렇게 기다리던 야영인데 이틀을 남겨두고 체육관에서 합기도 대련하다 손가락을 다쳤습니다. 수술을 하고 5일간 입원을 하는 바람에 야영을 못갔습니다. 병원에 가니까 시무룩해 있어서 아직도 손가락에 통증이 있는가 물어보았습니다. 아프진 않는데 손가락 때문에 야영을 못가서 속상해서 그렇답니다. 뜻대로 안 되는 게 인생입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모르는 게 인생입니다. 약4:13에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잠시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이 그렇게 멸망당할 것을 알았다면 롯이 그 땅을 보고 갔겠습니까. 전9:12에는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많이 부른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좁은 이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 주소서”
우리는 내 뜻대로 안 되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길 기도해야 합니다. 내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해야 합니다. 당장은 속상하고 당장은 이해가 안 되고 당장은 시련이고 고난일지라도 그 고난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해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낮추기도 하시고 더 큰 그릇을 만들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전8:17에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 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고난당함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것을 크게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1.먼저는 고난이 하나님의 테스트와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을 업그레이드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적인 테스트를 말합니다. 우물 속에 사는 개구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가끔 하나님이 우물을 마르게 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이대로가 좋사오니 할까봐 흔드시고 흩으시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둥지를 치워버리고 새끼를 떨어뜨리는 것은 새끼를 하늘의 왕자로 키우기 위함이듯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히 살아가고 더 큰 그릇으로, 더 귀한 일군으로 세우기 위해 연단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물이 있을 때는 헤엄치는 것 밖에 못하지만 물이 마르면 마른 땅을 딛고 우물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테스트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받치라고 하여 그의 믿음을 테스트했습니다.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요셉을 쓰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 모세를 쓰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속에 이들을 감옥에서, 광야에서, 고난의 풀무에서 연단시켰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요셉은 감옥에 갇혔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도바울을 로마로 보낼 때 바울은 포박에 묵힌 죄수가 되어 배를 타고 가는 중에 유라굴라 광풍을 만나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폭풍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에 풍랑이는 바다에서도 평안했습니다. 도리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형통임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하신 섭리에 의한 고난, 곧 테스트였습니다.
2.두 번째는 일방적인 사단의 공격에 의한 고난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시기하여 우리의 믿음을 떨어뜨리려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고난과 고통을 가합니다. 사단의 전략은 계속 변화하는데 초기에는 수없는 박해를 통해 공격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다 잡아 죽이므로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거절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밟으면 더 뿌리를 뻗어나가는 잔디처럼 더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방법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의 방법을 씁니다. 평안하게 하고 여유롭게 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게 하고 기도하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도리어 신앙이 떨어지고 변질되고 자기를 합리화시키고 열정도 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고통을 가하면 더 하나님을 찾고 더 열심히 기도하니까 큰 어려움 없도록 여유롭고 평안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을 멀리 하고 타락시키는데 훨씬 낫다는 것을 알아버렸답니다.
3. 세 번째는 우리가 범한 죄악으로 인하여 받는 고난입니다. 본문 10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고통은 불신앙과 불순종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는 교만으로 인하여 분명히 징계일 수 있습니다. 17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4절에서도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고 합니다.
열심히 길을 가고 있어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이 방황입니다. 길을 못 찾는 것이 방황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는 것이 방황입니다. 아무런 목표 없는 인생, 목적도 없이 사는 인생이 방황인데 곧 하나님을 떠나 자기 뜻대로 사는 인생이 방황이고 방탕입니다. 열심히 달려가고 있어도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면 더 많이 돌아와야 하듯이 하나님의 손을 놓아버리고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더 큰 방황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길 소원합니다. 할렐루야!
성경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여 곁길로 가다가 고난을 당한 인생을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불순종한 요나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탐욕을 부린 아간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였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며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뱀을 만났고 불신앙의 고백으로 40년을 광야에서 생활하며 둘러가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행여 우리가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당하는 고난이라면 요나처럼 “이 풍랑은 나의 연고라”고 고백하고 회개하여 돌이킬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용서하시고 지름길로 인도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면 뜻을 돌이켜 재앙을 거두시고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도우시고 역전시키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고난도 형통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고난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으면, 지금의 고난도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 보면 고난을 통하여 주시는 그 다음 말씀들이 이렇습니다. “이에 그들이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으매”입니다. 6절을 보시면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13절에서도 “이에 그들이 그 환란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19절에도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라고 합니다. 근심 중에, 환란 중에,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잠시 잊고 살았는데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잠시 멀리 했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살았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육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그래서 변함없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맛보고 확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그들이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구원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고난의 능력입니다. 할렐루야!
고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능력이 있습니다. 고난은 죄인이 회개하고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고난은 스스로 주인 되어 살아가는 인생을 낮추고 겸손하게 하고 자기를 돌아보아 한없이 연약하고 부족한 인생임을 깨닫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고난은 창조주요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들게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골방으로 들어가게 하여 하나님 앞에 무릎을 조아리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하면 회개의 은혜를 주시고 회복의 은총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고난은 그동안 우리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던 것을 알게 합니다. 건강이 축복이고 은혜임을 모르고 살았다는 것을 질병의 고통 속에 깨닫게 됩니다. 풍년농사의 넉넉함과 풍요로움의 감사를 다 모르고 살다가 흉년을 통해 알게 되고 개울가에 늘 물이 흘러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다가도 가뭄을 통해 개울이 마를 때 물이 메마르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 감사였음을 알게 합니다. 이처럼 어려움을 당하지 않으면 여유로움과 풍족함이, 그것이 얼마나 감사이며 은혜인지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감사를 회복하고 은혜임을 깨닫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고 역설적으로 고난도 축복임을 고백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고난이 주는 유익을 다윗의 고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시119:67이하에 보시면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그릇 행함을 알지 못했는데 고난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고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주님의 율례대로 순종하지 못한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주님의 율례를 다시 배우게 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율례를 배움으로 믿음이 자라고 신앙이 자라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더 깨닫게 하고 주님을 더 닮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도 유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9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고난 속에서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하나님은 애3:33에서는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고 했습니다. 히스기야왕도 사38:17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고. 야고보사도도 그러므로 너희가 시험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을 주시고 피할 길을 능히 여신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고난을 통해 자기를 살피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된다면 고난도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가 아니라 고난 중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은혜를 깨닫고 감사를 깨닫고 하나님을 섬기는 더 바른 법을 배우는 계기로 삼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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