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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월 19일
로젠버그 부부 사형 집행
로젠버그 부부의 아이들을 선두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탄원하기 위해
데모행진을 하는 사람들. 플랭카드에
“아빠와 엄마를 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라고 쓰여져 있다.
미국 전역이 매카시 선풍으로 이성을
잃고 있던 1953년 6월 19일, 미국의
전기기사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그의
부인 에설 로젠 버그가 뉴욕주의 싱싱
형무소에서 전기의자에 의한 사형에
처해졌다.
1944년부터 1945년 사이에 미국의
원자폭탄 제조비밀을 빼내 소련에
넘겼다는 것이 처형 이유였다.
로젠버그는 35세였고 부인은 37세였다.
이들은 1951년 4월 5일 스파이 주모자
와 적극적 협력자라는 죄명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었다. 이들 부부는 1950년
여름 간첩활동 혐의로 체포돼 재판을
받아왔다.
공산당원이었던 로젠버그는 재판기간
내내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고, 간첩
행위에 대한 물증도 없었지만 마녀사냥
의 광기는 이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당시의 연방수사국장 에드거 후버는
이 사건을 ‘세기의 범죄’로 규정했고,
이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담당 판사
어빙 카우프먼은 “이들이 조국을 배반
하고 소련에 원폭 기밀을 넘김으로
인류 역사가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사형선고는 세계의 여론을 들끓게 했다.
수많은 미국 시민을 비롯, 교황과 아인슈
타인, 피카소, 사르트르, 러셀 등 세계의
지성들이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며 구명운동을 펼쳤다.
사건의 진실은 이들이 처형된 지 44년이
지난 1997년 ‘워싱턴 포스트’지에 의해
밝혀졌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1943년
부터 1946년까지 로젠버그를 50여
차례나 비밀리에 만난 전 KGB 요원 알렉
산더 페크리소프의 증언을 통해
로젠버그가 원폭 제조기밀을 소련에
넘기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증언에 따르면 로젠버그는 소련에 고급
산업정보를 제공한 스파이이긴 했지만
원폭 기밀은 제공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
졌다. 결국 로젠버그는 간첩이 아니라는
좌파의 주장도, 원폭기밀을 제공했다는
우파의 주장도 모두 거짓임이 입증된
셈이다.
ㆍ사람 잡은 ‘매카시즘’
1950년 6월16일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이 육군 통신국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줄리어스 로젠버그의 집에 들이닥쳐 그를 체포했다. 3주 후 아내 에설도 함께 체포됐다. 로젠버그 부부는 소련에 원자폭탄 관련 기밀을 넘겼다는 간첩 혐의를 받아 1953년 오늘 전기의자에 앉았다. 미국에서 평시에 간첩 혐의를 받아 처형된 이는 로젠버그 부부가 처음이다.
2차대전을 최종적으로 끝낸 원자폭탄은 미국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핵 독점 시대는 1949년 소련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면서 끝났다. 이듬해 2월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은 “미국 국무부에 공산당원과 그 동조자 205명이 있다”고 발언해 ‘매카시즘’을 일으켰다. 6월25일엔 한국전이 터졌다. 미국내에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적대감은 절정에 달했다.
로젠버그 부부가 젊은 시절 공산주의 운동에 빠져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부부가 사귄 계기 역시 급진적인 정치운동에 대한 공감 덕이었다. 공산당원임이 발각돼 직장에서 해고된 줄리어스는 소규모 사업체를 꾸렸다.
로젠버그 부부를 고발한 것은 에설의 남동생이자 줄리어스의 처남인 데이비드 그린글래스였다. 그는 같은 혐의를 받고 있는 자신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검찰에 유리한 증언을 하기로 했다. 로젠버그 부부가 원폭 기밀을 소련에 넘겼다는 증거는 그린글래스의 증언이 전부였다.
미국 사회의 반공주의 움직임 속에 재판이 진행됐다. 개인의 신념에 대해 묵비권을 행사한 부부의 태도도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결국 부부에겐 사형이 선고됐다. 각계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사면을 거부했다.
로젠버그 부부는 정말 간첩이었을까. 훗날 공개된 관련 정보를 종합하면 줄리어스가 소련에 군사 기밀을 넘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넘긴 정보가 원자폭탄을 만들 만큼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의 전설적인 스파이 알렉산데르 페클리소프는 1997년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줄리어스와 50차례 만나 산업정보를 넘겨받았으나, 핵 관련 정보는 대단치 않은 것이었다고 했다. 게다가 에설은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덧붙였다.
▶2015년 김길자 대한민국사랑회 회장,
제1회 ‘애국인상’ 받아
▶2015년 미국 911
허위 신고·묻지마 총격에 한인 경찰 사망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한 흑인 청년이 고의적으로 허위 신고를 한 뒤, 출동한 경찰을 향해 마구 총을 쏴 한인 경찰 소니 김씨가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19일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이날 오전 한 남성이 911에 총을 들고 위협을 하는 괴한이 있다고 겁에 질린 목소리로 신고를 했다. “어떤 남성이 총을 들고 위협적으로 마구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생생하게 현장을 목격한 것처럼 진술한 남성은 괴한의 외모와 자신의 위치를 말한 뒤 또 한번 전화를 걸어 경찰의 출동 여부까지 확인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하지만 이 남성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을 향해 마구잡이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한국계 경찰 48살 소니 김이 총격으로 숨졌다.
김씨는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지만 부상이 심해 끝내 유명을 달리했다. 범인은 김 씨의 총을 빼앗아 뒤이어 도착한 경찰 2명에게도 총격을 가하다가 현장에서 사살됐다.
김 경관을 살해한 남성은 21살 트레피어 허몬스로 지역갱단에 속해 전과가 있는 흑인 청년으로 지인들에게 ‘경찰에 의해서 자살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드러났다.
신시내티 경찰당국은 근무중에 순직한 동료 경찰 소니 김씨가 훌륭한 경찰이었다며 안타까워 했으며, 지역사회에서는 김씨를 추모하는 성금 모금 행사도 열렸다.
고인의 가족사진이 올려진 온라인 모금 사이트를 통해 2000명의 추모객이 10만달러 가까이 기부했고, 추모 메시지도 이어졌다. 지역사회에서는 그를 ‘인정 많은 엘리트 경찰’로 소개했다.
신시내티시 측은 “가라테 6단 실력을 갖춘 그는 부모를 잃은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안겨 준 다정한 경찰이었다”며 “목숨이 위험한 수많은 현장에서 탁월한 공을 세워 27년 동안 22번이나 훈장을 받았다”고 밝혔다. 제프리 블랙웰 시 경찰서장은 “최고 경찰관을 잃었다”고 했다.
신시내티시는 이례적으로 소니 김이 해결한 사건들도 공개했다. 흉기를 든 괴한과 맞서다가 아무도 다치지 않고 체포해낸 일, 빌딩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하는 남자를 인간적으로 설득한 이야기 등이다. 소니 김은 현장에서 접한 애절한 사연에 마음으로 다가간 다정한 경찰이기도 했다. 엄마를 잃고 여동생과 고아가 됐던 존 닙스차일드는 “소니 김은 우리의 고통을 전부 이해했고, 사고 처리가 끝난 뒤에도 남아 위로해 주었다”고 했다.
1977년 부모를 따라 시카고에 이민 온 그는 신시내티대에 진학하면서 신시내티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1987년 경찰학교에 들어가 이듬해 경찰이 됐다. 무술 사범으로 경찰과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장남(17)은 소셜미디어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에서 자전거 타기, 5㎞ 달리기 등 아버지와 함께했던 추억들을 떠올리며 “우리 가족을,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을 지켜주어 너무 고맙다”고 작별 인사를 했다.
▶2010년 한국 사회학의 기틀 닦은
1세대 학자 이만갑 교수 별세
원로 사회학자이자 학술원 회원인 이만갑 서울대 명예교수가 2010년 6월 19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인 이 교수는 도쿄대 문학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광복 후 서울대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쓰며 한국 사회학계의 기틀을 닦았다. 특히 1957년 미국 코넬대에 교환교수로 가서 접한 서구 학계의 실증주의적 사회조사방법론을 도입, 한국 사회학 연구의 학문적 체계를 마련했다.
이만갑 교수의 초기 학문적 관심사는 한국의 농촌사회였다.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들이 농촌에 있다고 생각한 그는 미국서 익힌 사회조사방법론을 활용해 농촌 현장 조사에 착수, 농촌사회의 구조적 특성과 산업화에 따른 변화 등을 연구했다. 또 1967년엔 ‘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는 세력은 지배 계급의 바로 하위 경계에 위치한 계층’이라는 관점을 담은 ‘한국에서의 근대화의 사회학적 함축’이라는 영문 논문을 아시아연구협회 연차대회에서 발표해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는 인간 의식문제에 관심을 갖고 ‘의식에 대한 사회학자의 도전’ ‘자기와 자기 의식’ 등을 펴냈다.
김경동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만갑 선생님은 사회조사방법론을 활용한 사회 연구를 국내에서 처음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후학들을 길러내 한국 사회학의 기틀을 닦은 1세대 학자”였다고 말했다.
이만갑 교수는 서울대 신문대학원 원장과 대학원장, 한국사회학회 회장을 지냈고 1977~1981년에는 서울대 새마을운동종합연구소 소장으로 새마을운동을 뒷받침하는 학문적 연구에도 힘썼다. 저서로는 ‘한국 농촌의 사회구조’ ‘사회조사방법론’ ‘한국 농촌 가족의 연구’ ‘한국 농촌사회 연구’ ‘공업 발전과 한국 농촌’ 등이 있다.
▶2006년 이라크 검찰,
후세인에 사형 구형
▶2005년 경기도 연천군 최전방 부대서
총기난사 사건, 8명 사망
엄격한 위계질서에 익숙하지 않은 신세대 장병들에 대한 관리체계와, 사고 발생 가능성이 있는 문제 병사를 거르는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결과가 대형 참사(慘事)를 불렀다.
19일 오전 2시30분쯤 경기도 연천군 중면 육군 모사단 최전방 소초(GP) 내무반에서 이 부대 김동민(22) 일병이 수류탄 1발을 던지고 K-1 소총 44발을 난사, 장병 8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 참사는 1984년 이후 군 부대 총기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사망자를 냈다.
이 사건으로 GP장(소초장) 김종명(26·학군41기) 중위와 전영철(22)·조정웅(22)·박의원(22)·이태련(22)·차유철(22)·김인창(22) 상병 등 7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이건욱(21) 상병은 군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다가 숨졌다. 복부와 다리에 파편 관통상을 입은 김유학(22)·박준영(22) 일병은 국군 양주병원으로 후송돼 수술을 받았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군 당국 조사과정에서 김 일병은 “평소 괴롭히던 선임병의 자는 얼굴을 보고 순간적으로 홧김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조사 결과 김 일병은 수류탄 2개 중 1개의 안전핀을 미리 뺀 상태로 내무반에 들어가 던졌고, 내무반·상황실·취사장·옥상 초소 등을 옮겨 다니며 동료와 장교에게 사격을 가하고 범행 뒤 태연히 근무지에 복귀, 약 30분간 범행 사실을 숨긴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범행이 아니냐는 의혹과 범행 동기에 대한 의문이 일었다. 윤광웅(尹光雄) 국방장관은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이번 사건은 비무장지대(DMZ) 내 북한군 코앞에서 근무해 가장 엄정한 군기를 요구하는 GP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었다. 독자(獨子)로 성장한 경우가 많아 구타는 물론 폭언(暴言)도 못 견뎌 하는 신세대 장병들에 대한 관리가 ‘고참과 부하’ ‘명령과 복종’이라는 구식 시스템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김 일병을 비롯, 상당수 신세대 장병들이 미니홈피나 블로그를 소유, 자신의 심경을 솔직히 표출한 글들을 올려 사고예방에 도움을 받을 수 있으나 군 당국은 아직 이런 시스템을 갖고 있지 않다. 김 일병은 사건 전 자신의 미니 홈피에 ‘인생은 苦(고) 苦 苦’ ‘오늘의 감정상태: 슬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글들을 올리는 ‘사전 징후’를 보였으나 군 당국은 이를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4년 ‘이승복 장학회’ 설립, 창립총회 개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다가 무장공비들에게 무자비하게 살해당했던 이승복 어린이의 ‘나라 사랑’ 얼을 선양하고 계승하기 위한 ‘이승복 장학회’가 설립됐다.
강원도교육청은 최근 이승복기념관이 운영하던 목장을 9억1990만원에 일반에 매각해 이 대금으로 장학 사업을 벌인다고 21일 밝혔다.
이에 앞서 평창교육청은 지난 19일 ‘이승복 장학회 설립 창립총회’를 열고 회장에 윤재원 평창교육청 교육장, 부회장에 이준연 강원도의회 의원을 선임하는 등 임원진을 구성했다.
연간 지원규모는 3300여만원으로, 우선 지원 대상은 속사초등학교 졸업생과 재학생으로 초·중학생은 20만원, 고교생은 30만원씩 지급될 예정이다.
▶2003년 중국 양쯔강서
여객선-화물선 충돌 90명 실종
▶1999년 영국의 에드워드 왕자,
소피 라이스 존스와 결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막내아들 에드워드(35) 왕자와 평민 출신 소피 라이스 존스(34)양이 1999년 6월 19일 오후 5시 윈저성 세인트 조지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99년 6월 19일 결혼식을 올린 영국의 에드워드 왕자와 존스 양이 그들을 뒤따르는 군중에 손을 흔들고 있다.
두 형 찰스-앤드루와는 달리 이날 결혼식은 왕실 가족잔치로 조촐하게 진행됐다. 여왕 부부 등 왕실 가족, 소피 친정 식구, 하콘 노르웨이 왕세자, 브루나이 술탄 등 각국 왕족, 캔터베리 대주교,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 영화배우 존 트래볼타, 가수 엘튼 존 등 560명만 식장에 들어갔다. 인근 주민 8000명은 윈저성 경내에서 혼례행진을 지켜봤다.
이날 에드워드 왕자는 소피를 위해 손수 디자인한 백진주와 흑진주를 섞어서 만든 목걸이를 결혼 선물로 준비했다. 결혼식은 금반지가 소피 손가락에 잘 들어가지 않아 에드워드가 쩔쩔 맨 해프닝을 제외하고는 45분간 순조롭게 진행됐다. 신랑 신부는 성당 회랑에서 첫 키스를 나눈 뒤, 군중들이 샴페인을 터트리며 환호하는 가운데 마차를 타고 피로연 장소인 윈저성으로 향했다. 여왕은 결혼식 직전 "에드워드를 웨섹스 백작에, 소피를 웨섹스 백작 부인`에 봉한다"고 발표했다.
▶1994년 콜롬비아 대통령선거,
자유당의 삼퍼 피사노 후보 당선
▶1993년 영국의 소설가 골딩 사망 -
▶1983년 `파리대왕`으로
노벨문학상 수상
▶1990년 한국-이스라엘,
학술교류 협력의정서 체결
▶1981년 유럽이 공동개발한
우주로켓트 `아리안`호
남미 가이아나에서 발사
▶1981년 카이로서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유혈충돌
▶1981년 대한체육회, LA올림픽
남북한 단일팀 구성을 북한에 제의
▶1975년 제1회 세계 여성대회 열려
1975년 6월 19일, ‘평등·발전·평화’를 캐치프레이즈로 한 제1회 세계 여성대회가 멕시코시티에서 열렸다. 유엔이 정한 ‘세계 여성의 해’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대회에는 반다라나이케 스리랑카 총리와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 테레슈코바 등 세계 138개국에서 2000여명이나 되는 여성들이 참석, 성황을 이뤘다.
그러나 여성의 지위 향상이라는 공통의 목표는 같았지만 국가마다 여성이 처한 상황이 달라 관심분야에 큰 편차를 보였다. 여성대회였음에도 35명의 대회 최고위직 중 여성은 사무총장이 유일할 정도로 주요직을 남성들이 차지한 것도 문제가 됐다. 특히 멕시코는 남성을 대표로 파견하고 그를 대회 의장으로 선출해 빈축을 샀다.
첫 대회인 탓에 눈에 띄는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세계 여성이 처음 한자리에 모였고 미스·미세스로 불리던 여성을 ‘미즈’로 통일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대회였다. 이후 5년마다 대륙을 달리해 대회가 열리고 있다.
▶1969년 3선개헌반대 학생데모 시작
▶1965년 알제리, 군부쿠데타 발생
▶1963년 케네디 미국 대통령,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특별교서를 의회에 제출
▶1961년 쿠웨이트, 영국의 보호령
(62년간)으로부터 독립
▶1960년 아이젠하워 내한
4·19 후 2개월 만에 100만명의 인파가 다시 서울 거리를 가득 메웠다. 얼굴에는 분노 대신 반가움이, 두 손에는 돌멩이 대신 국기가 잡혀 있는 것이 그때와 다른 점이었다.
1960년 6월 19일 방한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오른쪽)을 허정 과도정부
대표가 영접하고 있다.
1960년 6월 19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 이후 78년 만의 첫 방문이었고, 아이젠하워로서는 두 번째였다. “당선되면 한국을 방문,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겠다”고 한 선거 공약을 지키기 위해 1952년 12월 당선자 자격으로 방문했다.
오후 4시3분, 미 대통령 전용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원래는 필리핀(14일)·대만(18일)·일본(19일)을 거쳐 22일에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일본 내 좌익 세력의 극렬 반대로 방일을 포기하고 한국행을 앞당긴 것이었다.
용산 미군기지로부터 카퍼레이드를 벌이며 숙소인 덕수궁 뒤 미 대사관저로 가려 했으나 “아이크(Ike·아이젠하워의 애칭)! 아이크”를 연호하며 서울역부터 시청 앞까지 도로를 가득 메운 인파 때문에 결국 샛길을 이용해야 할 만큼 그를 맞는 한국인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신문들도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방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1면에 ‘Dear Ike, Welcome to New Korea’라는 장문의 영문 기사를 쓴 신문도 있었고, 조병화 시인은 ‘세기의 날개’라는 제목의 시를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1950년2대 국회 개원
(의장 신익희, 부의장 장택상 조봉암)
▶1945년 미얀마
아웅산 수치 여사 출생
▶1944년 마리아나 해전서 일본군 참패
▶1940년 일본 프로야구 선수
장훈 출생
▶1937년 ‘피터팬’ 저자
제임스 배리 사망
영국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였던 ‘피터팬’의 저자 제임스 배리가 1937년 6월 19일 사망했다. 1860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배리는 에든버리대학을 졸업한 후 신문기자 생활을 했다. 처음에는 소설을 쓰기도 했으나 곧 연극에 흥미를 갖게 돼 이후 많은 희곡을 남겼다.
이런 그를 단연 최고의 극작가 반열에 세운 것이 ‘피터팬’이다. 1902년 씌어진 ‘작은 백조’라는 소설에 입각해 5막짜리 희곡 ‘피터팬’을 썼는데 이것이 1904년 처음 무대에 상연된 후 100년 동안 대중에게 사랑받는 작품이 된 것이다. 아기들이 하나씩 태어날 때마다 요정이 하나씩 태어난다는 깜찍한 발상, 행복한 생각을 하면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고 피터 팬처럼 세상의 악을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은 현실의 고통과 하루하루 싸우며 살아가야 하는 오늘날의 어른들에게도 작지 않은 위안을 준다.
그러나 정작 ‘영원히 자라지 않는’ 소년 피터팬은 희망과 즐거움만이 아닌 절망과 슬픔도 상징한다. 피터팬이 영원히 느낄 수 없는 엄마의 품과 가족 간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작가 자신의 어두운 성장 배경이 반영된 것으로 그는 어린시절 죽은 형과 자신을 비교하는 어머니에게서 온전한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했다고 한다. 즉, 작가 자신이 ‘영원히 자라지 않는 소년’ 피터팬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그는 키가 150cm도 되지 않는 단신이었다고 하니, 그 자신이 피터팬이 되어 영원히 자라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였을까.
▶1935년 국제노동회의서 1주 40시간
노동제의 원칙을 근본조약으로 채택
▶1918년 안중식 등 서화협회 창설
▶1917년 영국 하원, 부인참정권 승인
▶1912년 미국,
공무원의 8시간 노동제 채택
▶1907년 통신사
UP(United Press) 설립
▶1905년 청나라에서
미국상품 배척운동
▶1885년 자유의 여신상 기증
▶ 1867년 멕시코 황제를 지낸 오스트리아의 대공 막시밀리안 사망
▶ 1846년 미국 뉴저지주 엘리지안구장에서 열린 야구경기, 스퀘어에 의한 최초의 야구경기로 공식 인정
▶ 1623년 프랑스의 수학자 겸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 출생
https://youtu.be/-p5ietd5YEk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