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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5일 수요일
15. 般若 반야
何名般若 般若 是智慧 一切時中 念念不愚 常行智慧 卽名般若行 一念愚 卽般若絶 一念智 卽般若生 心中常愚 自言我修 般若 無形相 智慧性 卽是 何名波羅蜜 此是西國梵音 言彼岸到 解義 離生滅 著境 生滅起 如水有波浪 卽是於此岸 離境 無生滅 如水承長流 故卽名到彼岸 故名波羅蜜
하명반야 반야 시지혜 일체시중 념념불우 상행지혜 즉명반야행 일념우 즉반야절 일념지 즉반야생 심중상우 자언아수 반야 무형상 지혜성 즉시 하명바라밀 차시서국범음 언피안도 해의 이생멸 착경 생멸기 여수유파랑 즉시어차안 이경 무생멸 여수승장류 고즉명도피안 고명바라밀
어떤 것을 반야라고 하는가!
반야는 지혜다. 모든 때에 있어서 생각마다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을 곧 반야행이라고 하느니라.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기고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곧 반야가 나거늘, 마음속은 항상 어리석으면서 '나는 닦는다'고 스스로 말하느니라.
반야는 형상이 없나니, 지혜의 성품이 바로 그것이니라.
어떤 것을 바라밀이라고 하는가?
이는 서쪽 나라의 법음으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니라. 뜻을 알면 생멸을 떠난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서 물에 파랑이 있음과 같나니, 이는 곧 이 언덕이요, 경계를 떠나면 생멸이 없어서 물이 끊이지 않고 항상 흐름과 같나니, 곧 저 언덕에 이른다고 이름하며, 그러므로 바라밀이라고 이름 하느니라.
[송계 소주]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철학》(윤창화, 민족사, 2017)의 서문에서 백장회해와 선종사원의 초기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역사상 최초의 선종사원(禪院叢林)은 唐 중기 禪宗 九祖 백장회해(百丈懷海 : 720~814)가 784년에 창건한 대웅산(百丈山 ) 백장사(百丈叢林)이다. 그 이전에는 독자적인 선종사원이 없었다. 선승들은 율종사원에서 당우 한 채를 빌려 함께 기거하는 이른바 더부살이 형식, 또는 독살이형식이었다.
백장회해는 백장총림을 세우면서 세 가지 중요한 대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불전(佛殿, 대웅전)을 세우지 않고(폐지) 법당(설법당)만 세운다(不立佛殿 唯樹法堂). 둘째, 생활경제 즉 총림의 식생활 문제는 보청(普請, 노동)으로 해결한다(行普請法, 上下均力也). 셋째, 주지(방장)은 불조로부터 친히 법을 부촉 받은 법왕이므로 그를 높이기 위하여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表佛祖親囑授 當代爲尊也).
이 세 가지는 그 역사적 사실을 의심할 만큼 놀랄만한 일이다.
당대 조사선의 선승들은 반야지혜가 투철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사상적, 정신적으로 치열하게 고뇌한 끝에 '부처'란 목석이나 금은으로 만든 불상이 아니고 반야지혜가 곧 부처임을 확신했다. 따라서 반야지혜가 작동, 가동되지 않는 부처는 나무토막이나 돌조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불전(대웅전)을 세우지 않고 법신불이 활발하게 작용하고 있는 법당을 세운 사상적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서 본문 <제1장 선종사원(총림)의 독립>에서 '선종의 독립과 백장회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벽안의 보리달마(?~495)에 의해 내딛은 선불교가 (2조 혜가 3조 승찬을 거쳐) 교단으로서 세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4조 도신과 5조 홍인(弘仁, 601~674)의 동산교단 때부터다. 이어 양경(兩京, 낙양과 장안)의 법주인 북종선의 대통신수(大通神秀, 606~706)의 눈부신 활약으로 선불교는 중앙 무대인 장안과 낙양까지 진출한다. (그러나 법맥은 대통신수가 아니라 6조 혜능 7조 남악희양 8조 마조도일 9조 백장회해 10조 임제의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아직 당 초기 8대 불교종파(천태종, 정토종, 화엄종, 법상유식종, 구사종, 율종, 밀종, 삼계교)의 대열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선종은 화엄, 천태, 율종에 비하면 토착화 과정이 얼마되지 않았고 교단의 기반이 일천하여(서기 500년 전후에 달마가 선을 중국에 전래한 후 구조 마조도일(709~788) 때까지 250~300년을 넘지 못했다), 그 세력은 지역풍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율종과 선불교는 중시하는 바와 목적, 방향 그리고 수행방법과 생활방식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율종은 불상과 경전을 신성시 하며 율장을 탐구, 실천, 준수하는 것이 중심이었으나, 선불교는 불상이나 경전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또 선불교의 수행방법은 좌선과 명상이었으나 율종은 좌선이나 명상이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법문이나 강의도 선불교는 비논리, 직관적이었고 즉심시불,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강조했으나, 율종은 논리적, 교리적이었으며, 경전과 율장을 강독하고 계율을 준수, 실천하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불교의 사찰과 종파는 대부분 황실이나 권력자, 지방 절도사, (부자) 등 경제력이 큰 재가 불자 의존도가 높았다. 반면 불교는 그들의 통치기반에 종교적 이념이나 뒷받침을 제공하였다.
백장회해는 권력자들의 후원을 거부하고, (의식주 등 생활경제 문제를 의존) 그 대안으로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보청법(普請法,노동 및 울력)을 제정해서 수행자 모두가 직접적인 생산노동, 즉 경작을 통하여 총림의 생활경제 문제를 해결과 경제적 자립을 도모했다.
백장문하의 납자들이 도시와는 거리가 먼 백장산 기슭에서 권문세가들의 손짓을 뿌리친 채, 오로지 본분사(本分事, 修行)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급자족의 보청법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종은 다른 종파에 비해 여전히 열세였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법난을 거치면서 선종이 당 불교의 주류가 되었다.
<당 무종의 '회창폐불 會昌癈佛(841-846)'사건은 4번의 폐불 사건 중에서도 가장 피해가 컸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4만 4천여 개 사찰 가운데 무려 90%에 해당하는 4만여 개의 사찰이 파괴, 폐사되었고, 26만 9천여 명의 승려 가운데 26만 명(97%)이 강제로 환속 당했다.
불상과 동종 등 철기는 모두 녹여서 주전 등 기물을 만들었고 폐사로 말미암마 경전은 90%가 불에 타는 등 사라져 버렸다.
회창폐불 사건은 당말 불교계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천태, 화엄, 법상, 율종, 밀교 등 장안과 낙양(首都)을 기반으로 한 도시형 불교는 막대한 타격을 입고 소생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특히 국가나 귀족, 권력자 등의 보호를 받고 있던 종파는 멸절 상태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서도 비교적 타격을 적게 입은 것은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노동형 종교인 선종과 서민형 종교인 정토종뿐이었다.
선종이 피해가 적었던 것은, 대부분의 선종사원은 도시와는 거리가 먼 산속에 있었고, 경작을 통하여 자급자족 생활을 했으며, 또 권력이나 귀족의 비호, 도시 지향적인 종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낙양, 장안에서 먼 양자강 부근 백장산 오지에 위치한 선종은 피해가 가장 적었는데, 혜능의 남종선이 흥기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지리적인 환경이 작용했다.
이 사건은 중국불교의 지형도를 완전히 뒤틀어 놓았다. 기존의 불교종파는 글로기 상태가 되었으나 선종은 뜻밖에도 전화위기가 되어 비상의 날개를 펴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무종의 뒤를 이어, 한때 승려가 되어 선종사원에 일신을 의탁했던 선종황제는 즉위하자마자 폐불령을 철폐하고 불교, 그 중에서도 선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 지지했다. 또 백장회해에게는 '대지선사 大智禪師', 황벽희운에게는 '단제선사 斷際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민중들과 지식인, 관료와 사대부, 지방 절도사들은 권위를 거부하는 서민형 종교인 선불교에 대거 귀의했다.
唐末五代(850~959)는 기존 불교로서는 악몽이었지만, 선불교는 禪宗五家가 성립하는 등 황금기, 전성기였다. 이 시기 선종은 중국불교를 석권했다.>
당 이후 중국에서 외래인 불교는선불교와 율종불교 모두 쇠퇴하고 정토종만 겨우 대중들 속에 잔존하게 되었다. 자생한 도교와 유교가 중국인들의 의식과 생활 태도를 형성하는 주류가 되었다.
한반도는 기원 후 2세기 중엽에 가야에 불교가 허황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에 의해 유입된 이후 4세기에 고구려와 백제, 6세기에 신라에 유입되었다. 그러나 이 불교들은 중국을 거쳐서 온 격의불교 형태였다. 한반도 삼국시대 불교는 중국의 아류였다.
그런데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에 달마보리(520년 중국 입국)의 二入四行論(理入, 行入. 報怨行, 隨緣行, 無所求行, 稱法行)이 논해져 있는 걸 보면, 7세기 신라에 달마선종의 흐름이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선 불교가 형해가 되었지만 한반도에선 불교가 고대, 중세, 근대를 거쳐 현대까지 흥성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불교의 흐름은 여러 갈래이지만 크게 계율종, 정토종, 선종의 세 갈래로 묶을 수 있다.
이중에서 석가모니 본래의 가르침을 가장 모범적으로 준수하고 있는 것은 교종 인 계율종이다. 계율종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문자로 담겨있는 불경과 계율에 충실하면 된다는 종지를 갖는다. 선종인 정토종은 불경대로만 무조건 믿고 따르면 살아서는 복을 받아 편안하고 죽어서는 서방정토 극락에 간다고 여긴다. 이 두 종은 불교의 초기부터 지금까지 일반승려들과 재가불자, 신도들에게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통일신라 말기까지 주류는 화엄종을 주로하는 계율종이었다. 정토종은 소수였고 선종은 법랑선사 등 몇 명 선승에 의해 유입되었지만 소외되고 말았다.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에서 달마보리의 <이입사행론>을 언급했지만, 그것은 신사상의 소개 차원이었지 원효 본연의 불교론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신라가 쇠퇴하기 시작할 즈음 마침 당나라 말기 '회창폐불' 법난에서 살아남은 남종선이 흥기하여 주류가 된 시대에 유학한 승려들이 남종선을 배워 수입함으로써 9세기 초부터 10세기 초까지 구산선문이 성립하게 되었다. 각 선문의 납자들은 후삼국 지도층에 조력하여 마침내 새 나라 고려를 건국시켰다.
고려 건국과 5교 양종, 조선 건국과 선교 양종의 형태였으나, 고려 초부터 교종은 쇠미해지고 이후 현대까지 선종, 그 중에서 조계종이 한국불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어느 학자는 구산선문 선종이 한반도에 정착하여 흥성하게 된 시대적 요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치사상적인 면에서도, 왕실의 전제권이 유지되던 신라 중대(무열왕~선덕왕)에 "개개인의 특성을 강조하고,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분권적 사고는 발디딜 기반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집권화가 약해지고 지방분권화가 힘을 받던 신라 하대가 되어야만 선종이 비로소 기지개를 펼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될 수 있었다.>
신라 하대(780~935)의 어지러운 정치와 현학적인 교종불교에 대한 반발이 구산선문 선종의 성립의 요건이 되었고, 나아가 신라 패망과 고려 건국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에 200여 년 앞서 진덕왕(647~654) 때에 법랑선사가 당 도신의 동산종을 배워와 전파하려고 했으나, 새로운 불교를 거부하는 기존불교의 벽 때문에 실패하고 은거했으니, 선종이 용납되는 시대가 따로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이때에 당 현장(602~664)이 서역을 통해 인도에 가서 수많은 대장경을 구해와서 한창 한역사업을 벌일 때이니, 중국과 한반도 공히 계율종이 성세인 시대였다.
화엄종은 '일체의 천지만물은 비로자나불의 현현으로 보며, 불타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전 우주를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통일적 입장을 가진다'고 한다.
구산선문은 '직지인심 견성성불 불립문자 교외별전을 교지로 삼으며, 번쇄한 교리를 일삼는 교종을 비판하고, 신라 말 고려 초 사회 변동에 따라 주관적 사유를 강조한다'고 한다.
오늘날 조계종은 우리나라 1700년 불교를 대표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840년에 개산된 가지산문의 도의를 시원으로 한다고 한다. 즉 서기 840년 이전의 한반도 불교는 약간은 인정하나 가볍게 여긴다는 말이다. 즉 그 이전의 의상과 원효 등 승려들을 그들의 법통에서 제외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상과 원효 등 신라의 고승들이 세운 부석사, 분황사, 통도사, 화엄사, 금산사 등 교종의 사찰들도 소홀히 여기는 셈이다. 그런데 그 사찰들은 현재 조계종 산하에 포함되어 매우 중요하게 관리되고 있다. 구산선문의 개산조들은 모두 화엄승들로서 당나라 유학승 출신이다. 그리하여 교리는 교종 화엄과 같이 기반 하면서 초기에 화엄종 사찰에 함께 기거했으면서도 세가 강해지자 결국 화엄 등 교종을 결국 구축하고 말았으니, 일종의 배은망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들이 당에 유학 갔을 때엔 율종 등 다른 종들이 멸절하고 남종선만 홀로 살아남아 황실의 보호 하에 발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미 당은 쇠퇴의 막바지에 처해 있었다. 선종은 중국에서는 당말오대의 혼란기, 한반도에서는 신라고려 교체의 혼란기를 동시대에 겪은 이력을 갖는다.
선종이 혼란기 이후의 시대에 반드시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교리에만 완전히 집중한 것은 아니다. 선종이 종교와 사상계의 주류가 되면서 시대가 갈수록 이전의 교종 못지않은 부작용과 병폐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선종이 일어난 명분은 계율종 격의불교의 폐해가 누적됐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내내 선종은 왕실과 귀족들의 보호를 받으며 그들의 기복을 비는 통로가 되었다. 정도전 등 신유학자들이 배불정책을 조선 건국의 주요 명분으로 한 까닭은 고려 선불교 구산선문 승려들의 부패 때문이었다.
신라 말기 교종불교의 부패를 거부하며 일어선 선종불교가 고려 말기 부패한 기득권층이 되어 신진 지성인들과 민중으로부터 축출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불교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교리와 구성, 운영에 어떤 하자가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종교성과 사상성의 양 면을 갖는다. 기복과 사후에 대한 염려가 종교성이고, 우주와 인성 등 형이상학적 의문이 사상성이다. 종교성이 가장 농후한 게 정토종이고, 사상성이 가장 농후한 게 화엄종이다. 그런데 선종은 종교성도 아니요 사상성도 아니다. 단지 직지인심과 견성성불을 주장하며 자아를 통찰함을 목적으로 한다.
정토종은 단순하기 때문에 대중들이 가장 접하기 쉽다. 그러나 화엄종은 고도의 지적 능력이 소요되기 때문에 높은 수준의 지식인이 아니고서는 접근하기 어렵다. 그러나 선종은 직관을 중시하기 때문에 지적 능력이 보통이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 물론 직관력이 아주 우수한 자 몇 몇만 견성오도 할 수 있을 뿐이고 거의 대부분은 피안으로 가는 배 안에서 평생 동안 맴돈다.
선종의 고승인 성철은 역해에서 돈오만을 강조할 뿐, 점수와 점오는 일체 부인한다. 즉 우수한 직관력과 통찰력을 가진 극소수 상근기 중심의 불교관이다. 성철은 철저한 선승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의 중생들과 사찰의 많은 승려들은 중근기이거나 하근기이다. 성철의 잣대를 넘을 높이뛰기 선수는 가뭄에 콩 나기보다 더 드물다.
그런데 이것은 '직지인심 견성성불', 즉 '모든 사람은 부처다'라는 선불교 본연의 취지에 어긋난다. '모든 사람이 부처다. 그러나 자기가 무지와 아집에 휩싸여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기의 본성을 똑바로 볼 수 있다. 그래야만 자기가 부처임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하지만,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이미 사람마다 대소장단경중의 차이가 있는데, 어떻게 같은 높이의 잣대를 댄단 말인가.
그에 비하면 대안과 원효의 높이뛰기 잣대가 더 효율적이다. 원효는 지식인을 만나면 지식인의 높이로, 저자거리 장삼이사를 만나면 장삼이사의 높이로 잣대를 오르락내리락 했다. 거지를 만나면 거지의 키 높이로, 병자를 만나면 병자의 키 높이로 불법을 전했다.
그런데 선승들은 어떠한 높이의 잣대를 갖고 있는가. 원효는 돌아다니는 잣대였다. 그럼 선승들은 움직이는 잣대인가 고정된 잣대인가. 들으니 성철을 고승이 된 후에 자기를 친견하고자 하는 자는 필히 삼천 배를 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럼 자기가 삼천 배, 아니 줄여서 삼배를 먼저 하고 내방객을 맞을 수도 있지 않는가.
좌선을 하는 목적은 견성하기 위해서다. 견성이 쉬우면 해마다 수백 수천의 도사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견성오도를 했다는 스님이 희박하다. 더구나 스스로 견성오도 한 것은 쳐주지 않고 반드시 스승의 인가를 받아야 하다는 청규가 지엄하니 득도는 더욱 어렵다. 아마 한 스승 하에서 득도를 인가 받는 고승이 일 년에 한둘 나오기가 어려운 것이다.
단순한 물음이지만, 종교의 목적과 기능을 생각해보자. 첫째로 '자아 발견과 계발을 통한 개인적 만족과 위무', 둘째로 '포교를 통한 대중 교화와 위무', 셋째로 '민심 순화를 통한 사회 안정과 행복', 네째로 '국가 공동체 의식의 형성과 단결'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교종불교는 네 가지 모두를 표방하지만, 선종불교는 이 중에서 첫째 항목에 가장 비중을 두고 있다. 둘째 등 나머지 항목도 말하지만 그것은 비중이 낮고 형식적인 말치레 수준이다. 수십 년 동안 매달려 '자아 발견', 즉 '견성오도'를 이루고자 해도 근처에도 못 간 승려들이 수두룩한데 하물며 재가불자들과 장삼이사들에겐 그것이 화중지병일 따름이다.
그리고 '견성오도'가, 삼매 하는 승려들의 근기와 취향에 따라 개인적 관심의 해소와 자기만족, 자기 위안을 위한 단순한 목표가 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평생을 바쳐 좌선 수행을 해서 득도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늙고 쇠약해서 둘째, 셋째, 네째 항목으로 나가긴 어렵다. 남은 수명 동안 제자들을 돌보는 것만 해도 벅찰 것이다. 그러므로 '완벽한 견성오도'는 개인적으로는 대단한 성취일지라도 공적으로는 일정한 한계성을 갖는다. 불교사에 보더라도 고승대덕은 한 시대에 한둘 나오기가 어렵고, 대부분의 승려들은 산중에서 좌선수행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므로 선종의 수행방식 자체가 일정한 한계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선종의 법맥이 끊어지거나 흩어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조선시대 불교가 척불이라는 국가 시책에 희생당했지만, 선종이 갖는 묘한 매력이 회의심이 강하고 자아발견에 집념이 강한 소수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그들을 산중으로 이끌었다. 그들은 입산 전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하여 불법 탐구에 집중했다. 그러나 '직지인심 견성오도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란 선종의 교리에 따라 오로지 좌선삼매를 할 수밖에 없었다. '좌선삼매'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산중 승려들만이 할 수 있다. 그러니 선종은 일상생활에 바쁜 백성들의 삶과 괴리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를 사는 백성들에게 불교와 승려들은 세속과 동떨어진 깊은 산중에 고립되어 도나 닦는 별외의 것으로 인식되었다. 인간과 민중의 고민과 고통의 근원을 찾아 치유하고자 시작된 석가모니의 불교가 혜능의 선불교 제창 이후 엉뚱하게도 세상의 인간과 민중에서 분리되고 말았다.
선종은 주관적 사유를 강조하는 자아 탐구형 사상이다. 선종이 삭발하고 가사를 입으며 사찰에서 수행하고 있어 불교라고 하지만, 석가모니가 이룩한 불교 본연의 모습에서 보면 이단이다. 그래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존숭하는 인도불교에 뿌리를 둔 동남아불교계에서는 중국, 한국, 일본의 선종을 비 불교라 말한다.
선종은 달마대사에 뿌리를 두지만 그 너머 가섭의 '염화시중의 미소'를 선불교의 시작으로 한다. 그래서 선종은 '불립문자'를 주장한다. 그리하여 부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을 보지 말고 부처의 마음을 보라고 한다. 그런데 시공으로 수천 년 수만리 떨어진 부처의 마음을 어떻게 보고 느낄 수 있는가. 경전을 보지 말라고 했으니 대대로 스승의 입으로 전해오는 말들에 중심하여 사유할 수밖에 없다. 아니 사유, 생각 자체가 아집이라 하니 그것도 버려야 한다. 그러니 득도 여부 인가권을 쥔 스승의 권위가 하늘이 된다. 그러다 보니 선종에서는 사제 관계, 즉 공적이면서도 지극히 내밀한 사적 계보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스승과 선배의 권위는 절대적이 되었고, 제자들과 후배들은 종적인 부속물화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장회해가 보청법에서 '上下均力', 주지부터 행자까지 모든 승려가 고르게 일한다는 '백장청규'를 세웠지만 후세로 갈수록 희미해졌다. 또 백장회해가 시퍼렇게 세운 '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대원칙이 각 사찰마다 각 승려마다 엄히 실천하고 있었는지 짚어볼 일이다.
달마가 선종의 씨앗을 뿌리고, 혜능이 기르고 백장회해가 터전을 닦았다. 그러나 그들의 시작하는 마음은 순수했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른 노폐물은 쌓이고 싸여 마침내 동맥 경화를 일으키고 말았다.
선종이 발달한 원인이 여러 가지이지만 기존의 교종에 대한 반발과 개혁이 중심이었다. 그런데 그들도 결국 교종과 같은 동맥경화증에 걸리고 말았다.
'견성오도'는 무형의 이상으로서 사실 매우 지난하다. 정해진 기준표가 있는 게 아니라 도달한 자는 스스로 만족할 따름이고, 주위 사람들은 그의 언행을 보며 추측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수행법은 선종 교단 내에서는 통할 수 있어도 다른 교단이나 일반사회에서는 통할 수 없다.
선종이 부처님의 마음을 중심으로 한다는데, 그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직접 만나 법음을 들을 수 없으니, 제자들이 기록하여 남긴 불경으로 마음을 알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니 '불립문자 교외별전'이 말로서는 그럴듯하지만 실제가 아니다. '불립문자'의 의미는 경전 자구에만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요, ''교외별전'은 경전 이외의 다양한 경험을 고려하란 말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일부 고승들은 그것을 교종을 배척하고 불경을 소홀히 하는 하나의 명분으로 삼았다.
혜능 자신이 다른 중을 시켜 벽에 오도송을 쓸 만큼 일자무식이었다. 내가 지금 읽으며 소주 하는 이 《돈황본 육조단경》은 혜능 사후 70여 년이 지나 상좌인 하택신회가 편집한 책이다. 일자무식인 혜능이 유식한 말을 그렇게 많이 하진 않았을 게고, 유식한 신회의 자작품일 것이다.
이 책 자체가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란 교지에 어긋난다. 그럼에도 신회가 이 책을 편찬한 까닭은 스승의 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널리 세상과 후세에 알리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석가모니의 법이 적힌 다양한 불경들도 가르치고 널리 알림이 당연하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선종은 모순성을 갖는다.
현대 우리나라 불교가 어떤 모습이고 어떤 불법인지 잘 모른다. 아마 과거식의 선교 분리나 분별, 거부와 배척은 없을 것이다. 불교 수행의 목표는 일반화 되어 있다. 일신의 안일과 만족을 구하고자 삭발하고 납의를 걸치는 승려는 없을 것이다. 단지 수행 방법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듣기로는 현대불교는 좌선과 불경을 함께 한다고 한다. 맞는 방향이다. 좌선과 불경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서는 동전의 가치가 사라진다. 그러므로 교종이니 선종이니 조계종이니 화엄종이니 태고종이니 정토종이니 하는 종파 분별이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렇다고 두리뭉실 잡탕밥으로 섞을 필요는 없다. 정상은 같으나 등산로가 다른 불교의 제 종파가 서로 경원하거나 배척해선 안 된다. 취처 종파도, 석가모니가 출가 전에는 한 남편이었음을 생각하면 불교라는 큰 그릇 안 한 구석에 담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음주와 도박, 오입과 사음을 일삼는 자들까지 불교의 그릇 안에 담아 둘 필요는 없다.
선종은 선종대로 출발 시의 청정한 본연의 자세를 다시금 생각하고, 교종은 불경에 집착하여 형식미만 강조하는 구태의연함을 떨어내야 한다. 개인적 고뇌를 해소하는 방편으로 불교를 이용하는 것은 좋으나 자기도취에만 집착하는 소아적인 불교관에 머물어선 안 된다. 또한 봉건왕조 고려와 조선, 침략자 일제식민지시대에서 자의든 타의든 지배계급에 부역하던 불교가 아니라 민중의 애환을 위무하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는 불교 대의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하여 21세기 초 온갖 환난과 혼미 속에서 방황하는 중생들에게 출구를 찾는 한 줄기 빛을 내는 발광체가 되어야 한다. 이 길이 '私的 반야'와 '公的 반야'가 상생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迷人口念 智者心行 當念時有妄 有妄卽非眞有 念念若行 是名眞有 悟此法者 悟般若法 修般若行 不修卽凡 一念修行 法身等佛 善知識 卽煩惱是菩提 捉前念 迷卽凡 後念 悟卽佛 善知識 摩訶般若波羅蜜 最尊最上第一 無住無去無來 三世諸佛 從中出 將大智惠到彼岸 打破五陰煩惱塵勞 最尊最上第一 讚最上 最上乘法 修行 定成佛 無居無住無來往 是 定惠等 不染一切法 三世諸佛 從中變三毒 爲戒定惠
미인구념 지자심행 당념시유망 유망즉비진유 념념야행 시명진유 오차법자 오반야법 수반야행 불수즉범 일념수행 법신등불 선지식 즉번뇌시보리 착전념미즉범 후념오즉불 선지식 마하반야바라밀 최존최상제일 무주무거무래 삼세제불종중출 장대지혜도피안 타파오음번뇌진로 최존최상제일 찬최상 최상승법수행 정성불 무거무주무래왕 시정혜등 불염일체법 삼세제불 종중변삼독 위계정혜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고 지혜로운 이는 마음으로 행한다. 생각할 때 망상이 있으면 그 망상이 있는 것은 곧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 생각마다 행한다면 이것은 진실이 있다고 하느니라(생각 생각마다 진심으로 행한다면 곧 진실로 있음이라고 이를 수 있다).
이 법을 깨친 이는 반야의 법을 깨친 것이며 반야의 행을 닦는 것이다. 닦지 않으면 곧 범부요 한 생각 수행하면 법신과 부처와 같으리라(한 생각으로 열심히 수행하면 법신과 같은 부처이니라).
선지식들아, 번뇌가 곧 보리니, 앞생각을 붙잡아 미혹하면 곧 범부요 뒷생각에 깨달으면 곧 부처이니라(번뇌를 잘 깨치면 곧 보리에 이르나니, 번뇌에 계속 집착하면 범부가 되고 보리를 깨달으면 부처가 되느니라. 번뇌가 보리에 이르는 다리가 될 수 있다).
선지식아, 마하반야바라밀은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라, 머무름도 없고 가고 옴도 없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다 이 가운데로부터 나와 (장차 ) 큰 지혜로서 저 언덕에 이르러 오음(색수상행식)의 번뇌와 진로를 쳐부수나니,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니라.
가장 으뜸임을 찬탄하여 최상승법을 수행하면 결정코 성불하여, 감도 없고 머무름도 없으며 내왕 또한 없나니, 이는 정과 혜가 함께하여 일체법에 물들지 않음이라,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서 삼독을 변하게 하여 계, 정, 혜로 삼느니라
[松溪 小註]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능엄경 설법 중
* 12因緣法 : 12가지 요소가 서로 인과 관계를 이루어지면서 성립되는 현상.
無明, 行, 識, 名色, 六入, 觸, 受, 愛, 取, 有, 生, 老死
五陰 : 12인연법 중에서
色(있지도 않은 티끌을 일으키고)
受(받아 들이고)
相(모양을 느끼고)
行(움직임이 나타나고)
識(작용이 표면화 된다)
* 三毒 : 근본적인 세 가지 번뇌. 탐욕, 진에, 우치
貪慾(食慾, 色慾, 財慾, 名譽慾,
睡眠慾으로, 구하는 것 자체가 탐욕이
아니라 그것이 정도를 지나칠 때
탐욕이 된다.)
瞋恚진에(분노, 시기, 질투로 수행하는
데 큰 허물. 다스리기에 가장 어렵다.)
愚癡(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마음. 이로 인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판단할 수 없다.
번뇌의 원인이 된다.)
* 八正道 : 삼독을 없애기 위한 수행법
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바른 행동),
正命(바른 생활), 正精進, 正念(바른
인식), 正定(바른 정신)
* 戒定慧
戒(탐욕을 다스린다)
定(진에를 다스린다)
慧(우치를 다스린다)
善知識 我此法門 從八萬四千智惠 何以故 爲世有八萬四千塵勞 若無塵勞 般若常在 不離自性 悟此法者 卽是無念 無憶無著 莫起誑妄 卽自是眞如性 用智惠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선지식 아차법문 종팔만사천지혜 하이고 위세유팔만사천진로 약무진로 반야상재 불리자성 오차법자 즉시무념 무억무착 막기광망 즉자시진여성 용지혜관조 어일체법 불취불사 즉견성성불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팔만사천의 지혜를 좇느니라.
무엇 때문인가?
세상에 팔만사천의 진로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진로가 없으면 반야가 항상 있어서 자성을 떠나지 않느니라.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이니라. 기억과 집착이 없어서 거짓되고 허망함을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이 곧 진여의 성품이다.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자성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느니라.
[性徹 譯]
* 오즉불(悟卽佛, 깨치면 곧 부처) ... 六祖는 불지(佛地) 이외는 깨달음(오)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 최상최존(最上最尊, 가장 으뜸이고 가장 높음) ... 六祖가 설하신 법문의 전체를 두고 말함이다.
[송계 소주]
인간이 한 생물로 살아가노라면 팔만사천 종류의 진로, 다양한 경험을 한다. 그 중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것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일상의 파문들이다.
불교가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조선 유학자들로부터 비난 받은 핵심은 '인륜거역 무위도식'이었다. 속세를 떠나 머리를 깎고 회색 가사를 입음으로서 부모의 자식이 아니라 부처의 제자가 되니 천륜을 거역함이요,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 있으니 무위도식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이 아니요, 멍하니 앉아만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의 밭을 열심히 경작하고 있는 중이니 무위가 아니다. 백장선사 이후 선종의 취지가 '일일부작 일일불식'이니 결코 무위도식이 아니요, 신도들이 스님들로 하여금 농사일은 하지 말고 열심히 좌선구도 하여 미혹한 세상에 등불을 비춰달라고 하면서 시주를 하니 결코 무의도식이 아니다.
다수의 승려들은 승려 본연의 사업에 열중하고 있으나, 소수의 승려들이 본연을 잊고 일탈하는 것을 보고선 지레짐작 하여 승려 전체를 매도해선 안 된 것이다.
혜능이 지금까지 하는 법문의 요체인 무념 무상 진여 반야 지혜, 모두 좋은 말이다. 모두 이웃이나 사회, 즉 다수의 공동체를 위한 덕목이 아니라 철두철미 자기 마음을 위한 덕목이다. 그래서 불교는 기본적으로 자기 개인의 마음을 정화시키려는 개인성 종교이다. 물론 '하화중생'도 제시 되지만 '상구보리'가 지난한데 언제 하화중생에 나설 수 있겠는가. 상구보리를 완성하면 곧 백발에 피부는 쭈글쭈글하고 기력이 쇠해 걸어 다니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의 변화에 불교가 어떻게 적응하여 변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깊은 산중 암자의 승려들이야 참선수행에 정진하여 상구보리를 완성하면 되겠지만, 세속에서 불교를 수행하는 재가거사들은 참선만 계속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재가거사들은 참선과 불경을 병행함이 좋다.
앞에서 몇 번이나 비판했지만, 선종이 직지인심과 불립문자 등만 강조하며 불경을 소홀히 여기거나 배척해선 안 된다. 혼자 좌선하며 속으로 화두를 굴리는 것도 좋지만, 앞서 산 부처님과 여러 고승들이 남긴 말씀이 적힌 불경을 나침반과 이정표로 삼아 공부하면 훨씬 빨리 상구보리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득도를 해야 하화중생의 대도에 나설 수가 있다. 요즈음 시내 여러 곳 건물에 법당이 생겨 시민들이 쉽게 불교를 만날 수 있다. 만나 보진 않았지만 아마 젊은 승러들이 불교 대중화 사업을 펼치는 것 같아 보기에 좋다.
현대 사회는 온갖 문제를 안고서 굴러가고 있다. 강대국들은 극초음속 미사일 등 최첨단 무기 개발에 온 국력을 쏟아 붓고, 개인 개인은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하기 위해 눈에 불은 켜고 돈을 좇고 있다. 현실 사정이 이러한데 무슨 무념이고 무상이고 견성이고 반야고 피안인가. 강대국 국민들과 부자들에겐 전혀 이해되질 않는 휘황한 헛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온갖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자. 극초음속 미사일은 적국의 공격에 대한 공포 때문이요 큰 평수 아파트와 고급 자동차는 친구와 친척, 이웃에게 성공을 자랑하고자 함 때문이다. 그 공포와 자랑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마음이다. 개인의 보이지 않은 마음의 동굴에서 온갖 생각과 감정이 나온다. 그렇다면 자기 마음의 동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사상, 철학, 종교가 있음이다.
이 세상을 이루는 만물만상은 극초미세한 소립자들의 엉킴과 흩어짐, 율동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만상만물의 근원을 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사색 전문가가 아니라서 궁극에까진 못 가보더라도 분자 차원까지는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위 곳곳 깊고 조용한 곳에서 사유의 바다를 헤엄치며 궁극에 도달하고자 노력하는, 색색형형 선지식들이 많으리라. 선지식은 못되더라도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는 인간이라면, 극초음속 미사일 공포로부터, 부자임을 뽐내고 싶은 자만으로부터 탈출하여 내 마음의 동굴에 한 번들어가 보지 않으시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