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서] 겨울이니까, 눈보라 맞서서 함께 ‘꽃 잔치’ 떠나요.
겨울이니까, 찬바람 부니까, 고뿔 들었으니까…… 이제 우리 함께 꽃잔치 떠나요! 매운 바람 사납게 닥쳐오고, 눈보라 휘몰아치더니, 다시 천둥 번개가 굵은 빗줄기 몰고 오시더군요. 지난 주말의 날씨, 하수상하다 할 만했습니다. 등 허리가 시릴 정도로 날씨가 차갑다가 하루 쯤 괜찮아지는 듯싶었어요. 그러더니 다시 또 추워지고……. 겨울이기도 하지만, 이 정도면 고뿔 들기 딱 좋은 날씨입니다. 사람 몸뚱아리를 높이 치켜들었다가 냅다 내동댕이치는 듯한 날씨입니다. 아무래도 이 참에 꽃놀이 떠나야 할까 봅니다.
○ 생명이 살아 숨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꽃은 피어 ○
‘겨울꽃잔치’라고 하면 마치 ‘동그란 네모’ ‘오래된 미래’ 처럼 ‘형용모순’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겨울꽃잔치’는 형용모순이 아닙니다. 겨울이어도 꽃은 피어납니다. 어쩌면 삼백 예순 날 어느 날이라 하더라도 이 땅 어딘가에는 꽃의 향연은 이어집니다. 뭇 생명이 살아 숨쉬는 곳이라면 그곳에는 필경 꽃이 있습니다. 꽃은 생명이 살아있다는 뚜렷한 증거이니까요. 워낙에 겨울에 피어나는 본성을 가진 나무도 있지만, 겨울에 따뜻한 햇살을 만나면 봄인 줄 알고 피어나는 개나리 철쭉도 있지요. 그러니 우리 땅 어디엔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름다운 꽃이 있으리라는 생각, 떨칠 수 없습니다. 이 사나운 날씨를 떨치고 일어나서 꽃을 찾아 길 위에 올라야 할 이유입니다.
지난 계절에 그리도 아름답던 단풍잎이 낙엽되어 나뭇가지를 모두 떠났습니다. 그래도 꽃은 피어납니다. 무엇보다 남녘에는 이 즈음 빨간 동백나무 꽃이 망울망울 꽃봉오리를 한창 피워올렸겠지요. 겨울은 동백나무 꽃에서 시작합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중부지방에서라면 동백나무 꽃이 피어나는 계절은 이른 봄입니다. 천리포수목원의 경우에는 목련 피어날 즈음에 동백나무 꽃도 함께 피어나지요. 하지만 동백나무의 고향이랄 수 있는 남해안 지역에서는 십이월이면 벌써 빨간 동백나무 꽃을 볼 수 있습니다. 올에는 지난 가을 단풍이 유난히 아름다웠던 것만큼 동백나무 꽃도 더 빨갛게 피어나지 싶습니다.
○ 겨울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애틋한 풀꽃 한 송이 ○
동백나무 꽃 이야기를 하려니, 마치 이미 동백나무 답사 길에 오른 것처럼 벌써부터 마음이 설렙니다. 올 겨울에는 해 넘어가기 전에 남해안의 동백나무 숲을 찾아가 빨갛게 피어날 꽃을 누구보다 먼저 찾아보리라 마음 먹습니다. 아직은 동백나무 꽃이 좀 이른 편이니, 조금 뒤로 미루어야 하겠습니다. 빨간 동백나무 꽃은 찾아보는 대로,《나무편지》로 정성껏 전해드리겠습니다. 오늘 《나무편지》에서는 겨울의 꽃 이야기를 하면서 저로서는 빼놓을 수 없는 애틋한 꽃 한송이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매발톱꽃입니다. 대개 유월 초 쯤에 산골의 햇살 바른 곳에서 피어나는 여러해살이 우리 풀입니다. 꽃송이 뒤쪽에 삐죽이 솟아나온 부리가 마치 매발톱을 닮았다는 데에서 붙은 이름이 매발톱꽃입니다. 꽃의 생김새가 화려할 뿐 아니라, 빛깔까지도 초여름 기운에 잘 어울리는 꽃이지요. 신비로울 정도로 독특한 빛깔과 생김새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사랑받는 식물이다 보니, 사람들은 이 꽃의 다양한 품종을 선발해내 키웁니다. 그러나 그 모든 매발톱꽃 종류들이 꽃을 피우는 시기는 초여름, 유월부터 칠월 사이입니다.
○ 봄, 여름에 피는 꽃이 겨울에 피어난 까닭 ○
아름다운 매발톱꽃을 한겨울인 십이월 말쯤에 본 적이 있습니다. 몇 해 전 이야기입니다. 매운 겨울 바람 탓에 투툼한 외투의 옷깃을 여미며 천리포수목원을 여유로이 산책하던 중이었습니다. 멀리서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뿔싸! 여름에 피어나는 풀꽃, 바로 매발톱꽃이었습니다. 바로 위의 사진이 그 십이월이 피어난 매발톱꽃입니다. 그리고 바로 아래의 사진은 이 꽃이 초여름에 피어났을 때의 모습입니다. 오늘 《나무편지》에 포함한 다른 매발톱꽃 사진들은 다른 품종의 매발톱꽃들입니다. 제 시기에 맞춰 피어난 매발톱꽃만큼 싱그럽지도 않고 예쁘다 할 수도 없었습니다. 워낙 바람 찬 한겨울이었으니까 그 꽃이 온전할 수 없었겠지요. 그나마 피어난 것조차 신기할 따름이었죠.
대관절 어쩌려고 이 찬 바람 맞으며 꽃을 피운 것일까요? 넋이 빠진 채 한참을 꽃송이 앞에 쪼그려 앉아 가만가만 살펴 보았습니다. 추위에 파르르 떨며 고개 숙인 채 꼼짝 않고 피어있는 매발톱꽃! 볼수록 애처롭고 신비로웠습니다. 그 날은 아마 유난히 추웠던 날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매발톱꽃을 오래 바라보면서도 그의 애처로운 모습을 사진에 많이 담지 못했어요. 가만히 오래 바라본 끝에 이 작은 풀꽃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매발톰꽃이 서 있는 자리가 문제였습니다. 바로 커다란 메타세쿼이아 그늘 한가운데가 그의 자리였습니다. 누가 일부러 심어준 건 아닐 겁니다. 매발톱꽃이 양지 바른 곳에서 잘 자라는 풀꽃인 걸 모를 리 없는 수목원 식물 관리자들이 구태여 그 자리에 심었을 리 없지요.
○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여린 풀꽃의 간절한 안간힘 ○
봄에 그늘 짙은 곳에서 새싹을 틔운 매발톱꽃은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 즉 꽃 피우고 열매 맺어 자손을 번식시켜야 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선 꽃 피울 양분을 수굿이 모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곁에 서 있는 메타세쿼이아 그늘 사이로 비쳐드는 가늣한 햇살을 받아 지어내는 양식만으로는 꽃 한송이 피어낼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란 다른 매발톱꽃이 모두 화려한 꽃을 피우고 열매 맺고 시들어 진 뒤에도 그늘에 핀 매발톱꽃은 꽃 피울 양분을 모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매발톱꽃은 더 열심히 양분을 모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매발톱꽃 이파리 위에 햇살이 환하게 비쳐들었습니다. 가을 되어 메타세쿼이아가 낙엽을 한 뒤였습니다.
매발톱꽃은 때를 놓치지 않고, 햇살을 그러모아 양분을 지었습니다. 꾸준히 모은 끝에 드디어 한 송이 꽃을 피울 만큼의 영양분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아! 정말 그런데……. 그때는 이미 그 꽃의 꽃가루받이를 이뤄주어야 할 벌나비가 이미 자취를 감춘 십이월 말이었습니다. 아마 매발톱꽃도 그걸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소명을 끝내 이루기 위해 한겨울까지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애면글면 양분을 모아 꽃을 피워낸 겁니다. 여린 생명의 애옥살이가 눈물 겹도록 아름답고 애틋했습니다. 몇 해 전에 쪼그려 앉았던 한 송이 매발톱꽃이 유난히 가엽게 기억되는 겨울 초입입니다.
○ 이 겨울을 더 아름답게 할 꽃을 찾아서 ○
이 겨울에는 어떤 꽃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서서히 길 위에 오를 채비를 하며 지난 겨울을 뜨겁게 보냈던 겨울 꽃들을 하나 둘 떠올립니다. 누구보다 먼저 겨울을 노래하는 애기동백이 그러했고, 아름다운 향기가 지독할 정도로 강한 납매가 그러하며, 눈 속에서도 화사한 노란 빛깔을 내려놓지 않는 중뿔남천이 그랬지요. 겨울 내내 다문다문 피어나는 가을벚나무의 벚꽃 역시 이 겨울에 빼놓을 수 없는 꽃입니다. 자, 이제 우리 함께 마음으로라도 겨울 꽃 잔치에 함께 떠나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