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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바라봄의 원리
25/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제자들이 그가 바다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 하여 소리 지르거늘 27/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 하지 말라 28/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 지라 소리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 지라 33/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이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본질중에 대단히 중요한 원리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라봄의 원리”입니다.
즉 이루고자 하는 것을 사모하고 바라보면서 기도하면 주께서 그것을 이뤄워 주시는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결코 사모하지않고 바라보지 않는 어떤 것도 응답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소중한 원리가 가장 잘 나타난 사건이 바로 창세기에 소개되는 야곱의 사건입니다.
야곱은 자기를 속이고 품삯을 열 번이나 번역했던 라반에게 복수하고자 하여 신기한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양과 짐승들이 임신을 할때마다 한가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창30:37~39)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알룩달락한 것들을 바라보게 하니 알룩달룩한 새끼들이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야곱은 자기 양의 숫자를 불리기 위해 ‘바라봄의 법칙’을 적용할 줄 지혜를 가졌던 것으로 추적할수 있습니다.
제 며느리가 임신을 했습니다.
제가 들은 풍월이 있어서 “애야, 좋은 것만 생각하고 좋은 것만 바라보아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바라보고 사모하는 것들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려고 준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기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한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고 자녀들에게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신6:8-9) 너는 또 그것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바라봄의 원리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 될 때까지 아무 이름도 없는 목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서 부터는 바라봄의 원리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시작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지시한 땅을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이러한 그의 언약에 대한 바라봄이 그를 복의 근원이 되게 했습니다.
- 또한 자녀에 관한 축복도 동일한 원리를 통해 성취됩니다. (창15:5-6)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별들을 바라보게 하셔서 그 별들의 숫자만큼 자녀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천체 망원경으로 은하계를 넘어 천체에 더많은 별들을 바라보았더라면 하나님나라가 더욱 창대해 졌을 것입니다.
- (창13:14-15)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을 얻게 되는 과정이 소개됩니다.
곧 그가 롯과 헤어진후에 하나님께서 롯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이처럼 아브라함의 생애는 온통 바라봄의 원리가 적용된 생애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범사를 진행할때에 믿음이 있어서 믿음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휼륭한 믿음으로 대답이 나오게 되고, 그 대답대로 고백하면 하나님이 이뤄주신다는 것을 믿을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면 런던에서 올림픽이 개최되고 있습니다.
선수들이 무작정 훈련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목에 금메달을 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맹훈련을 하면서 자신을 가꾸워 그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바라봄의 원리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에게 나타난 바라봄의 원리가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풍랑속에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던 제자들이 침몰위기에 있자 주님이 물위를 걸어서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모두 놀라서 “유령이다”소리를 질러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늘 사고하기 전에 행동하던 행동파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하여 놀라운 도전장 하나를 내어밀었습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하소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도전을 교만으로 책망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오라”고 해 주신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자신을 오라고 명하신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담대하게 배에서 내려 물위를 걷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그때 발생합니다.
갑자기 베드로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내가 지금 무슨짓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인간인데 물위를 걷다니 이건아니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자기 눈에 물위에 여전히 서계시는 주님은 보이지 않고 물위로 걷는 자신과 거세게 불어닥치는 풍랑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입니다.
본문에 보면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볼때에는 신기하게도 물위를 걷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가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을 바라보았기에 순식간에 물속에 빠지는 무서운 실패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놀라운 교훈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라봄의 원리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끝까지 주님만 바라보았더면 얼마나 찬란한 경험을 했겠씁니까?
그러나 그가 주님을 바라볼때에는 물위를 걷는 인류역사상 초유의 사람이 될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람과 바다를 바라볼때에 물위의 사람이 아닌, 물속의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물위를 걸으라
이 말씀에서 물위의 사람이 있고, 물아래 사람이 있습니다.
곧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갈때에 물위의 사람으로 우뚝설수 있었씁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보는 눈길을 거두워 바람과 바다를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물아래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모두 에게도 물위의 사람이 되라고 권고하고 계십니다.
물론 우리가 다시 베드로처럼 물위로 걸어서 한강을 건널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이사건이후에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주님께서는 이 베드로의 한번의 경험으로 주님 자신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인시켜 주셨고, 주를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오라”고 하십니다.
곧 우리로 주님을 바라보고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길이 세상에 머물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적의 삶을 향해 도전할수 있게 됩니다.
저와 운동하는 60대 아주머니 한분이 계십니다.
과거에 열심히 교회를 다니신분이십니다.
그분이 제게 고백하기를 ‘목사님이 내곁에 게시기만 해도 영적인 기를 받는기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만큼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교회를 다니지 않습니다.
원인은 딱 한가지입니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으나 주님을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만 보고서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자기가 의지했던 그 사람이 주는 실망감 때문에 그만 구원의 유일한 길인 교회를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보는 훈련을 계속하셔야 합니다.
주님은 신실하셔서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만 바라보는 훈련을 하면 일생동안 위대한 신앙인으로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안에서 자꾸 사람을 보면서 비판하고 비교하고 판단하면 자신의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고통을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군대 가면 줄을 잘서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줄 만 잘 서면 편안한 군대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도리어 “신앙이야 말로 줄을 잘 서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곧 믿음좋은 사람,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 곁에서 신앙생활을 하면 휼륭한 신앙인으로 성장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꾸 비판을 좋아하고 인간적인 신앙인 곁에 있으면 함께 망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어부의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할아버지가 배를 타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버지도 배를 타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형도 배를 타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막내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 막내도 배를 타로 나갔다고 풍랑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에 어머니가 이 일이 왠일 이냐로 통곡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집에 가보니 방한가운데 시원한 바다를 헤쳐나가는 한폭의 배에 대한 그림이 있드라는 것입니다.
식구들이 밤낮으로 그것을 바라보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에 삶을 드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했던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이분은 거제도 바닷가 작은 시골동네에서 정상적인 교육환경이 조성되지 못한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고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때부터 대통령이 되고 싶어서 책상앞에 “미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붙여 놓고 공부를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분은 대통령이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들었던 목사님의 설교가 있습니다.
“자녀는 가르친대로 성장하지 않고 보여준대로 성장한다”는 말씀입니다.
보여주어야 그 모습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 목표를 자녀가 공부하는 책상앞에, 화장실안에, 대문앞에, 문짝마다 붙여 놓으십시오.
그리고 자녀와 함께 구체적으로 기도하고 도전하십시오.
아래 자녀가 되고싶어하는 미래의 상을 만들어 세워두십시오.
자녀는 틀림없이 그 모습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주대준씨의 책입니다.
그분은 지리산 자락의 산청군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부모를 여의고 고학으로 야간고등학교를 졸업 후, 육군 전산장교를 거쳐 청와대 전산실 창설 시 프로그램팀장으로 청와대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전산직능 공직자가 승진할 수 있는 한계인 전산실장을 넘어 정보통신처장, 초대 행정본부장, 경호차장으로 승진한 뒤 2개 정부에 걸쳐 경호차장을 역임하며 20년 동안 다섯 분의 대통령을 모신 후 경호실 5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진기록을 세우고 지난 2008년 12월, 역대 경호실 간부 중에서 최초 연령정년 퇴직을 한분입니다.
그분은 청와대 근무 시절, '청와대 기독신우회'를 창립, 퇴직 때까지 회장으로 섬겼으며, 입법, 사법, 행정부 및 지방자치단체를 총망라한 대한민국의 100만 공직자 선교를 위해 '한국기독교공직자 선교연합회' 창립을 주도하여 대표회장으로서 공직자 선교에 온 힘을 쏟으며 기적과 같은 부흥의 스토리를 써내려갔던 분입니다.
지금은 KAIST 전산학과(사이버보안) 교수로 부임하여, KAIST 개교 40년 역사상 최초로 정보보호대학원과 사이버보안센터를 설립하였고, 교수 부임 7개월 만에 대외부총장으로 임명받은 분입니다.
현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이자 월드비전 이사, 인터넷 윤리위원회 공동대표, 한국 미래목회포럼 정책자문위원, 한국직장선교연합회 이사로 봉사하며 섬기는 그는 시대를 선도하는 비전과 열정을 품고 있는 분입니다.
그분에 글에 보면 몇가지 교훈적인 내용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라보는 대로 인도하신다”
“바라볼수 있는 멘토가 있어야 한다”
“바라봄은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짓바람이 아니라 바라봄으로 가정을 세우신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화와의 타락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사탄의 유혹으로 화와가 생명과가 아닌 선악과를 바라보자 과연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를 얻기에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세상을 보라. 그러면 괴로울(distressed) 것이다. 당신 자신의 내부를 보라.
그러면 의기소침할 (depressed) 것이다. 그리스도를 보라. 그러면 쉼을 얻을(destressed) 것이며 행복을 누릴 것이다.”
최근 10대 청소년들은 영화 속에나 있을 법한 일들을 저지릅니다.
그런데 이들은 실제로 범죄를 저지른 후, 드라마나 영화를 모방했다고 말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지난 5년 간 아동성폭력이 무려 80.2%가 증가했고, 10대 성범죄 발생률은 일본의 10배, 미국의 2배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최근에는 인터넷과 케이블 TV 등 매스컴을 통해 모방 범죄가 생기면서 더욱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유럽과 미국에서는 범죄에 관한 보도를 줄이자, 그동안 강력한 처벌로도 줄어들지 않았던 범죄율이 빠르게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법적으로 범죄하는 사람들을 처벌해도 범죄가 줄어들지 않았는데 TV에서 그것을 생생하게 찍어서 보여주고 보도하는 것을 자제시키니까 자동적으로 범죄율이 확고하게 줄어들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국정보화진흥위원회에서 올해 청소년들을 조사한 결과, 하루 종일 모니터를 바라보며 게임 중독에 빠진 청소년이 14만 명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게임을 한다고 모니터 화면만 바라보고 있어요.
특히 어린 시절에 게임 중독에 빠진 아이들은 성장 후에도 술, 마약, 도박 중독에 빠질 확률이 더욱 높고, 사회적으로 큰 범죄를 저지를 위험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마음을 점령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와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마음에 생명수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생명이 들어오게 되므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생명의 역사가 나오므로 우리 생활에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살아계신 주님과 주님의 언약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할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