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으로의 여행 크로아티아, 발칸을 걷다]
Serbia
05 세르비아의 하얀성, 베오그라드(2)
“자, 이제 밖으로 나가죠.”
“혹시 부렉(BUREX)이라는 빵을 아시는지요?”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부렉요?” 하고 엘레나가 나를 보며 말하였다.
“이것은 세르비아 특제품인데 일종의 치즈 파이입니다. 이 파이는 비트나 버섯을 함께 넣어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까 택시에서 내린 곳 바로 건너편에 이곳에서 유명한 빵집이 있어요. 한번 맛보시지 않을래요?”하고 나는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좋아요, 그 나라 특산 음식을 먹어 보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니까요.”
우리는 걸어 나가 빵집으로 갔다. 어차피 우리의 다음 목적지로 가는 방향이었다. 빵집은 조그마했다. 우리는 빵을 샀다. 빵은 안에 들어가는 것에 따라 고기 부렉, 양파 부렉, 치즈 부렉 등 다양하게 있었다. 우리는 치즈 부렉을 사가지고 목적지로 향했다.
우리는 칼레메그단을 시작으로 프린스 마이클 거리라 불리는 크네즈 미하일로바 거리로 들어섰다. 이곳은 80년대부터 차량 통행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인사동, 대학로 같은 곳이었다. 직선으로 길게 뻗은 거리는 고전적인 느낌이 들었다.
내가 먼저 엘레나에게 설명하였다.
“이곳이 바로 프린스 마이클 거리 즉 미하일로바 거리죠.”
그녀는 나의 말이 끝나자
“이곳은 신기두눔 시대에는 주도로로 사용됐다고 하던데요. 당시에는 수레, 말 등이 다녔다고 합니다.
“책에 보면 첫 번째 거리라고 하던데 킹 피터 거리.”
“아 여기요, 이 거리가 킹 피터 거리인데 한때는 이곳 베오그라드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 중 하나였죠. 특히 18세기에는 많은 멋쟁이들이 사바 강에서 도나우 강, 도나우 강에서 사바 강으로 걸어 다녔다고 합니다. 여기서 도나우 강까지 1.5킬로미터, 사바 강까지는 약 1킬로미터 정도인데 지금 있는 이곳이 중간 정도 된다고 합니다.”
“엘레나”하고 나는 그녀를 불렀다. 자주 부르지 않은 이름이라 그런지 조금은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물음표) 카페 아세요?”
그녀는 관광 책자에서 보았다고 말하였다.
“우리 그곳을 한번 찾아볼까요? 아마 이 근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녀는 좋다고 하였다.
“베오그라드에는 카페를 비롯해서 레스토랑 등 좋은 곳이 많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이곳은 인기가 좋은 곳이라고 합니다. 이전에는 약국 등 다른 용도로 쓰였지만 마지막 주인이 카페로 1823년에 만들었다고 합니다. 세르비아 정교회 근처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나는 이정표를 보고 방향을 잡아 아래로 걸어내려갔다. 크랄랴 페트라 거리였다. 세르비아 국립은행이 보이고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니 ?(물음표) 카페가 보였다.
하얀 조그만 간판에 ?(물음표)가 적혀 있었다. 카페 안을 보니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특징이 있다면 테이블이 아주 작다는 것이었다. 들어가서 커피를 마시기로 하였다.
커피를 시켰는데 조그만 구리 접시에 견과류 같은 것이 나왔다. 식사용 테이블은 조금 더 컸다.
엘레나가 물었다.
“왜 이곳이 유명할까요?”
“이곳 분위기가 전통을 중요시하는 유럽인의 취향에 어울리는 전형적인 19세기 카페이고 그리고 이곳이 카페로 유명해진 것은 도나우 강을 이용해 들어오는 리버 크루즈 때문이 아닐까요? 독일에서 시작해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세르비아를 거쳐 흑해로 가는 유람선이 들어오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인들이 많다고 하네요. 이것은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수다를 떨고 있을 때 커피가 나왔다.
커피 맛은 무엇이라 이야기하기 뭐하지만 분위기로 마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견과류와 커피, 무엇인가 맞지 않는 느낌이었지만 단맛의 견과류와 쓴맛의 커피가 조화를 잘 이루는 느낌도 들었다.
커피숍 안에는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인물들의 사진이들이 걸려 있었다.
“이곳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아시는지요?” 하고 나는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모르겠는데요? 어떤 이야기죠?”하고 엘레나는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래 이곳에는 또 다른 이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카페의 이름을 ‘성당 옆의 카페’로 바꾸었는데 성당에서 이러한 이름이 맘에 안 들었는지 카페 주인을 고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카페 이름인 물음표(?)로 바꾸었다는군요.”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밖으로 나가 가까이 있는 세르비아 정교회로 갔다. 카페에서 바라보는 방향은 정교회의 측면이었다. 정교회를 중심으로 왼편에 있는 건물은 세르비아 정교회 박물관이었다.
“저기 보세요. 저건 세르비아 정교회 박물관입니다. 세계 1, 2차 대전 때 건립되었어요. 안에 세르비아 정교회 종 대주교의 집무실이 있습니다.”하고 나는 그녀에게 말하였다.
엘레나가 도로를 건너 정교회 정문으로 향하면서 말하였다.
“세르비아 정교회를 ‘사보르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세르비아 정교회는 총 300여개 정도 되는데 이 정교회는 베오그라드에 있는 총 다섯 개 교회 중 하나라는군요. 그리고 이 건물은 1845년에 지어졌다고 합ㄴ디다. 건물을 건립하는데 참 우여곡절이 많았답니다. 당시 이곳에는 오스만 투르크의 세력이 아주 강했는데, 그래서 정교회 건물을 건립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 당시 왕자였던 밀로쉬 왕자와의 합의하에 이 교회의 건립만 허용했고요. 그래서인지 이 정교회는 이곳 사람들에게 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정교회의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정원에는 벤치가 나란히 두 개가 있었다. 정원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그곳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데 헌금 목적인지 아니면 많은 관광객이 와서 그런지 1유로를 요구하였다.
안으로 들어가 둘러보았다. 안은 외부에서 보는 것보다 작은 듯 느껴졌다. 여러 나라의 정교회 모습과 별반 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
밖으로 나오자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리퍼블릭 광장과 스카달리야 거리로 가죠. 여기서 좀 걸으면 됩니다.”
“아, 리퍼블릭 광장과 스카달리야!”하고 엘레나가 말하였다.
“스카달리야 거리는 베오그라드의 몽마르트 거리로 불린답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함께하는 곳이죠. 아침에는 창가에 꽃이 많이 놓여 있어 사진 찍으면 예쁘다고 합니다. 밤은 더 재미있다고 하고요.”
우리는 걸었다. 천천히, 아니 어떻게 생각하면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그러한 걸음으로 걸었다. 우선 리퍼블릭 광장을 지나 스카달리야로 가기로 하였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내려왔던 길을 다시 올라가 프린스 마이클 거리로 향하였다. 이곳은 카페와 정원이 있고 거리의 악사들이 많아서인지 관광객이나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우리는 이 길을 따라 리퍼블릭 광장을 지나 스카달리야로 가기로 하였다.
우리가 지나가는 메인 도로에는 양쪽으로 쇼핑센터가 있었다.
분수대가 보였다. 내가 엘레나에게 말하였다.
“세르비아가 빈부차가 많이 나고 경제가 뒤떨어진 나라라는 것은 아시죠.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그렇기는 하지만. 한 예로 천연 자원이 많지만 자본이 없어 인프라를 만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평균 임금이 400-500유로 밖에 안 된다고 하니 유럽에서도 발칸이 오지라고 하는 게 임금 수준을 보면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 휘트니스센터라든가 클럽, 그 외에도 거의 모든 것이 회원제라 일반 서민들은 사용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우리 둘은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어느덧 리퍼블릭 광장에 도착하였다.
광장에는 미하일(마이클)왕자의 동상이 있고 그 뒤로 자태를 뽐내고 서 있는 국립극장이 보였다.
“국립극장은 베오그라드가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해방된 지 2년 후인 1869년에 미하일 왕자의 지시로 건립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인구는 지금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200만이지만 그 당시에는 25,000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 극장에서는 연극, 발레, 오페라 등을 공연합니다. 여기가 베오그라드의 중심이랄 수 있죠. 모두 다 그렇게 이야기하겠지만 이곳 사람들 다른 나라 사람들 못지않게 예술을 사랑한다는군요.”
“엘레나, 이전에 한 선배가 있었어요. 그 선배는 러시아어를 전공하고 대학 교수가 되었죠. 그 선배가 러시아가 개방되고 나서 일 때문에 러시아에 출장을 갔다고 합니다. 그때만 해도 사회주의라는 관념이 무척 강하게 남아있을 땐데, 그런데 러시아 사람들이 얼마나 예술을 사랑하는지를 그때 비로소 알았다고 합니다. 청소하는 등의 허드렛일 하는 사람이 일 년 동안 돈을 모아 깨끗한 신발을 하나 사고 일 년에 한 번 발레를 보러 간다고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문화에 대한 이해도나 관심이 대중적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한 계층에만 특화되어 있는 게 아니라….우리도 그러하면 좋겠지요.”
우리는 길을 건너 스카달리야로 갔다. 길이는 300미터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 거리는 도나우 강으로 뻗어나 있고 끝에는 시장이 있다.
“이 거리는 19세기에 지어진 단층 건물이 대부분이죠. 그리고 약 20개의 레스토랑이 모여 있습니다.”하고 나는 말하였다.
스카달리야 거리를 우리는 함께 천천히 걸어갔다.
“이곳 스카달리야 거리가 예술가들이 활동하였던 거리라는 것을 아세요?”하고 엘레나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물론이죠. 이곳은 19세기 중반에 작가, 화가, 음악가 등 많은 예술가들의 활동 무대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전통이 지금도 남아 있죠, 아직도 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우리 둘은 천천히 길의 끝으로 걸어갔다.
이러한 분위기가 있어서인지 악사들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천천히 거리의 끝자락에 도착하였다. 그곳에는 재래시장이 있었는데 식품, 견과류, 생선, 고기 등을 팔고 있었다.
나는 그곳을 빠져 나오면서 엘레나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시계를 보니 4시가 넘었다.
“어디 가서 사슴 맥주 한잔하죠?”
“사슴 맥주요?”하고 반문하자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곳에서는 ‘엘렌 피보’라는 맥주가 유명하다는데요. 엘렌이 사슴이라는 뜻이라네요.”
나는 그제야 의미를 알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