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1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 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 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 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 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 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화성 행궁의 건립과정
화성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에 전배(展拜)하기 위하여 행행(幸行)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상시에는 부사(뒤에는 留守)가 집무하는 부아(府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왕 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園行)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 1년(1801) 행궁 곁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는데, 그 뒤 순조·헌종·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렀다.
따라서 이 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수많은 행궁 중 그 규모나 능행 면에서 단연 으뜸이 될 만큼 건축물의 규모뿐만 아니라 성곽과 더불어 정치적·군사적 면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정조 때 최대의 역사였던 화성 성역은 1차적으로 화산의 현륭원 호위와 함께 팔달산 정상 바로 아래 성내 중심부에 건립된 행궁을 둘러싸면서 이를 수호하는 것을 중요 목적으로 설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화성 행궁이 성곽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서 정치적·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화성행궁은 처음부터 별도의 독립된 건물로 일시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 행궁과 수원부 신읍치의 관아건물을 확장·증축하는 가운데 조성되었다.
정조 13년 7월부터 현륭원 천봉을 앞두고 대대적인 구읍치의 관아와 민가의 철거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화성행궁은 팔달산 기슭 아래로 신읍치를 이치(移置)하기 시작한 지 2개월 뒤인 정조 13년 9월 말에는 벌써 신읍에 조성된 관아 건물은 행궁 27칸을 비롯하여 삼문(三門) 5칸, 좌변익랑(左邊翼廊) 9칸, 우변익랑(右邊翼廊) 6칸, 서변행각(西邊行閣) 5칸, 서상고(棲上庫) 10칸, 중문 5칸, 내아(內衙) 34칸, 중문 4처, 객사 20칸, 중문 2처, 향교 51칸, 중문 1처, 군수고 19.5칸, 공수(公須) 7칸, 관청 5칸, 창사(倉舍) 60칸, 각처 담장 278칸 등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