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 서평
한반도의 운명을 가르고
유라시아 지정학을 결정지은
살수대첩부터 나당전쟁까지, 7세기 국제전의 그날들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들, 전장에서 눈부시게 빛났다가 순식간에 쓰러져간 장군과 수만 병사들, 극적인 승리와 믿을 수 없는 패배가 교차하는 순간,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그날의 전쟁들이 새롭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유라시아 지정학을 결정지은 제1차 동아시아 세계대전
2021년 후기 덧붙인 증보판 발행(2015년 초판)
획기적인 고대전쟁사 연구서인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의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 유라시아 지정학을 결정지은 위대한 전쟁 612~676』이 출간 5년을 맞아 후기를 덧붙은 증보판으로 출간되었다.
중국의 수·당시대, 한반도의 고구려·백제·신라, 바다 너머의 왜국, 중앙 초원의 돌궐·설연타·고창국, 그보다 먼 티베트 등 동아시아 대륙과 해양에 걸친 각국이 근 1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치열하게 존망을 다툰 ‘전쟁의 시대’를 새롭게 조망한 저작이다. 무대를 중원에서 동쪽으로 옮긴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전쟁이 잦았던 이 시기 두 차례의 고구려 침공을 대가로 수나라는 무너져내렸고, 당이 등장해 한반도 삼국과 뒤엉켜 복잡한 외교전·심리전·실지전을 벌였다. 결국 많은 나라가 종말을 고하고 한반도 가장 끄트머리의 작은 나라 신라가 당을 몰아내고 한반도 통일국으로 등장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그 속에 담겨 있는지는 1000년도 훨씬 지난 지금에야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번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의 저자 서영교는 이 복잡다단한 시대를 세밀하게 되짚어 복원하면서 이 전쟁들이야말로 그 당시로서는 전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워 귀추를 주목한 ‘세계대전’이었으며 오늘날 한반도의 지정학을 최초로 결정지은 ‘위대한’ 전쟁이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최근 들어 ‘임진왜란’을 조선과 왜국의 전쟁이 아닌 세계전으로 바라보는 학계의 인식 전환이 이뤄지고 있는데, 사실 그보다 훨씬 앞선 제1차 동아시아 세계전쟁은 7세기에 이미 치러졌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식이다.
저자는 이미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펴낸 『나당전쟁사 연구』(2007, 학술원 우수학술도서)에서 “나당전쟁 당시의 국제적 연동성”을 주목해 이러한 주장의 개요를 확립했지만, 지난 8년의 연구기간을 거친 뒤에 그것을 세부적으로 입증해줄 다양한 증거자료가 백화점처럼 들어찬 800쪽이 넘는 대작을 완성시켰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 전쟁의 나라』(2007), 『전쟁기획자들』(2008), 『핼리혜성과 신라의 왕위쟁탈전』(2010), 『고구려 기병』(2012) 등의 저서와 논문을 펴내며 각국사의 디테일을 완성했다. 특히 가장 최근의 논문 「『문관사림文館詞林』에 보이는 장원창蔣元昌과 장씨가문의蔣氏家門醫」(『역사학보』, 2014)에서는 백제 의자왕이 말년에 위암으로 추정되는 질병(반위反胃)으로 고난을 겪었으며 길고 긴 투병생활이 통수권의 약화를 불러 백제의 사령탑과 전투 의지를 와해시키는 과정을 새롭게 입증하기도 했다. 이 책은 이런 연구를 토대로 『국방일보』에 ‘7세기 국제전의 양상’을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3년 6개월간(2011년 1월~2014년 7월)이나 연재하여 완성한 결과물이다.
이 책이 특별한 것은 이러한 ‘문제틀’ 때문만은 아니다. 눈에 보일 듯이 손에 잡힐 듯이 당시의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 여타 고대전쟁 연구서와의 큰 차별점인데, 그런 구체성이 팩션적 기교에 의존하기보다는 사료의 치밀한 고증에 기반한 확대 관찰을 통해 이미 형성된 ‘역사 문맥의 그물망’을 크게 출렁거리게 함으로써 이뤄내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모든 역사는 ‘이야기’이듯 따로 흩어져 있는 역사적 사실을 ‘세계전’이라는 얽히고설킨 거대 서사로 엮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당시의 국제정세에 대한 정교하고도 세밀한 이해, 연대기적 선후관계를 넘어선 내재적 인과관계를 꿰뚫고 있어야 한다. 저자는 능수능란한 공간이동과 시점이동을 통해 각국이 처한 각자의 긴박한 처지를 묘사하고 있는데 물이 웅덩이로 모이듯 이야기가 눈덩이처럼 저절로 불어나는 것을 독자들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쟁과 인간’ ‘전쟁과 경제’ ‘전쟁과 외교’ 등에 대한 인류학적 통찰이 그 이야기들의 고리를 더욱 바짝 죄어 튼튼히 엮고 있으며, 세부적으로는 전쟁지형, 공격 시기, 공성전과 농성전, 장창보병 대형, 보급선, 리더십 등 전쟁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들에 대한 충실한 묘사를 통해 그만의 드라마를 완성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 책이 탄생하게 된 ‘문제제기’의 양상과 ‘진실 추구’의 과정에 대한 저자의 진술을 간략히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진실은 단순하다
신라가 세계 최강국 당나라와 싸워 이겼다고 하는데 이것은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천하의 당 태종을 패배시킨 고구려도, 만만치 않은 백제도 결국 당나라에게 멸망당했는데 어떻게 신라만 살아남아 한반도를 통합했는가?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당전쟁이 시작된 670년 당나라 최정예 군대 11만이 칭하이 성 방면 티베트 고원 대비천大非川에서 발발한 결전에서 토번吐藩(티베트)군에게 전멸당했다. 대비천 전투에서 참패한 당의 장군은 고구려 총독이었던 설인귀薛仁貴였다. 668년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평양에 지배기구인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했고, 그 도호에 설인귀를 임명했다. 하지만 669년 안동도호부는 한반도 북부 평양에서 남만주 신성으로 치소를 옮겨갔다. 당이 한반도를 포기하고 만주로 지배 거점을 옮겼을 뿐만 아니라 그해 말 설인귀는 고구려를 떠나 토번군과 싸우기 위해 칭하이 호 부근 대비천으로 향했다. 당 주력군의 축이 만주에서 서역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이듬해 해발 3000미터 이상의 고도에서 설인귀는 모든 병력을 잃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토번군에게 전멸당한 11만 병력은 당 휘하의 동돌궐 기병이었다. 그들은 당이 포획한 전쟁기계였다. 당은 그들을 이용하여 서역과 칭하이, 북방 초원을 모조리 정복했다. 하지만 고도가 높은 그곳에서 천하의 동돌궐 기병도 힘을 쓰지 못했다.
신라가 상대방과 싸우기 이전에 당은 토번에게 강타를 맞고 쓰러져 링 위에 올라오지 못하게 되었다. 아니, 670년 당군의 전력 투사 방향이 서역으로 바뀐 것을 알아차린 신라가 당과의 싸움을 결정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더구나 실크로드 경영권을 둘러싼 당과 토번의 전쟁은 이것으로 끝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교역의 이권을 둘러싼 그 전쟁은 이후 150년간 지속되었다. 실크로드 전쟁은 현재 우리 민족의 모체를 형성하는 중요한 환경이 되었다. 통일신라는 당 제국의 힘이 서쪽으로 쏠리는 조건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25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물론 라싸에 있던 토번 국왕 손챈감포松贊幹布도 한반도와 만주에서의 전쟁 결과가 자국의 생존과 번영에 직결된다는 것을 그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645년 9월 18일 당 태종은 고구려에서의 철수를 선언했다.
646년 5월경 토번의 사자가 장안 궁정에 나타났다. 그는 3곡斛의 술을 담을 수 있는 7척 높이의 황금 거위 주전자를 바쳤다. 손챈감포는 고구려 전쟁의 전말과 태종의 패배를 훤히 알고 있었고, 그를 비아냥대고 있었다.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면 그렇게 빨리 귀국할 수 없지 않겠는가. 패전의 스트레스로 혈압이 상승하여 뇌혈관이 터져 반신불수가 된 태종은 노회한 사위, 토번 국왕의 서신을 읽고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확실한 것은 중풍 환자가 된 태종이 고구려 정벌에 대한 집착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은 세계를 변모시킬 수 있었고, 토번의 운명도 바꿀 수 있었다. 641년 태종은 문성공주文成公主를 토번 왕에게 시집보냈다. 고구려와 전쟁하기 위해 서방에서의 안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티베트 고원의 패권을 놓고 히말라야 카일라스(수미산) 부근에 있는 양동국洋同國과 치열한 전쟁을 벌여야 했던 손챈감포도 당나라와의 평화가 필요했다.
이후 태종은 토번에 문화사절을 거듭 보냈다. 당의 발달된 문물과 과학기술이 토번에 유입되었고, 그것은 토번의 시스템을 고도화시키는 자양분이 되었다. 고구려가 빨리 굴복하면 토번의 장래도 어두워질 것이다. 전쟁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고구려가 당을 얼마나 오래 버틸지도 중요했다. 그럴수록 당의 전력은 동북방 요동에 묶일 것이고, 당은 서방 토번에게 더 많은 혜택을 베풀 것이다. 토번의 국왕과 군부 수뇌부들은 이렇게 외쳤을 수도 있다. “고구려여 영원하라!” 사실 당이 고구려와의 전쟁에 매달려 있는 동안 토번은 티베트 고원을 통일하고 중국과 접경한 칭하이 지역을 점령했으며, 실크로드 타클라마칸 사막 남로의 전략적 요충지를 모두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당의 지배를 받고 있던 토번계 민족들을 모두 포획했다.
2013년에 「연개소문의 대對 설연타薛延陀 공작과 당 태종의 안시성 철군」이란 논문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았다.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을 찬술하면서 후세를 위해 자신의 견해에 상충되는 자료들을 모아 『고이考異』란 책으로 만들었고, 중국 중화서국 출판사가 그것을 시기에 맞춰 편년체인 『자치통감』에 주석으로 달았다. 『고이』에는 지금 사라진 당나라 시대 실록의 편린들이 남아 있다. 저자는 그 가운데 『태종실록』과 『고종실록』의 편린에서 연개소문이 몽골리아의 설연타 제국 매수에 성공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찾았다. 645년 당 태종이 안시성 앞에 있던 기간(6~9월)에 연개소문에게 매수된 설연타 유목기병 10만이 당의 수도권 북부인 하주夏州(오르도스)를 공격했다.(7월경) 이는 태종을 망설이게 했고 고구려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는 기세를 꺾었다. 설연타의 개입은 결국 태종을 고구려에서 철수하게 만들었다. 안시성이 살아남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전쟁의 진정한 승자는 안시성주가 아니라 연개소문이었다.
이 책의 주목할 만한 요소들
▲ 입체적인 인물 이해 및 심리 묘사
- 618년 9월 고구려 영양왕?陽王이 죽었다. 중국을 통일한 수 제국에 정면으로 맞선 그의 담대함은 불가사의할 정도다. 그는 일생을 수나라와의 끝없는 긴장과 전쟁 속에 보냈고, 결국 승리했다. 그는 사람을 잘 부렸다. 부하를 신임하고 전쟁터에서 전권을 위임했다. 612년 명장 을지문덕이 역사 전면에 부상할 수 있었던 것도, 영양왕의 동생이자 훗날 영류왕이 되는 건무가 대동강 어귀에 상륙한 수나라 보급선단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39쪽)
- 632년 1월 신라를 54년 동안 다스렸던 진평왕이 죽었다. 그는 덩치가 우람했다. 하지만 결코 둔중하지 않았다. 성숙한 남자였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비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 632년 선덕여왕은 45세가 넘는 나이에 신라의 왕으로 즉위했다. 당시로서는 할머니였다. 젊었을 때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그녀의 모습도 초췌한 노파가 된 뒤에는 빛을 잃었다.
- 김춘추는 독재자 연개소문을 보고 혁명을 꿈꾸게 됐다. 그는 이미 일사불란한 독재체제의 강력함을 뼈저리게 느낀 바 있었다. 그해(642) 대신과 왕족들을 추방하고 독재체제를 수립한 백제 의자왕이 신라를 급습해 신라 서부 지역 총사령부인 대야성이 함락됐고, 김춘추는 딸과 사위를 잃었다.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있는데도 신라는 다수의 귀족회의체 화백을 통해 만사를 처리하고 있었다. 분쟁의 소지가 많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느라 결정이 늦어졌다.(284쪽)
▲ 책 전반에 걸친 자세한 전투 묘사
-전투의 공간에도 적정 병력이 있다. 2인용 참호에 5명이 들어가면 효율이 떨어지듯이 백제는 신라가 요새화한 운봉 분지에 지나치게 많은 병력을 투입한 꼴이 됐다. 백제군의 대열은 신라군보다 밀집돼 있었다. 양측의 궁수들이 화살을 일제히 발사했다고 해도 백제군이 더 많은 피해를 봤을 것이다. 백제군의 퇴각이 시작됐다(177쪽)
- 진평왕은 함안에서 신료들과 함께 죽은 귀산을 맞이했다.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전사한 자들을 왕이 직접 보기 위해 왕경에서 함안까지 마중나간 것은 아니었다. 전쟁 중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중상을 당한 귀산 등이 진평왕을 만나기 위해 함안까지 갔다고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막성 전투 종료 후 그곳에 있던 상당수의 신라 병력이 왜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함안 쪽에 재투입되었고, 그 행렬 속에 귀산 등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때도 규슈에는 왜군 2만5000명이 배치되어 있었고, 언제 함안 지역에 상륙할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당시까지도 신라에 대항하는 가야 세력들이 잔존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왜군이 왕경인 경주를 직접 침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왜군이 함안에 상륙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은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사실 이외에도 유력한 근거가 있다. 당시 신라에 대항하는 가야 세력들이 왜의 원군을 기다리며 잔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82쪽)
- 이듬해인 603년 왜국에 중요한 인사이동이 있었다. 그해 2월 신라 원정군 총사령관 구메황자가 죽었고, 4월 그 자리에는 다가마황자當摩皇子가 임명됐다. 하지만 백제는 그것을 믿을 수 없었는지 아니면 패전의 상처가 매우 컸던 것인지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고구려가 군대를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184쪽)
▲ 전쟁과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
전쟁에는 끝없는 피로감, 공포심, 갖가지 결핍감이 얽혀 있다. 결국 죽음으로 이어지게 될 치명적인 부상의 위험도 매우 높았다. 병사들이 이 모든 것을 무릅쓰고 전쟁을 치르게 하려면 왕의 휘하에서 최선의 이익이 보장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 왕이 인명 손실을 최소화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병사들이 알아야 한다.(187쪽)
- ‘화살받이’들은 전진만 해야 했다. 그들이 다 소모된 후에야 토번군 본대의 차례가 돌아왔다. 토번은 병력을 외부에서 포획해 전쟁을 했다. 본대의 병력 대부분도 전쟁 직전에 토욕혼 지역을 공격해 산 채로 잡아온 당항黨項과 백란白蘭 사람들이었다. 이렇듯 토번은 전쟁을 하면 병력이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포획된 인간집단을 부리는 기술이 탁월했다. 토번군은 원
초적인 힘과 포획조직의 시스템 그리고 포획 자원의 운용기술이 어우러진 ‘전쟁기계’였다.(217쪽)
▲ 승부처에 해당하는 전략전술의 디테일
641년 중반 이남 칸은 중국을 침공하기 위해 유목전사들에게 보전훈련을 시켰다. 병사들을 각각 5인 1조로 만들고 한 사람은 말을 잡고 진陣 뒤에 있게 하고 말에서 내린 네 사람은 걸어서 앞에 나가 싸우게 했다. 승리하면 말잡이에게 말을 받아서 적을 추격하게 했다. 훈련에도 엄격한 군율이 적용됐다. 훈련의 목적은 기병이 상황에 따라 말에서 내려 보전을 하다가 다시 기병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능의 습득이었다. 승리가 확실해지고 적의 후퇴가 시작될 때 기마로 전환했다. 처음부터 기마를 자제한 것은 말을 지치지 않게 했고, 결정적으로 기마전을 할 때 말의 양호한 체력 상태를 담보했다. 설연타는 병사 1인당 네 필의 말을 가지고 있었다. 네 필의 말도 전투가 장기화되면 일정한 간격으로 교체해야 했다. 곧바로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네 필의 말을 제때 공급하려면 후방에 24필의 말이 있어야 한다. 안정적인 말 공급은 기병전에서 승리의 필요조건이었다.(246쪽)
- 험한 산악지대에서의 전투는 부대가 정연한 대열을 이뤄 싸우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30~50명의 병사가 무리를 이뤄 산림이 우거진 골짜기 구석구석에서 싸웠다. 시야가 좋지 않아 활은 위력을 발휘하지도 못했고, 긴 창도 용이한 무기가 되지 못했다. 단창과 곤봉을 이용한 패싸움이 주를 이뤘던 것으로 생각된다.(297)
▲ 긴박한 전세의 일목요연한 전개
무주 덕유산 방면의 가잠성이 백제 수중에 떨어졌고, 지리산 중턱의 아막성이 언제 함락될지 몰랐다. 백제는 신라의 심장부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1개의 고지를 선점했고, 나머지 하나도 차지할 것 같았다. 진평왕은 신라 왕경에 훨씬 더 위협적인 가잠성을 빠른 시일 내에 탈환해야 했다. 아막성에서 지리산 중턱을 넘으면 다시 가야산을 넘어야 경주에 닿을 수 있다. 하지만 백제군이 덕유산을 넘어서면 말을 달려 성주에서 대구를 거쳐 왕경인 경주에 곧바로 타격을 가할 수 있다.(191쪽)
▲ 거침없는 공간 이동과 세력구도의 거시적 조망
- 629년 북방 돌궐의 내분이 극에 달했다. 당이 돌궐을 평정하고 초원과 중원에서 모든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시점이었다. 고구려는 돌궐과 당 양극체제에서 당이 세계를 지배하는 단극체제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고구려의 병력 대부분이 초원·중원에 인접한 서북방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는 신라가 북진하여 고구려의 남쪽 영토를 침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209쪽)
- 바야흐로 동아시아는 반란의 계절이었다. 한 해 전인 642년 백제에서 대규모 숙청이 있었고,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왕과 대신들을 죽이고 집권했다. 장안에서 태자의 반란이 발각되고 7개월 후인 643년 11월 왜국에서도 정변이 일어났다. 아버지를 감금하고 권력을 스스로 차지해 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소가노 이루카는 쇼토쿠 태자의 아들이자 유력한 태자 후보였던 야마시로노 오에山背大兄 왕을 습격해 끝내 자살하게 했다. 쇼토쿠 태자 집안의 멸문을 목격한 스이코 천황의 아들 나카노 오에와 그 신하 나카도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가 소아씨 일문에 대한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라에서도 대야성 함락 이후 미래의 쿠데타 주체들인 김춘추와 김유신이 힘을 키우고 있었다.(339쪽)
- 이세적의 전면 부상은 7세기 중후반 만주와 한반도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줬다. 644년 그는 태종이 고구려 침공을 결정하는 데 거의 유일하게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고, 655년 고종 대에 측천무후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660년 당군의 백제 침공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킬 땐 그가 당군을 지휘하고 있었다.(350쪽)
▲ 고대 국가들의 ‘첩보전’ 양상 집중 조명
- 방어하는 입장에 있던 고구려가 당나라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서돌궐과 토번 같은 강국의 움직임에 주목했다면, 침공하려던 당은 고구려의 지형지세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원했다. 장안을 출발한 진대덕은 13년 전 영류왕이 당에 제출한 고구려 봉역도를 머리에 넣고 있었다. 진대덕은 고구려를 다니면서 많은 중국인을 만났다. 고급 정보는 아니지만 그들을 통해 고구려 일반에 관해 상당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고향) 집은 (중국) 어느 군郡에 있었는데 수 말년에 군대에 나왔다가 고구려에 들어와 잡혀 남게 됐습니다. 고구려에서는 유녀遊女를 처로 삼게 했으며, 고구려 사람들과 섞여 사는데 거의 절반이 될 것입니다.”(『자치통감』) 612년 고구려에 들어온 수나라 병사 30만 가운데 상당수가 포로로 남았다는 것을 이로 확인할 수 있다. 앞서 622년 당과 고구려 사이에 포로 교환이 있었다. 고구려는 1만여 명을 송환했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였다. 어린 나이에 포로가 된 그들은 고구려에서 강제 노동으로 근 30년을 보냈고 사오십 대 중반이 됐다. 당시로서는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이었다.
▲ 당나라 이정의 전투 역량
말을 잃어버리면 가혹한 군율을 적용했다. 만일 전투 때 말잡이가 순서를 잃고 우왕좌왕해 말안장과 말을 놓치는 자는 목을 벴다. 지옥과 같은 전장에서 말을 놓치지 않고 관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것은 엄격한 군율 아래 지속적인 훈련을 받아야 가능하다. 또한 이정은 이렇게 적고 있다. “적이 후퇴할 때 하마기병은 도보로 몽골 초원의 말은 야생성이 강해 악조건에서도 잘 견딘다. 돌궐인과 설연타인들은 모두 이러한 말을 탔다. 30보 이상 따라가면 안 되고, 말을 타고 즉시 따라가는 것 역시 금한다. 다만 적의 후퇴가 확실히 감지되고 요란스럽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
하면 그들을 추격하는 것은 가능하며, 그것도 여러 부대가 대열을 가지런히 해 전진하라. 전투 시 갑자기 하마한다고 하더라도 적이 패퇴한 이후에 말을 타고 추격하라.”(253~254쪽)
▲ 왜국이라는 변수의 재발견
왜국이 백제에서 고구려로 돌아선 까닭은? 불교를 적극 수용하겠다는 기치 아래 배불파인 물부씨를 타도하고 집권한 소아씨는 외국으로부터 다양한 불교 문물을 가져와야 했다. 소아대신(소가노 우마코)이 집권한 이후 고구려와 왜의 외교관계는 급물살을 탄 것으로 보인다. 소아대신이 백제 일변도의 왜국의 외교관계를 다각화하려 했던 것은 고구려가 백제와는 또 다른 거대한 선진문물의 창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왜 사신의 고구려 방문 시기는 왜국에 정변이 있었던 587년 7월 직후일 가능성이 높다. (292쪽)
▲ 고대사 기록의 검증과 수정
특정 국가 간의 전쟁이 되풀이되는 것은 국제 역학구조가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644년 고구려가 당을 선제공격한 듯 보이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가 무리를 이끌고 영주도독부에 침입해 노략질하므로 장검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격파했다.”(『신당서』 「장검전張儉傳」)『책부원귀』 「장수부」에도 기록된 이와 같은 사실은 그동안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당을 선제공격했다는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 첫째, 『신당서』에서는 644년 7월 장검의 고구려 침공 원인을 ‘신라가 자주 구원을 요청해서’라고 기술하고 있다. 둘째, 양국간의 긴장감이 흐르던 644년 고구려가 선제공격을 했다면 『자치통감』이나 『구당서』 『신당서』 제기에 그 기록이 보여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셋째, 연개소문은 전쟁을 피하기 위한 외교를 했고, 마지막으로 644년 9월에 미인을 태종에게 바치기도 했다. 고구려 선제공격설은 그 노력들과 상충된다.(373~374쪽)
▲ 당나라 내부에서도 전쟁을 반대했다
644년 11월 낙양에 도착한 태종은 이전 수나라 때 고구려 전선에 종군한 경험이 있던 퇴역 장군 정원숙鄭元璹을 불렀다. 그는 황제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요동까지 길은 멀고 양식의 운반도 어렵습니다. 고구려인들은 성을 잘 지켜 이를 급히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자치통감』) 그는 늙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다. 고구려에서 수많은 부하를 잃은 사람의 충언 어린 말이었다. 하지만 태종은 그 말을 귀담아듣지도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오늘날은 수나라와 비교할 바가 아니오.” 12월 태종이 떠난 낙양에 남아 수도권 경비를 담당하던 우위대장군 이대량이 죽었다. 그는 죽기 전 태종에게 고구려 원정군을 철회하라는 서신을 남겼다. 두 사람은 이 전쟁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태종의 고구려 침공 결정은 전 세계에 알려졌다. 티베트의 손챈감포와 파미르 고원 너머의 서돌궐 칸의 귀에도 들어갔다. 서돌궐이 644년 9월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국가인 언기를 차지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고구려와의 전쟁 패배와 이어진 내란으로 수나라가 멸망한 것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것이 당나라에도 재현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 공성전, 농성전, 기병전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다. 성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농성’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절망적인 단계다. 고립된 성은 공성기의 공격으로 결국 함락되기 일쑤였다. 상황이 거기까지 가지 않기 위해서는 기병력이 받쳐줘야 한다. 공격받는 성 자체의 기병으로는 한계가 있다. 주변의 성들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한다. 645년의 고구려 전쟁에서는 각 성 주변에서 기병전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당군은 그 싸움에서 우위를 확보한 이후 성을 포위하고 공성기를 사용하여 함락시켰다. 하지만 포위된 성을 공격하는 와중에 당군은 언제 등 뒤에서 고구려 기병의 습격을 받을지 몰랐고, 성 내부에서 문을 열고 나온 기병의 공격을 받을지도 몰랐다. 고구려 기병의 첫 승리는 당군이 요동성에서 육중한 공성기를 운반해오는 일에 차질을 주었을 것이 확실하다.(470쪽)
▲ 황제를 볼모로 한 고구려의 외교전
당군 총사령관 이세적은 태종이 요동성에 도착하기 이전에 요동성을 포위하고 있어야 했다. 시간이 촉박한 그는 신성 공격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장검도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요동성 공략을 위해 병력을 돌렸다. 황제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작전에 정치가 개입하면서 그 순수성은 떨어졌고, 병력 10만을 보유하고 있던 고구려의 거성巨城 신성과 건안성이 살아남았다. 이제 그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국의 본체인 황제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태종과 장손무기가 내놓고 밝힐 수 없는 사실도 있었다. 7월 말에서 8월 초반 사이에 초원의 강자 설연타가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당서』 「집실사력전執失思力傳」에 그 침공을 막아낸 기록이 보인다. 설연타가 당나라 수도권 부근에 공격을 시작한 상황에서 당군은 고구려 심장부 깊숙이 들어갈 수 없었다. 이미 설연타의 침공에 대한 대비가 있었고, 집실사력이 그들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하더라도 심리적인 중압감은 어찌할 수 없었다. 고구려의 대설연타 공작은 성공했다.(514~515쪽)
- 서영교 선생님이 쓰신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은 고당전쟁과 이를 둘러싼 돌궐, 토번, 백제, 신라의 역학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저자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7세기 동아시아 여러국가들의 입장과 전투묘사, 입체적인 인물이해 등은 당시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