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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택선생님과~
- 지금은 철거되고 아파트가 되어버린 가마골 향토사 연구원의 옛모습이 담긴(6년전) 동영상을 보고, '아 다행이다' 저런 기록이 있으니 했습니다. 우리가 남길 것도 그런 것이기를~
- 주영택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자료를 생산~
감사합니다~
- 강연은 오랜 옛날의 이 동네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습니다.
거제1동 마을산책강좌
거제1동 자연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찾다
주영택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
연제구의 지명 유래
1.거벌리
거벌리(巨伐里)는 『동래부지(1740년)』에 의하면 “서면 관내에 있으며 동래부 관문에서 5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거벌(巨伐)의 巨는 ‘클 거’로 크다는 뜻이고 伐은 ‘간흙벌’로 벌판을 의미한다. 거벌은 ‘큰 들판’이다. 이 들판은 지금의 거제동과 연산동 일대에 펼쳐져 있던 넓은 들판을 일컫는 말이다.
2.대조리
대조리는 『동래부지(1740년)』에 의하면 “서면 관내에 있으며, 동래부 관문에서 3리에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이 대조리와 거벌리가 오늘날의 연제구 지역이 된다. 대조리는 ‘한새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한’은 크다는 ‘대(大)’가 되고 새는 ‘조(鳥)’가 되어 ‘대조리’가 된 것이다. 이 ‘한새’는 ‘황새’로 소리난다. ‘한’의 ‘ㄴ’은 그 아래 ‘새’의 ‘ㅅ’과 부딪힐 때는 ‘ㄴ소리’가 잘 나지 않아 ‘ㅇ’으로 소리나 ‘한새’가 ‘항새’->‘황새’로 소리난다. 이 대조리는 한새인 황새가 많이 찾아 들어 대조리 들판을 ‘황새벌’이라 하기도 하고 황새가 오늘날의 십자산 일대에 둥지를 틀고 알을 많이 낳아서 ‘황새알벌’이라고도 하였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교육대학교 앞은 늪지대로 갈대와 수련과 줄풀 등 수초가 우거져 있었다. 1930년대 초 동해남부선 철도가 부설되기 전에는 연산 로타리에서 동래천이 가까운 교육대학교 앞까지는 늪이 넓고 깊어서 물이 많을 때는 배를 띄울 정도였다. 이곳 홍수 때면 동래천의 물이 불어 수영강이 쉬 빠지지 않아 황령산, 배산, 화지산의 비탈 물이 이곳으로 괴어 호수처럼 되었기 때문이었다. 홍수가 지난 때도 늪지대가 되어 있는 곳에는 철새들의 먹이가 많아 황새 등 철새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동래 학춤(부산시 무형문화재 기념물 제3호 지정)은 황새벌로 찾아드는 ‘학’에서 본 따 형상화한 춤이다.
3.거평리와 대제리
갑오경장(1894년)때 동리명이 바뀌는데 서면에서는 대조리가 없어지면서 거벌리만 남는다. 오늘날의 연제구 전체는 거벌리로 동리명이 통일된다. 대한제국으로 바뀐 다음해인 1898년의 행정구역 변경에서는 거벌이가 거평리(巨平里)와 대제리(大提里)로 나뉘면서 거벌리라는 동리명이 없어진다.
이 때의 대제리는 동재천 남쪽 둑이 크게 쌓이면서 둑을 가진 지역, 갑오경장(1894년) 이전까지 대조리가 대제리로 바뀌고 거벌리가 거평리가 된다. 이 거평리는 우리말의 ‘벌’과 같은 뜻의 한자어 평(平)이 된 것이다.
4.연산리와 거제리
한일합방(1910년) 때 읍내면에 연산리(蓮山里)가 신설된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변경 때는 부사부와 동래군으로 나누어지는데 연제구 지역은 동래군의 동래읍에 속하게 되고 거제리와 연산리로 나뉜다. 거제리는 거평리와 대제리가 합병하면서 거평리의 거(巨)와 대제리의 제(提)를 따서 거제리(巨提里)가 되고 서상면에서 읍내면으로 속하게 된다. 이때의 거제리는 오늘날의 거제동(1946년 10월 4일 개칭) 전체와 6.25 전쟁 당시 거제리포로수용소가 있었던 오늘날의 시청 자리까지가 되었다. 오늘날의 연산로타리에서 서쪽으로 목화예식장과 종근당 부근은 1950년대까지 저습지의 늪으로 수련이 자생하였다. 수련과 금련산의 산 이름이 어울려 연산리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다. 거제동은 4동, 연산동은 9동이며 1995년 동래구에서 연제구가 분구되면서 시청이 있는 부산시의 중심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Ⅱ 거제 1동의 자연마을
1.한새벌 마을
한새벌 마을은 지금의 부산교육대학교(거제1동 963번지)와 이사벨 중·고등학교 뒤 십자산 일대 지금의 법원, 검찰청 주변까지 있던 마을이다. 십자산(十字山,46m)은 꼭대기에 십자가가 서 있어서 십자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소나무가 우거진 동산에 황새가 많이 날아와 알을 낳았기에 한새벌이라고 불러 마을 이름도 ‘한새벌’마을이라고 하였다. 18세기 조선시대 주민들이 야산 기슭과 저습지를 개간하여 논밭을 일궈 10여 호를 이루어 살았다.
거학초등학교(1980년 개교) 일대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정상에는 오씨묘 2기가 있었다. 묘등 주위는 덕석을 깔아 놓은 것처럼 금잔디가 무성하게 자라 아이들이 즐겨 놀았다 해서 ‘덕석언덕’이라 불렀다.
○ 황새알 우물
십자산 소나무에는 황새들이 둥지를 틀고 있고 산아래 늪 주변에는 각종 야생초와 갈대가 우거져 있었다. 늪에는 물고기 등 먹거리가 풍부해 황새들은 이곳을 서식지로 삼아 알을 많이 낳아 황새알 터로 알려졌다.
지금의 부산교대와 거학초등하교 중간쯤, 다시 말해 CU교대샘터 편의점 옆에는 오래전 대조마을의 공동우물인 황새알 우물(연제구 거제1동 253-7)이 아직도 남아 있다. 적어도 300년 이상 된 이 황새알 우물은 지금도 샘물이 솟아 흐르고 있다.
옛날 황새가 날아와 입을 적셨던 원형의 황새알 우물은 지름이 1m10cm이고 깊이는 2질로 바닥이 훤히 보이는 얕은 석조 우물이다. 바닥은 지하수층 물길이 암반의 풍화된 틈새로 석간수처럼 항상 일정량이 흐르고 있다. 암반이 풍화돼 마사를 통해 나오는 정화된 이 물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듯하며, 미네랄이 풍부해 물맛이 아주 좋다. 1947년 부산시가 부산지역 우물을 대상으로 연 수질대회에서 이 황새알 우물물이 2등(1등은 괴정 통샘물)을 차지해 물맛 좋은 우물로 소문이 났다.
우물 앞 직사각형 돌받침대는 우물물을 뜨는 바가지를 놓는 받침대로 황새알 우물의 역사를 말해주는 유물이다. 그 뒤로 지면에서 원형 높이대를 설치해 두레박을 사용하게 하고 뚜껑을 만들어 놓았다.
황새알 마을 사람들은 우물 관리를 철저히 하기 위해 우물 고사(告祀) 등 마을 민속에 관심을 가졌으며, 우물의 변화는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우물의 변화에 늘 긴장했다. 그들은 매년 정초 우물가에 제물을 차려놓고 한 해 동안 변함없이 깨끗한 물이 나오고 나쁜 병이 돌지 않게 용왕님께 빌고 또 빌었다. 마을 사람들은 또 구장(지금의 통장 내지 반장)을 중심으로 합심해 1년에 두 번 우물치기를 했다. 1980년 당시 우물치기를 할 때 손수레 2대분의 흙과 돌멩이가 나왔다고 전해온다. 알고 보니 인근 거학초등학교 학생들이 퐁당퐁당 소리를 듣기 위해 돌멩이를 넣은 것이었다.
2005년 거학초등학교로 통하는 ‘교대로24번’길이 생기면서 황새알 우물이 도로에 편입되는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당시 주민들이 우물살리기 운동을 벌여 보존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지금은 우물의 석간수 맑은 물을 유지하기 위해 지면에 구멍을 뚫어 물이 흐르도록 하고, 주위에 꽃밭을 조성해 작은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인근 유치원생들은 이 우물에 견학하러 오기도 한다. 황새알 우물비가 입구 왼쪽에 서 있다.
○마을놀이 문화
●시대적으로 본 황새 놀이
수 억만 년 전 이 지역 옛날부터 텃새인 황새들의 고궁 터였다는 것을 아이들의 황새놀이를 통하여 잘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황새가 알을 까서 새끼를 키우고 살던 황새알 터전의 마을 이름이 있는 것 또한 정확한 증거 자료이다.
황새의 멋은 신선·선비의 멋을 지니고 있다하여 큰 날개를 펼칠 때의 우아한 멋은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고 한쪽 발을 들고 섰을 때 고고한 모습에서 멋을 찾을 수 있다.
봉이나 학·황새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좁쌀을 먹지 않는다며, ‘뱁새가 황새걸음을 쫓아가려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속담과 같이, 무지인이 지혜로운 신선 선비의 정신세계를 따라 가거나 능가할 수 없다는 말이 표현된다. 그래서 예부터 이 지역의 황새가 그렇게 선비들의 붓끝에서부터 사랑을 받으며 이 지역 옛 어린 아이들의 정서에서도 선망의 대상이 되어 노래를 불러가며 손으로는 황새 그림을 그리며 노는 놀이로 놀기도 하였다.
약 1920년대 이전 출생 하신 분의 옛 이야기로 대부분 세상을 떠나시고 남은 몇 분이 전해주시는 이야기는 그 당시 아이들이 무댕기늪 습지 들판 황새·소굴들 논둑으로 뛰어 다니면서 부르던 황새놀이 노래는 황새를 놀리는 내용이 들어 있다. 놀린다고(“보깬다고” 이 지역 사투리) 당시 이 지역 사투리 노래가 있었고 크고 우아한 멋있는 새의 날개를 상징하여 신선 선비의 도포 소매 자락을 비유하여 만든 것이다.
아이들의 시대별 황새놀이가 여러 가지 있어 들어본다.
※황새 놀이 노래(1900년대~1920년대)
‘1900년대 이전과 1920년대 당시 아이들이 황새를 쫓아다니며 황새를 놀리면서 부르던 황새놀이 노래’
황새야 황새야
니 모가지는 짜르제
내 모가지는 질다
황새야 텃새야
니 모가지는 짜르
내 모가지는 질다
라고 노래를 부르며 황새를 놀리며 놀았다. 또 1940-70년대 그 당시 아이들은 황새놀이를 연필로 백지 위에나 꼬챙이나 사금파리 조각으로 땅바닥에 황새그림을 그리면서 이 노래를 부르며 그림을 그리면서 놀았다.
※황새 놀이 노래(1930년대~1940년대)
황새야 텃새야
황새야 텃새야
너거 집에 불났다
고동껍질 물이고
하품하품 가드라
황새야 텃새야
황새야 텃새야
너거 집에 불났다
고동껍질 물이고
오픈 도픈 가드라
※황새 놀이 노래(1950년대)
1950년대 당시 아이들의 황새놀이는 두 아이가 서로 뒤돌아서서 양팔을 서로 꼬아서 등 뒤로 업고, 업은 아이가 앞으로 엎드리면서 등 뒤 업힌 아이가 하늘을 보고 바꾸어 가며 서로 업어주면서 업어준 아이가 업힌 아이에게 노래를 부르며 물어본다. ‘황새야 텃새야 무엇 무엇 보았나.’라고 물어보면, 등 뒤에 업힌 아이가 업어준 아이에게 일일이 눈에 보이는 것을 답한다. ‘소나무도 보인다. 감나무도 보인다.’라고 대답하면, 다시 반대로 업어주며, 물어보는 놀이이다. 특히 이 놀이는 어른 아이에게 아주 좋은 건강 운동이라 할 수 있다.
황새야 텃새야
어디까지 보이니(보이노)
황새야 텃새야
무엇(멋이) 무엇(멋이) 보이니(보이노)
라고 여러 가지를 물어보고 답하고 다시 업힌 아이가 반대로 업고 물어보는 놀이다. 이렇게 옛날부터 황새 놀이가 성행할 수 있었던 것은 황새들의 옛 고궁 터였기 때문이며, 보고 느낀 그대로의 아이와 어른들의 삶이 놀이문화에서도 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지역의 신선 선비와 같이 대접을 받던 새, 크고 고고하고 멋있는 우아한 황새다. 껍데기 모습과 정신세계를 통틀어 표현할 때, 황새의 크고 우아한 모습은 신선·선비의 고고한 기풍과 절개 지조와 같아보여서 남녀노소 모두 좋아하게 되었다.
이 지역 옛 선비들도 붓을 들면 황새를 잘 그리던 이유였으며 특히 이 지역 황새벌 황새알 마을에 황새들의 고궁 터와 앞들에는 거제 큰 둑을 끼고 흐르는 무댕기늪 습지의 황새 먹이가 다양하고 풍부했으며 이 지역을 그렇게 생활하도록 자연 조건이 되어 있었음은 그 시대를 살던 삶의 역사의 사실이었다. 그 옛날 텃새 황새가 도시 개발로 인해 먹고 살 곳을 잃어가고 있다.
○신흥 고무 공장과 굿판 이야기
부산 도시철도 1호선 부산교대역을 중심으로 세병교에서 연산로타리 일대는 황새벌이었다. 지금은 한양 아파트가 자리잡고 있다. 이 자리는 1950년대 ‘신흥고무 공장’이 있어 고무신과 운동화를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1950년대 처음에는 고구마·감자 가루로 만드는 당면 공장이었다가, 동래고무 공장에서 (고)김명오 사장의 신흥고무 공장으로 운영되었다. 불이 나서 삼화고무 공장을 빌려 운영하다 양태준 사장과 동업을 했다. 이후 분리하여 양태준 사장은 범일동 지금의 부산진시장 앞으로 국제고무 공장으로 개업하여 나갔다.
신흥고무 공장은 불이 나고 난 뒤부터 서서히 부도 사건과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의 럭키아파트 자리의 금성사는 엘지(LG)로 명칭이 변하였다. 당시 황새벌 주변에서 사람들은 짚신을 신고 다니다가 고무신이 나오기 시작하여 그 옛날 신흥고무 공장이 인기 있었다. 이 신발 공장에는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이 다녔다. 그 곳은 먹고 살기 어려운 시대에 일할 수 있는 유일한 일터가 되었다.
1956년 당시 신흥고무 공장에는 점심시간이 되면 아기를 업고 젖을 먹이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짚신을 신고 다니다가 고무신을 신게 되니 편안하여 고무신은 참으로 그 시절에는 인기가 좋은 신발이었다. 그 당시 남자 고무신과 여자의 코고무신은 인기가 있었고 사람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편리한 신이었다.
그 뒤 운동화가 나오게 되어 요즈음 실내화 같이 생긴 까만 운동화를 베구두라하여 그것을 더 좋은 고급신으로 생각하였다. 짚신에서 고무신으로 바뀔 때 참으로 그 당시로서는 좋은 신발이었기 때문에 그 시대에 불러지던 신고산타령 같은 노래 가락 속에서도 나온다.
신고산 타령
신고산이 우루루루
화물차 떠나는 소리에
고무 공장 큰 애기
단보짐만 싸누나
어랑 어랑 어허야
어허 름마 디여라
니가 내 사랑이지
라는 소리에서도 접할 수 있을 정도로 산업화의 유일한 고무신에 대한 사랑과 애절한 이야기도 많았다. 일반 서민층의 짚신과 고무신에 관한 구전으로 전해오는 옛 이야기를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짚신을 신고 다니던 사람이 고무신을 한 켤레 사서 신어보니 너무 예쁘고 편하고 좋아서 아까워서 마구잡이로 신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귀한 돈으로 새 신을 사서 신어보니,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나르고 뛰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인데, 신을 신고 다니면 신이 닳아서 떨어 질까봐 고무신을 신고 길을 나선 이가, 누가 오면 신고 서 있다가 사람이 지나가고 나면 벗어서 맨발로 걸어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일제 때 모든 것이 귀한 시대에 어쩌다가 장만한 한 켤레의 신발이 얼마나 소중했던지, 짚신에서 고무신으로 바뀌는 산업화의 시대 생활상을 신발이 대변하고 있다.
신흥고무 공장에서는 1년에 한 번씩 큰 굿을 하는데, 신흥고무 공장에 굿을 하게 되면 일주일간 굿판을 벌려서 주변 마을 사람들은 굿 구경을 가는 어른들을 따라 아이들도 줄줄이 굿을 구경 가서 보았다. 거대한 큰 상을 차려놓고, 상 위의 양쪽으로는 아름답게 종이 연꽃을 크게 만들어 연꽃다발을 세우고, 떡이랑 밥과 나물 전과 생선포, 꽃 같이 예쁘게 만들어진 과자랑 통돼지 고기 등 맛있는 음식들을 많이 차려 놓고 굿을 한다.
1950-60년대 6.25전쟁이후 먹고 살기가 급급하여 볼거리도 별로 없었고, 항상 배가 고프던 사람들이 신흥고무 공장 부자 집 사장이 굿을 하면 여기 저기 마을에서 굿을 구경하러 모여 들었다. 하루에 몇 차례 굿을 하고 나면 상위에 올려 진 맛있는 음식들을 모두 내려서 나누기를 하는데, 골고루 나누고 나면 또 다시 상을 차리고 하루에 1~2번씩 내려서 나누면서 배고픔을 달랬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 때, 여러 가지 음식을 골고루 얻어 먹어보게 되고 모자라는 영양과 허기를 채웠다.
큰 굿을 구경하게 되면 사람들이 많은 음식을 나누는데 이런 나눔의 소문이 많이 나는 것은 그 시대의 나눔의 방법이며, 베푸는 마음의 좋은 길이다. 그리고 이것을 아름다운 하나의 연 중 행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해마다 하는 그 굿을 구경하길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신흥고무 공장에는 해마다 큰 굿을 했기 때문에 신흥고무 공장 굿이 이 지역에서는 유명했다. 부자들이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자비를 베푸는 것을 그 당시는 그렇게 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도깨비까지 잡아먹는 왜놈들
부산교육대학교 동쪽에서 연산로타리까지의 늪지대 넓은 물구덩이에서는 도깨비가 나왔다. 도깨비에 홀려 동래서 부산장을 보고 밤늦게 오는 사람이 그 늪에 빠져 곤욕을 치른다든가 낮에는 아이들이 줄풀과 갈대와 수련이 우거져 있는 늪가에서 잠자리, 개구리 같은 것을 잡다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 늪은 홍수가 지난 뒤면 흙모래가 쌓여 연약해진 물구덩 수렁이 되어 잘못 디디면 빠져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위 마을에서는 아이들을 그 물구덩 늪으로 가지 못하게 겁을 주느라 도깨비가 나온다고 했다.
실제로 비 오는 음습한 밤이면 이곳에 버려진 개, 고양이 같은 짐승의 썩다 남은 뼈에서 파란 인광(燐光)을 발하면 도깨비불 같게도 보이고 갈대와 줄풀이 뒤섞여 바람에 일렁일 때면 그 줄기와 잎이 섞갈려 내는 소리가 밑도 끝도 없는 도깨비 소리처럼 들렸다. 그래서 아이를 가진 집에서는 구덩이 늪지대로 못 가게 도깨비가 나온다고 겁을 주었고 동래에서 부산장으로 간 사람이 밤늦게 오면 횃불을 들고 훼바지까지 마중을 나와야 했다.
그랬던 그곳에 동해남부선이 부설되어 기차가 높은 기적소리를 울리며 달리고부터 그 도깨비가 없어졌다. 없어졌다는 것은 동해남부선을 부설하면서 제방을 쌓아 물구덩 늪지대가 어 느 정도 정리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동래쪽 사람들은 도깨비까지 잡아먹는 왜놈이라 했다. 그 말은 기차선로를 개설하고 기차불통(기관차)이 높은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칙칙거리다 보니 철도시설을 한 일본인이 도깨비처럼 무서운 게 없는데 그 무서운 도깨비마저 잡아먹었다는 뜻이었다. 이 말은 일본사람을 저주하는 소리였다.
동래, 연제지역은 보수적 성향의 민족성이 강한 곳이었다. 도깨비까지 잡아먹었다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속뜻은 철도시설을 침략의 기구로 보는 것과 함께 침략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 말이었다. 사실 그 말이 생겨난 4,5년 뒤의 1940년대 초부터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우리나라 사람에게 징용, 징병, 학병, 근로동원, 정신대 등의 이름으로 죽음의 자리로 몰아붙였다. 도깨비까지 잡아먹을 정도라는 동래지역 사람의 비유는 헛된 비유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산업화 물결의 전도사 전차의 개통
부산항의 개항 역할의 몫을 차지한 것은 전차(電車)이다. 전차 선로는 부산진-초량 간 다음은 초량-부산우체국 앞 간에 부설하고 부산진-초량 간 다음은 초량-부산우체국 앞 간에 부설하고 부산진-동래 온천장 간 성대한 개통은 1915년 10월 31일이었다.
부산역-부산진 입구까지 1구, 부산진 입구-부산진까지 2구, 부산진에서 좌수영까지 3구, 좌수영-남문까지 4구, 남문-온천장까지 5구로 1구에 5전씩 25전이면 동래 온천장에 갈수 있었다.
●전차 개통 이후 사회상
사람들은 쇠막대기로 번갯불 잡아먹고 가는 괴물이라 하며 구경꾼들이 많았고 전차를 타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개통되고는 전차를 이용하는 승객이 적어 텅 빌 지경이었다. 정차장이 있었으나 승객이 손을 들면 태우고 아무데나 내릴 수 있었다.
활량들은 무더운 여름밤에 한 잔 술을 목에 적시고 모시 바지 저고리 바람에 부채를 들고 50전으로 부산-동래 온천장 간의 전차 속에서 피서를 즐길 수 있는 진풍경이었다.
전차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란 유교의 해묵은 도덕률에 금이 가게 만든 ‘문명의 전도사’이자 자본주의 상품의 달콤한 유혹도 전파한 ‘침략의 첨병’이기도 하였다.
서면에 부산제2상과 동래에 동래고보 학생들이 전차 통학을 많이 하였다. 동래선에 타고 다니는 학생들이 일본 운전수에 시비도 걸고 정차하라 소변을 하고 가겠다고 하니 전차는 서고 학생의 용무를 보고는 출발하는 풍경도 있었다고 한다.
●한새벌 마을의 사대앞 정차장(停車場)
교대 사거리에서 시내 방면 이사벨중·고등학교 앞 부산도시철도 1호선 1번출구 부근에 사대앞 정차장이 있었다.
●남문구 마을의 남문구(南門口) 정차장
동해선 왼쪽 교각 밑을 지나 우측 거제로를 따라 시내 방면으로 가다 부산도시철도 3호선 거제역 6번 출구와 건너편 유엔아이 아파트(연제구 아시아드로64) 사이에 남문구 정차장이 있었다.
2.남문구 마을
남문구(南門口) 마을은 지금의 부산지방법원과 고등검찰청 자리에서 철도건널목 부근과 거제로 건너편 롯데제과 부산지점 일대의 넓은 지역을 지금도 남문구라고 부르고 있다. 동래읍성의 남문(지금의 동래경찰서 부근)으로 들어가는 입구 부근에 있던 마을이라 남문구 마을이라 불렀다.
남문으로 들어가는 동래천에 있는 다리가 세병교(洗兵橋)다. 세병교는 동래구 수안동과 연제구 거제1동을 잇는 다리로 동래천에 걸쳐 있다. 세병(洗兵)이란 병기를 씻어서 거둔다는 뜻으로 전쟁이 끝나 평화가 돌아옴을 뜻한다. 이 세병교는 동래읍성의 남문의 익성(翼城) 가운데의 앞쪽 문을 세병문이라 했다. 그 세병문 남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그리 불렀다고 한다. 부산진으로 가는 다리라고 하여 부산다리라고도 했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남문구 마을 주변 일대는 황령산에서 발원하여 양정동 모너머고개를 거쳐 거제시장(거제1동 486-1번지) 앞을 지나 동래천으로 흘러드는 거제천(巨堤川) 양쪽에는 저습지로 미나리꽝과 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 습지에는 많은 연꽃들이 피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 일대를 연밭(蓮田)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 앞으로 흐르던 거제천은 복개되어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거제 큰 둑
오늘날 거제 큰 둑에는 하마정·양정·거제리·무댕기늪·한새벌·남문구·북천이 배밭(미원회사 자리)·경기장들·경기장 다리를 가로 질러 복개천이 흘렀다. 무댕기늪 습지 옆 거제 큰 둑(거제천)에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포플러(바람나무)나무, 수양버들이 많았다. 거제천을 흘러서 온천천으로 흐르는 물길은 홍수나 장마철에는 물이 범람을 하고 물바다가 되어 넘실거리는 풍경이었다.
거제 큰 둑에 어른들은 경기장다리 밑에 발동기를 실어다 놓고 물을 퍼내고 고기를 잡는 일이 많았다. 어른들 팔뚝 보다 더 큰 가물치와 잉어, 송어, 민물장어, 미꾸라지들을 잡아서 큰 통에 담아오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거제 큰 둑에 나는 수초들이 다양한데 둑 위에는 쑥부쟁이와 둑 아래로는 돌미나리, 큰 송곳챙이풀, 개미나리(옥도나물)이 많았고 그 밖에 황새나시랭이, 물풀들이 많았다.
○금용산(쇠미산)
거제2동의 서쪽에 있는 산으로 부산진구·동래구와의 경계를 이룬다. 해발 149.6m의 금용산은 부산의 등줄 산맥인 금정산맥의 지맥으로 북쪽으로 금정봉에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화지산과 연결된다. 전형적인 노년 산지로 사면이 완만하고 산정은 종순형이다. 서쪽산록에는 어린이대공원이 자리 잡고 있으며 북동쪽에는 종합운동장의 육상보조 경기장이 있고, 남동쪽 산록에는 사직동과 초읍동을 연결하는 종합운동장 주경기장으로 진입하는 대로가 연결되어 있다. 금용산은 「쇠미산」의 한자식 지명으로 이 산에 쇠물이 많이 나왔다는 데서 비롯된다.
○경기장 들
약 2000년 전 거칠산국 시대부터 수천년을 조상들이 일제 강압에도 불구하고 지켰던 ‘경기장’이라는 지명이 1970년까지 있었다. 그 옛날 신라의 4대 탈해왕이 거도장수를 보내서 마숙놀이(말달리기 경주)를 했던 장소가 경기장들이었다. 거칠산군에서 거도장수와의 마숙놀이로 신라와 합병되었던 당시 거칠산국 시대 신라장수를 믿고 무심코 있다가 당했던 거칠산국 성민들에게는 한 맺힌 땅이 바로 이 지역이다. 그리고 이 지역의 역사를 보면 ‘어리석으면 당하게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어 잊어서는 안 될 지명이다.
경기장들은 미원회사로 1960년대 들어 와서 있다가 없어진, 지금의 연서초등학교·동래세무소와 우정약품 월드메르디앙·예가 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다. 아파트 단지 주변은 한때 일제 때 북천이 ‘배밭·포도밭’이 있었고, 그 자리에 원예시험장이 조금 있다가 온천장 원예고등학교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그 주변 모두가 옛날의 신라 거도장수가 말을 달리던 마숙놀이를 했던 경기장들이었다.
지금은 경기장들 주변으로 복개천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옛날에 유명했던 경기장 다리가 있었다. 경기장 다리를 다시 고쳐서 연산교라고 불렀다.
○부산지방법원과 고등검찰청 터 자리
그 옛날부터 지금도 그 자리 그대로 있는 기차굴다리 밑을 지나 소달구지 가는 길을 따라 사직동 마을 방향으로 들어가면 좌측으로 논들이고 우측으로 조금 높은 언덕 밭에 봄이 오면 복사꽃이 만발한다. 그리고 대나무 밭 울타리로 들러 쌓인 초가집에 반쯤 열린 싸리문이 정겹던 시골풍경이다. 이 집에 살던 서보배선생 동생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이민을 가서 큰 병원 원장이라 한다.
지금의 검찰청과 법원 청사가 대리석으로 든든하게 세워진 자리에 단정하게 조경이 가꾸어져 있고, 이른 봄 설중 청매, 홍매화가 향기를 날리며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꽃잎이 눈꽃처럼 휘날릴 때에, 그 옛날 이 마을에 봄이 오면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언덕 밭에 복사꽃이 만발하게 피던 아름답던 전원이 생각나며 그 때를 대신 일깨워 주는 듯하다.
봄마다 나물바구니 옆에 끼고 나물 캐던 처녀들이 황새알과 언덕 너머 황새벌 길가 샛노란 민들레꽃, 보라색 제비꽃이 아지랑이 속에서 아른 아른 거리며 꽃 마중하던 기차굴다리 밑의 조금 넓은 길이다. 이 길섶 양쪽 논에 가을이 오면 참새 떼가 사람들 눈을 피해 바쁘게 내쫓겨 달아나던 들녘에 알찬 벼가 누렇게 익어 철렁철렁 황금 물결을 이루었다.
하늘에는 큰 황새의 날갯짓이 여유로웠다. 황새알 언덕 조그마한 산에는 잡목사이 애장묘와 큰 무덤들 사이에 키가 크고 작은 소나무들이 서 있었는데, 키가 큰 소나무 꼭대기 위에 접시모양의 집을 짓고 살던 운치의 전경이 아름다웠던 황새들의 보금자리는 그 옛날 전설로 남겨진 이 지역의 옛 풍경이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금정산 줄기 만덕 고개를 바라보면 금용산 앞섶의 작은 마을과 들판에 1960년대 중 후반부터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여 자연에 서식하던 황새들의 멸종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제 1동에 멋쟁이 높은 빌딩들이 우뚝 솟아 있다.
○도깨비불
도깨비불은 허제비불, 헛체비불, 헛깨비불, 귀신불, 민불 등으로 이름이 많다. 도깨비불은 접시 모양을 하고 하얀 꼬리를 남기면서 잘미산에서 고분이 있는 산으로 이산에서 저산으로 날아 다녔다.
연산동 곡리 마을 언덕 반도보라 아파트 옆 연일시장 언덕 위에서 밤에 잘미산을 바라보면, 고분군이 있는 산 방향으로 인불이 왔다 갔다 날아다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지금의 연산로터리 충렬로 방향 곡리 마을 타작마당에 올라서서 거제리 큰 둑 지금의 복개천이 된 곳을 바라보면 그 거제 큰 둑 뒤로 황새알이라는 동국제강 선산에도 무덤과 애장묘가 많았다. 거제 큰 둑 위로 거제역 방향 쪽에서 동래 방향 쪽으로 어두운 밤에는 인불이 왔다 갔다 날아다녔다.
옛날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공동묘지가 있기 때문에 공동묘지에 사람이 죽어서 썩을 때 몸에서 나오는 인이 날아다니는 것을 멀리서 보면 하얀 불 같이 보인다고 하여 인불이라고 했다. 당시 어린아이들은 밤에 비가 오는 날이면 밖에 나가기가 겁이 나서 대문 밖을 잘 나가지 못하고 화장실도 가기가 무서웠다.
옛날 곡리 마을에 집이 몇 가옥 밖에 없었다. 이 곳은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았던 들 가운데 조그마한 언덕, 농촌 마을이었다. 호롱불로 밤을 지새우고 밝히던 그 시절 집안에 손님이라도 오든가 특별한 집안 행사가 있으면 남포불이나 촛불을 켰었다.
1950-60년대에는 곡리 마을에 가옥수가 약 70~80채 정도 있었다. 1960년 후반에 전깃불을 보게 되었다. 곡리 앞뒤는 산과 들 뿐이고 작은 야산 뒤에 큰 산인 잘미산 앞섶에 공동묘지는 한 번 세상을 떠나면 다시 못 오는 저승길의 마지막을 알리는 무서운 곳이었다.
연제구 그 옛날 토박이들의 사투리로 귀신불을 허체비불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 불을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전깃불이 밝아졌고 도시화로 변하여 공기가 탁해졌고 복잡한 빌딩숲에 사람이 많이 살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 옛날 그 무서웠던 도깨비불 또는 인불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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