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연으로 살아가기- 최길호 목사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복음 3:28-30)
요즘 세상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이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조개가 10억개가 자연찜 상태로 폐사했습니다. 미국 켈리포니아에서 한낮 기온 섭씨 54.5도 기록이 나왔습니다. 100년만에 최고 기록입니다. 땡볕 아래 방치해두었던 프라이팬 위에 달걀을 올려 놓자 그대로 후라이가 되는 장면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캐나다에서 폭염으로 지난 일주일간 719명이 돌연사했습니다. 2021년 7월 14일 현재 코로나 실시간 통계 사이트인 월드오미터에 따르면 전세계 사망자가 406만 8천 259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제가 코로나 초기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코로나가 시간이 되면 백신이 개발되어서 극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코로나가 극복이 되면 더 심한 변종 바리러스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 코로나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미루지 말고 행해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제가 뛰어난 예지력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성경이 종말의 사건을 그렇게 예언했기 때문에 말씀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아야 할 때입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마음이 느슨해지고 아직 잠자는 상태에 있는 교회 가족들이 있으면 안됩니다. 누가복음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곳에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진다고 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해서 재림의 날을 기다릴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초림과 재림에는 평행되는 개념이 많이 있습니다. 초림의 시대 상황과 재림의 시대 상황에 유사점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초림 전과 재림 전의 사람들의 태도와 침례 요한의 사명과 마지막 재림의 기별을 전하는 사람들의 사명에도 공통점이 많이 있습니다. 침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그를 임신했을 때 주의 사자가 그에게 태어날 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눅 1: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침례 요한도 성장해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요 1:28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하니라” 이 침례 요한의 삶은 재림의 때에 사람들을 준비하도록 사명을 받은 사람들의 삶의 특징을 보여 줍니다. 그 중에 두 가지 특징을 본문을 통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침례 요한은 역사의 주연으로 살았습니다.
주연의 사전적 정의는 “연극, 영화, 책, 드라마 등에서 주인공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연과 대비되는 보조적인 역할을 조연이라고 합니다. 최근에 한국영화 ‘미나리’에서 윤여정씨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녀는 74세에 주연이 아니라 조연으로 세상의 스폿라잇을 받았습니다. 주연이 아닌 조연이 이런 언론의 주목을 받는 일은 드뭅니다. 그녀는 젊었을 때는 세시봉의 가수들에게 너무나 인기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수 조영남씨와 이혼한 후에는 생활을 염려해야 했습니다. 자식들을 기르기 위해 좋은 역할, 나쁜 역할 가리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조연을 맡아서 주연을 돋보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결과로 주연보다 더 주목 받는 조연이 되었습니다.
침례 요한이 그랬습니다. 침례 요한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조연의 삶을 살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이었습니다. 눅 3:16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니라” 요 3: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을 자라고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이렇게 그는 진정한 조연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언제나 주연이었고 자신은 조연이었습니다. 그는 조연을 충실히 함으로 참된 주연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침례 요한과 같은 태도를 취했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침례 요한에 대한 당대의 평가를 생각해보면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침례 요한은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옛 선지자들처럼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새로운 왕국의 도래를 선포했습니다. 침례 요한이 등장하기 이전 400년 동안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었습니다. 이제 침례 요한의 기별을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난 선지자 중 한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나라 전체가 들끓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있는 광야로 모여 들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 그의 말은 확신시키는 힘이 있었습니다. 마 3: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으니” 그에게서 하나의 새로운 혁명적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엘렌 지 화잇은 말합니다. “만일 그가 자신을 메시야라고 선언하고 로마에 항거하는 반란을 일으켰다면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그의 깃발 아래로 뭉쳤을 것이다” (소망 DA, 178).
그는 주연이 될 충분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주변에서 끓임 없이 주연이 되도록 부추기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요 3:26”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침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나이다” 제자들이 보기에 침례 요한이 주연인데 이제 예수께서 주연으로 역할이 바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침례 요한이 나서서 주연의 자리를 꿰차도록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침례 요한은 세상의 인기와 경쟁심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의 주연은 예수 그리스도이었습니다. 예수 한 분에게 그의 삶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어떤 교인들은 신앙의 가정 안에서 성장합니다. 그러다가 세상의 주목을 받고 세상의 영예를 받으면 자신의 사명과 본분을 잊어버립니다. 자신이 주연이 되는 길로 나아 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는 결코 주연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탕자의 모습이 그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 탕자는 자신이 주연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 아버지를 떠납니다. 그러나 그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결국은 조연도 못되고 짐승들에게 수종 들어야 하는 길로 떨어졌습니다. 주님을 버리고 자신의 길로 가는 사람은 환경에 메여 사는 종이 됩니다. 혹은 권력과 인기의 종이 됩니다. 세상 역사의 마지막에 살며 재림의 기별을 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본분을 분명히 정합니다.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세상의 영광과 인기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식을 전하며 그분이 중심이 되는 삶을 삽니다. 그것이 참으로 사람이 주연으로 사는 방법입니다.
2. 역사의 주연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 요 3:28-29을 봅니다.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침례 요한은 자신이 아닌 예수께서 주연임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비유합니다. 결혼식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젊은 남녀가 일생에서 맞이하는 최고의 순간입니다. 신랑의 친구가 보통 사회를 봅니다. 양가의 어머니들이 촛불을 밝힙니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부드러운 음악을 연주합니다. 주례자가 등단을 합니다. 신랑이 입장을 합니다. 오케스트라가 결혼 행진곡을 연주합니다. 신랑이 입장하고 그날의 주인공인 신부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 옵니다. 모든 하객들이 일어서서 주인공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결혼에서는 주인공은 신랑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백그라운드 음악으로 하프와 트럼펫이 연주되었습니다. 신부가 먼저 입장해서 모든 하객들과 함께 신랑을 기다립니다. 문이 열리면 신랑이 입장합니다. 모든 사람이 일어납니다. 신랑이 모든 행사의 초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결혼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다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신랑의 친구였습니다. 신랑의 친구는 결혼식의 모든 순서가 잘 진행되도록 책임지는 사람이었습니다. 신부를 신랑에게 넘겨주는 것도 요즘처럼 신부의 아버지가 아닌 신랑의 친구가 했습니다. 그러나 신랑의 친구는 조연이었습니다. 주인공인 신랑이 등장하면 그는 물러나야 합니다. 신부를 취하는 것은 신랑의 친구가 아닌 신랑이 하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은 바로 신랑의 친구이고 예수님은 신랑이었습니다. 침례 요한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침례 요한은 바로 그 친구의 역할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도록 모든 것을 준비했습니다. 그가 광야에서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마 3:2). 그가 선포한 그 천국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셨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르실 때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기다리도록 준비시켰습니다. 만나 주석은 마 3:29절을 이렇게 주석합니다 “천국은 예수와 그의 말씀과 이적과 함께 왔고 그의 죽음과 부활과 함께 왔으며, 이 시대의 종말에는 완성된 모습으로 올 것이다”
천국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온 것,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달려 돌아가신 것, 그분이 사흘 만에 부활한 것, 그분이 하늘 지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중재 하는 것, 그분이 재림할 것이 천국 복음입니다. 천국에는 두 가지 천국이 있습니다. 하나는 은혜의 천국이고 다른 것은 영광의 천국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받아 들이는 순간 천국이 임합니다. 삶을 저주하고 불평하던 사람들, 세상에 대해서 사람들에 대해서 화를 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는 순간 감사와 찬양이 임하게 됩니다. 삶의 바닥에 떨어졌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잡고 전혀 다른 삶으로 변화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기독교 역사에는 그런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지상에서도 예수님으로 인한 천국을 누리는 삶이 바로 은혜의 천국입니다. 그런 은혜의 천국을 경험하며 살던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이르게 될 영원한 천국이 영광의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만나야 내 삶에 천국이 이루어 집니다. 천국은 예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실 때 이루어 집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입니다. 교실에서 방과 후에 청소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학급의 친구가 돈을 잃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손에 들고 있었는데 언제 어떻게 잃어 버렸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저는 혹시 그 친구가 돈을 휴지로 생각해서 휴지통에 버렸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휴지통에 보니 정말 지폐가 있었습니다. 액수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꽤 액수가 큰 지폐였습니다. 그 돈을 보는 순간 욕심이 생겨서 감추고는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습니다. 청소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돈을 부모님께도 숨겼습니다. 그 돈을 쓰지도 못하고 꽤 오랫동안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 내내 불안했습니다. 학교에서 친구들의 얼굴만 봐도 괜히 덜컥 겁이 났습니다. 어느 날 집에 가는데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하늘에 번개가 번쩍거리고 우르릉 꽝꽝꽝 하는 천둥소리가 들렸습니다. 저의 잘못 때문에 하늘이 노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천둥과 번개가 치면 어렸을 적의 그 두려웠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제가 그 돈을 어떻게 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오직 그 때의 불안했던 마음만이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어린 초등학교 아이에게도 죄는 마음의 평화를 깨뜨립니다. 죄를 짓는 사람에게 평안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라고 하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란 뜻입니다. 침례 요한은 그 예수를 바로 깨닫고 전했습니다. 요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표현은 구약의 내용을 한 마디로 압축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에 대한 가장 완벽한 정의 입니다. 이것은 침례 요한이라서 가능한 표현이었습니다. 어린 양은 어디에서 나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침례 요한은 레위 지파에 속합니다. 아론의 후손입니다. 제사장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과 성소제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성소에서 어린 양은 속죄 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범하면 어린 양을 성소에 가지고 와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양을 잡아 죽였습니다. 어린 양의 죽음으로 죄가 용서를 받았습니다. 성소에서 아침 저녁으로 어린 양을 제물로 드려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기 위하여 번제, 양을 태워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바로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매일 희생당한 어린양으로 선언했습니다.
오늘날 재림을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켜야 할 우리들이 전해야 할 기별은 무엇입니까? 바로 침례 요한이 전한 기별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천지에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습니다. 인간이 아닌 우주를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이 세계 역사를 둘로 가르며 인간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갔습니다. 우주의 대 사건입니다. 어떤 사건이 이보다 더 중요할 수 있습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놀라운 소식입니다. 믿기지 않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정확히 밝혀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목전에 영광의 천국이 다가 와 있습니다. 만약 재림교회의 모든 목회자들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매 설교에서 전한다면 교회에 늦은비 성령의 능력이 임할 것입니다. 신자들의 마음과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의 영광으로 환하게 빛날 것입니다. 지금 한 명이 있는 곳에 백 명의 새로운 영혼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역사를 따라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 역사의 방향을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역사는 재림의 날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그 재림을 준비하도록 인도하는 일에 주연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선지자와 왕 536 “영원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에 이르기까지 사건의 사슬에 고리와 고리를 연결시키고 계신 위대하시고 스스로 계신 분께서 당신의 말씀 속에서 주신 예언들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장래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를 말해 준다. 현재까지 일어나리라고 예언된 모든 사건들의 성취들을 역사의 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으므로 아직 오지 않은 모든 것도 그 순서대로 성취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마치며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두 가지 영적인 교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침례 요한은 역사의 주연으로 살았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주연입니다. 그 주님을 소개하며 세상을 이끌어가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