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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권력이 독점한 재산을 스스로 나눠 가졌다
증 언 자 :김연태(남)
생년월일 :1947(당시나이 33세)
직 업 :건축자재공(현재 건축자재공)
조사일시 :1989.4
개요
집 앞에서 공수들의 잔학성을 보고 이에 분노하여 시위에 가담. 5월 21일 전남대 정문에서 공수들에게 붙잡혀 갈비뼈가 부서지고 무릎이 깨지는 부상을 당했다. 현재 어렵게 살고 있지만 그는 광주 시민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면서 당시 광주 시민의 행위는 정당했다고 말한다.
나는 건축자재공이었다
함평군 나산면에서 1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함평농고를 졸업하고 광주로 올라왔다. 함평에서는 부모님이 20마지기와 밭 30마지기의 농사를 지으며 별 어려움 없이 살았다.1980년 당시 나는 금남로 4가 건축자재 사무실에 나가고 있었다. 광주에서 마땅한 거처를 구하지 못하고 통근을 하다가 1980년 5월 무렵에는 건축자재 사무실에서 아예 기거하고 있는 상태였다. 5월 18일 12시 제일예식장에서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다. 나는 아침에 서둘러 친구의 결혼식장에 갔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사무실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3시경 금남로 거리는 시민과 학생들로 가득했고 버스는 끊겼는지 보이지 않았다.대인시장 쪽에서는 공수들이 밀고 내려오는 중이었고 무장한 공수들은 1개 중대 정도로 지하상가 공사판 부근에 배치되어 있었다. 시민과 학생들은 공수들을 향해 돌을 던지며 무어라고 외치고 있었다. 나는 시위광경을 쳐다보며 섰다가 오후 6시쯤 사무실로 돌아왔다.
시장 보고 오는 할아버지를
5월 19일 아침 8시경 1층 사무실 문을 열고 대인시쪽 주변을 바라보니 공수 12명 정도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이때 자전거를 타고 시장을 다녀오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할아버지가 막 공수들 앞을 지나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공수들 3명이 할아버지를 가로막으며 허리 부분을 곤봉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자전거 뒤에 올려졌던 시장 바구니가 땅에 떨어져 달걀은 모두 깨져서 박살이 나고 야채는 길바닥에 흩어져 나뒹굴었다. 이를 본 시민들이 공수 3명에게 달려들었다. 나도 시민들과 합세하여 "시장 보고 오는 할아버지를 무슨 이유로 때리는 거냐? 나쁜 놈들 너흰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도 그러냐?' 하며 공수들에게 항의했다. 공수들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쉽게 길을 비켜주었다. 그제야 시민들은 안심을 하고 할아버지를 일으켜주었다. 나는 먼저 넘어진 자전거를 길 건너편에 세워두고 할아버지를 자전거가 세워진 곳으로 모시고 왔다. 그때야 할아버지는 겨우 자전거를 끌고 가셨다. 너무나 겁에 질린 나머지 아픈 줄도 모르고 걸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사무실에서 오전 내내 일을 한 후 오후 7시쯤 문을 닫았다. 다만 왜 광주시내에 공수들이 와서 죄없는 시민을 때리는 걸까'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뒤숭숭했다.
죽은 아주머니 목 뒤에 대검의 흔적이
5월 20일 어제 아침에 보았던 광경이 눈에 선했다. 시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오히려 시민들을 곤봉으로 때리던 것을 생각하니 화가 나서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오전 11시쯤 사무실 문을 닫고 지하상가 공사장 근처로 걸어나왔다. 가톨릭센터부근에서 금남로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무엇을 하는 걸까'궁금해 하며 가까이에서 보려고 걷고 있었다. 갑자기 '우'하는 소리와 함께 전남도청 부근에서 무장한 공수들이 곤봉과 대검을 들고 쫓아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도망가기에 정신이 없었고, 나 역시 살아나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정신없이 뛰는 도중 지하상가 공사장 앞에 쓰러져 있는 아주머니 한 사람을 보았다. 나는 도망가는 것을 멈추고 가까이 가서 보니 아주머니는 3,4O대 정도로 보였고,파란색 얇은 스웨터에 회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내가 아주머니를 일으켜주기 위해 목을 감쌌을 때는 이미 죽은 사람처럼 몸은 축 처진 상태였으며, 머리 뒷부분에서는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피가 낭자한 것으로 보아 대검에 찔린것 같았다. 뒤에서 공수들이 쫓아오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쓰러진 사람을 일으키고 있는데 설마 무슨 일이야 있을라고' 하는 어리석은 기대로 버티고 있었다. 이때 나를 쫓아온 공수 한 명이 "야! 이 새끼야,빨리 가버려!"하며 목 뒷부분을 곤봉으로 내리쳤다. 나는 아픈 줄도 모르고 재빨리 뛰어 충장로파출소로 들어갔다. 파출소 안에는 잠옷 차림으로 소장 한 명이 있었다. "저기 아주머니가 쓰러져 있습니다. 이미 죽은 것 같습니다." '나는 경찰이 아니니까 돌아가시요 광주 시민인데 공수들에게 쫓겨서 이곳에 있는 거요." "사람이 죽어 있는데 어떻게 그냥 갈 수 있습니까?' 나는 그에게 사정하듯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분명 파출소 소장으로 보였다. 그리고 쫓겨온 사람이라면 왜 내게 가라고 한단 말인가. 의문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팬티만 입혀진 여학생
하는수없이 나는 충장로파출소에서 나와 한일은행 부근으로 올라갔다. 공수들은 붙잡힌 시민를을 광주은행 본점앞에 세워둔 군용트럭에 싣고 있었다. 공수들을 피해서 한일은행을 지나 시외버스공용터미널로 갔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앞에도 공수들은 진을 치고 있었고, 나는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앞 지하도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공수들의 동태를 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지하도로 도망가는 여학생을 보고 공수 한명이 쫓아가는 것이 보였다. 공수는 여학생을 끌고 지하도 위로 올라온 뒤 곤봉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여학생은 미친듯이 소리쳤지만 공수는 더욱 악랄하게 굴었다. 대검을 들고 여학생의 옷을 갈기갈기 찢었다. 순식간에 옷은 모두 찢어져 벗겨졌고 팬티만 입혀져 있었다. 여학생의 몸은 이곳저곳이 대검에 긁혀 피투성이가 되었다. 여학생의 가슴에 대검을 들이대고 "찔러 죽여 버려야 해.너는 간첩이야!" 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 여학생은 어깨너머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였는데,공수는 한 손으로 여학생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제쳤다. 여학생은 반항도 못 하고 쓰러지듯 내팽개쳐졌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나는 온몸이 부르르 떨려 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세상에‥‥ 세상에·..' 할말을 잃고 서있는 나에게까지 공수들이 쫓아왔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골목으로 뛰어 전남대 정문까지 도망갔다. 전남대 정문에 있던 공수들 6명에게 다시 쫒겼다. 골목으로 도망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놈들은 골목까지 몫아왔고 잡힐 때까지 쫓아올 성 싶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생각으로 대로로 뛰었다.
그런데 쫓아오던 공수들은 도저히 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아예 포기하고 돌아갔다. 나는 다시 정신없이 뛰다가 걷다가 저녁 무렵 MBC방송국 쪽으로 걸어왔다. MBC방송국 앞에서는 엄청나게 모인 광주 시민과 젊은 청년들이 '계엄해제', '김대중 석방하라'를 외치며 전남도청 앞으로 몰려갔다. 나도 '계엄해제'를 외치며 전남여고 돌담에서 서성거리다가 시위대열을 따라 도청으로 향했다. 엄청난 숫자의 시민들과 학생들이었지만 곤봉을 들고 총을 메고 서 있는 공수들을 돌로써는 도저히 뚫을 수 없었다. 왜 오랜 시간 동안을 이곳에서 시민들과 함께 버티고 있었다. 조선대 부근에서도 무장한 공수들이 보였다. 공수들은 조선대 부근에서 서성거리는 젊은 청년들을 곤봉으로 두들겨패는 것이었다. 골목으로 도망가는 젊은이들까지 쫓아갔다. 한참 후 시계를 보니 어느새 21일 새벽 2시였다. 집에 돌아갈까 망설이고 있는데 "광주세무서가 불에 탄다"는 말이 들렸다. 즉시 광주세무서를 향해 뛰었다. 광주세무서는 일부만 불에 타 어느 정도 불길이 잡혀 있었고, 다만 옆에 있는 주택가가 불에 타고 있었다. 2백여 명의 시민들이 함께 협조하여 불을 끄기 시작했다. 아무 가정집에서나 물을 퍼다 불을 껐다. 새벽 4시가 되었다. 시민들은 제각기 흩어지고 나는 피곤한 몸으로 금남로 4가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 시간인데도 금남로 군데군데와 대인시장 부근에는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군부대를 향해
5월 21일 새벽에 집에 돌아온 뒤 깊은 잠에 떨어졌다. 오전 10시쯤 눈을 뜨기가 바쁘게 대인시장 부근 전매청건물 앞으로 나왔다. 시위대들이 어제는 보이지 않던 용달차와 트럭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지나가는 용달차를 세워 얼른 올라탔다. 20여 명의 젊은 청년과 시민들이 타고 있었다. 모두들 손에 몽등이를 들고 차체를 두들기며 승리감에 젖어 있는 표정들이었다. 이들을 보자 나도 기분이 좋았다. 20여 명의 시민군들과 함께 아세아자동차로 갔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에 들어서자 모두 갖고 가라는 식으로 차문까지 열어두었다.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과 아세아자동차 회사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이 각각 트럭, 버스 3대에 나뉘어 타고 비아 쪽으로 향했다. 비아 쪽에 있는 군부대에 총을 가지러 가자고 의견이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군부대 약간 못 미친 곳에서 우리들이 탄 차를 본 공수들은 4대의 탱크를 밀고 내려왔고, 탱크 옆으로는 무장한 군인들이 따라 내려왔다. 대항할 무기가 없는 우리는 겁이 나서 재빨리 차를 돌려 도망쳤다. 다행히도 공수들이 발포를 하지 않아 무사히 광주시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우리 일행 중 내가 탄 차는 다시 대인시장 부근 전매청 앞으로 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우리를 본 대인시장 부근의 주민들과 시장 아주머니들이 고생한다며 차에 김밥과 음료수를 실어주었다. 우리는 김밥과 음료수를 싣고 몽둥이로 차체를 두들기며 계림동 오거리로 갔다. 시민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고 차들이 지나다녔다. 지나가는 시위대차를 세우고 김밥과 음료수를 나누어 주었구 밥과 음료수가 바닥나자 서방 쪽으로 향했다. 서방 삼거리쯤 가자 시민과 학생들이 엄청나게 모여 있었다.
시민들은 '계엄해제', '전두환 물러가라' 등을 외쳐댔다. 서방 삼거리를 지나 대창운수 회사 부근에서는 일부 사람들이 4대 정도의 군용트럭에 나뉘어 타고 교도소로 간다고 했다. 나는 함께 간 일행들과 자켜보고 있다가 무서울 것 같아 따라가지 않았다. 10∼60명이 교도소로 출발한뒤 20여 분이 지나 그쪽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공수들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우리는 시내 쪽으로 다시 들어가자고 하여 서방 삼거리로 왔다. 시민들은 우리에게 어디서 오느냐고 물었다. 전매청 앞에서 출발하여 계림등 오거리를 거쳐 이곳으로 왔다고 얘기하자 그들은 갑자기 우리에게 시민들을 위해 담배를 갖다줄 것을 부탁했다.
담배를 나누어주다
나와 운전수,그리고 청년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용달차에서 내렸다. 우리는 담배를 가져오겠다고 약속한 뒤 대인동 전매청으로 왔다. 전매청은 유리문이 닫혀져 있고 그안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만약에 담배를 주지 않으면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겠다고 협박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손으로 저지하며 자신이 전매청장임을 반복해서 말하고 즉시 10박스를 내주었다.굉장히 큰 박스였는데 '거북선'과 '선'담배였다. 담배를 강탈했다는 느낌이나 양심의 가책은 없었다. 관청이나 공공기관에 있는 물건들은 광주 시민의 것이었고 당연히 우리 시민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했다. 우리는 권력이 나누지 못한 것을 스스로 나누고 있었다. 그만큼 우리는 떳떳하고 당당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 10박스의 담배를 용달차에 싣고 서방으로 향했다. 서방삼거리에서 담배를 나누어주고 MBC방송국 앞으로 갔다. 다시 백운동으로 왔을 때는 학생들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손에는 몽둥이만 들려 있었다. 백운동에서 30갑씩 들어 있는 통 10개 정도를 나누어주고 중앙로로 갔다. 태평극장 부근에서 30갑짜리 20여 개를주고 광천동파출소에서 조금 나눠주고 다시 돌아 돌고개양동시장으로 갔다. 이곳에서 담배를 조금 나눠주었더니 양동시장 아주머니들이 밥을 차에 실어주었다. 밥을 싣고 유동 삼거리를 거쳐 전남대 앞 굴다리 쪽으로 갔다. 이곳에서도 밥과 담배를 일부 나눠주고 일신방직 앞으로 왔을때 밥과 담배는 모두 바닥이 났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이곳저곳에 모여 있으면서 우리와 함께 환호성을 지르거나 박수를 쳐주며 용기를 주었다. 우리 3명은 다시 용달차를 몰아 시외버스공용터미널로 들어갔다. 개찰구 문을 굳게 닫고 5, 6명의 직원들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무조건 버스를 내달라고 했더니 처음에는 상당히 머뭇거렸다. "버스를 내놓지 않으면 모두 불질러 버리겠소."하며 소리 지르자 광주고속 고물차 3대를 내주었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 부근에 모여든 사람들과 함께 3대의 버스와 1대의 용달차에 나뉘어 타고 운전을 잘하는 기사들에게 운전을 하도록 했다. 한쪽에서는 조선대에 주둔하고 있는 공수들을 몰아내자고 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전남대에 있는 공수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우리는 두 편으로 나뉘어 전남대와 조선대에 주둔하고 있는 공수들을 몰아내러 가자고 했다. 2대의 차가 조선대로 먼저 출발하고, 내가 탄 차와 버스 1대는 전남대 정문으로 향했다. 오후 3시경 전남대 앞에서 공수들과 투석전을 벌이고 있던 시민들과 합세하였다. 공수들은 대개 전남대 안에서 진을 치고 있었고 1개 소대 정도만 교문 앞에서 우리와 맞서고 있었다.갑자기 공수들 2,3명이 쫓아왔다. 시민들 10여 명은 재빨리 전남대 정문 앞 다리 부근에 몸을 숨겼다. 쫓아오던 공수들이 다리를 막 건너려고 하는 순간 시민들이 공수들을 덮쳤다.이때 시민들 4명은 무서워 도망갔고 나머지 6명은 공수들을 잡아들면서 두들겨팼다. 이를 본 다른 공수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아무곳으로나 뛰어들었고, 나 역시 붙잡고 있던 공수들을 놓고 뛰었다. 한참 뛰는 도중 내 앞에서 도망가던 할아버지 한 분이 발목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나는 쓰러진 할아버지를 모른체하고 혼자 도망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55세는 더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를 일으켜 끌다시피 도망을 갔다. 순간 뒤에서 누군가 나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나는 공수들 3명에게 붙잡힌 것이었다. 총에 맞았던 할아버지는 어떻게 되었는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전남대 본관 안으로 끌려가보니 이미 많은 숫자의 시민들이 잡혀와 있었다. 피범벅이 되어 신음하는 사람, 머리가 터진 사람 등 2백여명은 넘을 것 같았으며, 30세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사람은 두개골이 벌어져 차마 쳐다볼 수 없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공수 한 명이 그 부상자를 워커 끈으로 꿰매고 있었다. 참혹했던 그 광경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그 기막히고 환장할 장면을‥‥ 그들은 짐승이 었다.
차 안에 최루가스를
21일 밤이 되자 공수들은 장갑차처럼 생긴 차에 40여명을 싣고 꼼짝도 못하게 하고 차 문을 닫은 뒤 최루탄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젊은이 한 사람은 최루탄 가스와 부상에 못 이겨 차 안에서 그대로 죽었다. 모두들 몸부림치며 콜록거렸고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숨죽이며 있었다. 공수들은 운전사 옆에 앉아 방독면을 쓰고 흉악스런 모습으로 유쾌해 했다.차가 움직였고, 얼마 후 교도소 앞에서 멈추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쳐다볼 수 없도록 땅에 엎드리게 했다. '이제 우리는 죽는구나' 생각하고 엎드려 있었다. 이때 군인들은 저녁밥이라며 비상식량으로 먹는 건빵 한 개씩을 나누어주었다. 손바닥 절반 크기도 못 되는 건빵 한 개씩이 우리들 식사의 전부였다. 잡혀온 우리는 모두 창고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두들겨맞은 탓에 아픈 것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좁은 창고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을 잤다. 얼마 후 군인들은 군화발로 밟고 차면서 잠을 못 자게 깨웠다. 교도소 복도로 한 사람씩 불러내어 조사를 하기 시작했고 나 역시 복도로 불려나갔다. 복도 한가운데 에 앉혀두고 다짜고짜 소리쳤다. "데모 주동했지?" "나는 데모한 극실이 없소 볼일이 있어 지나가던 차에 잡힌 거요."
그러나 그들은 내 말은 믿지 않으려고 했고 막무가내였다.뿐만 아니라 조사를 하는 사람들이 말하기가 바쁘게 옆에 서 있던 공수들이 곤봉으로 내리치며 군화발로 찼고 그것도 부족하여 개머리판으로 짓이겼다. 그놈들은 또 곡괭이를 들고 나의 다리를 사정없이 쑤셨다. 갈비뼈에 심한 통증이 왔고 무릎이 완전히 나가버렸다.복도에 그대로 쓰러졌다. 무릎이 깨져 일어설 수가 없었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신이 멍한 상태로 쓰러져 있는데 공수들 4명이 나타나더니 나를 창고 안으로 다시 밀어넣었다. 부상자들의 신음 소리는 더욱 높아졌고 비좁아 꿈틀거리며 괴로워했다. 창고의 한가운데에 거의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공수들은 돌아가며 한 명씩 기웃거려 보고 움직이면 움직인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군화발로 차고 사정없이 밟았다. 공수들 중 대위 한 명이 나를 보며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저기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 중태니까 건드리지 마라." 나는 깊은 잠에 빠지듯 의식을 잃었다.
가마니에 덮여 실려나가는 시체들
정신을 차리고 보니 5월 25일이었다. 창고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리밥을 주고, 나에게는 죽을 갖다주었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죽을 먹을 수 있었다. 죽을 먹고 나니 조금은 살 것 같았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정신을 차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이게 웬일인가? 사람들이 죽어서 나가다니‥‥ 분명 그들은 사람들이었다. 죽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왜 가마니에 둘둘 말아 리어카에 싣고 가겠는가? 처음에는 가마니에 말아서 시체 4구를 리어카에 싣고, 그다음은 3구를 싣고 어디론가 떠났다. 이것을 본 우리는 모두 허탈감과 두려움에 떨었다. 얼마 전 내가 있는 창고 안에서도 한 사람이 죽어서 실려 나갔다고 했다. 그 광경을 본 나는 며칠 동안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살아난 것에 대해 감사했다. 그러나 5월 26일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공수한 명이 아침부터 와서 나를 흔들어 깨웠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재빨리 눈을 떴다. 몇 명의 공수들이 더 와서 나를 일으켜 밖으로 끌고 가더니 헬리콥터에 나를 태웠다. 나는 통합병원으로 옮겨졌다. "안심하시오.이곳에는 공수들이 오지 않으니까." 누군가가 말해 주었다. 내무반인 듯한 곳은 부상자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3백여 명은 충분히 넘을 것 같았다.통합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동안에 합동수사본부에서 나온 형사들로부터 서른 번에 이르는 조서를 받았다. 형사들은 내게 물었다. "네가 데모를 주동했지? 거짓말하지 말아. 다 알고 있으니까." "나는 데모하지 않았습니다. 동생을 찾으러 나갔다가 공수들에게 잡힌 겁니다" 하고 말하자, 형사들은 거짓말한다며 내 몸의 이곳저곳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끝까지 데모한 사실이 없다고 버티었다. 서른 번 동안 똑같은 내용으로 조서를 썼다. 통합병원에 온 지 한 달도 채 못 되어 몸도 완쾌되지 않은 나를 헌병이 차에 태웠다. '나를 또 어디로 데리고 가려고 차에 태우는 걸까.'내 눈은 천으로 가려져 있어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차가 멈추고 몇 명이 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모두 차에서 내리게 했다. 도착한 곳은 전에 잡혀왔던 광주교도소 앞이었다. 다시 3일 동안을 그 창고에서 지냈다. 처음에 함께 잡혀왔던 사람들이 그대로 있었다. 이들 모두는 각각A,B,C등급으로 나뉘어졌고, 나는 C급으로 분류되었다. 3일 후(6월말경) 나를 헌병대로 끌고 갔다. 헌병대에서는 "밖으로 나가면 절대로 두들겨 맞았다고 하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다. 또 별 2, 별 3이 헌병대로 와서 우리를 내무반으로 불렀다. 이들 역시 우리에게 구타당한 사실을 누설하지 말도록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교육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자 광주시청 버스가 헌병대 앞에 대기되었다. 시청버스에 3백여 명의 잡혀온 시민들을 태우고 광주시청에 도착했다. 나를 포함한 3백여 명의 사람들에게는 제각기 한 명씩 시청 직원들이 딸렸다. 그런 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시청 직원들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인을 받아 돌아갔다.
돈 천만원을 들고 찾아와
우리 가족 모두는 나를 찾아 헤매다 못 찾고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이웃 사람들에게도 ○○집○○는 죽었다고 소문이 나기도 하여 살아 돌아온 나를 껴안고 우리 가족은 며칠을 두고 울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무것도 못 하고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님에게 걱정만 끼쳐드리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1982년까지 누워서 치료를 받아야 했고 조선대병원, 기독병원,적십자병원 등 가보지 않은 곳 없이 논밭을 모두 팔아 치료를 했다.결국 내가 이렇게 되자 나의 집사람은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고 그 후로도 우리의 생계는 집사람에 의해 지탱되었다. 나는 몸이 조금 나아지면 일(건축자재 일)을 나가지만 무리하거나 날씨가 흐린 날에는 일을 할 수가 없다. 나 때문에 큰애는 2년 동안 휴학한 뒤 올해(1989년)에야 복학하여 숭일중학교에 다닌다. 몸이 조금씩 완쾌되자 부상자회를 조직하려고 작은 모임들을 가졌다. 그때마다 안기부 형사들이 찾아와 방해하곤 했다. 그들의 소행이 귀찮고 괴로워서 이름과 생년월일을 바꾸고 집을 옮기면 어느새 알고 찾아왔다. 감시는 끊이지 않았다. 집회에 참여하기 위하여 집을 나서면 대문앞에서부터 쫓아다녔다.
1984년 무렵 전두환이 광주에 온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 나는 누가 오는지 모르고 있었는데, 형사들이 하루 전날 찾아와 대통령이 오니까 그사이 여행 좀 하고 오라고 데리고 갔다. 화순온천으로 해서 부곡으로 돌아 전두환이 서울로 올라갈 무렵 광주에 데려다주었다. 언젠가는 형사들이 무작정 나를 차에 태우고 갔다. 오늘은 또 어디로 가는가 하고 봤더니 경기도까지 갔다. 싣고 간 우리들을 1백 미터 간격으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내려 주고는 휭하니 가버리는 것이었다. 사람을 물건 던지듯 멋대로 하는 그런 놈들이었다. 나는 현재까지도 폭도라는 누명을 쓰고 있다. 군인들이 국민을 죽이기에 광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감히 폭도라 매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광주 시민들은 민주화를 위해 '전두환이 물러가라'고 외쳤으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또한 광주 시민은 민주적으로 시위했다. 5월 16일 횃불시위를 하면서도 엄숙하게 진정 민주화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위를 했다. 그런 광주 시민이 폭도란 말인가? 언젠가는 정부에서 내 입을 막으려고 돈 천만 원을 들고 왔다. 나는 너무 기막히고 분해서 그 사람 얼굴에 침을 뱉고 돌아가라고 소리질렀다. 광주문제의 해결은 광주 시민 모두를 명예회복시키는 것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조사 · 정리 안은정) [5.18연구소]